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의료진'에서 '소크라테스'로 연결한 3단계 화법의 속뜻

김고금평 기자 입력 2020.10.03. 12:36

30일 KBS 2TV 한가위 특집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사진=KBS 영상캡처


지난달 30일 KBS 2TV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 출연한 나훈아는 40분간 노래만 부른 뒤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우리에겐 영웅들이 있는데, 그들은 의사와 간호사들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지킨 주인공은 왕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유관순 누나, 진주의 논개, 윤봉길 의사 등 보통의 우리 국민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소크라테스를 응용한 ‘테스형’이라는 노래를 부를 땐 “세월에 끌려다니지 말고 모가지를 비틀어 (세월을) 끌고 가야 한다”는 인생론도 펼쳤다.

나훈아가 이날 무대에서 사용한 의료진, 보통 국민, 소크라테스 같은 키워드들은 서로 맥락 없는 독립적 형태로 보이지만,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세 키워드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 드러낸 ‘말’의 속뜻과 그의 ‘변명’을 따라가봤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신을 믿지 않고 청년을 선동하고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고발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오직 이성에만 충실하고 끝까지 시와 비를 가린 뒤 소신을 말하고 실천하는 지성인이 독배를 마셔야 했던 이유는 그 시대인의 무지나 진리에 대한 외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파이돈’ 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친구 크리톤에게 마지막 말을 이렇게 남겼다.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빚을 갚아 주겠나?”

30일 KBS 2TV 한가위 특집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사진=KBS 영상캡처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신(醫神)이다. 아테네에는 병으로부터 회복된 사람은 의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유언으로 남긴 데에는 이런 의미가 있다. 인간 마음속 병을 고치려다가 독배를 마신 자신이 언젠가 인간의 병이 고쳐지는 날, 자신을 대신해서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바쳐달라는 속뜻이었던 셈.

이 닭 한 마리를 갚을 책임은 크리톤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모든 사람에게 진 빚이다.

나훈아는 코로나19라는 육체적 병을 다스리는 의료진을 향한 찬사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진 빚을 얘기했지만, 그 속뜻은 국민에게 상처 주는 정신적 병에 대한 의신의 또 다른 치유에 대한 희망사항을 꼬집은 ‘예인의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변명’ 편에서 ‘무지의 자각’을 통해 지혜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 분양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아테네든 어떤 다른 나라든 행복을 얻거나 발전하는 경우 한 사람 또는 일군의 지도자나 사이비 현자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또는 대중 전체의 지혜의 집결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그(정치가)보다는 현명하다고, 왜냐하면 우리는 둘 다 선이나 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데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이에 대해 나는 알지도 못하거니와 알고 있다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변명’ 중에서)

30일 KBS 2TV 한가위 특집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사진=KBS 영상캡처


소크라테스는 지성인의 역할이 권력에 아부하며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는 대신, 거리에 넘쳐 흐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진정한 지혜를 길어내는 데 있다고 봤다.

나훈아가 언급한 유관순 누나, 진주의 논개, 윤봉길 의사 등 보통의 우리 국민은 ‘거리에 넘쳐 흐르는 인간의 진정한 지혜’의 산물인 셈이다.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축배로 다가온다. 지성인이 마신 독배는 용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남긴 ‘닭 한 마리를 빚진’ 시대가 계속된다면 인간의 병은 더 악화하고 있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의료진으로 시작해 보통 국민을 거쳐 소크라테스로 마치는 나훈아의 3단계 화법이 생뚱맞으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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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테스형’ 젊은이까지 잡았다…중독성 가사와 멜로디 ‘깡’ 못지 않네

나훈아 ‘테스형’ 젊은이까지 잡았다…중독성 가사와 멜로디 ‘깡’ 못지 않네

나훈아의 콘서트가 안방극장에서 대박을 친 가운데 ‘테스형!’이 화제의 곡으로 떠올랐다.

나훈아는 30일 방송된 KBS2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으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15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 나훈아는 무대를 사로잡는 원맨쇼로 시청자를 열광하게 했다. 나훈아는 코로나19 관련 상황으로 지친 국민들에게 공연을 통해 위로를 주고자 ‘노개런티’로 공연을 진행했다.

나훈아의 이름값과 무게감을 새삼 느낀 웅장한 무대에서 시청자가 특히 관심을 보낸 노래가 ‘테스형!’이다. ‘테스형!’은 나훈아가 지난 8월 발매한 새 앨범 ‘아홉 이야기’에 수록된 신곡이다. 작사와 작곡은 나훈아가 직접 맡았다.

나훈아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테스 형!’이라고 표현하며 세상이 왜 이렇게 힘드냐고 묻는 재미있는 가사를 붙였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먼저가본 저세상 어떤 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 가요 테스형’

재미 속에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는 가사는 물론 깊이 있는 음색과 리듬감은 듣는 사람을 순식간에 빠져들게 했다.

나훈아는 ‘테스형!’을 부른 뒤 “우린 지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며 살고 있다”며 “테스형에게 세상이 왜 이렇고 세월은 또 왜 저러냐고 물어봤더니 테스형도 모른다고 하더라. 세월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떻게 할수없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월은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가게되어있으니 이왕 세월가는 거 우리가 끌려가면 안 된다. 우리가 세월의 모가지를 딱 비틀어서 세월을 끌고가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방송 이후 ‘테스형!’은 중장년층은 물론 젊은 20대에게도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20대들의 커뮤니티에는 ‘테스형!’에 중독된다는 글이 잇달아 올라왔다. 테스형은 1일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음원사이트와 유튜브에서도 화제다.

누리꾼은 “소크라테스를 형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가수”, “테스 형 못지 않은 훈아 형 짱” 등의 댓글을 남기며 ‘테스형!’을 향한 뜨거운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원문보기:
http://sports.khan.co.kr/entertainment/sk_index.html?cat=view&art_id=202010011158003&sec_id=540101#csidx8d43c98166ef055994d79425bd953ee

과밀학급 해소·교육환경 개선하려면…“초등교원 매년 4400명 신규 채용해야”

등록 :2020-09-12 08:10수정 :2020-09-1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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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기 교원수급 방향’ 보고서 분석
학급당 학생 수 OECD 평균 21명으로
중등 5400명…정부안보다 1천명 많아
초등학교 교실. 이정아 기자
초등학교 교실. 이정아 기자

과밀학급을 해소하고 교육 환경을 지금보다 개선하려면, 내년부터 2040년까지 해마다 초등은 4천여명, 중등은 5천여명의 신규 교원을 채용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1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실에서 입수한 교육부 위탁 정책연구 ‘학령인구 감소에 대응한 중장기 교원수급 방향 및 과제’의 결과보고를 보면, 통계청 인구 추계 자료 등을 활용해 2021~2040년 교원 신규채용 규모를 따져본 결과 연간 초등은 4472명, 중등은 5427명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부가 이제껏 밝혀온 채용계획보다 초·중등 각각 연간 최소 1천명 이상이 더 많은 규모다.
최근 발표된 ‘OECD 교육지표 2020’ 가운데 교사 1인당 학생 수 및 학급당 학생 수 관련 현황.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교육부는 2018년 내놓은 ‘중장기 교원수급계획’에서 2030년까지 초등은 3500명, 중등은 3000명 수준으로 신규채용을 줄여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7월에는 계획을 일부 수정해, 2024년까지 초등은 3천명, 중등은 4천명 안팎으로 채용하는 한편 2025년부터는 미래교육 수요를 반영해 새로운 수급계획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정책연구 결과에서 신규채용 규모가 기존 교육부 계획보다 커진 이유는, 단지 ‘학생 감소에 따라 교원도 감소한다’고 보지 않고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조건들을 ‘정책변수’로 삼아 정량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첫번째로는 학급당 학생 수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낮추는 한편 전체 학생 수가 24명이 넘는 소규모 학교는 통폐합시키지 않고 유지시키는 모델을 적용했다. 학교의 존재를 ‘지역소멸’을 막기 위한 핵심 조건으로 본 것이다. 두번째로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시행에 따라 중등 교원이 이전보다 15%가량 더 필요해질 것이라고 봤다.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과 교사가 늘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공교육의 출발선에서부터 격차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 전체 초등학교 1학년의 학급당 학생 수를 17명으로까지 감소시키는 조건을 넣었다. 프랑스에서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해 초등 저학년의 학급당 학생 수를 10명으로 낮춘 사례를 참조했다.

연구책임자인 이길재 충북대 교수(교육학)는 “학교 통폐합에 따른 지역 소멸, 부모·가정 배경에 따른 교육 격차 등을 막기 위한 ‘최저방어선’을 쳐둔 채 교원수급을 전망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동안 교육계를 중심으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교원 숫자를 무작정 줄여선 안된다’고 주장해왔으나, 어떤 조건에 따라 교원이 얼마나 더 필요할지 구체적으로 따져본 연구는 거의 없었다. 교육부는 내후년 새로운 교원수급 모델을 만들 계획인데, 이번 정책연구에서 시도한 접근법이 참고가 될 수도 있다.

심상정 의원은 “교육부는 이번 정책연구 결과를 최대한 활용해 교육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의 교원수급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기획재정부와 행정안전부도 ‘교원 감축’ 주장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교육에 대한 국가 차원의 투자에 행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다른 삶]의료진 친절에 감동해 16년간 어린이병원 기부…하나도 안 아깝다

성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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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의 ‘경계인’

캐나다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병원은 어린이병원(The Hospital for Sick Children)이다. 의사·간호사·오디올로지스트·특수교사 등 전문가들이 동등한 동료로 서로 협력한다. 이들 의료진은 환자나 가족에게 친절하다. 가정의나 전문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와 의료진이 시민 건강을 중심에 두고 논의하고, 진통을 겪으며 지금의 의료서비스 제도와 문화를 정착시켰다. 사진은 캐나다 토론토 어린이병원 전경.

캐나다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병원은 어린이병원(The Hospital for Sick Children)이다. 의사·간호사·오디올로지스트·특수교사 등 전문가들이 동등한 동료로 서로 협력한다. 이들 의료진은 환자나 가족에게 친절하다. 가정의나 전문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와 의료진이 시민 건강을 중심에 두고 논의하고, 진통을 겪으며 지금의 의료서비스 제도와 문화를 정착시켰다. 사진은 캐나다 토론토 어린이병원 전경.

며칠 전 일이다. 코스트코 계산대에서 돈을 내기 직전에 직원이 말했다.

“어린이병원(The Hospital for Sick Children)에 기부하지 않으실래요? 2달러 이상이면 되는데요.”

코스트코에서는 1년에 서너 번쯤 이런 제안을 받는다. 거절하거나 망설인 적은 없었다. 직원은 내가 산 물건 가격에 기부금을 추가하고, 기부했다는 표시로 노란색 풍선 그림에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노란색 종이풍선들은 코스트코 한쪽 넓은 벽면에 날아갈 듯 가득 붙어 있다.

비록 적은 액수지만 매달 은행계좌 자동이체로 이 병원에 기부해온 지도 올해로 16년째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코스트코에서처럼 제안을 받을 때마다 선뜻 기부하는 것은 토론토 사람들에게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여러 매체나 그곳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 어린이병원이 어떤 곳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병원은 캐나다가 자랑하는 병원이자 캐나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병원이다. 나처럼 자식이 그곳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기라도 하면 그 고마움은 평생을 가게 마련이다. 말로만 듣던 ‘인술’을 실제로 접한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어린이병원에 기부 안하실래요?”
선뜻 제안에 응하는 토론토 사람들
그곳에서 ‘인술’을 접하고나면
그 고마움에 흔쾌히 기부할 수밖에

아이의 인공와우 수술을 하며 만난
병원 의료진들은 누구나 친절했고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
동등한 관계의 동료로 협력했다

회복까지 1년6개월, 날 감동시킨 건
의료 전문가의 존중과 배려의 태도

“환자를 친절하게 대하는 건 당연”
이렇게 문화와 제도가 개선되는 데
진통이 따르는 건 필연적일 지도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큰아이는 15년 전 어린이병원에서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아이는 보청기를 끼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소리를 잘 듣게 되었다. 아이는 올여름 대학을 졸업하고 다음달부터 직장에 나간다.

어린이병원에서 우리가 감동한 것은 아이가 소리를 잘 듣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린이병원에서 검사하고 수술하고 특수교육을 받은 1년6개월 동안 우리는 ‘병원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거의 처음으로 알게 됐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친절했다. 환자를 대할 때 모두가 웃는 얼굴이었다. 그 못지않게 놀라웠던 것은 의사·간호사·특수교사·오디올로지스트(Audiologist, 청력을 검사하고 보청기 같은 청각 관련 기계 상태를 점검·보완하는 전문가) 등 우리가 만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위아래가 아닌 동등한 관계의 동료로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었다. 한국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던 우리 눈에는 조금 낯선 광경이었다. 아이가 두 살일 때 한국의 모 대학병원에서 청각장애 판정을 받고 나서도, 우리는 병원에서 특수교육은 물론 특수학교나 특수교사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다(우리에게 특수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우리 같은 부모에게 보청기를 팔러 나온 회사 영업사원이었다). 그 병원에서는 특정 전문가가 다른 분야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시하는 경향마저 있어서, 우리 아이를 가운데 두고 전문가들끼리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벌써 26년 전 일이니 그 병원의 그런 문화도 지금은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 아이는 어렵기는 했으나 보청기를 끼고 일상생활을 하고 학교 공부도 부지런히 따라갔기 때문에 캐나다에 살러 와서도 인공와우 수술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청각장애 학생들을 담당하는 교육청 관계자가 소집한 회의였다. 교장과 2명의 담임교사도 함께한 회의에서 교육청 담당자가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아이가 학교 생활을 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인공와우 수술을 받으면 큰 효과가 있을 거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인공와우 수술은 보청기를 끼고도 거의 들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인 줄 알았다.

교육청 담당자가 알려준 대로 우리는 수술신청서를 작성해 어린이병원에 보냈다. 한 달 만에 답장이 왔다. 병원에서 연락해온 사람은 뜻밖에도 오디올로지스트였다. 한국에서는 그저 청력을 검사하는 ‘기사’였으나 캐나다 어린이병원에서는 오디올로지스트가 아이의 검사와 수술, 재활교육에 이르는 모든 일정을 짜고 그 진행을 담당했다. 말하자면 입원 준비부터 퇴원에 이르는 과정을 총괄하는 지휘자였다. 아이는 오디올로지스트가 만든 시간표대로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청력검사, MRI 테스트, CT 스캔, 언어 능력 검사 등을 6개월에 걸쳐 하나하나 받았다.

모든 검사가 마무리되자 오디올로지스트는 회의를 소집했다. 거기에는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와 간호사, 수술 이후 언어교육을 담당하는 특수교사가 참석했다. 그들은 검사 결과를 함께 검토하고 수술이 우리 아이에게 효과가 있을지 여부를 두고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 아이의 장애와 관련해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모습도,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며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교환하는 것도 처음 보았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그 당연한 것을 어린이병원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벌써 십수년이 흘렀는데도 우리가 어린이병원에서 보낸 수술 당일의 그 하루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날, 병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자원봉사자들이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친절하게 안내했다. 아이를 수술실에 들여보낸 뒤 우리는 보호자 대기실에 가 있었다. 그곳에는 우리 같은 환자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수술을 마친 의사들이 수술복을 입은 채 수시로 들어와 수술 결과를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필자 자녀는 토론토 어린이병원에서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다. 병원은 퇴원하는 어린이들에게 인공와우 수술 개발 국가인 호주의 상징 코알라 인형을 선물한다. 코알라 귀 뒤에도 수술 자국을 만들어놓았다.

필자 자녀는 토론토 어린이병원에서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다. 병원은 퇴원하는 어린이들에게 인공와우 수술 개발 국가인 호주의 상징 코알라 인형을 선물한다. 코알라 귀 뒤에도 수술 자국을 만들어놓았다.

수술실에 들어간 지 2시간쯤 지나자 우리 아이를 수술한 닥터 펩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건과 수술복 어깨에 땀이 배어 있었다. 수술을 끝내자마자 마스크를 벗고 바로 오는 길이었다. 벌떡 일어선 우리에게 “앉아서 들으세요”라면서 수술 결과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수술 부위가 안면 신경이 지나는 자리라 조금 까다로웠으나 수술은 잘되었으니 안심하라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또 감동했다.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한달음에 달려와 환자 가족에게 그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해도, 그 또한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닥터 펩신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궁금한 거 더 없으세요? 무엇이든 괜찮으니 물어보세요.”

이후 입원실에서 하룻밤을 자고, 퇴원하고, 기계를 새로 받고, 병원에 있는 특수교사한테 교육 받는 과정이 1년 내내 이어졌다. 1년6개월 동안 우리가 쓴 돈은 수술 당일과 그 이튿날 이틀치 주차비로 냈던 17달러가 전부였다. 의료보험 제도 덕분에 병원비가 무료였고 고가의 기계를 무료로 지급받고, 무엇보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었으나 정작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무료’나 ‘뛰어난 의술’이 아니었다. 사람을 존중하고, 특히 장애인이나 환자와 같은 약자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의료 전문가들의 마음과 태도에 깊이 감동했다.

병원에서 이런 경험을 했으니 어린이병원 기부 권유라도 받으면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이민 와서 처음 가본 큰 병원에서 이런 경험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캐나다 병원 하면 ‘친절하다’는 느낌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어떤 이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캐나다 의료의 질은 괜찮은지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환자들을 대하는 의료진의 태도까지 포함한다면 의료의 질은 한국보다 훨씬 낫습니다.”

물론 내가 했던 경험이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어린이병원뿐만 아니라 가정의(패밀리닥터)와 다른 병원의 전문의를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 어느 곳에서 만났든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모두가 친절했다.

캐나다에서는 응급실을 제외하고는 1차 진료는 가정의를 통해서 하게 되어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우리말을 할 줄 아는 한국인 가정의를 당연히 선호한다. 한국인 가정의가 이곳 한국 사람 모두를 감당할 만큼 많지는 않아서,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 가정의를 찾아가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한국인 가정의라 해도 친절하지 않으면 한국 사람들에게도 외면받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가지 않으면 가정의는 수입이 그만큼 줄어들고, 오진이라도 하게 되면 제소되고 나아가 면허정지까지 당하는 경우도 있다.

캐나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1년에 한번씩은 정기검진을 받으라고 권유한다. 의료보험 제도로 의료비가 무료인 까닭에 국가는 병의 예방에 큰 힘을 기울인다. 병이 깊어지면 국가가 그만큼 큰 비용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캐나다 시민 대다수는 1년에 한번씩은 가정의를 만난다. 여기서 병의 징후가 보이면 가정의는 2차 진료기관인 큰 병원의 전문의에게 환자를 보낸다.

평소 정기검진을 받지 않다가, 갑자기 심각한 병에 걸린다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전문의를 빨리 만나 수술 일정을 잡을 수 있으면 다행이겠으나 잡지 못하면 오랫동안 대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캐나다 병원 의사들의 태도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친절하다”고 답한다. 이곳 의과대학도 진학하기가 어렵고, 의사들이 격무에 시달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힘들어서 우리 아이는 절대 의사 시키지 않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의사도 있다. 그런데도 의사들이 환자에게 그렇게 친절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의 문화도 작용하겠고, 대학을 마치거나 사회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의대에 진학하니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본인 스스로 ‘힘든 직업’을 선택한 만큼 소명의식 같은 것을 더 구체적으로 가지게 돼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얘기다. 이곳에서는 4년제 대학 졸업자에게만 의대에 지원할 자격을 준다.

최근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병원 가운데 하나인 마운트사이나이병원 의사를 만나서도 물어보았다. 그는 “의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인데, 아픈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마음에 안 들게 진료하거나 불친절한 의사가 있으면 환자가 병원당국에 항의 편지를 보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런 편지를 받으면 병원은 의사에게 반드시 경위서를 쓰게 한다. 의사가 잘못한 일이 없다 해도 바쁜 와중에 그런 경위서를 쓰는 것은 번거롭고 때로 불쾌한 일일 수밖에 없다.

만약 의사의 잘못이 확인되면 병원은 의사에게 주의나 경고를 하고, 그런 일들이 쌓이면 이동이나 진급을 할 때 당연히 불이익을 받게 된다(캐나다의 종합병원은 모두 국립이고 의사는 준공무원 신분이다). 의료 소비자들의 평가와 항의는 가정의나 전문의에 대한 좋은 평판도 만들어내지만 최악의 경우 밥줄도 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토론토의 버스기사들이 장애인들에게 친절할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다. 운전기사가 법이 정한 대로 하지 않으면 승객은 버스회사(공기업이다)에 불만 사항을 적은 편지를 쓰고, 그런 편지가 쌓이면 운전기사는 직업을 잃을 수밖에 없다.

캐나다 병원의 문화와 제도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1960년대 초반 캐나다에서 의료보험 제도를 처음 시행할 때도 큰 갈등이 빚어졌다. 수입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의사들이 파업으로 맞서는 바람에 외국인 의사들을 들여오는 등 큰 진통을 겪었다. 다만 제도를 도입하려는 정부와 의료진이 시민 건강을 중심에 두고 전향적으로 논의한 결과 오늘 캐나다 시민들이 누리는 의료서비스 제도와 문화를 정착시켰다. 제도와 문화를 개선하는 데 진통이 따르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