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읽기 NO 1

 

 

 주요한인력거꾼

 

밤 새로 두시에야 자리에 누웠던 아찡이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졸음 오는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잠자리라는 것이 되는 대로 얼거리 해놓은 막살이 속에 누더기와 짚을 섞어서 깔아 놓은 돼지우리 같은 자리였다. 그 속에서는 그야말로 돼지처럼 뚱뚱한 동거자가 아직도 흥흥거리며 자고 있는 것을 억지로 깨워 일으켜 가지고 아찡이는 코를 힝 하고 풀어서 문턱에 때려 뉘면서 찌그러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잠자던 거리가 깨기 시작하는 때이었다. 상해 시가의 이백만 백성이 하룻밤 동안 싸놓은 배설물을 실어 내가는 꺼먼 구루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잔돌 깔아 우두럭투두럭한 길 위로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고 하는 것이 아찡이 눈앞에 나타났다. 동편으로 해가 떠오르려고 하는 때이다. 일찍 일어난 동리집 부인님네들이 벌써 나무통으로 된 대변통들을 부시느라고 길가에 쭉 나서서 어성버성한 참대 쑤시개로 일정한 리듬을 가진 소리를 내면서 분주스럽게 수선거렸다. 아찡이와 뚱뚱보는 한꺼번에 하품과 기지개를 길게 하고 바로 그 맞은편에 있는 떡집으로 갔다. 거리로 향한 왼편 구석에 널빤지 얼거리가 있고, 그 얼거리 위에 원시적 기분이 농후한 꺼먼 질그릇 속에 삐죽삐죽하게 콩기름에 지져 낸 유자꽤(조반죽 반찬 하는 떡)가 담뿍 꽂히어 있고, 그 옆에는 방금 구워 놓은 먹음직스런 쪼빙(떡)들이 불규칙하게 담겨 있는 위로는 벌써 잠코 밝은 파리 친구들이 날아와서 윙윙거리면서 이떡 저떡으로 돌아다니면서 먹고 싶은 대로 실컷 그 고소하고 짭짤한 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 선반 바로 뒤에는 사람의 중키나 되리만큼 높이 쌓인 가마가 놓여 있고 그 가마 밑 네모진 아궁이에다 지금 떡 굽는 사람이 풀무를 갖다 대고 풀떡풀떡 해서 불을 피우고 있고 가마 위 나무뚜껑 아래에서는 길쭉길쭉하게 빚어서 한편에 깨알 몇 알씩을 뿌린 쪼빙들이 우구구 하면서 뜨거운 진흙 위에서 모래찜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모래찜을 실컷 해서 엉덩이가 꺼무죽죽하게 되면, 그 손톱이 세 치씩이나 자란 떡장수의 손이 들어와서 한 놈씩 한 놈씩 잡아 내다가 앞에 놓인 선반 위 파리 무리의 잔치터 위에 던져 주는 것이었다. 바로 이 떡 가마 왼편에는 기다란 부뚜막을 가진 가마가 걸려 있고 그 위에서 지금 유자꽤들이 오그그 하면서 콩기름 속에서 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행길 쪽으로 향한 이편 한 모퉁이에는 네모 반듯한 부뚜막 위에 보름달만큼씩이나 둥근 서양철 뚜껑을 덮은 깊다란 물솥들이 네다섯 개 줄리리 걸려 있고 부뚜막 바로 한복판에는 직경이 두 치나밖에 안 될 쇠통이 뚫려 있어서 가마지기가 이따금씩 그 조그맣고 뚱그런 뚜껑을 열고는 바로 그 부뚜막 안쪽에 쌓아 둔 물에 젖은 석탄가루를 한 부삽씩 쭈르르 쏟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그 구멍 속으로부터는 까만 연기와 붉은 불길이 힐끗힐끗 밖으로 내치미는 것을 서양철 뚜껑으로 덮어 막아 버리고는 놋으로 만든 물푸개를 바른손에 들고 왼손으로 이편 솥뚜껑을 열고는 부글부글 끓는 맹물을 퍼서는 저편 솥 속으로 쭈루루 붓고는 또다시 왼편 솥 속 물을 퍼다가 바른편 솥 속에 넣고, 이렇게 쭈룩쭈룩 소리를 내면서 분주스레 퍼 옮기고, 쏟아 옮기고 하다가는, 엽전 두어 푼이나, 나뭇조각 물표 서너 개씩을 가지고 와서 빙 둘러섰는 아가씨들과 할머니들의 서양철 물통(오리주둥이 같은 것이 달린 것), 혹은 세숫대야, 혹은 쇳주전자, 혹은 사기주전자 등에 엽전 두 푼에 물푸개 하나씩, 그 절절 끓는 물을 담아 주는 것이다.

아찡이와 쭐루(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동거자 뚱뚱보는 어두컴컴한 부엌 속으로 들어가서 둥그런 탁자를 가운데 놓고 뒷받침 없는 걸상에 삥 둘러앉은 때묻는 옷 입은 친구들 틈에 끼여 앉아서 떡 두 개씩과 꺼룩한 미음을 한 사발씩 먹고는 쩔렁쩔렁하는 전대 속에서 동전을 여섯 푼씩 꺼내서 탁자 위에 메치고 코를 힝힝 아무 데나 풀어 붙이면서 거리로 나왔다.

둘이서는 잠잠히 걸었다. 조약돌을 깔아서 올통볼통한 좁은 골목을 지나 나와서 전찻길을 끼고 한참 올라가다가 다시 조그만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서 인력거 세놓는 집 앞에 다다랐다. 벌써 수다한 인력거꾼들이 와서 널찍한 창고 속에 줄줄이 세워 둔 인력거를 한 채씩 끌고 나아갔다. 아찡도 거의 해져서 나들나들하는 종이로 돌돌 싸둔 대양(大洋) 오십 전을 인력거세 하루 선금으로 지불하고 어둑신한 창고로 들어가서 제 차례에 오는 인력거 한 채를 들들 끌고 거리로 나아왔다. 그는 잠깐 우두머니 서서 분주스럽게도 왔다갔다하는 군중을 바라다보다가 인력거 뒤채를 부득부득 밀면서 나아오는 뚱뚱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어째 신수가 궁해. 어젯밤 꿈이 숭하더라니!”

뚱뚱보는 이 말 대답할 사이도 없이 벌써 맞은편 거리에서 오라고 손짓하는 서양 여자를 보고 설마 남에게 빼앗길세라 줄달음질을 쳐가서 인력거 앞채를 내려놓고 그 여자를 태웠다.

아찡이는 절반이나 잊어버려서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도 안 나는 꿈을 되풀이해 생각해 보려고 애를 쓰면서 정거장 쪽으로 향해 갔다.

마침 남경서 떠난 막차가 새벽에 북정거장에 닿았다. 제섭원(齊燮元)이가 노영상(盧永祥)이를 들이친다는 풍설이 한창 돌 때인데 이번 차가 아마 마지막 차일는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소주(蘇州)서, 곤산(昆山)서 쓸어 밀리는 피란민들이 넓은 정거장이 찌어져라 하고 밀려 나왔다. 정거장 정문이 있는 곳에는 벌써 그 동안 각처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의 잃어버린 짐짝으로 가득 채워 있어서 교통 단절이 되어 버렸고, 좌우 옆문으로 쏠려 나오는 군중이 문간에 수직하고 있는 군인들의 몸수색을 당하면서 이리 밀치우고 저리 밀치우고 흐늑흐늑하였다.

아찡은 이 기회를 안 놓치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며 기회만 엿보고 서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저편 한구석으로 늙은 할머니 한 분, 젊은 색시 한 분, 또 돈푼이나 있어 보이는 젊은 사내 하나가 고리짝, 참대궤짝, 바구니 등 수십 개의 짐짝을 겨우 검사를 마친 후 시멘트 길바닥에 쌓아 놓고 어쩔 줄을 몰라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이었다. 아찡은 곧 그곳으로 뛰어가려다가,

‘이놈아’ 하고 외치는 순사의 고함 소리에 눌려서 한편으로 물러서면서 아까운 듯이 그쪽만을 바라다보았다. 짐은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촌계 관청식으로 두리번두리번하기만 하던 사내가 마침내 짐짝들을 여인네더러 보라고 맡기고 인력거를 부르려고 정거장 구외로 나왔다. 아찡은 인력거를 내던지고 번개처럼 이 사내에게로 달려들었다. 벌써 네다섯 다른 인력거꾼들도 달려와서 이 젊은이를 에워쌌다.

“어디로 가오? 어디요? 여관으로요?”

젊은 사람은 어찌해야 좋을는지 모르겠다는 모양으로 한참이나 어릿어릿하다가 겨우 상해 말은 아닌 어떤 다른 지방 사투리로 사마로(四馬路)까지 얼마에 가겠느냐고 물었다.

“사마로까지 육십 전만 내슈.”

하고 한 인력거꾼이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젊은이는 딱하다는 듯이 잠시 망설이더니,

“이십 전에 가면 가구 그렇잖으면 그만둬.”

하고 중얼거리었다. 인력거꾼 서넛이 펄쩍 뛰면서 한꺼번에 외쳤다.

“이십 전이라니, 어딜, 우리 그렇게 에누리 없어요.”

“그자 촌놈이다. 상해 말은 할 줄 모르는 모양이다.”

하고 인력거꾼 하나가 외쳤다. 그래서 그들은 이 시골뜨기를 잔뜩 곯려먹으려고 그냥 육십 전을 내어야 한다고 떠들었다. 얼마 동안 승강이 계속되다가 값은 마침내 매 인력거에 사십 전씩(보통때 값의 사 배)에 작정이 되었다. 아찡이도 새벽부터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새벽부터의 운수를 웃고 떠들며 서로 축하하는 동무 인력거꾼들과 섞여서 정거장 구내로 들어가서 고리짝을 한 개 들어 내왔다. 아찡은 큰 고리짝 한 개와, 또 어제 먹다 남은 것인지 생선 대가리 같은 것을 주워 싼 조그만 보꾸러미 한 개를 인력거 위에 올리어 놓고 앞장을 서서 줄곧 달음질해 나아갔다.

사마로에 즐비한 여관들은 여관마다 피란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그들은 이여관 저여관으로 한참이나 왔다갔다하다가 마지막에 겨우 어떤 좁고 더러운 여관으로 가서 그것도 남은 방이 없다고 해서 응접실에 그냥 있기로 하고, 겨우 짐을 풀어 놓았다. 인력거꾼들은 그 동안 미리 흥정한 장소까지 와가지고도 여기저기를 한참이나 끌려 다녔다는 것을 핑계로 해가지고 세상이 떠나갈 듯이 싸고 덤벼들어 떠들어 댄 결과로 마침내 매인 앞에 대양 일 원씩을 떼내었다. 아찡은 그의 손바닥에 놓인 번들번들 빛나는 은전 일 원짜리 한 푼을 눈이 부신 듯이 바라보면서, 저고리 앞자락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었다.

그가 인력거 채를 질질 끌면서 다시 큰거리로 나아올 때 혼자서,

“이게 웬 호박인구? 꿈자리가 사나우문 생시엔 되레 신수가 좋은 법인가?”

하면서 속으로는 좀 있다 밤에 방장이네게로 가서 한잔 할 기쁨을 예상하면서 그 번들번들하는 큰 돈을 허리춤 전대에 잘 간수하였다.

참말로 그날은 특히 운이 좋았던지 큰거리에 척 나서자 마침 가랑이 넓은 바지를 입고 팽갱이 같은 모자를 쓴 미국 해군 하나를 만나서 태우고 팔레스 호텔까지 가서 해군들 보통 버릇으로 그냥 막 집어 주는 돈을 받아서 헤어 보니 이십 전짜리 은전이 한 푼, 동전이 열두 푼이었다.

그는 너무나 좋아서 벙글벙글 웃으면서 전차 궤도를 건너 인력거 정류소로 들어가서 차를 내려놓고 그 살대 위에 편안히 걸터앉아서, 행상하는 어린애를 불러 동전을 여섯 푼 던져 주고 쪼빙(떡)을 두 개 사서 맛있게 먹었다.

해가 벌써 오정이나 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앞자리에 앉았던 인력거가 다 풀려 나가고 마침내 아찡이 차례에 이르렀다. 방금 팔레스 호텔 문지기인 인도인이 망치를 휘두르면서 ‘인력거꾼’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려고 일어서다가 아찡은 그만 벌떡 나가자빠졌다. 아찡이 바로 뒷자리에서 참새 눈깔 같은 눈을 도록도록하며 앉아 있던 뾰죽이가 번개같이 아찡 옆으로 뛰어나가서 손님을 태우려고 달려갔다.

아찡이는 저도 모르게 ‘에쿠쿠’ 하고 신음하였다. 뒷자리에 차례로 앉았던 다른 인력거꾼들이 삥 둘러서면서 눈이 둥그래서 아찡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찡이는 겨우 몸을 일으켜 인력거 채 위에 걸터앉으면서 ‘으륵’ 하고 아까 먹었던 쪼빙 두 개를 그대로 토해 버렸다. 머리가 휭하고 온몸이 노곤해 들어 왔다. 오 분, 십 분, 십오 분! 그는 다시 제 기운을 차려 보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의아스런 눈으로 바라다들 보고 있던 동료들 중에, 그중 나이 많이 먹은 곰보 영감이 마침내 가까이 와서 아찡이의 싸늘하게 식은 손을 주물러 주면서 말했다.

“여보게, 요 골목을 돌아 들어가서 사천로(四川路) 청년회로 가문, 돈 안 받구 병 보아 주는 의사 어른이 계시다네. 그리 가보게. 그저께 우리 장손녀석이 갑자기 아프대서 거기 가서 약 두 봉지 타먹구 나았다네. 어서 가보게.”

아찡이는 무의식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마도 이 곰보 영감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까 보다 하고 흐릿하게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글쎄 어젯밤 꿈이 불길하더니…… 그는 마치 꿈속에서 길을 걷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남경로(南京路)로 뛰어들어갔다.

 

2

그가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기억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이사람 저사람에게 물어 보아 가며, 핀잔을 먹어 가면서 여기까지 찾아는 왔다. 방 안에는 자기 이외에도 서너 노동자들이 먼저부터 와서 아무 말도 없이들 서로 번번이 쳐다들만 보고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어디서 무엇에 치었는지 그냥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추켜 들고 ‘호 호’ 하면서 부들부들 떨고 앉아 있었다. 아찡은 한참 동안이나 벽을 기대고 반쯤 누워 있다가 차차 정신이 드는 것을 깨달았다. 인제는 정신은 똑똑해졌는데 몸이 그저 사시나무 떨리듯 와들와들 떨리고 멎지를 않았다.

의사님은 어디를 갔나?

그곳 하인 비슷한 사람 하나가 비를 들고 들어왔다. 아찡은 거의 본능적으로,

“의사님 어디 가셨수?”

하고 물었다. 하인은 아무 대답이 없이 비로 방바닥을 두어 번 슬적거리고 나더니 기지개를 하면서,

“규칙이 의사님이 새루 두시가 돼야 오우! 갔다가 두시에들 오라구. 두시 전에는 의사님이 안 오시는 규칙이야.”

하고는 다시 방을 쓴다. 아찡은 비가 가는 곳마다 풀썩풀썩 일어나는 먼지를 흠뻑 맞으면서, 잇몸이 딱딱 마주 붙어서 떨리는 소리로 다시 물었다.

“지금 몇 시쯤 됐소?”

“열두시.”

하고 그 하인은 마치도 시간을 따로 외워 가지고 다니기나 하듯이 빨리 거침없이 대답했다.

두 시간! 그러나 여기서 기다릴밖에 없었다. 지금 아무 데도 갈 기력이 없었다. 왜 이다지도 몸은 자꾸만 떨릴까?

아찡이 한참이나 정신없이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때에는 떨리는 증세는 모두 없어지고, 그저 머리를 무슨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이 띵할 뿐이었다. 팔 부러진 사람은 아직도 그냥 ‘호 호’ 하고 앉아 있고 다른 사람들은 일체 상관없다는 듯이 천장들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흐리멍텅한 아찡의 귀로는 바깥 길 위로 뿡뿡 쓰르르 하며 오고 가는 자동차 소리들이 어디 멀리서 들려 오는 소리같이 들렸다. 그는 침묵이 무서워졌다. 그래서 그는 이 답답한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나 되는 것처럼,

“지금 몇 시나 됐을까요?”

하고 공중을 향하여 물었다. 천장만 쳐다보던 사람들이 잠깐 얼굴을 돌려 표정 없는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바라다볼 뿐이요, 누구 하나 말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아찡은 무서운 생각이 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글쎄 어젯밤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문이 열리면서 깨끗이 양복을 입고 금테 안경을 쓴 뚱뚱한 신사 한 분이 들어왔다. 아찡이는 직감으로 이 사람이 의사어른이려니 하고 벌떡 일어나면서,

“의사나리님, 제가 오늘 갑자기…….”

하고 말을 건넸더니, 그 신사는,

“아니오, 아니오, 의사는 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다가야 오십니다. 좀더 기다리시오.”

하고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조금 후에 그 신사는 다시 나타났다. 아픈 몸과 가슴을 가진 노동자들의 멀건 눈들이 이 젊은 신사의 일동일정을 멀거니 바라다보았다.

이 신사는 좀 뚱뚱하고 퍽 쾌활스런 사람이었다. 그는 조그마한 세 다리 교의에 펄썩 주저앉으면서 구둣발로 마룻바닥을 한 번 쿵 구르고 나서,

“당신들 의사 뵈러 왔소? 좀더 기다리시오. 아, 당신은 팔을 다쳤구려? 무슨 일 하오? 또 당신은?”

하면서 이사람 저사람 번갈아 보면서 대답은 쓸데없다는 듯이 남이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혼자 주절대었다.

그러나 그도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다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표정 없는 여러 눈들이 신사의 몸을 떠나서 다시 천장으로 향하려 하는 때에, 신사가 다시 버룩버룩하면서 말을 꺼냈다.

“세상은 고해이지요. 죄 때문이외다. 아담 이브가 한 번 죄를 진 이후로 그 죄악이 온 세상에 관영해서 세상이 이렇게 괴로움 많은 세상이 되었습네다.”

하고는 가장 동정이나 구하는 듯이 군중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군중의 얼굴은 일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하는, 그러면서도 약간 호기심에 끌린 표정이 나타난 것을 그는 간파한 모양이었다.

“당신들은 기도를 해본 적이 있소?”

하고 신사는 일동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 신사의 얼굴만 열심으로 바라다볼 뿐이었다. 신사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기도함으로 죄 사함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삼장 십육절에 말하기를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짐을 지시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그 피로 우리 죄를 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는 이렇게 괴롭다가도 죽은 후에는 천당에 가서 금거문고를 뜯고 천군 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생명수가의 생명과를 먹으면서 살아가게 된답니다.”

하면서 절반이나 설교체로 혼자 흥분해서 한참 내리엮고는 다시 한번 일동을 둘러보더니, 벌떡 일어나며 눈을 하늘을 향하여 올려뜨고,

“오!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여, 이 불쌍한 무리들을 굽어 살피사 당신의 거룩한 성신의 불로 그들의 죄를 태워 버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하느님을 믿게 하시오며, 풍성하신 은혜를 베푸소서.”

하더니 다시 눈을 내리떠 군중을 둘러보면서,

“여러분, 오늘부터 예수 품안으로 들어오시오. 예수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는 가볍고 쉬우니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 괴로움을 모두 잊어버리고 예수만 믿었다가 이 다음 죽은 후에 천당에 가서 무궁한 복락을 같이 누립시다.”

하고 끝내고는 그만 불쑥 나가 버렸다.

소 눈깔같이 우둔한 눈으로, 이 흥분한 신사의 머릿짓 손짓을 열심으로 바라다보던 눈들은 다시 일제히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면서 각기 입으로는 약속했던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찡이는 열심으로 그 신사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모두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죽은 후에는 무궁한 복락을 누린다’는 소리를 들을 때에는 ‘그렇게 되었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하고 속으로 부러워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이 무슨 아담과 이브의 죄 때문에 괴롭게 되었다는 소리는 미련한 생각에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기 같은 인력거꾼들은, 모두 아담 이브의 죄의 형벌을 받는 중이라고 하려니와 그러면 어찌하여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양귀자들이나 또는 자기도 가끔 인력거에 태우는 비단옷을 입은 색시들은 아담 이브의 죄 형벌을 받지 않고 잘 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사가 나아간 후에도 아찡이는 한참이나 그 신사가 하던 말을 알아들은 대로 되풀이해 보았다. ‘세상에서는 괴롭게 지내다가 일후 죽은 후에 천당에 가서는 금거문고를 타고…….’ 죽은 후에 금거문고를 타려면 살아서는 왜 꼭 고생을 해야 되는가? 죽은 후에 천군 천사와 함께 노래 부르면서 잘 살려고 하면 왜 살아서는 매일 뚱뚱한 사람을 인력거 위에 태우고 땀을 흘려야 하며 발길에 채어야 하고 ‘홍도아째’ 순사 몽둥이에 얻어맞아야만 되는가? 죽은 다음에 생명과를 배부르게 먹으려면 살았을 적에는 어찌하여 남 다 먹는 아침 죽 한 그릇도 맘대로 못 먹고 쪼빙과 미음으로 요기를 하여야만 되는 것일까? 이것을 아찡이는 아무리 하여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신사가 말한 바 그 소위 천당이라는 데는 그러면 우리 같은 인력거꾼들만이 몰려가는 데일까? 그렇다면 양귀자들과 양복 입은 젊은 사람들과 순사들은 죽은 후에는 어떤 곳으로 가는가? 그들도 예수만 믿으면 천당으로 가는가? 만일 그들도 천당으로 간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도 고생이라곤 아니 했으니 그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옳다. 만일 천당이라는 데가 있다면 거기서는 필시 우리 이 세상 인력거꾼들은 아까 그 사람이 말한 모양으로 금거문고나 타고 생명과를 배불리 먹고 놀고 이 세상에서 인력거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은 모두 인력거꾼이 되어서 누더기를 입고 주리고 떨면서 인력거를 끌고 와서 우리를 태워 주게 되나 부다! 그렇다. 그리만 된다면 나도 한번 그들을 ‘에잇끼놈’ 하고 소리 지르면서 발길로 차고, 동전 서 푼 던져 주고, 예수 만나 보려 대문 안으로 들어가게 될 터이지. 정말 그럴까…… 하고 그는 혼자 흥분하여졌다. 그래 그 신사가 아직 있으면 천당에도 인력거꾼이 있느냐고 물어 보고 싶었다. 만일 그렇다고만 하면 그는 이제라도 어서 속히 죽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 좋은 천당으로 한시바삐 갈 것이다. 그는 호기심에 끌려서 미닫이 칸 막은 안방에서 무슨 책인지 웅얼웅얼하면서 읽고 있는 하인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 영감님, 영감님두 예수 믿수?”

웅얼웅얼하던 소리가 뚝 끊기고 잠시 가만 있더니,

“네, 왜 그러우?”

한다.

“천당에두 인력거꾼이 있답디까?”

“인력거꾼? 흥, 천당에도 인력거꾼이 있으문 천당이 좋달 게 무얼꼬. 없어요.”

눈만 멀뚱멀뚱하고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빙그레 웃었다. 피가 뚝뚝 듣는 부러진 팔을 들고 앉았는 사람만이 아무것도 모두 귀찮다는 듯이 그냥 물끄러미 팔만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아찡이는 낙망했다. 천당에는 인력거꾼이 없다! 그러면 역시 고생하는 놈은 우리들뿐인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나 천당에서나 늘 즐거운 것뿐이니!

그는 그런 천당에는 가기가 싫었다. 천당에 가서도 낮은뎃사람이 위로 가고, 위엣사람이 아래로 가지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데까지 일부러 다리 아프게 찾아갈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괴롭더라도 이 세상에서나 쪼빙이나마 잔뜩 먹고 몸이나 성해서 한 달에 한 번씩 이십 전짜리 갈보네 집에나 가서 자면 그것이 더 행복스러운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몸이 퍽 가뜬해진 것처럼 생각되어서 아찡이는 오지도 않는 의사를 기다리기가 싫어져서 그만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런데 그가 분주스런 거리로 이사람 저사람 피하면서 걸어나갈 때 홀로 큰 고독을 깨달았다. 아찡은 제가 갑자기 이 세상 밖에 난 것같이 생각이 되어서 슬퍼졌다. 지나가는 사람, 지나오는 사람 들이 모두 희미하게 멀리 딴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고, 자기는 지구 밖 어떤 곳에 홀로 서서 이 사람떼를 바라다보는 것처럼 생각되어졌다. 그는 이것이 흉조라고 생각되어 몸을 떨었다.

그는 정신없이 다리가 움직여지는 대로 걸었다. 팔레스 호텔 앞에 버리고 온 인력거는 기억에 나오지도 않았다. 그 인력거를 잃어버리면 제 앞에 어떠한 비참한 일이 오리라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였다. 저도 모르게 제 집 쪽으로 걸어오다가 건재 약국에 들어가서 감초 가루약을 동전 서 푼 어치 사들고 그냥 걸어갔다.

아찡이 얼마나 오래 걸었던지 제 집 동구 밖에까지 왔을 때 동구 밖에 울긋불긋한 기를 늘이운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안경 쓴 점쟁이를 발견하였다. 아찡이는 저도 모르는 새 그리로 끌리어갔다.

전대에서 이십 전짜리 은전 한 푼을 꺼내 이 점쟁이 앞에 던져 주고 우두머니 서서 점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쟁이는 누런 안경 속으로 그 큰 두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아찡이의 아래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자그마한 상자 속에 손을 넣어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내서 펼쳐 읽어 보고는, 책상 밑에서 커다란 장지책 한 권을 꺼내 들고 세 치나 자란 시커먼 엄지 손톱으로 장장 들쳐 가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몇 곳 읽어 보더니 책을 덮어놓고서 책상 위에 놓인 유리판에다가 먹붓으로 글자를 넉 자를 써서 아찡 앞에 쑥 내밀었다. 아찡이가 그 글자를 알아볼 리가 없었다. 점쟁이는 가장 점잔을 빼면서 관화가 조금 섞인 듯한 영파 방언으로 점의 해석을 길게 늘어놓았다. 이러쿵 저러쿵 중언부언한 해석을 다 모아 보면 대략 이러한 뜻이었다.

……아찡이가 지금은 전생의 죄값으로 고생을 하지만 인제 얼마 안 있으면 돈 많이 모으고 잘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3

아찡이는 정신없이 제 방 안으로 들어가서 꼬꾸라졌다. 그는 몸을 떨었다.

몸이 다시 으스스하고 구역이 나기 시작하였다. 아찡의 눈앞에는 그의 전 생애가 한번 죽 나타났다. 어려서 시골서 남의 집 심부름 하던 때로부터 상해로 굴러들어와서 공장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쫓겨 나서는 이내 인력거를 끌게 된 것…… 그것이 벌써 팔 년이라는 긴 동안이었다.

팔 년 동안 인력거를 끌던 신산한 기억이 다시금 생각났다. 애스톨 하우스 호텔에서 어떤 서양 신사를 태우고, 오 리도 더 되는 올림픽 극장까지 가서 동전 열 푼을 받아 들고 너무도 억울해서 동전 두 푼만 더 달라고 빌다가 발길에 채던 생각이 났다. 또 언젠가는 한번 밤이 새로 두시나 되어서, 대동여사에서 술이 잔뜩 취해 나오는 꺼우리(조선 사람) 신사 세 사람을 다른 동무들과 함께 한 사람씩 태우고 불란서 조계 보강리까지 십 리나 되는 길을 끌고 가서 셋이서 도합 십 전짜리 은전 한 푼을 받고 너무도 기가 막혀서 더 내라고 야단치다가 그 신사들에게 단장으로 얻어맞고 머리가 터져서 급한 김에 인력거도 내버리고 도망질쳐 달아나던 광경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고는 또다시 언젠가 한번 손님을 태우고 정안사로 가다가 소리도 없이 뒤로 달려온 자동차에게 떠밀리어서 인력거를 바수고 다리까지 삐인 위에 자동차 운전수의 발길에 채고 인도인 순사 몽둥이에 매맞던 일도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이 났다.

길다면 길고 멀다면 먼, 또는 짧다면 또 짧은 팔 년 동안의 인력거꾼생활! 작은 일, 큰 일, 눈물난 일, 한숨 쉰 일들이 하나씩하나씩 다시 연상되어서 그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목이 갈한 것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온몸에 쥐가 일어서는 것을 감각하여,

“끙.”

소리를 지르며 도로 엎으러지고서는 다시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4

종일 인력거를 끌다가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와서 아찡의 시체를 발견하고 공보국에 보고한 뚱뚱보를 따라서 공보국에서 순사와 의사가 검시를 하러 이 더러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의사는 방 안에서 검시하고 영국인 순사 부장은 중국인 순사 통역을 세우고 뚱뚱보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서 조그만 수첩에 적어 넣었다.

“아찡이가 언제부터 인력거를 끌었지?”

“글쎄 똑똑히는 모릅니다. 이 집에 같이 있게 되기는 바루 삼 년 전부터이올시다. 그때 제가 인력거를 처음 끌기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있게 되었사와요.”

“그래 똑똑히는 모른단 말야?”

“네, 네, 아찡이 제 말로는 이 노릇을 시작한 지가 금년까지 팔 년째라구 말을 합니다만, 나리!”

순사 부장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안에서 검시하고 나오는 의사를 향해 웃으면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무얼요, 저 죽을 때가 다 돼서 죽었군요. 팔 년 동안이나 인력거를 끌었다니깐요. 남보다 한 일년 일찍 죽은 셈이지만, 지난번 공보국 조사에 보면 인력거 끌기 시작한 지 구 년 만에는 모두 죽는다구 하지 않았습니까?”

의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흐흥! 팔 년으로 십 년, 그저 그 이내지요. 매일 과도한 달음질 때문으로…….”

5

공보국에서 온 일꾼들이 아찡이의 시체를 거적에 담아 실어 가지고 간 후, 뚱뚱보는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날 오후 두시에 사람들은 그 뚱뚱보가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인력거에 손님을 태우고 기운차게 달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아까 순사 부장과 의사와의 회화를 못 알아들은 것이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오 년이나 육 년 후에 그도 아찡이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을 모르므로 뚱뚱보는 껑충껑충 아스팔트 매끈한 길 위를 기운차게 달리는 것이었다…… 마치도 한 백 년 더 살 것같이…….

 

 

 

 

 

 

 

 

 

 

소설읽기 NO 4

 

 

김연수 스케이트

 

눈 쌓인 추풍령을 지나오는 동안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북풍이 골목길로 접어들어 슬레이트 지붕에 매달린 날카로운 고드름 몇 개의 속내를 단단하게 만들면서 서너 차례 지나갔다. 밤 사이 털모자 끝에 달린 왕방울만한 눈이 또 내린 것이다. 평화동 80번지 골목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가장들이 한쪽으로 치워놓은 눈무더기와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눈사람 등이 제멋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진주한 눈의 군대 앞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은 엉거주춤 걸어가는 자세와 미끄러진 자세의, 그 중간쯤 애매한 어딘가를 가리키는 동작을 하고는 기적소리가 울려퍼지는 골목을 지나갔다.

정인은 아직 키가 일 년에 5센티미터씩 자라는 국민학교 3학년짜리였다. 지난 늦가을부터 정인의 엄마가 굵은 색실로 짜준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아마도 그 스웨터가 정인의 몸에 맞으려면 내년 겨울이나 되어야 할 것이다. 워낙에 강수량이 적은 고장이라 정인에게도 뜻하지 않은 눈의 연이은 습격은 아름다웠다. 비실비실한 겨울 햇살을 받아 낱낱의 눈송이들이 되비춰주는 빛들은 정인에게 음악 시간에 듣는 풍금소리를 연상시켰다. 건반을 누르고 발을 굴리면 아주 오랫동안 들리는 두터운 소리가 교실에 가득 차듯이 왠지 따뜻해 보이는 눈들이 80번지 저지대 마을을 감싼 것이다.

정인은 쪼그리고 앉아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대문 앞에 쌓인 눈을 만지작거렸다. 처음 내릴 때는 보드라웠지만, 간밤에 골목을 휩쓸고 지나간 바람에 단련되어 단단하게 굳어버린 눈 알갱이들이 갈치의 비늘처럼 날카롭게 반짝였다. 가끔씩 바람이라도 지나가면 담벼락 너머로 비어져나온 목련 가지에 쌓였던 눈이 정인 쪽으로 날아들었는데, 정인은 그 비늘 같은 눈송이들이 눈으로 들어갈까 겁이 나 손을 휘저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에 정인은 있는 것이다.

혼자서 신이 나 눈을 만지작거리는데 뒤에서 마른기침 소리와 함께 주인집 재성 남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욕쟁이 할아버지가 침을 막 뱉은 입에 청자 한 개비를 물고 집 앞에 쌓인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족히 10분은 너머 피울 담배였다. 지난 여름, 아랫장터에 있는 자신의 지물포에서 전지다발을 내리다 허리를 삐끗한 이후로는 숨조차 가빠 담배 피우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른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릴 생각으로 정인은 두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서자마자 익숙한 어지럼증이 정인을 휘감았다. 정인의 시야로 폭설이라도 내린 듯, 온통 하얀색만이 가득했다. 한 순간 정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정인은 아문센이나 갈 만한 북국(北國)의 어느 왕국에 간 것이다. 그 왕국은 만년설로 언제나 하얗기 그지없는 세상이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에서는 어느쪽으로 가나 남쪽입니다. 머리도, 눈썹도 하얀 집사가 그렇게 말하며 정인을 맞이한다. 여기는 어딘가요? 당연히 만년설 왕국이죠. 거기가 어딘지 모르고 온 사람은 정인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집사는 당황하여 눈썹을 만지면서 말한다. 눈썹에서 비늘처럼 하얀 것들이 떨어진다. 성(城)의 가장 깊은 곳에 가면 만 년 전의 눈에 휩싸인 왕자가 누워 있다. 거기까지 내려가면 갈수록 온도는 내려갑니다. 그래서… 집사가 말끝을 흐린다. 많은 사람들이 왕자를 구하러 내려가다가 얼어붙었답니다. 웬만큼 사랑이 뜨겁지 않다면… 집사는 다시 말끝을 흐린다. 정인은 순간 당황한다. 자신에게 만 년 전의 눈을 모두 녹아내리게 할 만한 사랑이 있을까? 집사의 간곡한 하얀 눈빛이 정인을 사로잡는다. 도망갈 수 있다면…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온통 하얀 세상뿐.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의 목소리다. 정인은 목청껏 대답한다.

「먼산은 왜 그키 쳐다보나?」

엄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대문간에 서서 정인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이라.」

요즘 들어 부쩍 정인이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에 엄마로서는 어딘가 모자라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던 차였다. 엄마는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

「아부지 술 깨면 잡수시게 뇌신 하나만 퍼뜩 사온나.」

정인의 엄마는 작은 구슬처럼 튀어나온 쇠붙이로 여닫는 지갑에서 동전을 건네주면서 말하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인은 엄마가 건네준 동전을 보느라고 벙어리장갑을 눈앞에 펼쳤다. 벙어리장갑에 달라붙어 있던 눈송이들이 어느새 녹아내려 둥근 물방울들로 맺혀 있었다. 정인은 동전만 골라 주머니에 넣은 다음, 두 손을 엉덩이에 문질러 물방울을 털어냈다.

80번지는 역의 반대편에 있었다. 중심가인 평화동은 원래 경부선 철길을 따라 서쪽, 역 앞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철길 저쪽에 있는 평화동 80번지만은 평화동으로 부르지 않고 그냥 80번지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 철길이 건널 수 없는 강이라도 되는 양, 80번지 사람들은 시내에서도 이방인으로 통했다. 80번지 사람들은 더럽고 속임수를 잘 쓰고 싸움질이나 하는 족속들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러한 평판의 대부분은 중심가로서의 자부심을 가진 같은 평화동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다른 도시에 비하자면, 중심가나 80번지나 낙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도시만 개발되지 못했다는 이러한 불만은 인근 도시에서 군인 출신 대통령이 나오고 그 도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부터 더욱 커졌다. 그 대통령이 정인네가 살고 있는 도시를 지나면서 <어릴 적에는 이 시가 세상에서 제일 큰 도시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초라하기 그지없구만>이라고 말한 일은 두고두고 상공회의소 패거리들의 안줏감이 될 정도였다. 근대화의 열풍에서 밀려나 있는 낡은 도시. 그것이 바로 그 도시의 현재 이름이었다.

약국은 상주로 나가는 도로변에 있었다. 며칠 전에 처음 눈이 내렸을 때만 해도 시청 트럭이 시내를 오가면서 모래를 뿌려대어 그나마 버스가 다닐 수 있는 길은 만들어놓았었는데, 그날 아침에는 시청에서도 포기했는지 모래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인은 쇠사

슬로 친친 감아놓은 바퀴를 슬슬 굴리며 지나가는 트럭과 버스들처럼 엉거주춤 약국까지 갔다. 약국 앞길은 일찌감치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는데, 약사인 여주인의 깔끔한 성격을 그대로 보는 듯했다. 정인은

약국 문의 위창으로 비어나온 연통 끝에 매달린 깐포도통을 보면서 약국의 문을 열었다.

「아주무이? 아주무이?」

정인이 몇 번을 되풀이해서 부르자, 앞치마를 두른 약사가 안쪽 문을 열면서 밖으로 나왔다. 아침을 만들다가 정인의 목소리에 달려나온 듯, 아직 물기 가득한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았다. 정인의 아버지는 절대로 이 약국에서 약을 사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인근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이 여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인은 매번 약을 살 때마다 이 약국을 들르곤 했다. 약사 역시 정인네에게 약을 팔지 않겠노라며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정인이 계속 약을 사러 왔기 때문에 그녀는 속으로 <참 잔망스러운 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뇌신 한 봉지만 주세요.」

 

불 위에 얹어놓고 온 국거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약사는 무심한 눈초리로 정인과 그녀 사이에 놓여진 진열장의 문을 열고 약봉지를 찾았다.

「여기 있다.」

약사의 뒤쪽에 걸려 있는 졸업장을 보며 공상에 빠져 있던 정인은 그 말에 얼른 어머니가 준 동전을 꺼내어 셈을 치르고는 밖으로 나갔다. 약사는 정인이 남기고 간 시선을 따라 자신의 뒤쪽에 걸린 졸업장을 보았다. 콧대 높은 사립 여대생이 고향인 시골 도시,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80번지에서 약국을 개업한 이유는 약사로서의 대단한 꿈이 있어서가 아니다. 반대로 아무런 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떤 꿈이었는지는 그녀도 아주 오래 전 잊어버렸다. 약사는 졸업증에 씌어진 자신의 이름을 한 번 발음해보았다. 어색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데, 문득 방금 아이가 사간 약 이름이 떠올랐다. <나혜선>과 <뇌선>. 그때, 안채에서 국물이 끓어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돈이 왜 남나?」

정인 엄마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너 옳게 말해라. 이 약 어디 가서 샀나?」

엄마의 부릅뜬 눈초리에 정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평화약국에서요.」

「이 가시나가. 아부지 알면 우짤라고 거서 사나?」

엄마의 호통에 잔뜩 주눅이 든 정인이 고개를 숙였다.

「암만 캐도 모르겠네. 그 약국 년이 식전이라 미칫는갑다. 이거 아부지 머리맡에 갖다 놔라.」

하지만 정인 엄마로서는 아직도 석연치 않은 뭔가가 남아 있었다. 두부를 부엌칼로 총총 자르고 펄펄 끓어대는 김치찌개에 넣고 나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려는 정인을 불러 세웠다.

「너, 뇌신 좀 가 와봐라.」

도마 위에서 칼로 파를 뭉텅뭉텅 쓸 때처럼, 뚝뚝 끊기는 엄마의 목소리에 정인은 절로 움츠러들었다. 엄마는 벌레라도 집는 것처럼 뇌신 봉지를 자신의 눈 높이까지 들어올렸다가 다른 손으로 정인의 등을 툭 쳤다. 엄마가 짜준 스웨터의 부풀어오른 공간들 덕택에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매를 맞는 순간 왠지 모를 억울함이 정인의 몸을 감쌌다.

「가시나야, 뇌신 사오라 캉께네 왜 또 뇌선 사왔나? 약국 년이 이래 주디?」

엄마는 방 안의 아버지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정인을 힐난했다. 정인은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리고 겁에 질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라마, 니가 뇌선 달라 캤나?」

엄마는 정인의 고갯짓을 약국 여자가 일부러 한 짓은 아니라는 의미로 알아들었지만, 그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이 뇌신을 달라고 했는지, 뇌선을 달라고 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자신이 분명히 뇌신을 달라고 했다고 말한다면, 전에도 한 번 그런 기억이 없었다. 정인이 눈물을 흘리기 직전, 집 앞에 쌓인 눈을 다 치운 욕쟁이 할아버지와 재성이 들어왔다. 욕쟁이 할아버지는 얼굴이 빨갛게 된 정인과 화가 난 표정으로 뇌선을 들고 서 있는 엄마를 훑어보자마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차렸다.

「아가 또 뇌선 사왔구만. 뭐 어때서 그 카나? 약이 똑같지. 별나게 구는 인간이 개밥에 닭알이지.」

갑자기 욕쟁이 할아버지가 눈치 없이 큰소리를 지르자, 엄마는 화가 더 치밀어올랐다. 엄마는 욕쟁이 할아버지 쪽은 보지도 않고 정인의 팔을 툭 낚아채어 부엌 쪽으로 들어갔다.

「너는 왜 그키 모자라나?」

속이 탄 엄마의 혼자말이었지만, 정인으로서는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나지 않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한참 고심하던 엄마는 정인에게 주머니칼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정인은 정지 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의 학용품이 있는 앉은뱅이 책상에서 까만 주머니칼을 가지고 나왔다. 엄마는 부엌 한쪽에 앉아서 뇌선 봉지를 놓고서는 그 주머니칼로 정성 들여 <선>자에 그려진 선 하나를 지워나갔다. 한참 칼을 쥐고 있던 엄마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정인에게 약봉지를 보여주었다.

「어떻나?」

「진짜 뇌신 같아여.」

엄마의 환한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다시 마음이 풀어진 정인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지만, 이내 엄마는 정인의 머리를 한 번 쥐어박았다.

「너는 진짜 좀 모자란 모양이다.」

다시 된서리를 맞고 마당으로 나온 정인에게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았는지 재성이 다가왔다.

정인에게 말했다.

「그라지 말고, 너 우리하고 스케이트 타러 안 갈래?」

「난 스케이트도 없어여.」

「재순이 꺼 빌려주만 되지. 이따 갈 때 부를 텡께 나와라.」

정인은 한참 동안이나 재성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인에게 재성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정인도 벙어리장갑을 벗고 손가락을 내밀어 약속했다. 정인의 손가락에 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정인의 아버지는 황금동 동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근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몇 년 간은 부산의 한 식품업체에 다녔지만, 입대한 이후로는 <이러다간 평생 공장밥 먹다가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통신수업으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상고에 다닐 때부터 글씨깨나 쓴다는 소리를 들었는 데다가 군대에서도 차트병으로 일한 탓에 <너, 면서기 하면 잘하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였다. 그의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는데, 어디 멀리 일이라도 나가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안 들어오기 일쑤였는 데다가 집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놈의 술추렴으로 제정신이었던 날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 역시 <남자는 펜대를 굴려야 하는 법>이라고 귀에 인이 박이도록 말해왔었다. 그래서 정인의 아버지가 몇 번의 응시 끝에 9급 공무원이나마 합격했을 때만 해도 사법고시에라도 붙은 것처럼 온 집안이 떠들썩했었다. 장손인 그는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빳빳하게 다려 입은 와이셔츠를 입고 첫 출근 했다.

그 빳빳하던 와이셔츠 칼라 세우고 정인의 아버지는 밑으로 줄줄이 징검다리처럼 있었던 동생들을 모두 학교 졸업시키느라 노총각으로 늙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간 손자도 못 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갑자기 정인의 할머니에게 밀어닥친 것이 바로 정인의 아버지가 서른두 살 되던 해였다. 푸에블로호가 납북되고 김신조가 넘어오던 그 즈음이니 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정인의 할머니에게는 있었다. 전쟁이 나면 아들녀석도 끌려갈 것이고 그 전에 어서 씨라도 받아놓아야지 핏줄이 이어질 터였다. 그래서 조카를 앞세워 여상 졸업하고 운전기사들을 상대로 음식 장사 하는 식당에서 집안일을 거들고 있던 지금의 정인 엄마를 맞아들였다. 한동안은 애가 안 서 굿을 하네, 한약을 달이네 하며 사람을 안달하게 만들더니 기껏 결혼하고도 이태를 더 기다려 나온 녀석은 고추가 아니라 조개였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여겼지만, 할머니의 속내는 아직도 세월은 많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인지 첫애 정인이 태어나고 나서도 한동안 소식이 뜸하다가 다시 2년쯤 더 지나서 정인 엄마는 임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들여온 며느리가 엉덩이도 손바닥만한 게 왠지 몸이 부실하다고 여기던 차에 그만 덜컥 유산되고 말았다. 원래 내색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라 주위에 은근짜로 통했던 정인 아버지도 이번에는 얼굴에 화색까지 돌면서 여섯시만 되면 정확하게 동사무소에서 집으로 귀가하곤 했었는데, 유산이 되고 나서부터 은근짜는 털팔이로 바뀌어 술을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술은 운전대를 잡건, 펜대를 잡건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만들어버린다. 곤드레가 된 아들의 모습에서 죽은 남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는 어서 툭툭 털어버리고 다시 임신하는 수밖에 아들의 마음을 돌릴 길은 없다고 누누이 며느리에게 얘기했었다. 하지만 하늘을 봐야 별을 딸 것이 아닌가? 통금 직전에라도 들어오면 다행인 것이었지만,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술에 취해 잠자리는커녕 밤새 그놈의 술주정을 하는 꼴은 꼭 지 애비를 빼닮았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할머니 말대로 삼신 할매가 정인네를 불쌍하게 여겨서인지 어쩐지 정수가 턱 들어섰다. 이번에는 정인 엄마더러 새벽 물에 손도 담그지 못하도록 다그치고 조심시킨 결과, 부실한 몸이나마 드디어 아들을 보게 되었다. 아들을 봤다고 해서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멀리하겠냐마는 적어도 몸 속으로 들어간 알코올이 독으로 작용하지는 않는 듯, 정인 아버지가 술주정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기를 얼르는 모습에서 할머니가 자전거를 이끌고 면사무소로 첫 출근 하던 아들의 늠름한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끊이지 않는 우환과 근심도 이제 끝나고 아들 말마따나 승진시험도 척 붙어서 동네 사람들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들고 살 날도 멀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뇌수막염에 걸린 정수는 그 이듬해 겨울, 엄마가 평화약국에서 감기약을 조제해 와서 이틀 간이나 집에 방치해두는 바람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이제 정인의 아버지는 영원히 술과 함께 살아갈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정인 엄마가 앞으로는 애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은 그로 하여금 술로써 모든 일을 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인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조상들도 살아 생전 모두 그 문을 생명의 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갔으니, 그도 결국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술자리로 죽음을 초대할 것이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숭숭 밀려 들어온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정인 아버지는 실눈을 뜨고 그 기운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살폈다. 손잡이가 있는 부분의 창호지에 엄지손가락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아마도 그가 지난밤, 술에 취해 들어오면서 뚫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억도 나지 않았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몸을 한 번 뒤집어 모로 누웠다가 쉽게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아 그는 머리맡에 있는 자리끼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부엌 쪽으로 난 정지 문을 밀어붙이며 고함을 버럭 지르려는데 비린내가 훅 끼쳤다.

「이 뭔 냄새고?」

「꽁치 구우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습니까?」

「아따, 냄새 지랄맞네. 치우고 뇌신 사왔나?」

풍로를 마당 쪽으로 내놓고 석쇠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정인 엄마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왜 그키 놀라나? 뭐, 잘못된 거 있나?」

「아이라여. 여 있습니다.」

정인 엄마는 찬장에 넣어두었던 약 한 봉지를 그에게 건넸다. 다행히 그는 뇌신인지 뇌선인지는 신경 쓰지도 않고 북 찢어 그 안에 든 가루약을 입 안에 털어넣고는 금색 주전자에 든 자리끼로 목을 축였다.

「오늘은 사무소 안 갈 낑께 누구 찾으만 아프다 캐라.」

「마이 아파여?」

「미친 지랄은 뒀다 니 딸년한테나 하고 치았뿌라. 아프만 어짤 낀데? 또 감기약 사줄 끼가?」

그러면서 그는 정지 문을 소리나게 닫아버렸다. 엄마로서는 풍로 불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평생 죄인처럼 살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한숨 한 번 쉬고 얼른 정인 엄마는 정인 아버지가 버린 뇌선 껍데기를 주워 풍로 불에 태워버리고 다시 꽁치를 뒤집기 시작했다.

겨울 햇살은 높이 올라갈수록 부풀어오르는 풍선처럼 그 열기를 더해갔다. 지붕에서 눈 녹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으니 제아무리 태산처럼 쌓인 눈이라고 하더라도 오늘 안에 모두 녹아버릴 기세였다. 햇살이 문지방을 비추다가 툇마루 쪽으로 나아갈 때까지도 아버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주인남자는 이미 택시회사로 나갔고 욕쟁이 할아버지도 지물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부르러 온 재성 남매도 곧 따라가겠다는 정인의 말을 듣고 스케이트장으로 먼저 가버렸으니, 정인은 아직 깨어나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병원에 갈 일이 있다며 외출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의 밥상을 차려주기 위해 정인이 집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방학책 들춰보는 일마저도 지겨워지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주무시고 있는 방 안의 갑갑함을 견디지 못한 정인은 조심스레 이불에서 몸을 일으켜 스웨터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슬레이트 지붕 처마마다 매달린 고드름이 겨울 햇살을 받아 물방울들을 하나씩 떨어뜨리고 있었다. 성급한 안뜰의 바닥 중에는 벌써 녹아버려 물기로 질퍽한 곳도 생겨났다. 정인은 마치 비가 내리듯이 줄을 지어 떨어지는 고드름의 물방울에 손바닥을 대고 있다가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앞집 기와 지붕 위에 살짝 매달린 겨울 햇살은 주변의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며 먼 길을 날아와 고드름으로, 안뜰로, 툇마루로, 정인의 이마로 튕겨졌다. 혹시나 해서 대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가봤더니 햇살이 닿는 곳부터 쌓인 눈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제야 정인은 스케이트장에 생각이 미쳤다.

정인은 창호문을 열어 잠자는 아버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쉽게 깨어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정인은 얼른 농고(農業高等學校) 앞, 논에 만들어진 스케이트장의 얼음이 아직도 무사한지 알아볼 생각으로 신발을 고쳐 매고 뛰어나갔다. 상주로 통하는 국도의 상황은 정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지 않았다. 아침나절에 약을 사러 갈 때만 해도 온통 하얀빛이더니 어느 틈에 그 빛들이 다 사라져 아스팔트의 거무튀튀한 색만 정인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차를 타지 않고 농고 앞 스케이트장까지 가는 방법은 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상주 쪽으로 조금 내려가 직지천(直旨川)을 따라 가는 길뿐이었다. 정인은 코끝이 빨개지도록 불어오는 겨울 바람을 양볼에 한껏 받으며 미끄러운 인도를 따라 뛰어갔다. 몇 번은 넘어질 뻔했고 몇 번은 실제로 넘어졌지만,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정인은 직지사교에 이르러서 좌측으로 방향을 돌려 직지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인은 살얼음이 언 직지천의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그 물줄기를 따라 화장한 동생 정수의 몸이 떠내려갔었다. 그 물을 따라 흘러갔다면 동생은 낙동강을 거쳐 태평양 어디쯤 존재할 것이다. 정수가 죽고 나서부터 정인의 엄마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인은 아직도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우리 집의 왕자님>이라고 불렀듯이, 정인에게도 동생 정수는 왕자처럼 예뻤었다. 그렇게 손가락도 예쁘고 발가락도 예뻤던 아이의 몸이 어떻게 눈송이 같은 가루로 바뀔 수가 있었을까? 정인은 뛰어가면서 둑길에 쌓인 눈을 발로 한 번 차보았다. 서로 엉겨붙은 눈발들이 얼어붙은 땅 위로 흩날렸다. 아무리 정수의 몸이 작았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가벼울 수 있겠는가? 정수가 떠난 뒤, 정인의 몸 안에도 그처럼 큰 빈 공간이 남아 있는데 말이다. 정인은 자꾸만 떠오르는 정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직지천에서 고개를 돌려 시내 쪽을 바라보며 뛰었다.

정인이 비로소 농고 앞 스케이트장에 도착했을 때, 새벽같이 스케이트장을 찾아왔던 아이들은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인은 차가워지는 두 손으로 귓불을 비비며 차양이 둘러쳐진 스케이트장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고개를 삐죽이 내밀었다. 물방울처럼 오빠를 따라온 계집애들이 갸르르 웃는 소리가 스케이트장 위로 번지고 있었다. 정인은 한쪽에 각목과 비닐을 조립하여 만든 가건물 쪽으로 들어갔다. 그 가건물 안에서는 라면, 오뎅, 떡볶이 등의 분식을 팔거나 스케이트를 대여해주는 곳이 있었다.

「입장료 내놔!」

중공군처럼 볼까지 내려오는 털모자를 쓴 사내가 두툼한 장갑을 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정인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냥 구경왔어여.」

「그냥 볼라 캐도 입장료는 내는 기라.」

「그라만 나가서 보께여.」

「나가만 안 보이여. 여서 봐야 한끼네 돈 내놔라.」

「안 보이도 볼 끼라요.」

「어째 아가 이키 맹랑하나? 안 보이는데 뭔 수로 볼 끼가?」

「야는 입장료가 없어서 그칸다.」

「진짜가?」

재성이 물었다.

「그냥 보는 데도 입장료 내라카잖아.」

재성은 정인과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재성은 조금 망설이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야 입장료는 내가 내께요. 들라보내요.」

정인이 고개를 들어 재성을 쳐다보았다.

「아야! 아무도 없나? 여 봐라.」

텅 빈 동굴 같은 방에 자신의 목소리만 되울려퍼졌다. 주인집 마루에서 욕쟁이 할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조그맣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베이지색 내복 차림의 정인 아버지는 상반신만 이불 밖으로 꺼내고는 머리맡의 자리끼를 들이켰다. 어젯밤 김 주사 때문에 과음하기는 했지만, 보통 때와 달리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팠던 것이다. 자리끼를 들이켠 그는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무도 없나? 여 봐라. 정인아.」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담뱃불을 붙이고 창호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차갑지만 신선한 바람이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내뿜으며 담배를 피웠다. 아내도, 정인도 근처에 없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부엌 창을 가린 비닐이 바람에 부딪혀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리한 떨림이 소리로 바뀌어 지근지근 아픈 그의 청기관을 울렸다.

「이 아아들이 다 어디 갔나, 참말로.」

그는 귓가로 들어오는 비닐 소리를 지우려는 듯, 큰 소리로 혼자말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침묵을 지키고 담배만 빨고 있자니 그 비닐 소리가 귓바퀴로 흘러 들어왔다. 그 비닐 소리가 그의 내면 어딘가를 자꾸만 건드리는지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정수를 시내에 떠내려보내던 날, 차가운 겨울 바람 때문에 등에 맨 광목천이 자꾸만 펄럭이던 때가 생각났다. 오직 혼자서 차가운 시내에 발을 담그고 들어가 뼛가루를 뿌렸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가 말려서 다른 사람은 누구도 따라오지 않았던 터였지만, 무서움이 몸을 감쌌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었다.

그는 비닐 소리를 그대로 참고 있을 수가 없어 정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비닐을 죄다 뜯어버렸다. 압정들이 후드득거리면서 마당으로 떨어졌다. 정인 아버지가 비닐을 뜯어내는 소리가 들리자 지물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욕쟁이 할아버지가 마루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거, 뭔 짓 하나?」

「내 일인께네 상관 말아여.」

「그게 어째 니 일이라? 우리 집 뜯어내는데.」

「아따, 그 말 많네, 참말로.」

「저노무 자슥이 비싼 뇌선 처먹고 미쳐뿌릿나.」

그 말에 그가 뜯어놓은 비닐을 손에 잡고 욕쟁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 캤습니까?」

「뇌신이 아니라, 뇌선 처먹고 미쳤다 캤다. 국가 공무원이면 타인에게 모범을 보여야지, 어째 된 게 허구한 날 술이고? 그게 미친 것 아이고 뭐가?」

그러자 그가 소리를 빽 질렀다.

「내가 뇌선 처먹고 황달에 걸리든,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할배가 뭔 상관입니까? 국가 공무원은 술도 못 처먹습니까?」

「아따, 그노무 미친 지랄은 아래위도 없구만.」

욕쟁이 할아버지는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문을 소리나게 닫아버렸다. 하지만 정인 아버지는 옳다구나 싶었다.

<이 씨팔놈의 여편네가 지 남편을 빙신으로 안다 이 말이지. 뇌신 사오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또 값싸다고 뇌선 사왔다 이거지. 어디 두고 보자. 이 빙신 같은 년, 다리몽둥이를 뿌려뜨릴 기라.>

그는 비닐뭉텅이를 마당 한쪽에 휙 팽개치면서 침을 뱉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정인은 스케이트장에 앉아 어서 재순이 스케이트를 자기에게 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인은 아버지 아침을 차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 즈음부터 얼음판의 가장자리가 녹기 시작해 아이들이 스케이트장에서 하나둘 빠져나오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얼음이 녹아버리면 입장료만 날리고 돌아갈 판이었다. 그건 모아둔 돈으로 정인의 입장료를 내준 재성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그래서 재성은 타기 싫으면서도 정인에게 스케이트를 빌려주는 것이 싫어서 계속 얼음판 위에서 미적거리고 있는 재순에게 빨리 스케이트를 빌려주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순은 쉽게 스케이트를 벗어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인은 논둑에 쪼그리고 앉아서 얼음판 밑으로 보이는 추수하고 남은 벼뿌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얼음판 밑으로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정인에게는 만년설 왕국이 떠올랐다. 정인은 쪼그리고 앉아 있던 발을 펴서 일어섰다. 예의 그 어지럼증이 정인을 감쌌다. 저는 사실 좀 모자란 사람이에요. 만년설 왕국의 집사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모자란단 말입니까? 피예요. 이모가 그랬거든요, 저는 피가 모자라다구요. 그래서 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갈 자신이 없어요. 집사는 다시 한 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만지작거린다. 하지만 당신은 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까? 집사는 저 아래 멀리 얼음판 밑으로 보이는 왕자의 언 얼굴을 정인에게 보여준다. 호기심에 가득 찬 정인이 고개를 내민다. 얼음판 밑으로는 얼어붙어 있는 정수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정인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재성이 재순의 스케이트를 들고 서 있었다. 재순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논두렁에 앉아 있었다. 정인으로서는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스케이트를 타고 싶은 욕망이 더 강했다. 정인은 재성이 이끄는 대로 발을 스케이트에 밀어넣었다. 재순의 스케이트는 피겨용이어서 빨간색이 앙증맞을 정도로 작게 보였는데 공간이 좀 남았다. 재성은 쪼그리고 앉아 정인의 스케이트 끈을 묶어주었다.

나중에 지친 재성이 임시로 만들어진 분식점에 들어가 있을 때까지 정인은 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다. 처음에는 스케이트를 빼앗겨 울먹거리던 재순도 곧 한쪽에 피워놓은 불길 옆에서 다른 애들과 노는 일이 재미있어 정인의 존재를 잊어먹고 있었고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 치고 박는 장난을 하며 놀던 재성도 정인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심지어는 정인 자신마저도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아버지 생각도, 엄마 생각도 다 잊어버리고 정인은 그저 이쪽에서 저쪽으로 엉거주춤 스케이트만 타고 있었다. 그 많던 아이들이 조금씩 스케이트장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정인은 멍하니 스케이트만 타고 있었다. 한껏 따뜻해진 겨울 햇살이 녹기 쉬운 가장자리부터 얼음을 녹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풀린 물이 조금씩 얼음 위로 밀려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재성이 소리쳐 정인을 부를 때까지, 정인은 환상 속에 빠져 있었다. 빈혈 때문에 늘 빠지게 되는 그 환상이었다. 정말입니까? 가다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만년설 왕국의 집사가 다시 한 번 확인이라도 받듯이 되물었다.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죽고 정수가 살아난다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불쌍한 정수. 정수만 돌아온다면, 아버지도 술을 드시지 않을 것이고 엄마도 울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정수를 데리고 돌아와 정수는 죽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면 부모님들은 모두 놀라실 것이다. 제가 갈게요. 정인이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집사는 피가 모자라는 정인이 짐짓 걱정되지만, 정인의 용기에 탄복하여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연다. 새하얀 심연 밑으로 끝없이 놓여진 계단이 보였다. 정인은 그 한 발을 내민다.

「내 손을 잡아.」

재성의 심각한 말을 듣고 나서야 정인은 자신이 얼음판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어느 틈에 가장자리가 모두 녹아버려 껑충 뛰지 않는 한, 논두렁으로 나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꼼짝없이 정인은 얼음판에 갇혀버린 셈이 되었다. 철길이 평화동과 80번지를 나눠놓은 것처럼, 죽음이 정인네와 정수를 나눠놓은 것처럼, 녹아버린 물은 얼음판과 논두렁을 나눠놓았다. 그 바람에 정인이 꾸던 모든 환상도 깨져버렸다. 정인은 정신을 차리고 다가갈 때마다 자신의 몸무게 때문에 얼음판으로 밀려 들어오는 얼음물을 바라보았다. 얼음이 섞인 물은 마치 젤리처럼 액체 반, 고체 반의 상태가 되었지만, 정인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재성이 아직 얼음이 남아 있는 다른 곳을 찾아보았지만, 녹지 않은 곳은 없었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그 광경을 구경할 때에야 정인은 무서움이 부쩍 늘었다.

재성이 그 중에서 얼음과 논두렁의 폭이 좀 좁은 곳을 찾아 손을 뻗쳤다. 하지만 도무지 건너갈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정인은 쉽사리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재성의 다그치는 소리에 그 손을 잡으려고 작은 손을 내뻗다가 정인은 그만 얼음물에 빠져버렸다. 워낙 논이었던 곳이라 깊을 리 없었지만, 차가움이 뼛속 깊이 밀려들었다. 자기 혼자만 빠진 것이다. 정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얼음물을 헤쳐 앞으로 나아갔다. 정인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누구도 얼어죽지 않고 성의 그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사람은 없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다만 너무 춥기 때문이다. 정인은 비로소 만년설 왕국의 달디단 환상에서 벗어나 몸의 차가움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된 것이다.

불에 몇 번 젖은 옷을 말리기는 했지만, 채 마르지 않았는 데다가 황악산에서 내리치는 북풍을 맞아 정인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고 있었다. 재성 남매와 정인, 이 세 명은 직지천의 둑길을 따라 걸어갔다. 재성 남매는 뭐가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송이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정인의 눈앞으로 까치 한 마리 물가에 심어둔 버드나무 가지를 박차고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응달의 가지 위에 쌓였던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찰나, 정인은 냅다 집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인이 발을 굴릴 때마다 진흙탕이 된 길이 한 뼘씩 뒤로 밀려났다. 바람은 이제 북풍이 아니라 남풍이 되어 불어왔다. 정인은 아버지와 엄마에게 꾸중들을 일이 걱정되었다.

 

 

 소설읽기 NO 43

 

 

구리 료혜이 우동 한 그릇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우동집으로서는 일년 중 가장 바쁠 때이다.

북해정도 이날만은 아침부터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보통 대는 밤 12시쯤이 되어도 거리가 번잡한데 이날만큼은 밤이 깊어질수록 집으로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10시가 넘자 북해정의 손님도 뜸해졌다.

사람은 좋지만 무뚝뚝한 주인보다 오히려 단골 손님으로부터 주인 아줌마라고 불리우고 있는 그의 아내는 분주했던 하루의 답례로 임시 종업원에게 특별 상여금 주머니와 선물로 국수를 들려서 막 돌려보낸 참이었다.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막 나갔을 때, 슬슬 문 앞의 옥호(屋號) 막을 거둘까 하고 있던 참에, 출입문이 드르륵, 하고 힘없이 열리더니 두명의 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6세와 10세 정도의 사내애들은 새로 준비한 듯한 트레이닝 차림이고, 여자는 계절이 지난 체크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

라고 맞이하는 여주인에게, 그 여자는 머뭇머뭇 말했다.

"저...... 우동...... 일인분만 주문해도 괜찮을까요?"

뒤에서는 두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네...... 네. 자, 이쪽으로."

난로 곁의 2 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여주인은 주방 안을 향해,

"우동, 1 인분 !"

하고 소리친다.

주문을 받은 주인은 잠깐 일행 세 사람에게 눈길을 보내면서,

"예 !"

하고 대답하고, 삶지 않은 1 인분의 우동 한 덩어리와 거기에 반 덩어리를 더 넣어 삶는다. 둥근 우동 한 덩어리가 일 인분의 양이다. 손님과 아내에게 눈치 채이지 않은 주인의 서비스로 수북한 분량의 우동이 삶아진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우동 그릇이 테이블에 나왔다. 우동 그릇을 가운데 두고, 이마를 맞대고 먹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카운터 있는 곳까지 희미하게 들린다.

"맛있네요."

라는 형의 목소리.

"엄마도 잡수세요."

하며 한 가닥의 국수를 집어 어머니의 입으로 가져가는 동생.

이윽고 다 먹자 150 엔의 값을 지불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라고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세 모자에게,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

라고 주인 내외는 목청을 돋워 인사했다.

 

신년을 맞이했던 북해정은 변함없이 바쁜 나날 속에 서 한해를 보내고, 다시 12 월 31 일을 맞이했다.

지난해 이상으로 몹시 바쁜 하루를 끝내고, 10 시를 막 넘긴 참이어서 가게를 닫으려고 할 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의 남자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주인은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체크 무늬의 반코트를 보고, 일년 전 섣달 그믐날의 마지막 그 손님들임을 알아보았다.

"저..... 우동.....일 인분입니다만.....괜찮을까요 ?"

"물론입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여주인은 작년과 같은 2 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우동 일 인분 !"

하고 커다랗게 소리친다.

"네엣 ! 우동 일 인분 !"

라고 주인은 대답하면서 막 꺼버린 화덕에 불을 붙인다.

"저 여보, 서비스로 3 인분 내줍시다."

조용히 귀엣말을 하는 여주인에게,

"안돼요. 그런 일을 하면 도리어 거북하게 여길 거요."

라고 말하면서 남편은 둥근 우동 하나 반을 삶는다.

"여보,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은 구석이 있구료."

미소를 머금는 아내에 대해, 변함없이 입을 다물고 삶아진 우동을 그릇에 담는 주인이다.

테이블 위의 한 그릇의 우동을 둘러싼 세 모자의 얘기 소리가 카운터 안과 바깥의 두 사람에게 들려온다.

"음...... 맛있어요........ "

"올해도 북해정의 우동을 먹게 되네요 ?"

"내년에도 먹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

다 먹고 나서, 150 엔을 지불하고 나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에 주인 내외는.

"고맙습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그날 수 십번 되풀이했던 인사말로 전송한다.

 

그 다음해의 섣달 그믐날 밤은 여느 해보다 더욱 장사가 번성하는 중에 맞게 되었다. 북해정의 주인과 여주인은 누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9시 반이 지날 무렵부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10 시를 넘긴 참이어서 종업원을 귀가시킨 주인은, 벽에 붙어 있는 메뉴 표를 차례차례 뒤집었다. 금년 여름에 값을 올려 '우동 200 엔'이라고 씌어져 있던 메뉴 표가 150엔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2 번 테이블 위에는 이미 30분전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이 놓여져 있다.

10 시 반이 되어, 가게안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기나 한 것처럼, 모자 세 사람이 들어왔다. 형은 중학생 교복, 동생은 작년에 형이 입고 있던 점퍼를 헐렁하게 입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엄마는 여전히 색이 바랜 체크 무늬 반코트 차림 그대로였다.

"어서 오세요 !"

라고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여주인에게, 엄마는 조심조심 말한다.

"저.... 우동.... 이 인분인데도... 괜찮겠죠 ?"

"네.... 어서요. 자 이쪽으로."

라며 2 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여주인은 거기 있던 <예약석>이란 팻말을 슬그머니 감추고 카운터를 향해서 소리친다.

"우동 이 인분 !"

그걸 받아,

"우동 이 인분 !"

이라고 답한 주인은 둥근 우동 세 덩어리를 뜨거운 국물 속에 집어넣었다.

두 그릇의 우동을 함께 먹는 세 모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리고, 이야기도 활기가 있음이 느껴졌다.

카운터 안에서, 무심코 눈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짓는 여주인과, 예의 무뚝뚝한 채로 응 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주인이다.

"형아야, 그리고 쥰아..... 오늘은 너희 둘에게 엄마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구나."

"고맙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실은, 돌아가신 아빠가 일으켰던 사고로,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상을 입었잖니. 보험으로도 지불할 수 없었던 만큼을, 매월 5만엔씩 계속 지급하고 있었단다."

"음.... 알고 있어요."

라고 형이 대답한다.

여주인과 주인은 몸도 꼼짝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

"지불 약속은 내년 3 월까지로 되어 있었지만, 실은 오늘 전부 지불을 끝낼 수 있었단다."

"넷 ! 정말이에요 ? 엄마 !"

"그래, 정말이지. 형아는 신문 배달을 열심히 해주었고, 쥰이 장보기와 저녁 준비를 매일 해준 덕분에, 엄마는 안심하고 일할 수 있었던 거란다. 그래서 정말 열심 히 일을 한 덕택에 화사로부터 특별 수당을 받았단다. 그것으로 지불을 모두 끝마칠 수 있었던 거야."

"엄마 ! 형 ! 잘됐어요 ! 하지만, 앞으로도 저녁 식사 준비는 내가 할 거예요."

"나도 신문 배달, 계속할래요. 쥰이하고 나, 엄마한테 숨기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요...... 11월 첫쩨 일요일, 학교로부터 쥰이의 수업 참관을 하라는 편지가 왔었어요. 그때 쥰은 이미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아 놓고 있었지만요. 쥰이 쓴 작문이 북해도의 대표로 뽑혀, 전국 콩쿠르에 출품하게 되어서 수업 참관일 에 이 작문을 쥰이 낭독하게 되었대요. 선생님이 주신 편지를 엄마에게 보여드리면...... 리를 해서라도 회사를 쉬실 걸 알기 때문에 쥰이 그걸 감췄어요. 그걸 쥰의 친구들한테 듣고..... 내가 참관일에 갔었어요."

"그래... 그랬었구나... 그래서 ?"

"선생님께서, 너는 장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라는 제목으로, 전원에게 작문을 쓰게 하셨는데, 쥰은 <우동 한그릇>이라는 제목으로 써서 냈대요. 지금부터 그 작문을 읽어 드릴께요.

<우동 한그릇>이라는 제목만 듣고, 북해정에서의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사실은 쥰 녀석 무슨 그런 부끄러운 얘기를 썼지 !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죠.

작문은..... 아빠가 교통 사고로 돌아가셔서 많은 빚을 남겼다는 것, 엄마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 내가 조간 석간 신문을 배달하고 있다는 것 등 .... 전부 씌어 있었어요.

그리고서 12월 31일 밤 셋이서 먹은 한 그릇의 우동이 그렇게 맛있었다는 것..... 셋이서 다만 한 그릇밖에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동집 아저씨와 아줌마는, 고맙습니다 !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 라고 큰 소리로 말해 주신 일.

그 목소리는 .... 지지 말아라 ! 힘내 ! 살아갈 수 있어 !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요.

그래서 쥰은, 어른이 되면, 손님에게 '힘내라 !' '행복해라 !' 라는 속마음을 감추고, '고맙습니다 !' 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의 우동집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었어요."

카운터 안쪽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을 주인과 여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카운터 깊숙이에 웅크린 두 사람은, 한장의 수건 끝을 서로 잡아당길 듯이 붙잡고,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작문 읽기를 끝마쳤을 때 선생님이, 쥰의 형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와주었으니까, 여기에서 인사를 해달라고 해서....."

"그래서 형아는 어떻게 했지?"

"갑자기 요청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말이 안 나왔지만.... 여러분, 항상 쥰과 사이좋게 지내줘서 고맙습니다... 동생은 매일 저녁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동생이 <우동 한 그릇>이라고 읽기 시작했을 때 .... 나는 처음엔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슴을 펴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고 있는 동생을 보고있는 사이에, 한 그릇의 우동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더 부끄러운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때..... 한 그릇의 우동을 시켜주신 어머니의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형제가 힘을 합쳐,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쥰과 사이 좋게 지내 주세요, 라고 말했어요."

차분하게 서로 손을 잡기도 하고, 웃다가 넘어질듯 이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 작년까지와는 달라진 즐거운 그믐날 밤의 광경이었다.

우동을 다 먹고 300 엔을 내며 '잘 먹었습니다.'라고 깊이깊이 머리를 숙이며 나가는 세 사람을, 주인과 여 주인은 일년을 마무리하는 커다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라며 전송했다.

다시 일년이 지났다.

북해정에서는, 밤 9 시가 지나서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을 2 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그 세 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2 번 테이블을 비우고 기다렸지만, 세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북해정은 장사가 번성하여, 가게 내부 수리를 하게되자, 테이블이랑 의자도 새로 바꾸었지만 그 2 번 테이블만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새 테이블이 나란히 있는 가운데에서, 단 하나 낡은 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것이 여기에 ?' 하고 의아스러워 하는 손님에게, 주인과 여주인은 <우동 한 그릇>의 일을 이야기하고, 이 테이블을 보고서 자신들의 자극제로 하고 있다, 어느 날인가 그 세 사람의 손님이 와줄지도 모른다. 그 때 이 테이블로 맞이하고 싶다, 라고 설명하곤 했다.

그 이야기는, '행복의 테이블'로써, 이 손님에게서 저 손님에게로 전해졌다. 일부러 멀리에서 찾아와 우동을 먹고 가는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테이블이 빌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문을 하는 젊은 커플도 있어 상당한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고 나서 또, 수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해 섣달 그믐의 일이다.

북해정에는, 같은 거리의 상점회 회원이며 가족처럼 사귀고 있는 이웃들이 각자의 가게를 닫고 모여들고 있었다.

북해정에서 섣달 그믐의 풍습인 해 넘기기 우동을 먹은 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동료들과 그 가족이 모여 가까운 신사(神社)에 그해의 첫 참배를 가는 것이 5, 6년 전부터의 관례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도 9 시 반이 지나 생선가게 부부가 생선회를 가득 담은 큰 접시를 양손에 들고 들어온 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평상시의 동료 30 여명이 술이랑 안주를 손에 들고 차례차례 모여들어 가게 안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2 번 테이블의 유래를 그들도 알고 있다. 입으로 말은 안 해도 아마, 금년에도 빈 채로 신년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섣달 그믐날 10 시 예약석'은 비워둔 채 비좁은 자리에 전원이 조금씩 몸을 좁혀 앉아 늦게 오는 동료를 맞이했다.

우동을 먹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서로 가져 온 요리에 손을 뻗히는 사람, 카운터 안에 들어가 돕고 있는 사람, 멋대로 냉장고를 열고 뭔가 꺼내고 있는 사람 등등으로 떠들썩했다.

바겐세일 이야기, 해수욕장에서의 에피소드, 손자가 태어난 이야기 등, 번잡함이 절정에 달한 10 시 반이 지났을 때, 입구의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몇 사람인가의 시선이 입구로 향하며 동시에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오버코트를 손에 든 정장 슈트 차림의 두 청년이 들어왔다. 다시 얘기가 이어지고 시끄러워졌다. 여주인이 죄송하다는 듯한 얼굴로 '공교롭게 만원이어서'라며 거절하려고 했을 때 화복(일본옷) 차림의 부인이 깊이 머리를 숙이며 들어와서, 두 청년 사이에 섰다.

가게 안에 있는 모두가 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인다. 화복을 입은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저.... 우동.... 3 인분입니다만...... 괜찮겠죠 ?"

그 말을 들은 여주인의 얼굴이 변했다. 십수 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밀어젖히고, 그 날의 젊은 엄마와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눈앞의 세 사람과 겹쳐진다.

카운터 안에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주인과, 방금 들어온 세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저.... 저.... 여보 !"

하고 당황해 하고 있는 여주인에게 청년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14 년 전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셋이서 일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삶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후, 우리는 외가가 있는 시가현으로 이사했읍니다. 저는 금년,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하여 교오또(京都)의 대학병원에서 소아과의 병아리 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내년 4월부터 삿뽀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에 인사도 하고 아버님 묘에도 들를 겸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우동집 주인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교오또의 은행에 다니는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인생 가운데에서 최고의 사치스러운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님과 셋이서 삿뽀로의 북해정을 찾아와 3 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여주인과 주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넘쳐흘렀다.

입구에서 가까운 테이블에 진을 치고 있던 야채 가게 주인이, 우동을 입에 머금은 채 있다가 그대로 꿀꺽하고 삼키며 일어나,

"여봐요 여주인 아줌마 ! 뭐하고 있어요 ! 십년간 이 날을 위해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기다린, 섣달 그믐날 10 시 예약석이잖아요, 어서 안내해요. 안내를 !"

야채 가게 주인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여주인은,

"잘 오셨어요.... 자 어서요..... 여보 ! 2 번 테이블 우동 3 인분 !"

예기치 않은 환성과 박수가 터지는 가게 밖에서는 조금 전까지 흩날리던 눈발도 그치고, 갓 내린 눈에 반사되어 창문의 빛에 비친 <북해정>이라고 쓰인 옥호막이 한발 앞서 불어제치는 정월의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소설읽기 NO 4

 

 

권정생 강아지똥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    흰둥이는 아직 어린 강아지였기 때문에 강아지똥이 되겠습니다.    골목길 담 밑 구석자리였습니다. 바로 앞으로 소달구지 바퀴 자국이 나 있습니다.    추운 겨울, 서리가 하얗게 내린 아침이어서 모락모락 오르던 김이 금방 식어 버렸습니다. 강아지똥은 오들오들 추워집니다. 참새 한 마리가 포로롱 날아와 강아지똥 곁에 앉더니 콕! 쪼아 보고, 퉤퉤 침을 뱉고는,   "똥 똥 똥……. 에그 더러워!"   쫑알거리며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강아지똥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똥이라니? 그리고 더럽다니?"   무척 속상합니다. 참새가 날아간 쪽을 보고 눈을 힘껏 흘겨 줍니다. 밉고 밉고 또 밉습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이런 창피가 어디 있겠어요.    강아지똥이 그렇게 잔뜩 화가 나서 있는데, 소달구지 바퀴 자국 한가운데 뒹굴고 있던 흙덩이가 바라보고 빙긋 웃습니다.   "뭣땜에 웃니, 넌?"    강아지똥이 골난 목소리로 대듭니다.   "똥을 똥이라 않고, 그럼 뭐라고 부르니?" 흙덩이는 능글맞게 히죽 웃으며 되묻습니다.   강아지똥은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목 안에 가득 치미는 분통을 억지로 참습니다. 그러다가,   "똥이면 어떻니? 어떻니!"   발악이라도 하듯 소리지릅니다. 눈물이 글썽해집니다. 흙덩이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똥 중에서도 제일 더러운 개똥이야." 하고는 용용 죽겠지 하듯이 쳐다봅니다.    강아지똥은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립니다. 울면서 쫑알거렸습니다.   "그럼, 너는 뭐야? 울퉁불퉁하고, 시커멓고, 마치 도둑놈같이……."   이번에는 흙덩이가 말문이 막혔습니다.   멀뚱해진 채 강아지똥이 쫑알거리며 우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강아지똥은 실컷 울다가 골목길 담벽에 노랗게 햇빛이 비칠 때야 겨우 울음을 그쳤습니다. 코를 흘찌락 씻고는 뾰루퉁 딴 데를 보고 있었습니다. 보고 있던 흙덩이가 나직이,   "강아지똥아."  하고 부릅니다. 무척 부드럽고 정답습니다. 하지만 강아지똥은 못들은 체 대답을 않습니다. 대답은커녕 더욱 얄밉다 싶습니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 도둑놈만큼 나빴어."    흙덩이는 정색을 하고 용서를 빕니다.    강아지똥은 그래도 입을 꼭 다물고 눈도 깜짝 않습니다.   "내가 괜히 그래 봤지 뭐야. 정말은 나도 너처럼 못생기고, 더럽고, 버림받은 몸이란다. 오히려 마음 속은 너보다 더 흉측할지도 모를 거야."   흙덩이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제 신세 타령을 들려 주었습니다.    "내가 본래 살던 곳은 저쪽 산 밑 따뜻한 양지였어. 거기서 난 아기 감자를 기르기도 하고, 기장과 조도 가꿨어. 여름에는 자줏빛과 하얀 감자꽃을 곱게 피우며 정말 즐거웠어.  하느님께서 내게 시키신 일을 그렇게 부지런히 했단다."   강아지똥은 이야기에 끌려 어느 틈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던 것을 어제, 밭 임자가 소달구지를 끌고 와서 흙을 파 실었어. 집 짓는 데 쓴다지 않니. 나는 무척 기뻤어. 밭에서 곡식을 키우는 것도 좋지만, 집을 짓는 것도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니. 집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재워 주고 짐승들을 키우는 곳이거든. 그래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딴 애들과 함께 달구지에 실려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를 멈춘 흙덩이가 술픈 얼굴을 지었습니다.   강아지똥이 놀라 쳐다봤습니다.   "그래서 어쨌니?"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잔뜩 뿔었던 화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다가 나 혼자 달구지에서 떨어져 버렸단다."   "어머나!"    "난 이제 그만이야. 조금 있으면 달구지가 이리로 또 지나갈 거야. 그러면 바퀴에 콱 치이고 말지. 산산이 부서져서 가루가 된단다."   "산산이 부서져서 가루가 된다니? 그럼 그 다음엔 어떻게 되니?"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그걸로 끝이야."    둘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흙덩이가 다시,   "누구라도 죽는 일은 정말 슬퍼. 더욱이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들은 괴롬이 더 하단다." 하고는 또 한 번 한숨을 들이켭니다.    강아지똥이 쳐다보고,   "그럼, 너도 나쁜 짓을 했니? 그래서 괴로우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 나도 나쁜 짓을 했어. 그래서 정말 괴롭구나. 어느 여름이야, 햇볕이 쨍쨍 쬐고 비는 오지 않고 해서 목이 무척 탔어. 그런데 내가 가꾸던 아기 고추나무가 견디다 못해 말라 죽고 말았단다. 그게 나쁘지 않고 뭐야. 왜 불쌍한 아기 고추나무를 살려 주지 못했는지 지금도 가슴이 아프고 괴롭단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지 않니? 햇볕이 그토록 따갑게 쪼이고 비는 오지 않고 해서 말라 죽은 것 아냐?"   강아지똥은 흙덩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아기 고추나무는 내 몸뚱이에다 온통 뿌리를 박고 나만 의지하고 있었단다."   흙덩이는 어디까지나 제 잘못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길바닥에 버려지게 된 것을 그 죄 값이라 생각했습니다.   정말 아기 고추나무가 못 살게 제 몸뚱이의 물기를 빨아버리는 것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릅니다. 마음으로는 그만 죽어버려라 하고 못된 소리까지 했습니다. 그게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아 흙덩이는 괴로운 것입니다.    만약 지금 다시 밭으로 갈 수만 있다면 이제부터는 열심히 곡식을 가꾸리라 싶습니다. 그러나, 그건 헛된 꿈입니다. 언제 달구지 바퀴에 치여 죽어 버릴지 모르는 운명인 것입니다. 흙덩이의 눈에 핑 눈물이 젖어듭니다.    그때, 과연 저쪽에서 요란한 소달구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 나는 이제 그만이다.'

 

    흙덩이는 저도 모르게 흐느끼고 말았습니다.    "강아지똥아, 난 그만 죽는다. 부디 너는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나 같은 더러운 게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니?"    "아니야,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    소달구지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흙덩이는 눈을 꼭 감았습니다. 강아지똥은 그만 자기도  한 몫에 치여 죽고 싶어졌습니다.   으르릉 쾅!……   그런데 갑자기 굴러오던 소달구지가 뚝 멈추었습니다.    "이건 우리 밭 흙이 아냐? 어제 이리로 가다가 떨어뜨린 게로군."    소달구지를 몰고 오던 아저씨가 한 말입니다. 그리고는 흙덩이를 조심스레 주워 듭니다.   "우리 밭에 도루 갖다 놔야겠어. 아주 좋은 흙이거든."    흙덩이는 무어가 무언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달구지 한 켠에 얌전히 올라앉자, 방긋방긋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밭으로 도로 돌아가게 된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소달구지가 멀리 가 버린 다음, 아직도 그쪽으로 눈길을 준 채 빙그레 웃던 강아지똥이 혼자서 쓸쓸해졌습니다.   '그 애가 죽지 않고 도로 살던 곳에 가게 된 것이 참말 다행이야. 그럼 난 혼자서 이제부터 어떻게 하나?'   강아지똥은 고개를 갸우뚱 생각을 합니다.   "아니야,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    조금 전에 흙덩이가 일러 준 말을 되뇌어 봅니다.   '정말 나도 하느님께서 만드셨다면 무엇에 귀하게 쓰일까?'   해가 저물도록 웅크리고 앉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어디선가 검은 구름떼가 몰려와 하늘 가득히 덮었습니다.    이내 사뿐사뿐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솜이불처럼 강아지똥을 따뜻하게 덮어 줍니다.    눈 속에 묻혀, 강아지똥은 쌕쌕 잠이 들었습니다.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고, 긴긴 겨울을 지냈습니다.    따뜻한 햇빛이 깔리고 골목길에 눈이 녹았습니다. 봄노래가 어디에나 흥겹게 들렸습니다. 꽁꽁 얼었던 강아지똥도 몸뚱이가 축 늘어지고 노곤해 졌습니다. 껌벅껌벅 졸리는 눈을 억지로 뜨고 사방을 둘러봤습니다. 겨울에 보던 것보다 모두가 다릅니다.    예쁜 새가 날아갑니다. 꽃고무신을 신고 애들이 골목길을 뛰어갑니다.   "꼴꼴꼴……"   "삐악 삐악 삐악……"   힐끗 돌아보니 병아리떼를 데린 엄마 닭이 분주히 걸어옵니다.   '저건 걸어다니는 새들이구나.'   강아지똥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엄마 닭이 강아지똥 곁에까지 와서 기웃이 들여다 봅니다.   "왜 그렇게 보셔요? 걸어다니는 새님."   강아지똥은 조금 겁이 났기 때문에 무척 공손히 말했습니다.   "뭐라고? 나보고 걸어다니는 새님이라고! 기막혀라. 이래뵈도 난 여덟 마리의 아들과 다섯 마리의 딸을 데린 어엿한 병아리 어머니야."   엄마 닭은 조금 화가 난 듯, 그러나 점잖게 신분을 밝혔습니다.   강아지똥은 코가 빨갛게 되어,   "병아리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하셔요."  하고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옳지, 아이들은 역시 잘못했을 때는 곧장 용서를 받는 것이 좋아."    이렇게 엄마 닭은 지나치게 위엄을 보이고는 이어서,   "널 들여다 본 것은 행여나 우리 아기들의 점심 요기라도 될까 싶어서 본 거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아지똥은 어쩌면 소름이 쫙 끼칠 만큼 무서운 말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고   "점심으로 나를 먹어 주시겠다는 거죠? 좋아요, 모두 맛나게 먹어 주어요." 하고는 샛노란 열세 마리의 병아리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런 귀여운 아기들의 점심밥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면 기꺼이 제 몸을 내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엄마 닭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야, 너는 우리에게 아무 필요도 없어. 모두 찌꺼기뿐인 걸."    그러고는 병아리를 데리고 저쪽으로 가 버립니다.   "꼴꼴꼴……"   "삐악 삐악 삐악……"   강아지똥은 또 풀이 죽었습니다.   '나는 역시 아무데도 쓸 수 없는 찌꺼기인가 봐.'   저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다음에는 이어서 눈물이 나오고……   강아지똥은 그만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집니다. 하필이면 더럽고 쓸데없는 찌꺼기 똥까지 만들 필요는 없지 않아 해서입니다.   봄날의 하루 해가 무척 지루합니다.   느리게 그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나왔습니다. 반짝반짝 고운 불빛은 언제나 꺼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다음날이면 역시 드높은 하늘에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습니다.    강아지똥은 눈부시게 쳐다보다가 어느 틈에 그 별들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아름다운 불빛."    이것만 가질 수 있다면 더러운 똥이라도 조금도 슬프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강아지똥은 자꾸만 울었습니다. 울면서 가슴 한 곳에다 그리운 별의 씨앗을 하나 심었습니다.   

      비가 내렸습니다.   봄을 치장하는 단비가 촉촉이 골목길을 적셨습니다. 강아지똥 바로 앞에 파란 민들레  싹이 하나 내밀었습니다.   "너는 뭐니?"    강아지똥이 내려다보고 물었습니다.   "난 예쁜 꽃이 피는 민들레란다."   "예쁜 꽃이라니! 하늘에 별만큼 고우니?"    "그럼!"   "반짝반짝 빛이 나니?"    "응, 샛노랗게 빛나."    강아지똥은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어쩌면 며칠 전에 제 가슴 속에 심은 별의 씨앗이 싹터 나온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떻게 그런 꽃을 피울 수 있니?"   물어 놓고 얼른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비를 내리시고 따뜻한 햇빛을 비추시기 때문이야."    민들레는 예사로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역시 그럴 거야. 나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을라고…….'   금방 강아지똥의 얼굴이 또 슬프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러자 민들레 싹이,   "그리고 또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하고는 강아지똥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    "네가 거름이 되어 줘야 한단다."    강아지똥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너의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서 예쁜 꽃을 피게 하는  것은 바로 네가 하는 거야."    강아지똥은 가슴이 울렁거려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과연 나는 별이 될 수 있구나!'   그러고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그만 민들레 싹을 꼬옥 껴안아 버렸습니다.   "내가 거름이 되어 별처럼 고운 꽃이 피어난다면, 온 몸을 녹여 네 살이 될게."   비는 사흘 동안 계속 내렸습니다.   강아지똥은 온 몸이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습니다. 땅 속으로 모두 스며들어가 민들레의 뿌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줄기를 타고 올라와 꽃봉오리를 맺었습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샛노랗게 햇빛을 받고 별처럼 반짝이었습니다. 향긋한 내음이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습니다.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습니다.

 

 

 

 

 

 

 

 

 

 

 

 

 

 

 

 

 

 

 

 

 

소설읽기NO 5

 

 

에드가 앨런 포 검은 고양이

 

 

지금부터 내가 써 나가려는, 전혀 거짓이라고는 없는 이 기괴한 이야기를 나는 누군가가 믿어 주기를 바라지도, 또한 바라고 싶지도 않다. 사실 나 자신의 오감으로도 믿지 못하고 있는 일을 믿어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겐 미치광이의 잠꼬대로나 여겨질 것이다.

지금 나는 미친 것도,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일이면 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이 가기 전에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 아무튼 나는 지금부터 내 가정 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려 한다.

그 사건의 결과는 나를 공포에 빠뜨리고, 번민을 안겨다 주었으며 끝내는 나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하지는 않겠다. 내게는 오직 공포감만 주었을 뿐인 사건이었지만, 세상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터무니없는 괴담으로만 여겨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내 악몽조차도 흔히 있는 시시한 일로 넘겨 버리는 지성의 소유자가 나타날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나 같은 사람보다는 냉정하고 논리적이고 훨씬 침착한 그 지성의 소유자는 내가 지금 두려움에 떨며 얽혀 있는 이 사건 속에서도 아주 당연하게 여겨지는 하나의 연속된 인과 관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온순하고 동정심 많은 아이로 알려져 있었다. 마음이 너무도 여려서 친구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특히 동물을 좋아했던 내게 부모님은 여러 애완동물을 내가 바라는 대로 사 주셨다. 나는 날마다 그 동물들과 함께 지냈고, 그들에게 먹이를 주고 쓰다듬어 줄 때 가장 큰 즐거움을 느꼈다.

이 독특한 성격은 나이를 먹어가며 한층 더해져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오로지 동물을 사랑하는 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이 되었다. 충실하고 영리한 개에게 애정을 품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하여 얻어지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들의 천박한 우정과 경박한 신의를 여러 번 겪어 본 사람이라면 동물의 이기심 없는 헌신적인 애정 속에서 가슴 뭉클한 무언가를 느낄 것이다.

나는 일찍 아내를 맞았는데, 다행히 그녀의 성품도 나와 비슷했다. 내가 동물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아내는 여러 귀여운 애완동물을 구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 집에는 작은 새, 금붕어, 영리한 개, 토끼, 조그만 원숭이, 그리고 한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중 고양이는 몸집이 무척 큰 멋진 녀석으로 온몸이 새까맣고 놀랄 만큼 영리했다. 이 고양이의 영리함이 화제에 오를 때면 적잖이 미신을 믿는 아내는 검은 고양이는 모두 마녀의 화신이라고 예부터 전해 오는 말을 곧잘 입에 올리곤 했다. 그러나 아내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며―나 또한 지금 그 말이 우연히 떠올라서 쓰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플루토(지옥의 왕)―이것이 고양이 이름이었다―는 내가 귀여워하는 놀이동무였다. 늘 내가 먹이를 주었으며, 집안 어디에든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외출할 때도 쫓아나오려고 해서 그것을 막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우정은 여러 해 동안 이어졌는데, 그 동안 내 기질과 성격은 폭음 때문에―털어놓기 부끄러운 일이지만―전날의 자취는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나날이 변덕이 심해져 화를 잘내고 다른 사람의 기분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게 되었다. 아내에게도 욕설을 퍼붓고 마침내는 폭력을 휘두르기에 이르렀다.

물론 귀여워하는 동물들도 내 성품의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동물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플루토에게만은 아직 그 손길을 뻗치지 않고 있었다. 토끼, 원숭이, 개들이 우연히 또는 반가워하며 내 곁에 다가오면 사정없이 그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러나 내 병은―아, 음주보다 더한 병벽이 또 어디 있으랴!―점점 악화되어 마침내 플루토까지, 이제는 늙어서 얼마쯤 까다로워진 플루토까지 나의 병벽을 빠짐없이 맛보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늘 다니던 선술집에서 만취가 되어 집에 돌아온 나는 플루토가 나를 피하는 기색을 느꼈다. 나는 고양이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 놈은 나의 난폭한 태도에 놀란 듯 내 손목에 달려들어 가벼운 상처를 내고 말았다. 순간 나는 악귀와도 같은 분노의 포로가 되어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나의 순수한 영혼은 단숨에 내 몸으로부터 사라지고 술에 절어 구겨진 사악한 증오가 온몸에 떨게 했다. 나는 조끼 주머니에서 조그만 칼을 꺼내 고양이의 목을 움켜잡고 한쪽 눈을 태연히 도려냈다. 이 무섭고 잔인한 행위를 써내려 가노라니 얼굴이 붉어지고 화끈대며 몸이 떨려온다.

그 다음날 아침 어느 정도 취기가 진정되어 이성을 되찾은 나는 내가 저지른 죄에 대해 공포와 회한이 뒤섞인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미약하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내 마음의 뿌리를 뒤흔들 만한 것은 못되었다. 나는 여전히 폭음으로 세월을 보내며 그 행동에 대한 모든 기억을 완전히 술 속에 파묻어 버렸다.

한편 고양이는 조금씩 상처가 나아갔다. 도려내어진 눈의 뻥 뚫린 구멍은 분명 무서운 형상이었지만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된 듯했다. 전과 다름없이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내가 가까이 가면 몹시 두려워하며 달아나 숨었다. 고양이의 달라진 태도가 처음에는 조금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감정도 곧 분노로 바뀌어, 마침내 끝내 구원받을 수 없는 파멸의 구렁텅이에까지 나를 몰아넣으려는 듯 짓궂은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이러한 인간의 근성에 대해서 철학은 아직까지 아무 설명도 없다. 그러나 이런 근성이야말로 인간 마음에 내재해 있는 원초적 충동의 하나이며, 인간 성격을 형성하는 근원적 기능 또는 감정의 하나이다. 나는 그것을 내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듯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때문에 오히려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어리석은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뛰어난 분별력을 지니고도 법률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기고 싶은 욕구가 늘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이 짓궂은 감정이 나를 파멸로 끌어들였다. 죄도 없는 동물을 계속 학대해서 결국은 파멸로까지 이르게 한 것은, 자신을 나무라며 자신의 본성을 학대하고 악업 때문에 악업을 낳는 이 헤아리기 어려운 영혼의 욕구였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태연히 고양이의 목에 밧줄을 걸어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볼에 눈물이 흐르고, 비통한 회한에 가슴아파하며 나는 고양이의 목을 매단 것이다.

내가 가슴 아파한 것은 그 고양이가 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나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으며, 결국 내 불멸의 영혼을―만일 그런 게 있다면―신의 무한한 자비심으로도 구해 낼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 속에 빠뜨리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참혹한 짓을 한 날 밤, 잠들어 있던 나는 '불이야!'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침대와 커튼이 불길에 휩싸이고 집안은 온통 불바다였다. 아내와 하녀와 나는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집은 몽땅 타 버렸다. 내 재산은 모조리 재가 되었으며 그 뒤로 나는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나는 이 재해와 나의 잔인한 행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일련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이 마당에 어느 한 가지 일이라도 소홀히 남기고 싶지는 않다.

다음날, 나는 불탄 자리로 가 보았다. 담은 한쪽만 남은 채 모두 허물어져 있었다. 그런데 내 침대 머리판이 놓여 있던 칸막이 벽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얼마 전에 석회를 발라 새로 칠한 것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벽 언저리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벽의 어느 한 부분을 아주 세밀하게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한데!"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이런 소리에 이끌려 벽 가까이 가 보니 흰벽에 얕게 새긴 듯한 거대한 고양이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울 만큼 정확했으며, 고양이 목에는 밧줄이 감겨져 있었다.

이 요괴―라고밖에 여길 수 없었다―를 흘끗 본 나의 놀라움과 공포는 끔찍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았다. 그 고양이를 목매단 곳은 뜰이었음이 생각난 것이다. '불이야!' 하는 소리에 사람들이 순식간에 뜰로 잔뜩 모여들었다는데―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잠든 나를 깨울 작정으로 고양이 시체를 열린 창문으로 내 방 안에 던져넣은 게 틀림없다. 그런데 다른 쪽 벽들이 무너지는 바람에 고양이 시체는 새로 바른 벽으로 밀어붙여져 벽의 석회가 화염과 시체에서 뿜어져 나온 암모니아의 작용에 의해 이 같은 화상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양심이야 어떻든 나의 이성에는 납득할 만한 설명이 되었으나, 아무튼 그 사실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여러 날 동안 나는 고양이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내 마음에는―회한과는 달랐지만―회한 비슷한 모호한 기분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고양이를 잃어버린 것이 섭섭하게 여겨져, 뻔질나게 드나들던 사구려 술집 같은 데를 기웃거리며 대신 기를 만한 털빛이 비슷한 고양이는 없나 하고 찾아보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술집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술이 취하여 멍하게 앉아 있던 나는 문득 그 방 안의 유일한 가구라고 할 만한 진이며 럼 술통 위에 무언가 검은 게 웅크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술통 위라면 아까부터 줄곧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검은 그것을 깨달은게 참으로 이상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대어 보았다. 검은 고양이였다. 바로 플루토와 비슷한 몸집을 한 녀석으로 한 군데만 빼놓고는 플루토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플루토는 온몸이 새까맸으나 이 고양이는 가슴 언저리 부분 전체가 윤곽이 흐릿한 커다란 흰 얼룩점으로 덮여 있었다.

내가 손을 대자 고양이는 얼른 일어나 목을 쭉 빼고 내 손에 몸을 비비면서 아양을 떨었다.

이 녀석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고양이였다. 나는 곧 가게 주인에게 그 고양이를 내게 달라고 말해 보았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자기 것이 아니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전혀 본 적도 없는 고양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잠시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다가 이윽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그러자 고양이도 함께 따라가고 싶은 눈치를 보였다. 나는 따라오도록 내버려두었다. 걸어가며 나는 이따금 허리를 굽혀 가볍게 고양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집에 오자 고양이는 곧 길들여졌고 아내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고양이에 대한 혐오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싹터오는 것을 느꼈다. 고양이가 분명 나를 따른다고 여기자 그것만으로도 성가시고 마음이 초조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혐오와 곤혹스러움이 점점 더해 가 마침내는 극도의 증오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고양이를 피했다. 일종의 치욕감과 전에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기억 때문인지 고양이를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여러 주일 동안은 때리거나 거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서히―아주 서서히 나는 고양이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증오를 느끼게 되었고 마치 전염병 환자의 숨결을 피하듯 그 불길한 모습을 슬슬 피하게 되었다.

게다가 집으로 데려온 다음날 아침 그 고양이도 플루토처럼 한 눈이 멀어 있음을 알게 된 것도 내 증오를 부추겼다. 그러나 한 눈이 없다는 것 때문에 아내는 한층 더 측은히 여기는 것 같았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이전에는 나의 뛰어난 성품이었으며 온갖 단순 소박한 기쁨의 근원이었던 이러한 인정스러움을 아내는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미워하면 할수록 고양이는 나를 더욱 사랑하는 것 같았다. 어떤 집요함을 가지고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는데, 내가 어디에 가든지 으레 쫓아와 의자 아래 웅크리고 앉거나 무릎 위로 뛰어올라 핥거나 또는 그 불길한 몸을 비벼대는 것이었다. 또, 일어나 걸어가려고 하면 두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와 하마터면 곤두박질할 뻔하게 하고, 길고 뾰족한 발톱으로 옷에 매달려 가슴언저리까지 기어오르곤 했다.

그럴 때면 단번에 내리쳐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무한한 인내력을 발휘하여 참곤 했다.―전에 저지른 흉포한 행위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것도 한 까닭이었으나, 실은 그보다도―뚜렷이 말해 두지만―고양이가 무서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공포감은 꼭 육체적 위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달리 부를 수도 없다. 고백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지만―그렇다, 이 중죄수 감방에 있는 지금도 여전히 고백하기 부끄러운 기분이지만―그 고양이가 나에게 안겨 준 공포와 전율은 실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망상에 의해 부채질된 것이었다.

전에 내가 죽인 고양이와 지금의 이 얄미운 고양이 사이에 단 하나 다른 점인 흰 얼룩점에 대해 아내는 여러 번 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얼룩점은 크지만 아주 희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서히,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서서히―내 이성은 오랫동안 그것을 부정해 왔지만―윤곽이 뚜렷해졌다.

그것은 입에 올리기에도 몸서리쳐지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그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 고양이가 미웠고 무서웠으며 할 수만 있다면 그 괴물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지금 그 얼룩점은 보기에도 소름기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교수대―무섭고도 불길한 공포와 죄과의 고민과 죽음의 형구인 교수대 모양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의 비참함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비참함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더욱이 겨우 한 마리의 짐승이―내가 그 동류를 진심으로 경멸하며 죽여 버린 짐승이―하느님의 모습과 똑같이 창조된 인간인 나에게 이렇게도 헤어날 길 없는 괴로움을 주다니! 아! 이미 나는 밤에도 낮에도 안식의 기쁨을 찾지 못했다. 낮 동안에는 잠시도 그 고양이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밤은 밤대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서운 꿈에 시달려 거의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깨어 보면 그 불길한 짐승의 뜨거운 입김이 내 얼굴에 덮쳐왔으며, 묵직한 무게가―나로서는 뿌리칠 힘없는 악마의 화신이―내 가슴 위에 떡하니 얹혀 있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고통에 짓눌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아주 작은 선심조차 무너져 버렸다. 사악한 생각―몹시 시꺼멓고 흉악한 생각―이 내 유일한 마음의 반려가 되었다. 여느때의 까다로운 성격은 점점 심해져 모든 것, 모든 사람들을 향한 증오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맹목적으로 몸을 내맡기게 된 듯한 나의 돌발적이고 잦은, 억누를 수 없는 격노의 발작에 누구보다도 괴로워하고 누구보다도 참을성 있게 견디어 준 피해자는―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나의 아내였다.

어느 날, 가난으로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던 낡은 집의 지하실까지 볼일이 있어 아내는 나를 따라 내려왔다. 고양이도 나를 따라 가파른 층계를 내려왔는데 그 때문에 하마터면 거꾸로 나뒹굴 뻔했던 나는 갑자기 몹시 흥분하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손도끼를 접어든 나는 너무나 격분한 나머지 그때까지 나를 억누르고 있던 어린애 같은 공포도 잊고 고양이를 향해 대번에 찍어 내리려 했다. 만일 생각대로 내려쳤다면 고양이는 물론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격은 아내의 말리는 손길에 멈춰졌다.

이 간섭으로 말미암아 악마도 당하지 못할 만큼 격노에 휩싸인 나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대신 아내의 머리 한복판에 도끼를 박아 넣었다. 아내는 비명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이 무서운 살인이 끝나자 나는 곧 신중하게 이 시체를 감출 방법에 골몰했다. 하지만 낮이건 밤이건 이웃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시체를 집에서 밖으로 내가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여러 가지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시체를 잘게 썰어 불에 태워 버리려고도 생각했다. 또한 지하실 바닥을 파고 그곳에 파묻어 버릴까도 생각했다. 아니면 뜰의 우물에 던져 버릴까―상품처럼 보이도록 상자에 담아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인부를 시켜 집에서 지고 나가게 하는 일도 궁리해 보았다.

그리하여 결국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훌륭한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시체를 지하실 벽 속에 넣어 발라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중세의 사제들이 희생자를 벽 속에 넣고 발라 버렸다는 기록이 있듯이.

이러한 목적에는 안성맞춤인 지하실이었다. 벽을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채 최근에 회칠을 슬쩍 한 번 했을 뿐인데 그것이 습기 찬 공기 때문에 아직 굳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벽 한쪽은 장식용 연통과 난로였던 곳을 메워 다른 부분과 똑같이 보이게 한 돌출부가 있었다. 그곳의 벽돌을 들어내고 시체를 집어넣은 다음 누가 보아도 의심스럽지 않도록 벽을 완전히 바르는 것은 쉬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과연 내 예상대로였다. 쇠지렛대로 아주 쉽게 벽돌을 떼어내고 시체를 조심스럽게 안쪽 벽에 세워 그대로 버티어 놓은 다음, 그리 힘들이지 않고 본디대로 벽돌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몰타르와 모래와 머리칼을 되도록 조심스레 손에 넣어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회를 반죽한 다음 새로 쌓아올린 벽돌 위에 골고루 발랐다. 일이 다 끝났을 때 나는 이제 다 되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벽은 조금도 손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티끌 하나도 낱낱이 주웠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자, 적어도 헛수고는 아니었어."

다음에 할 일은 이 참극의 원인이 된 고양이를 찾는 것이었다. 그 고양이를 죽여 버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때 내 눈에 띄기만 했다면 고양이의 운명은 끝나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활한 동물은 지난번의 내 격렬한 분노에 겁을 먹었는지 이러한 기분으로 있는 내 앞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불길한 고양이가 없어져 얼마나 홀가분하고 통쾌한 안도감을 느꼈는지는 도저히 글로 표현하거나 상상도 할 수 없다. 고양이는 그날 밤새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덕분에 고양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 처음으로 하룻밤 내내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그렇다, 분명 살인을 했다는 중압감이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데도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나를 괴롭히던 고양이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자유로운 몸이 되어 숨쉴 수 있었다. 두려움을 주던 괴물은 영원히 이 집에서 달아난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그 고양이를 보게 될 리 없다고 생각하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느껴졌다.

내가 저지른 죄의 두려움에 양심이 아픈 것도 그리 없었다. 두세 차례 심문을 받았지만 문제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집도 수색되었지만 아무 것도 발견될 리 없었다. 이로써 앞날의 행복은 확보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내를 죽인 지 나흘째 되는 날, 뜻밖에도 한 무리의 경관이 몰려와 다시 엄중히 가택 수색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체를 감춘 곳은 제아무리 찾아본다 해도 찾을 리 없다고 확신한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경관의 명령으로 나도 함께 수색하게 되었다. 집 안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세 번인가 네 번째로 지하실에 내려갔다. 나는 얼굴빛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내 심장은 마치 천진난만하게 잠든 아이처럼 조용히 뛰고 있었다.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유유히 돌아다녔다.

경관들은 완전히 의심이 풀려 집을 떠나려 했다. 나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나는 승리의 표적으로 한마디라도 하여 내 무죄를 그들에게 한층 더 확신시켜 주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참다 못한 나는 층계를 올라가는 경관들에게 마침내 말을 건넸다.

"여러분, 의심이 풀려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빌며 그와 더불어 앞으로는 좀 예의있게 행동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이 집은 그 구조가 썩 잘 되어 있답니다."

아무 이야기나 마구 지껄여대고 싶은 격렬한 욕망에 싸여 나는 뭘 말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참으로 잘 지어진 집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무엇보다도 벽 말인데―아니, 여러분들 그만 돌아가시렵니까?―어떻습니까, 이 벽의 견고함은......"

이렇게 말한 나는 완전히 흥분하여 미치광이처럼 들고 있던 막대기로 아내의 시체가 들어 있는 바로 그 부분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아, 하느님, 악마의 독니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내리친 소리의 메아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무덤 속에서 대답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처음에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처럼 짓눌린 채 간간이 끊어지는 소리였는데, 곧이어 사람 소리라고는 도저히 여길 수 없는 길고 높으며 끊어짐이 없는 아주 괴상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지옥에 떨어진 죽은 이와 그 파멸에 기뻐 날뛰는 악마의 목구멍에서 동시에 흘러나오는, 지옥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공포와 승리가 반반씩 섞인 울부짖음이었다. 순간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반대쪽 벽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한동안은 층계 위의 경관들도 공포와 놀라움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음 순간, 대여섯 명의 억센 팔이 달려들어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벽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미 거의 썩고 핏덩어리가 말라붙은 시체가 모두들의 눈앞에 우뚝 나타났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는 시뻘건 입을 크게 벌리고 불같은 외눈을 커다랗게 뜬 그 무서운 고양이가―나로 하여금 살인을 하도록 감쪽같이 꾀어 들이고, 지금은 그 비명 소리로 나를 교수대로 이끈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나는 이 괴물을 무덤 구멍 속에 시체와 함께 넣고는 그대로 발라 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