이용남 조회 8 | 09.09.08 03:04 http://cafe.daum.net/lyn0604/EiUQ/1090

먼 옛날, 사람들이 PC 통신이라는 걸 쓰던 시절의 유머 한 토막입니다. 어느 국문학과 교수님이 '귀족적이고도 에로틱한 내용을 담아 작문을 해오라.'는 과제를 내줬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공주님이 임신하셨다.'라고 달랑 한 줄만 써서 냈다고 하죠. 화가 난 교수님은 SF와 미스터리를 가미하여 다시 작문해 오라고 시키는데요. 다음 날 학생이 제출한 작문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별나라 공주님이 임신하셨다. 범인은 누구인가?'

여기서 두 번째 과제물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것은 '스토리'일까요? '플롯'일까요?

답은 플롯입니다. 이게 스토리가 되려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야 합니다. '별나라 공주님은 어느 날 아무개와 정을 통해 임신을 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왕실에서는 난리가 나고….' 스토리로 정리하니 작문의 양이 늘어날 수밖에 없군요. 어쨌든 예문들을 통해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를 어느 정도 파악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토리는 시간의 순서에 따른 이야기의 흐름이고, 플롯은 사건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재배치한 구조를 말합니다.

여전히 아리까리하시다면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시나리오 작가가 기가 막힌 스토리 하나를 생각해 냈다고 합시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누나를 사랑해 온 유지태는 고등학교 시절 과학실에서 누나와 애정행각을 벌이다가 최민식에게 들킨다. 최민식은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유지태의 누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복수하기로 결심한 유지태는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후 최민식을 납치하여 15년 동안 감금한 후 군만두만 먹였다. 폭삭 늙어서 풀려난 최민식은 중국집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먹었던 그 군만두의 맛을 찾아 헤멘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영화 [올드보이]의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토리입니다. 물론 이 순서대로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를 만들어도 됩니다. 하지만 작가와 감독은 영화 내내 관객들의 의문을 최대한 증폭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최민식이 납치당한 후 감금된 모습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스토리 상의 사건을 시간 흐름과 관계없이 재배치하여 만들어 낸 새로운 이야기의 틀이 플롯입니다. 요약하자면 '15년간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최민식이 자신을 감금한 자와 그 이유를 추적한다.' [올드보이]의 플롯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플롯을 구축하는 것은 이야기로서의 영화를 완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플롯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시시한 이야기가 꽤 흥미로워질 수도 있고, 아주 훌륭한 스토리가 찌질해 질 수도 있으니까요. 심지어 영화의 성격이나 장르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만약 [올드보이]의 플롯을 스토리처럼 시간 순서대로 구성했다면, 복수의 칼을 가는 유지태의 집착이 부각되면서 좀 더 정통 스릴러에 가까워졌겠죠. 별나라 공주님이 누군가와 만나 사랑에 빠져 임신하게 되는 이야기를 중심에 내세운다면 그것은 SF 멜로가 될 겁니다.

한 편의 영화에 하나의 플롯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드보이]의 경우에도 곁가지 이야기가 하나 더 따라붙지요. 풀려난 최민식은 여자 사람 강혜정을 만나고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부녀관계였구요. '감금당했던 최민식이 유지태를 쫓는다.’를 메인 플롯, 근친상간과 관련된 이 곁가지 이야기는 서브 플롯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영화의 스토리'라고 할 때 시간 순서에 따라 그 영화를 요약하지 않습니다. 플롯에 따라 선후가 달라진 이야기대로 줄거리를 만들고 그것을 보통 스토리라고 부르지요. 이처럼 플롯 짜기를 통해 새롭게 구축된 이야기는 '내러티브'라고 부르는 편이 옳습니다. 내러티브라는 것은 사실 무척 포괄적인 개념으로 단순히 등장인물들의 연기나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사건 뿐만 아니라, 소품, 조명, 편집 등 여러 장치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이야기의 맥락과 의미까지도 총칭하는 말입니다. 쉬운 예로 우리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강혜정의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장면만으로도 지난 15년간 강혜정에게 일어났던 일과 두 사람의 관계에 얽힌 비밀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만약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했다면 굳이 이런 장면을 삽입하여 맥락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스토리를 플롯으로 구축하는 과정에서 설정을 빠트리는 실수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빚어진 대본의 허점을 보통 '플롯의 구멍(plot hole)'이라 부릅니다. 위키피디어 '플롯의 구멍' 항목에 보니 이런 예시가 있군요. 샘 레이미의 영화 [스파이더맨 3]를 보면 어둠의 스파이더맨 에디가 샌드맨에게 '스파이더맨은 네가 딸을 구하도록 놔두지 않을 거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는데, 에디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복선이 영화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거죠. 이런 식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시나리오 작가들은 '스토리 맵'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합니다. 스토리 맵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플롯을 구축하는 습관, 우리나라의 '막장 드라마' 작가분들에게 필히 권유하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