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3
저녁 8시 45분. 막내딸과 식탁에 앉았다. 중3 두산동아 영어교과서가 앞에 놓여 있다. 한 쪽엔 자습서와 필기구가 놓여 있다. 영어는 앞에서 배운 것을 알아야 뒤에 나온 것이 이해된다. 1학기 때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면 복습을 통해 다시 익히는 것이 급선무다. 나는 1학기 기말고사 시험범위였던 3·4·5과를 펴게 했다. 단어와 숙어를 점검하고 본문 해석을 시켜볼 참이다.
문제풀이를 하지 않아 점수가 나쁘게 나왔나 보다. 중간고사에선 92점 나왔는데 기말고사에선 70점이라니… 문제를 풀어보지 않은 결과다. 우선 한 줄씩 읽으며 우리말로 번역을 해보라고 했다. 3·4·5과 본문 전체를 90% 이상 정확하게 번역을 해냈다. 문제는 중요한 구문과 숙어를 많이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단어도 여러 개를 잊어버린 상태다.얼마나 복습을 하지 않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영어 과목은 그리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문제는 시험에서 항상 실수를 하는 것이다. 요인은 완전히 숙지하지 않고 대충 넘어갔거나 응용력이 부족한 데 있다. 문제를 많이 풀고 배경지식을 충분히 갖추어야 응용력이 생기는데 배운 교과서 부분만 알고 넘어가니 조금만 문제를 바꿔서 출제해도 허를 찔리고 마는 것이다.
30년 베테랑인 지 애비가 옆에 있는데 한번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거 못해낼 것도 없을 텐데 딸은 한 번 해보겠다는 결단력과 승부욕이 부족하다. 학습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지금부터 영어를 집중으로 해서 영어 특기자로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다. 딸이 따라주지 않아 못하고 있다.어떻게 학습동기를 불어넣어 줄까? 스스로 하는 학습시간을 어떻게 좀 늘릴 수 있을까? 흥미를 유발시켜 학습동기를 부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어젯밤 나는 꼬박 새웠다. 오랫동안 영어교사로 교직에 있지만 나는 학교교육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전인교육 특기적성교육을 주장하지만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특별활동, 체육대회, 수학여행, 소풍, 동아리활동, 각종 강연회, 음악회 등을 통해 전인교육과 특기적성교육을 도모하긴 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구색을 갖추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오로지 국영수를 중심으로 한 입시교육에 총력을 기울이는 실정이다.
당연히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진도를 나가야 하는데 학습부진아를 언제까지 기다려 같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해하고 따라오는 학생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고 그 학생 중에 한두 명이라도 서울대에 합격하면 학부모나 상급기관의 책임추궁을 모면할 충분한 구실은 되는 셈이다. 스스로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대로 방치되는 수밖에 없다. 개성이니 특기 적성 연애까지도 일단 대학교 들어가서 생각해 보자는 주의다. 연애도 때가 있는데…….
아침 7시 반 등교 밤 열시까지 자율학습. 이것이 과연 교육적인 처사인지 확신할 수 없다. 말이 자율학습이지 사실은 반 강제적이다. 이런 입시준비 관행에서 막내딸이 어떤 대접을 받으며 어떤 생활을 하게 될 것인가를 뻔히 알고 있는 나는 딸의 고교진학 문제를 그냥 마음 편히 예사롭게 생각할 수가 없다. 딸을 외국으로 보내면 어떨까? 인도의 교육도시 '샨티니케탄'을 생각해 보았다.
자율과 자연 속에서 오로지 행복과 희망을 키워가는 교육도시. 샨티니케탄은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세운 교육도시다. 유치원에서부터 비스바바라티 국립대학까지 오로지 자연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는 곳, 나는 관련 자료를 검색해보며 꼬박 밤을 새웠다. 여기서 대학 보내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공부할 수도 있다. 나는 그곳 물가를 알고 있다. 몇 해 전 한 달간 샨티니케탄을 비롯해 인도 여러 도시를 여행했기 때문이다. 비스바바라티 대학 캠퍼스도 그때 둘러보았다.
딸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내가 청소년 때 생각했던 것과 요새는 모든 것이 다른데 내 생각대로 시인이 세운 대학도시로 유학을 보낸다면 과연 딸이 흡족해 할까.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기로 했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진희씨가 쓴 <샨티니케탄>을 즉시 인터넷 서점에 신청했다. 꼼꼼히 읽어보고 딸의 교육과 연관하여 생각해볼 것이다.
하지만 국내교육에 적응 못해서 나가는 도피 형 유학은 반대다. 대한민국의 언어, 역사,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국으로 간다는 것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도 있는 문제다.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가는 대한민국 청소년의 대열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한편 커다란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신중을 요하는 일이다.
나의 생각은 다시 국내 대안학교와 특성화고교에 이르게 되었다. 거리상으로 비교적 가까운 수도권을 살펴보았는데 이우학교는 기숙사가 없고 수도권은 아니어도 비교적 가까운 천안의 한마음고등학교는 학교의 비교육적 처사가 인터넷에 올라 있어 제외하기로 했다.
제일 눈길을 끈 학교가 강화의 산마을고등학교였다. 나는 학교의 교육목표, 교육 시설, 학교연혁, 교직원등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자연과 자율로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이 딸에게 좋은 체험을 제공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딸의 의견이 중요하다. 역시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두기로 했다.
이튿날 나는 딸을 불러 인터넷으로 산마을고등학교의 여러 자료를 살펴보았다. 전교생이 62명인 학교. 배설물이 자연친화적 퇴비로 바뀌는 화장실, 1실 4인의 기숙사. 가족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듯 하는 온돌형 식당, 각 학생들에게 할당된 3평의 농토……. 딸은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일단 어떤 판단이나 결정은 보류하고 딸에게 이런 학교도 있다는 정보제공 차원이었다.
그날 저녁 딸은 수학 과외선생에게 산마을고등학교 얘기를 했나 보다. 수학선생님이 거기 가면 대학 못 간다고 했다며 가지 않겠단다. 나는 그냥 딸의 심중을 짐작하는 선에서 듣고 있었다. 과외선생은 학원에 다니면서 틈나는 주말에 두 번씩 딸을 지도하고 있다. 한 아파트 이웃집에 살았고 집사람의 성당 대녀이기도 하다. 딸은 과외선생을 잘 따르고 숙제도 열심히 하고 있다. 멘토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멘토가 반대의사를 보였다면 딸은 분명 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선택의 폭은 조금 더 좁아졌다. 한동안 실업계냐 인문계냐 고민하더니 실업계는 이제 포기한 상태이니 말이다. 이제 실력이 없어도 인문계뿐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