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 위대한 화가 외

클로드 모네

[ CLAUDE MONET ]
감상자를 예리하게 응시하는 <베레모를 쓴 자화상>(1886)

감상자를 예리하게 응시하는 <베레모를 쓴 자화상>(1886)

원어 Claude Oscar Monet(원어)
출생-사망 1840년 11월 14일 ~ 1926년 12월 5일
출생지-사망지 프랑스 파리 - 프랑스 지베르니
예술양식 직접 눈으로 관찰하며 그린 색채가 풍부한 풍경화와 구상화, 일본 목판화에서 영감을 받은 구도, 단속적 화풍
작품 미술작품 감상하기

클로드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르아브르로 이사했다. 르아브르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그가 후일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곳에서 노르망디 바닷가와 시골을 탐험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급격히 변화하는 날씨가 바다와 육지에 미치는 효과를 관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방화가 외젠 부댕의 회화 기법이 모네의 표현법에 평생토록 영향을 주었다. 부댕은 모네에게 야외에서 직접 눈으로 관찰하며 그리는 '외광회화'의 개념을 소개해주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파리로 간 모네는 전통주의자인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들어가 후일 인상주의 화가 동료가 될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프레데리크 바지유를 만난다. 모네는 다수의 풍경화, 바다 풍경화, 초상화들로 연례 살롱전에 통과되어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었으나, 대규모의 좀 더 도전적인 작품들은 거절당했다. 살롱전에서 <정원의 여인>(1866)과 같은 작품들이 거절당하자, 쓰디쓴 실망감을 느낀 모네는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카미유 피사로, 르누아르 등과 함께 무명미술가협회를 설립했다. 이 협회는 1874년에 처음으로 독자적인 전시회를 개최했다.

 

<양귀비>를 비롯한 일부 수작들이 아르장퇴유에서 그려졌다.

모네가 이 무명미술가 협회전에 제출한 <인상, 해돋이>(1873경)는 외관상 마무리가 덜 되어 보여서 평론가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이 그림의 제목을 차용하여 무명미술가 협회전을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고 조롱하는 혹평을 했다. 하지만 무명미술가협회의 화가들은 낙심하지 않고, '인상주의자'라는 야유 섞인 용어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러한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주도권을 잡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새롭고 매우 성공적인 작업 방식을 연마해나갔다.

모네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과 장소들을 그림의 소재로 채택하곤 했다. 자신의 두 아내를 모델로 삼았고, 정원, 파리의 건물, 노르망디 해안과 전원,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던 지베르니에 있는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모네가 살던 전원적인 환경은 친구들을 끌었다. 마네와 르누아르 등이 파리의 혼잡을 피해 모네의 집에서 잠깐의 조용한 휴식을 즐겼다. 모네는 19세기 초부터 바르비종파의 관례를 따랐으나, 야외에서 풍경을 대충 스케치한 후에 화실에서 그림을 마무리 짓던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달리, 모네는 대규모 캔버스에 그릴 때조차도 야외에서 모든 작업을 끝마쳤다.

자연광 속에서
자연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포착해내고 싶어 했던 모네는 서양 풍경화의 양식에서 벗어나 동양 미술,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 목판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각의 과정과 그것이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에 매료되었던 모네는 '건초더미'(1888~1894), '포플러'(1892), '루앙 대성당'(1892~1894)과 같은 연작 그림들에서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이 작품들은 똑같은 풍경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을 각기 다른 그림들로 그린 것이다. 명암이 마치 고체처럼 만질 수 있는 실체를 가진 것으로 보여, 회화 역사상 이정표가 되는 작품들이다. 모네의 후기 활동은 지베르니에 있는 수련 연못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품들은 초대형의 벽화와 같은 캔버스 형식을 취했다. 식물들과 물이 색의 추상적인 환영 속에 녹아있고, 물감을 십자형으로 두껍게 칠하여 독특한 질감을 창조했다. 모네가 죽은 직후에, 프랑스 정부는 튈르리 공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모네의 마지막 수련 연작을 설치했다.

자연광을 탐구한 작품들 중 하나인 <국회의사당>

자연광을 탐구한 작품들 중 하나인 <국회의사당>

인상주의의 탄생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3)는 인상주의의 발달 과정 중에 그 이름을 지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의 주제는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항구를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모네는 밝은 오렌짓빛 태양이 희미한 바다 안개 속을 뚫고 떠오르는 것과 햇빛이 수면에 반사되는 것을 표현함에 있어 느슨하고 의례적인의 화법을 구사했다.
파리 풍자잡지 『르 샤리바리』의 미술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1874년에 열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독자적인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보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인상 - 그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상을 받았고, 저 그림 속에는 어떤 인상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한 솜씨란 말인가! 저 바다 풍경이 걸리기 이전의 벽지 상태가 저 바다 풍경화보다 더 완전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평가에 흔들리지 않았다. 후일에, 모네는 지금은 유명해진 해돋이 그림의 제목을 선정하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풍경화는 단지 인상일 뿐이고, 순간적인 것일 뿐이기에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유래했다. 알다시피 나 때문에 우리에게 붙게 된 꼬리표이기도 하지만, 나는 르아브르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안개 속의 태양을 그리고, 배의 돛대들을 전경에 그려 넣은 그림을 보냈다. 그림의 제목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르아브르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담을 수 없었기에 "<인상>이라고 적으시오"라고 말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미리 머릿속에 그림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빛의 화가, 모네의 그림 같은 자연주의 식탁

[福] 아주 행복한 생활 2014/05/12 19:02

빛의 화가, 모네의 그림 같은 자연주의 식탁



매일 밤 자정 1920년대 파리의 명소로 타임슬립 하여 황홀한 로맨스를 펼치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는 두 주인공의 대화로 시작합니다. "여긴 모네가 그림 그리고 살았던 곳이야. 시내에서 30분 거리고. 우리가 여기서 산다고 생각해봐."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이 장소는 '모네의 정원'이란 애칭을 가진 지베르니. 그런데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추구하는 21세기형 라이프스타일이 이미 한 세기 전, 바로 이 지베르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지베르니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며 절정의 예술을 꽃피웠던 예술가, 클로드 모네의 이야기입니다.




<클로드 모네의 집과 정원 지베르니 -http://giverny.org/->


풍경이란 오직 인상일 뿐



1874년 모네는 마네, 드가, 피사로 등 동료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곧 세간의 조롱거리고 전락하는데, 미술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평은 이랬습니다.


"인상- 그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상을 받았고, 저 그림 속에는 어떤 인상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한 솜씨란 말인가! 저 바다 풍경이 걸리기 이전의 벽지 상태가 저 바다 풍경화보다 더 완전하다."



<인상, 해돋이(Impression : Sunrise) 출처 : 위키피디아>

 



가장 집중적인 포화를 맞은 것은 모네의 그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르아브르 항구를 그린 <인상, 해돋이>는 노 젓는 뱃사공 뒤로 햇빛으로 물든 금빛 수면이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모네는 "풍경이란 오직 인상, 즉물적인 인상이라서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지만,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된 작품만을 인정하던 시대에 형태도 색채도 두루뭉술한 모네의 그림은 놀림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인상'이라는 단어에 '미완성'이란 의미가 내포되었음을 이용해 르루아는 경멸적인 기사를 썼고 모네와 동료들은 조롱 섞인 '인상파'란 이름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하지만 모네는 '인상파'란 이름을 받아들이고 '빛은 곧 색채'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고집스럽게 화풍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지독한 혹평을 받았던 작품, <인상, 해돋이>는 '르네상스 이후 최초의 총체적 미술 혁신'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인상파' 미술의 기원이 되었으며 르루아가 작명한 '인상파'란 이름은 '불명예스런'에서 '가장 명예로운' 이름으로 반전을 이룹니다.



<모네가 그렸던 '수련' 연작 중 하나. -출처 : http://www.interagir.com->



인상주의 탄생 이후 모네는 미술사에 또 한 번의 획을 긋게 되는데 그가 시도한 '연작(series)'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일한 모티브를 비슷한 구도와 다른 분위기로 반복해 그리는 연작 형식은 칸딘스키, 몬드리안 같은 추상화를 거쳐 앤디 워홀의 팝 아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며 20세기 미술을 연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그 중 <수련>은 그의 대표 연작이자 최고의 역작입니다. 그는 200여 점이 넘는 <수련>을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에 그리며 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화폭으로 옮겼습니다. <수련> 연작을 그릴 당시 모네는 하루 종일 빛을 보고 그림을 그렸던 탓에 화가로선 치명적일 정도로 백내장이 악화되어 있었고, 아내와 아들, 또 평생 동지였던 르누아르까지 잃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한 인간의 고뇌와 상실감은 예술가의 열정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모네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연작을 마무리한 1926년 12월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지베르니의 화가, 정원사, 그리고 미식가



<길이 6m에 달하는 '수련' 연작 -출처 : 위키피디아->



모네가 1897년부터 1926년 사망할 때까지 매달린 <수련>은 길이 6m란 어마어마한 스케일 외에도 감상할 때 선 자리에서 열 걸음 이상 떨어져서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독특한 감상법으로 유명합니다. 과연 모네는 어떻게 이런 걸작을 탄생시킨 것일까요? 비밀은 바로 '지베르니'에 있습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1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센 강둑의 조그만 동네입니다. 명성을 얻기 전 모네가 파리에서 그림을 그릴 때 잠깐 머물며 매혹되었던 곳으로 만년에는 아예 정착해 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전생에 걸친 유화 작품 2천여 점 중 350여 점이 이곳에서 완성됐으며, 문제의 2,150여 점에 달하는 <수련> 연작이 탄생하고 완성된 것도 이곳에서입니다.


재미있게도 지베르니는 미술사의 거장과 함께 모네에게 재미있는 명성을 하나 더 선물했는데, 정원사란 타이틀이 그것입니다. "나는 정원 가꾸기와 그림 그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만큼 모네는 지베르니 정원 가꾸기에 열심이었습니다. 꽃밭과 연못을 만들고 수상정원을 꾸미는 한편, 평소 원예잡지를 구독하며 지구촌 곳곳에서 사온 꽃나무와 식물들로 새로운 조경을 시도했습니다. 그 실력이 오늘날의 원예사들이 봐도 감탄할 정도라죠. 출장을 갈 때면 정원사들에게 일일이 메시지를 남겼고, 아내에게는 꽃들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고 합니다.



<모네의 정원 -http://giverny.org/->



물론 모네의 이런 정원 가꾸기에는 인상파로서의 숙명이 뒤따르긴 합니다. 이 정원에서 그는 이젤 3~4개를 동시에 펼쳐놓고 하루 종일 작업을 하는 등 마음껏 작품활동을 즐겼던 것입니다. 인상주의 화가에게 자연은 영감의 원천. 평소 야외에서 그림 그리기를 즐겨 뙤약볕이나 파도, 모래바람은 물론 비 오는 날에도 마다치 않던 모네였으니,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는 지베르니는 천혜의 피사체이자 독창적인 색감의 팔레트, 그만의 자유가 보장된 완벽한 아틀리에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네는 이 아름다운 정원을 혼자 독식하진 않았습니다. 정원이 꽃과 푸른 녹음으로 휩싸이면 그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즐겼습니다. 덕분에 모네의 정원은 인상파 화가들뿐만 아니라 조각가 로댕,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등 당시 문화 예술계, 정치계를 휘어잡던 걸출한 인물들이 드나들며 영감을 얻고 화합과 소통을 하던 성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자연 속에서 키운 미각



<모네의 주방 -출처 : http://www.galenfrysinger.com/->



이런 지베르니 문화를 꽃피우는 데 정원 못지 않게 커다란 역할을 한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모네의 식탁. 사실 모네는 미식가로 꽤나 까탈스럽고 완벽한 식성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맛있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며, 음식은 맛있게 먹이 위해 먹는 것이라고 여긴 진정한 식도락가였습니다. 화가로서 명성을 얻지 못하던 시절에도 요리사를 두 명이나 두었죠.


보관법이나 운송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신선한 식재료를 다양하게 구하지 못하던 시대였음에도 식탁에는 매일 신선한 채소가 올라와야 했고, 푸아그라는 알자스 지방산, 송로버섯은 페리고르산 식으로 재료의 품종부터 신선함, 맛을 세밀히 따졌다고 합니다. 또 맛있게 먹은 금식은 요리 수첩에 조리법을 기록하기까지 했는데 그렇다고 직접 요리를 한 것은 아닙니다. 부엌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면서 맛있게 먹었던 레시피를 요리사에게 던져주곤 완벽히 재현하라고 요구했던 인물, 그가 모네였습니다.



<작은 만찬회가 열리곤 했던 모네의 식탁 -출처 : http://giverny-impression.com->



이런 모네의 까다로운 식성 덕에 모네 가족이 지베르니에 정착해 정원을 가꾸는 것과 함께 가장 공을 들인 게 바로 채소밭을 일구는 것이었습니다. 모네는 완벽한 채소밭을 꾸미기 위해 품종 카탈로그를 끼고 살았고, 지베르니의 기후와는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품종은 기필코 채소밭에 심고야 말았습니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끊임없이 그림 그리는 데 몰두했던 그였지만, 하루에 한 번은 채소밭을 살피러 캔버스 앞을 떠났다고 합니다. 또한 마음에 드는 씨암탉이나 씨오리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 사육장을 돌며 축사를 채웠고, 하늘빛과 파란색으로 꾸며진 그의 부엌은 커다란 화덕과 아이스크림 제조기 등 당시로선 최신식 각종 요리기구로 꾸며졌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조달된 산지직송(?)의 신선한 재료에 오랫동안 고급 식당이나 유명인들과 식도락을 즐기며 쌓은 미식 견문은 모네의 식탁을 소박하지만 풍성하고, 예의와 격식을 갖춘 최고의 만찬으로 완성되어 지베르니를 찾는 수많은 손님들의 입맛을 매혹시켰습니다.


걸작 <수련> 연작을 탄생시키고 사시사철 꽃으로 둘러싸여 있던 모네의 그림 같은 정원 지베르니는 모네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의 빈곤한 영혼과 까다로운 식도락을 완벽히 채워준 건강한 텃밭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지베르니의 풍요로운 결실로 완성한 그 자연주의 식탁은 모네가 수많은 예술가와 소통할 수 있었던 오감이 살아 있는 창구,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자연'이란 정체성이 투영된 그의 삶 자체이자 또 하나의 연작이 아니었을까요?




출처 : 웹진 Pioneer 134호(5월호) 천재의 식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