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 썰물] 암호 같은 논술
박태성 기자 icon다른기사보기
수능이 끝나면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수백 대의 퀵서비스 오토바이들이 마치 레이스를 펼치듯, 대학 논술 고사장 주위에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이다. 논술시험은 수능이 끝난 직후 집중적으로 치러진다. 수험생들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다른 대학 시험장으로 가기 위해 오토바이에 짐짝같이 실려간다. 퀵서비스 회사들은 최대 10만 원에 이르는 요금을 받는다. 논술 열풍이 몰고 온 우리 시대의 웃지 못할 자화상이다.

논술문제들이 너무 난해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자연계 제시문에 나온 기호들이 마치 딴 나라 언어처럼 생소하다. 인문계 경우도 고교 사회과에서는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이론들이 지문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모 사립대는 논술 문제를 지난 2005~2006년 미국 정치학계 논문에서 가져왔을 정도다. 사정이 이러하니 서울 강남 대치동 논술학원가에는 '암호 같은 기호'들을 전수받기 위해 수험생들이 몰린다. 대학들은 답을 제대로 적은 학생이 없어서 평가하기가 편하다는 말도 버젓이 한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유치원에서부터 논술학원에 다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책도 곧 등장할 듯하다. 최상급의 논술답안을 쓰려면 박사 학위 서너 개 정도는 필요하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최근 한 시민단체가 서울 11개 대학 수시전형을 분석한 결과, 논술전형 비중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문제가 너무 어려워 교수들조차도 답을 쓰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논술은 설득의 언어다. 그런데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함께 '진실의 언어'가 수반돼야 한다. 기호 해독 요령과 테크닉만 배우고 오토바이에 실려 가는 현실 속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진실의 언어'를 체득할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박태성 논설위원 pt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