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놀아야 잘 쓴다
학교에서 논술끝내기
▲ 논술의 자양분은 즐겁고 풍요로운 삶이다. 점심시간에 학교 교정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를 즐기고 있는 학생들.
삶, 사유, 논술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의 ‘놀토’가 있었다. 쉬는 날이 2주 단위로 반복되자, 자기 계획을 더듬는 학생이 늘고 있다. 학생들은 대부분 수업 시간에 배운 ‘삶의 질’까지 운운하며 반색을 한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 아이들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놀아서’ 불안했고 그래서 내내 죄책감이 들었단다. 공부에 대한 원죄 의식. 발목 잡힌 삶의 질이다.

실용성과 목적 달성에만 ‘올인’ 하면 인간의 영혼은 쉽게 지치는 법. 버트런 러셀은 〈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에서 유용성만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다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생활 속의 균형감각을 잃기 마련이다. 이런 모습은 늘 긴장 속에서 무리하게 목표를 이루려는 분위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공부를 했건 놀이를 했건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조바심 탓에 당당한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학생들의 긴장감이 가슴을 친다. 러셀의 조언처럼 이 학생들에게는 진정 ‘쓸모없는 지식’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느낌은 생활 속의 작은 고민들에서 나온다. 세계 평화나 국가 경쟁력을 걱정하느라고 일상이 불행해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침에 지각을 했다거나 친구와 말다툼을 벌였다거나 선생님께 오해받은 경험 등이 나를 괴롭힌다. 교양은 바로 이런 작은 두통거리들을 이겨내게 하는 정신의 힘을 길러 준다. ‘쓸모없는 지식’들은 불쾌한 일을 덜 불쾌하게, 즐거운 일은 더 즐겁게 만드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실용과 효율만을 강조하다 보면 무엇이든 어떻게 써먹을지 하는 관점에서만 보게 된다. 목표에만 집착하다 보면 마주 한 대상을 수단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순간에 몰입하고 기쁨을 느낄 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예컨대, 부모가 아이를 응시할 때, 연인이 서로를 바라볼 때, 산 정상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등등을 떠올려 보라. 무엇을 이루겠다는 조바심이 없어도 그 자체로 행복하지 않은가?

요한 하위징아(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하는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가 볼 때 놀이는 한 마디로 ‘자유’다. 놀이는 도덕이나 강요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즐기는 자세, 즉 놀이와 여가는 인간됨의 필수조건이다. 수수께끼나 소꿉장난을 하는 어린 아이, 바둑을 두는 어른들을 떠올려 보자. ‘재미’ 이외에는 그 어떠한 목적도 없다. 그들은 오직 즐기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놀 뿐이다.

그러면서도 놀이는 정신의 성숙과 진지함을 키워 준다. 연극이나 영화는 모두 가짜 상황이다.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부부인 척’ 할 뿐,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만약 실제 상황이었다면 과연 즐겁게 놀이를 즐길 수 있을까? 가짜인 줄 알기에 상황에 헌신하고 자발적으로 몰입한다. 놀이가 끝나면 정신이 뿌듯함이 기억 속에 남는다. 시를 쓸 때건, 운동 경기를 할 때건 간에 모든 놀이는 황홀한 즐거움을 준다. 학교 축제를 치를 때의 해방감도 현실에서 벗어나 보는 자유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삶에서 놀이가 꼭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정신이 지친 상태에서는 놀이도 무채색이 된다. 몸이 무거우면 밥맛을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거운 정신’을 가진 사람은 삶을 즐기기 어렵다. 니체(F. Nietzsche)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이 무거운 자들을 ‘중력’으로 표현하고 이에 맞서는 방법으로 ‘춤과 웃음’을 강조한다. “무거운 모든 것이 가볍게 되고, 신체 모두가 춤추는 자가 되며,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것”이 중력을 죽이는 지름길이다. 무거운 공부에 눌리지 않으려면 크게 웃으며 춤추는 용기가 필요하다.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은 선택의 자유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때 가능하다.




논술 문제는 학생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주로 묻는다. 그러나 학교에서 입시와 직결되지 않는 것은 늘 뒷자리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국·영·수가 음·미·체보다 반드시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클럽활동 한 시간에서 정규수업보다 더 많은 것을 체험할 수도 있다. 학교 축제나 수학여행에서 반짝 빛이 나는 창의성은 아이들의 인생이 저마다 다를 것임을 새삼 일깨운다. 그러나 입시를 위한 공부는 이 모든 가치를 용광로처럼 녹여 버린다. 그러니 웃음과 놀이의 결을 느끼지 못한 학생이 논술에서 기댈 곳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과외다. 학교생활에서 체험하는 삶의 순간들이 논술의 뇌관인데도, 학생들에게는 또 하나의 ‘중력’일 뿐이다. 학생들은 목까지 채운 단추를 풀어 사고의 숨통을 틔워야 한다. 자신의 삶을 놀 줄 아는 학생에게 논술은 ‘춤추는 날개’가 되어 줄 것이다.

<하루 하나씩 친구와 나누는 20분간의 대화>

1. 학교에서 점심시간보다 더 즐거운 시간은 없었는지 살펴보고 그 이유를 이야기해 보자.
2. 공부는 놀이가 될 수 없는가? 각자의 경험을 근거로 입장과 이유를 말해 보자.
3. ‘대규모 놀이동산’과 ‘클럽활동’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같은 것일까? 호이징하의 ‘놀이’를 떠올리며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
4. 러셀이 강조했던 ‘쓸모없는 지식’의 가치를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이야기해 보자.
5. 청소년들은 누구보다 개성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창의성’을 평가하는 시험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

-논술을 잘 하려면?

*‘왜냐하면’과 ‘예를 들어’를 사용해 보세요. ‘왜냐하면’은 주장의 근거를, ‘예를 들어’는 주장의 현실성을 담아 줍니다.

권희정/서울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기사등록 : 2006-04-16 오후 03:10:28 기사수정 : 2006-04-17 오후 01: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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