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다다익선(多多益善)

규모의 측면에서 <다다익선>은 1980년대를 통해 이어진 백남준의 대규모 비디오 설치작업의 백미(白眉)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을수록 좋다’는 뜻의 사자성어 ‘다다익선(多多益善)’은 양적 확대를 통하여 차별 없는 민주성을 성취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장을 열고자 하는 백남준의 비디오 철학을 엿보게 한다. 물론 그 직접적인 함의는 1,003대에 달하는 TV 수상기의 상식을 뛰어넘는 수량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 양(量)의 미학은 단지 발신(發信) - 즉 TV수상기 - 의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신(受信)의 측면까지 고려한 것으로, 같은 의미에서 현대의 매스미디어의 작용방식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다. 백남준 자신은 이와 관련하여 일본방송계 원로의 경험담을 인용한 적이 있다. “방송이라는 것은 물고기의 알 같은 것이다.

물고기의 알은 수백만 개씩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그 가운데 대부분이 낭비되고 수정(受精)되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 그야말로 다다익선이다.”11) 즉, 이 비디오 메시지가 발신된 후 수신되어 수정(受精)되는 과정에서 지켜지는 원칙이 바로 ‘다다익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작품명명에 있어 동음이의어의 말장난(pun)에 능했던 백남준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다다(多多)’라는 단어와 20세기초엽 ‘다다(DADA)’운동과의 연상 역시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는 것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다다’는 백남준이 평생을 유지한 ‘플럭서스’의 예술이념과 결코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어쨌든, 현재까지 엄청난 수의 관객들이 이 탑에서 메시지를 ‘수신’하여 갔다는 점에서 발신에 대한 그의 고안은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얼마나 ‘수정’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겠지만.

1. 역사적 모형

현재 <다다익선>의 최초 디자인에 대한 백남준의 스케치가 남아있지 않아 그 아이디어의 전개과정을 명확히 추적해 볼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완성된 구조물의 최종적인 형태는 분명히 ‘탑’을 지향하고 있었다.

<다다익선>의 형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개막식을 기념하여 제작된 포스터에 백남준 자신이 이 탑의 원형으로 고려했던 여러 모티브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도판9) 한국의 전통적인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파르테논 신전, 스톤헨지, 바벨탑, 브랑쿠지의 <끝없는 원주> 그리고 V.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 등이 그것이다.

존 G. 핸하르트가 다다익선의 형태에서 “거대한 지구라트”가 연상된다고 했을 때는 아마도 바벨탑과 같은 서구적 기원을 떠 올렸을 것이다.12) 또한 타틀린의 <기념비>는 실제로 백남준의 최초의 구상이기도 했다. 그는 400미터 높이로 설계된 이 거대한 아이디어를 비디오 형식으로 번안하는 것을 한 때 구상하였으며 <타틀린에게 보내는 찬가>라는 이름으로 구상하였다고 한다.13)

아마도 그 기념비적인 특성이나 조형과 실제공간을 융합시키고자 했던 이 러시아 작가의 조형이념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었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다다익선>이라는 제목으로 낙찰되었다.

TV수상기를 마치 벽돌처럼 쌓아올려 지은 수직적인 조형물이라는 설치형식은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의 회고전에서 선보인 <비라미드 V-yramid>(도판10)나 1984년 카스파 쾨닉(Kaspar Konig)이 기획한 <여기에서부터 Von Hier Aus>에 출품한 (도판11,12), 그리고 1985년 퐁피두의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출품한 (도판13) 등을 거치면서 구체화되어가고 있었다.

휘트니 회고전 당시의 한 방송 인터뷰에서 백남준의 <비라미드>가 매우 즉흥적인 착상으로 이루어진 설치라고 밝히고 있다.14) 즉, 이 작품이 설치된 전시 도입부의 갤러리는 원래 칠흑같이 어두운 방으로 조성하고자 하였으나 휘트니 미술관 측에서 전체 미술관의 자연광을 모두 가려야 한다는데 난색을 표하자, 그럴 바에야 모니터들을 한 곳에 모두 모으자는 식으로 형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막상 수직적으로 쌓아올린 모니터들은 서로 다른 색채의 영상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게 되었고 그 각 영상들간의 긴장감은 예기치 않은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당시 이 작품의 대중적인 인기 역시 백남준이 이 형식에 주목하게 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1982년의 휘트니 미술관 개인전은 이후 백남준이 본격적으로 비디오설치에 몰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부분의 대규모 설치작업들이 이 전시 후에 이루어진다.

형태적인 측면에서 <다다익선>의 가장 직접적인 전범(典範)은 1984년 뒤셀도르프의 메세게란데 홀(Messegelande Halle)의 넓은 공간에 설치되었던 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깔때기를 거꾸로 매단 형태로 점점 적어지는 5개의 동심원과 99대의 TV수상기로 구성되어 관람자들은 마치 허공 속에 유영하는 듯한 비디오들의 이미지를 밑에서부터 올려 보도록 설계되었다.

모니터 화면 위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극적인 흐름과 격렬한 속도감이 나선형 틀과 어울리면서, 관람자가 서 있는 위치가 변화됨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형태를 창조한다. 실로 이 작품은 속이 빈 <다다익선>이라고 할 정도로 그 스케일과 아이디어의 흐름이 서로 닮아있는데, 심지어 5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까지 흡사하다. 아마도 백남준은 <다다익선>을 실제로 구상했을 때, 를 설치하면서 피부로 느꼈던 효과를 십분 고려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백남준이 처음 <다다익선>을 구상했을 때, 건물공간과의 조화를 위해 뉴욕 휘트니미술관에 소장된 <비라미드>와 퐁피두에 전시되었던 <삼색비디오>의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작품, 즉 올려 보아도 좋고 내려 보아도 좋은 작품으로 구상했다고 한다.15) 램프코어의 나선형 통로를 따라 올라가며 시점에 따라 변화하는 <다다익선>을 감상하노라면 그의 의도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도 또한 ‘다다익선’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것들을, 이질적인 것들을 한 데 버무려 놓음으로써 제 삼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 서로 다른 것들을 구분하고 분리하기보다는 은근슬쩍 한 데 모음으로써 “전환”을 꾀하는 것. ‘무당’ 백남준의 굿거리는 <다다익선>의 번뜩거리는 화면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