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 필요없다구요? 그말 믿어도 되나요?

기업 “이젠 학벌 필요없다” vs 취업 준비생들 “그말 누가 믿어?”
[‘공존 자본주의’에서 길을 찾다]<7> 일자리 ‘미스매치’를 없애자,上현실은

《 “학점은 중간 정도면 되고 영어도 하한선만 맞추면 합격하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학점 4.0, 토익 950점, 자격증 7개 같은 ‘스펙’을 갖춘 지원자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A사 인사 담당 임원)

“고학점, 높은 토익점수, 자격증은 기본이고 공모전 참여와 인턴 경험도 있어야 서류전형이라도 통과하던걸요.”(서울 B대 4학년생)

한국의 취업 준비생들은 학점, 자격증, 토익 같은 스펙을 쌓는 데 열중하고 있다. 취업포털 조사업체인 잡코리아는 지난해 12월 대학생 2명 중 1명은 취업 사교육을 받고 대학생 한 명이 1년 동안 취업 사교육에 쓰는 돈은 평균 279만 원이라는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상당수의 대학생이 1년 이상 휴학을 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취업준비생들은 등록금을 제외하고 재학 간에 평균 1500만 원 가까이를 취업 사교육에 쓴다는 것이다.

과연 ‘스펙=취업’이라는 공식이 성립할까. 동아일보는 2일부터 13일까지 국내 10대 대기업 인사 담당자와 24∼31세의 취업준비생 8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인터뷰 결과 뽑는 쪽과 지원하는 쪽의 인식에 상당한 격차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스펙은 별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지만 지원자들은 “현실에서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반박했다. 양측 모두 실명이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기업은 이미지 손상을, 지원자들은 취업 때 불이익을 걱정했다. 기업과 취업 준비생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취업 미스매치’ 문제를 2회에 걸쳐 다룬다. 먼저 일자리 미스매치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 다음 회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소개한다. 》


■ 10대 기업 인사담당자 인터뷰
동아일보가 인터뷰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방향을 잡고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은 극소수”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학벌, 학점, 토익, 자격증, 공모전, 인턴 경험 등 스펙이 취업에 끼치는 영향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양한 스펙을 쌓았더라도 정작 직무에 꼭 필요한 능력을 갖춘 지원자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지적했다. 전자회사인 A사 인사 담당자는 “실제 현업에 투입됐을 때 도움이 안 되는 스펙은 모두가 거품”이라고 했다.

○ 학점 토익 자격증에 대한 불편한 진실


입사를 위한 최소 학점을 묻자 대부분 4.5점 만점을 기준으로 중간 등급인 B(3.0∼3.2)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2.5만 넘으면 된다는 기업도 있었다. B전자회사의 인사 담당 임원은 “학점은 성실성을 보는 척도일 뿐”이라며 “회사에서 재교육을 받을 때 뒤처지지 않을 학습능력만 갖추면 된다”고 했다. 이 때문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영역별 점수를 본다는 회사도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영업직의 경우 수능 언어영역 고득점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10명 중 8명의 인사담당자는 “무슨 과목을 이수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C회사 관계자는 “해당 학교에서 해당 전공을 이수한 선배들을 통해 어떤 교수가 학점을 잘 주는지를 파악하고 있다”며 “불필요한 교양과목에서 A를 받은 것보다 학점이 짠 전공과목에서 B를 받으면 더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영어점수에 대해 D사 관계자는 “해외 영업직처럼 영어를 자주 쓰는 직군만 제외하면 기업에서 제시한 하한선만 맞추면 된다”고 했다. E회사 관계자는 “직무와 무관한 자격증은 갖고 있더라도 안 내는 게 낫다”며 “하고 싶은 일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자격증을 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SKY 선호?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F사 인사 담당 임원은 “학력 차별을 없애기 위해 자기소개서에 학교를 못 쓰게 하고 블라인드 면접을 하는 등 노력을 하지만 막상 뽑고 나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의 학생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G사 관계자는 “특정 대학 졸업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다만 하위권 대학을 나왔더라도 서류 필기시험 면접 등 단계별로 학력차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고 그 가능성이 예전보다 높아진 것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학력 물 타기’는 결코 효율적인 취업 대책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었다. A사 관계자는 “유학, 편입, 대학원 진학은 사실 부족한 학력을 부풀리고 자기만족을 위한 시도로 보인다”며 “차라리 그 시간에 전공과목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게 낫다”고 했다.

○ 화장은 지워라


어디선가 본 듯한 모범답안을 내놓는 이들이야말로 ‘탈락 1순위’다. H사 관계자는 “가장 먼저 솎아내는 자기소개서가 취업 사교육 기관에서 컨설팅을 받은 것”이라면서 “대학생으로 가장해서 해당 학원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조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I사 관계자는 “우리는 말 잘하는 아나운서나 글 잘 쓰는 작가를 뽑는 게 아니다”라며 “자신이 기업의 대표가 됐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키울 것인지 성실하게 고민한 흔적이 있는 자기소개서를 찾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했다.

C사 인사 담당자는 “지원 동기에 ‘사회 공헌에 앞장서는 기업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은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돈을 벌어야 사회 공헌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것이다. J사 관계자는 “근본적으로는 적성과 무관하게 대학수학능력 시험 점수에 따라 학교와 전공을 선택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며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정진욱 기자 cool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