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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논술] <135> 교과서로 논술잡자 -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 |
삶·죽음에 대한 여러 인식과 자신의 견해는? |
【논제1】 각 제시문에 드러난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설명하시오. (600자 내외)
【논제2】 논제1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이에 반하는 사례를 통해 주장을 강화하시오. (800자 내외)
아래 각 제시문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다. 제시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가)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
밤은/ 어느 집에 묵고 간담?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성삼문 '절명시(絶命詩)'
(나)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가 문상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말하였다.
"아내와 함께 살고 자식을 키워 함께 늙은 처지에 이제 그 아내가 죽었는데 곡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무정하다 하겠는데, 하물며 질그릇을 두들기고 노래를 하다니 이거 심하지 않소!"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소. 아내가 죽은 당초에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소. 그러나 그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던 거요. 그저 삶이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소. 비단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氣)도 없었소.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 형체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된 거요. 이제 다시 변해서 죽어가는 거요. 이는 춘하추동이 되풀이하여 운행함과 같소.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 있소.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한다면 하늘의 운명을 모르는 거라 생각되어 곡을 그쳤단 말이오. -장자 '장자'
(다) Many medical organizations, ethical institutions, governments and their judicial systems and also many humanist individuals worldwide disapprove such practice(mercy killing) of terminating human lives on the basis of 'mercy' under their various arguments related to ethics, public opinions, medical traditions and fundamental right of human being to live as long as it is in power of the almighty creator and also the respective person is able to live the life.
But ideologies and realities are different. It is easy to condemn such killings for those who are not put in such a critical situation and also have not come under tension of taking such hard decisions. Merciful death or mercy killing must have the strong reasons to justify such as unbearable pain, physical discomfort or loss of quality life. In the words of Darwin's theory, we may say that the person deserving 'mercy killing' is not fit to survive. The reason of 'treatment is too expensive and time-consuming' is not an acceptable excuse for such killings.
(라) "이것이 진리라고 하면, 이제 인생의 여로의 마지막에 이르러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감에 있어, 일생 동안 추구해 온 것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충분한 이유가 있네. 그러므로 나는 큰 기쁨을 가지고 내 갈 길을 가는 걸세. 나뿐만 아니라,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고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쁜 마음으로 이 길을 갈 걸세."
"아주 옳은 말씀이외다"라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정화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즉, 영혼이 모든 방면에서 육체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을 수습하고 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만으로 사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시 말하면 육체의 쇠사슬로부터 영혼이 해탈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그렇습니다."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고 해방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요"
"참 철학자들만이 오로지 영혼을 이와 같이 해방시키려 하는 거야.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와 해방이야말로 철학자들이 특별히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의 상태에 가깝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 막상 죽음에 당면해서 마다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렇지요."
"오오 심미아스, 참 철인(哲人)은 늘 죽는 일에 마음을 쓰고, 따라서 모든 사람 가운데 죽음을 가장 덜 무서워하는 자일세. 이렇게 생각해 보세. 그들이 늘 육체와 싸우고, 영혼과 더불어 순수하게 되기를 원했다면 말일세. 그들의 소원이 성취되어 하데스(사후세계)에 도착하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바라던 지혜를 얻게 될 희망이 있고 동시에 그들의 원수와 함께 있지 않게 될 걸세. 그런 곳으로 떠나려 할 즈음에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떨고 싫어하는 것처럼 모순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거기에 가면 지상에서 사랑하던 이나 아내나 자식을 만나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는 희망에서 죽기를 원했던 것이 사실이야. 그렇다면 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이로서, 그리고 저 하데스에서만 지혜를 보람 있게 향유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죽음을 싫어하겠는가? 오히려 큰 환희 속에 저승으로 떠날 것이 아니겠는가? 오오 나의 벗이여, 만일 그가 참 철학자라고 하면 그럴 것일세. 그는 저 세상에서, 그리고 거기에서만 순수하게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말일세. 사리가 이렇다고 하면, 내가 말한 것처럼, 그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소리일 거야." -플라톤 '파이돈'
각각의 제시문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다른가를 분석해야 한다.
(가) 이 글은 죽임을 당하여 인생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순간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드러난 글이다. 시의 각 행은 크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구성되어 있다. 1, 2행은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 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3, 4행은 '해도 지려 하는'의 표현을 통해 삶이 끝나가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일상에서 늘 겪는 '해가 지는' 현상과 연결시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5, 6행은 '황천'이라는 시어를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곳의 모습을 '주막'의 유무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세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어진 세계임을 나타내고 있다.
기복신앙이나 기독교적인 내세구원론, 불교적인 윤회관,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은 자연의 순환이라는 도가적 측면과는 또 다른 생사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7, 8행에서 '오늘 밤'의 시어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 죽음의 세계를 '어느 집', '묵는다'라고 나타냄으로써 더욱 구체화한다.
(나) 아내의 죽음을 맞아 장자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에 혜자가 그 이유를 묻자, 장자는 본래 삶이란 형체도 기(氣)도 없는 것이며 흐릿하고 어두운 것 속에서 변하여 기가 생기고 그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기고 그 형체가 변해서 삶이 생기지만, 이제 다시 그것이 변해서 죽음이 오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를 통해 죽음이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풀이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이란 자연의 순환이치와 같은 것이다.
(다) 오늘날 우리 사회 담론 중의 하나인 존엄사에 관한 글이다. 글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다. 존엄사를 반대하고 있는 주장을 전제하고 그 전제를 반박하는 구성이다. 전제의 근거는 ①윤리적 측면 ②의료적 측면 ③생명의 신수설 즉, 우리의 생명은 모두 신이 주신 것으로 생명의 소유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신이라는 측면 등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박의 논거로 ①환자의 감내하기 힘든 고통 ②신체적 불편 ③삶의 질의 저하 등을 제시하였고 ①적자 생존과 같은 생존적 차원과 ②치료 비용 부담과 같은 경제적 측면은 논거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라)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향한 여정을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그려낸 글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에서 이룬 진리의 세계를 완성하는 공간으로 하데스(사후세계)를 인식하고 그 곳에서 진리의 마지막 단계를 이룰 수 있으므로 참 철인들에게는 행복의 세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곧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정화이자 해탈로 묘사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영혼이 순수하게 혼자 있는 상태를 염원해 왔으므로 참 철학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후 세계에서 철학자들은 완성하고자 했던 지혜를 얻게 됨으로 죽음을 큰 기쁨 속에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개개인의 삶의 과정과 목표에 따라 죽음을 맞는 태도가 다르게 드러난 셈이다.
대화제(大話題)는 '삶과 죽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숙명적 상황에 처하는데, 대처하는 방식은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삶을 전제로 한 죽음임을 유의하면서 논의에 임해야 한다. 자칫 죽음에 대한 무념의 태도나 지지적 태도 등이 논의 대상이 아님을 알고 논지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논제1】은 각각의 제시문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 태도가 어떻게 다른가를 분석한 뒤에 그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이다. 설명이라는 방법은 독자의 이해가 목적이기 때문에 제시문 근거를 바탕으로 쉽게 풀어서 말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되겠다. 약 600자 분량이니 제시문마다 150자 남짓씩 설명하면 된다.
【논제2】 ㉠논제1을 바탕으로 ①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이에 반하는 사례를 통해 ㉣주장을 강화하시오)
이 논제에서 논의 대상은 ①이다. 즉 삶과 죽음에 대한 수험생들의 견해를 논술하는 것이다. 다만 ㉠부터 ㉣까지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조건이 많은 논제는 채점에 객관성을 유지하기 좋은 방편이다. 해당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우선 ㉠은 논의의 범주이다.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제시문에 드러난 견해 안에서만 논의해야 한다. 이 때 논제1에 삶과 죽음에 대한 4가지 견해가 드러나 있어 어느 한 견해를 선택할 것인지, 네 견해의 일부나 전부를 일반화하여 논술할 것인지 먼저 결정해야 한다. ㉡은 논의 과정에서 제시되어야 할 근거인데 사례란 구체적으로 있었던 존재라야 한다. 물론 문학적 허구라도 보편성을 지닐 때 사례로서 충분한 자격을 지닌다. ㉢ 역시 논의 과정에서 제시되어야 할 근거인데 ㉣과 논리적으로 연계시켜 생각해 보면 ㉢은 전제되고 또한 반박되어야 할 요소이다. 반례이니 반박함으로써 주장이 강화되는 것이다. 다만 800자의 짧은 글이니 완성된 글의 구조(정당화 문맥구조)를 계획하지 말고 본론 형태만 갖추어도 충분하겠다.
·우리나라 문학에 나타난 삶과 죽음의 인식
우리 문학에서는 삶과 죽음을 이어지는 현상으로 인식하고 형상화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를 테면, 고조선 시대의 '공무도하가'에서는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이별해야 하는 아내의 비극적 심정이 남편을 따라 죽음으로써 저승에서 재회를 기약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은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삶이 죽음의 세계에서도 이어진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고전 소설 '심청전'에서는 죽음이 재생의 의미로 수용되고 있다.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죽음 이전의 단계에서 질적으로 변화하고 상승한 새로운 존재로의 재생을 의미한다. 죽음을 통한 자기 갱신을 성공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을 또 다른 의미로 바라보고 있다. 신라시대 유행한 향가 '제망매가'에서는 누이의 죽음을 애석해 하면서 죽음의 세계에서의 재회를 기약하고 있다. 물론 저승에서 재회를 위한 삶의 세계에서 노력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 문학의 여러 작품에서 죽음을 삶과의 단절로 인식하고 그 슬픔을 그려내고 있다. 정지용 '유리창'과 김광균 '은수저' 등에 형상화된 자식의 죽음에 대한 부모의 슬픔의 정은 육친의 슬픔을 넘어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삶은 이승에서 이루어지며 죽음은 저승의 몫으로 본 것이다. 전통 민속 상례에서 상여꾼의 앞소리 또한 죽음을 이승과의 단절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죽음이 현실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많은 작품들이 삶과 죽음을 단절적으로 인식하고 형상화한 작품들이 드러나고 있다.
·존엄사 논란 계기로 본 한국인 죽음의 의미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의 글 중에서
존엄사는 그동안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계를 중심으로 도입 요구가 계속됐다.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고 싶은 '웰다잉(well dying)' 개념이 확산되면서 국민의 찬성 목소리도 높아졌다. 국립암센터가 2008년 10월 성인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87.5%가 존엄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양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의 경우 1975년 4월 혼수상태에 빠진 딸(퀸란)의 생명유지장치 제거 권리를 아버지에게 달라는 소송에서 법원이 아버지의 주장을 인정함으로써 존엄사 논쟁에 불이 붙었다. 영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논쟁이 벌어졌고, 식물인간 환자에게서 영양공급장치를 떼어내도 좋다는 판결(1993년) 등이 나왔다. 독일은 형법으로 "어떤 이유에서도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한 개인의 판단을 기준으로 죽음 방식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방식이 되고 만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다수가 공감하는 방식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도 바람직한 방식을 찾긴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래도 '한국사람'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에 각각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지탱해주는 공통분모는 있게 마련이다. 이는 마치 하나의 나무에서 생겨난 수많은 가지와 잎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돼 있는 것과도 같다. 서로 다른 가지와 잎을 각각의 차원에서만 파악한다면 모든 가지와 잎이 공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낼 수 없다. 오직 뿌리의 차원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바람직한 방식이 찾아지는 것이다.
죽음의 해법을 찾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는 하나의 흐름은 바로 전통 속에 있다. 우리 전통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를 칼 융은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 왔을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돼 있다고 봤다. 그중에서 몸은 '모음'을 의미한다. 물, 쇠고기, 시금치, 콩나물 등을 '소화'라는 방식을 통해 모아놓은 것이다. 물, 쇠고기, 시금치, 콩나물 또한 그 이전의 물질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원재료를 분석해 들어가 보면 결국 우주에 가득한 물질의 본질인 기(氣)에 도달한다. 형체를 가진 모든 몸은 기가 모여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닷물에 얼음이 떠 있는 것과도 같다. 사람들이 그것을 얼음덩어리로만 안다면 얼음덩어리가 녹아 없어진 뒤에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얼음의 본질을 모르는 탓이다. 얼음의 본질은 물이다. 물의 차원에서 보면 얼음이 녹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즉 물의 차원에서 보면 얼음이 얼어 있을 때나 녹았을 때나 변함없는 물이다.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차이는 오직 형태뿐이다. 얼음이 녹는 것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의 몸이 죽는 것도 이와 같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기가 잠시 모여 있다는 의미고, 죽는다는 것은 기가 흩어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죽음을 '돌아가신다'고 표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논제1】
각 제시문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삶과 죽음의 세계에 대하여 (가)는 여정처럼 이어진 공간으로, (나)는 자연의 순환이치와 같은 경우로, (다)는 본인의 의지 있는 삶의 필요성을, (라)는 삶에서 이루는 지혜를 완성시키는 세계로 인식하고 있다.
(가)에는 죽음의 세계에는 ‘주막’이 없는 정도이니 삶의 세계에 비해 다소 풍류를 즐길 수는 없을 지라도 지속적 성격을 지닌다고 인식한다. 하여 죽음을 해가 매일 저무는 것처럼 일상적 행위로 받아드리고 있다. (나)에서는 삶과 죽음이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천지에 함께 존재하는데, 계절의 순환처럼 다르게 보일 따름이다.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것은 형체이고 그 형체는 기가 변한 것이고 그 기는 원래 흐릿하고 어두운 것이 변한 것이다. 삶과 죽음도 이처럼 변화하여 순환하는 과정인 것이다. (다)에서는 인간의 삶은 본인의 의지적 행위가 이루어질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인위적인 기계의 도움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은 죽음에 대한 의미를 밝히지는 않고 삶의 의미만을 제시하고 있다. (라)에서는 삶과 죽음은 이어지고 발전하는 단계로 인식하고 있다. 삶의 세계에서 이룬 지혜를 완성시키는 단계로 죽음을 생각해야 참된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삶의 세계에서 이룬 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
【논제2】
삶의 세계와 죽음 세계에 대해 우리 조상들은 연결적 인식과 단절적 인식이 공유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두려움보다는 담담한 심정이 드러나고 있는데 제시문에 드러난 것처럼 여로의 한 과정으로나, 자연 순환의 이치, 지혜의 완성 그리고 인위적 연명의 불필요성 등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후자의 경우 후자의 경우 안타까움과 절망적 심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글은 전자에 주제의식을 드러내고자 한다.
김소월의 시 『초혼』에 드러나는 고복 의식을 한 사례로 제시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신을 떠난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이미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내 보려고 하는 초혼의식을 하였다. 이는 영혼과 육신이 분리 될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사람의 몸과 마음, 어느 하나 죽어 없어지는 것은 없다. 죽어서 없어진다는 생각은 본심을 망각한 채 욕심에 빠져 몸의 형체만 보고 판단을 내리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의 내 마음에서 보면 죽어 없어지는 것은 없다. 다만, 몸의 차원에서 볼 때 형태가 바뀔 뿐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던 기가 흩어져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래 있었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도 같다.
한편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중세 유럽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은 페스트가 창궐한 지역에서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현실이 주는 공포감에 대한 인간의 몸부림으로 볼 수도 있다. 마치 길손이 갑자기 강도를 만났을 때 우선 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살려 주십시오’하는 행위와 견줄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현상이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개인의 인식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기 상황에서 살고자 행동하는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 반사적 행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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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훈 부산사대부고 교사 |
(주) 천재교육
III. 소설의 수용과 창작,
V. 수필의 수용과 창작
·고등학교 『문학(하)』
(주) 천재교육
VI. 한국 문학의 특질과 흐름
·고등학교 『전통윤리』
교육인적 자원부
III. 친척·이웃·교우관계와 바람직한 삶
·고등학교 『사회 · 문화』
(주)중앙교육진흥연구소
V. 현대 사회와 사회 문제
【논제1】 각 제시문에 드러난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설명하시오. (600자 내외)
【논제2】 논제1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이에 반하는 사례를 통해 주장을 강화하시오. (800자 내외)
아래 각 제시문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다. 제시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가)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
밤은/ 어느 집에 묵고 간담?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성삼문 '절명시(絶命詩)'
(나)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가 문상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말하였다.
"아내와 함께 살고 자식을 키워 함께 늙은 처지에 이제 그 아내가 죽었는데 곡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무정하다 하겠는데, 하물며 질그릇을 두들기고 노래를 하다니 이거 심하지 않소!"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소. 아내가 죽은 당초에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소. 그러나 그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던 거요. 그저 삶이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소. 비단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氣)도 없었소.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 형체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된 거요. 이제 다시 변해서 죽어가는 거요. 이는 춘하추동이 되풀이하여 운행함과 같소.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 있소.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한다면 하늘의 운명을 모르는 거라 생각되어 곡을 그쳤단 말이오. -장자 '장자'
(다) Many medical organizations, ethical institutions, governments and their judicial systems and also many humanist individuals worldwide disapprove such practice(mercy killing) of terminating human lives on the basis of 'mercy' under their various arguments related to ethics, public opinions, medical traditions and fundamental right of human being to live as long as it is in power of the almighty creator and also the respective person is able to live the life.
But ideologies and realities are different. It is easy to condemn such killings for those who are not put in such a critical situation and also have not come under tension of taking such hard decisions. Merciful death or mercy killing must have the strong reasons to justify such as unbearable pain, physical discomfort or loss of quality life. In the words of Darwin's theory, we may say that the person deserving 'mercy killing' is not fit to survive. The reason of 'treatment is too expensive and time-consuming' is not an acceptable excuse for such killings.
(라) "이것이 진리라고 하면, 이제 인생의 여로의 마지막에 이르러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감에 있어, 일생 동안 추구해 온 것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충분한 이유가 있네. 그러므로 나는 큰 기쁨을 가지고 내 갈 길을 가는 걸세. 나뿐만 아니라,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고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쁜 마음으로 이 길을 갈 걸세."
"아주 옳은 말씀이외다"라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정화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즉, 영혼이 모든 방면에서 육체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을 수습하고 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만으로 사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시 말하면 육체의 쇠사슬로부터 영혼이 해탈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그렇습니다."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고 해방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요"
"참 철학자들만이 오로지 영혼을 이와 같이 해방시키려 하는 거야.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와 해방이야말로 철학자들이 특별히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의 상태에 가깝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 막상 죽음에 당면해서 마다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렇지요."
"오오 심미아스, 참 철인(哲人)은 늘 죽는 일에 마음을 쓰고, 따라서 모든 사람 가운데 죽음을 가장 덜 무서워하는 자일세. 이렇게 생각해 보세. 그들이 늘 육체와 싸우고, 영혼과 더불어 순수하게 되기를 원했다면 말일세. 그들의 소원이 성취되어 하데스(사후세계)에 도착하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바라던 지혜를 얻게 될 희망이 있고 동시에 그들의 원수와 함께 있지 않게 될 걸세. 그런 곳으로 떠나려 할 즈음에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떨고 싫어하는 것처럼 모순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거기에 가면 지상에서 사랑하던 이나 아내나 자식을 만나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는 희망에서 죽기를 원했던 것이 사실이야. 그렇다면 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이로서, 그리고 저 하데스에서만 지혜를 보람 있게 향유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죽음을 싫어하겠는가? 오히려 큰 환희 속에 저승으로 떠날 것이 아니겠는가? 오오 나의 벗이여, 만일 그가 참 철학자라고 하면 그럴 것일세. 그는 저 세상에서, 그리고 거기에서만 순수하게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말일세. 사리가 이렇다고 하면, 내가 말한 것처럼, 그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소리일 거야." -플라톤 '파이돈'
각각의 제시문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다른가를 분석해야 한다.
(가) 이 글은 죽임을 당하여 인생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순간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드러난 글이다. 시의 각 행은 크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구성되어 있다. 1, 2행은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 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3, 4행은 '해도 지려 하는'의 표현을 통해 삶이 끝나가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일상에서 늘 겪는 '해가 지는' 현상과 연결시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5, 6행은 '황천'이라는 시어를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곳의 모습을 '주막'의 유무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세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어진 세계임을 나타내고 있다.
기복신앙이나 기독교적인 내세구원론, 불교적인 윤회관,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은 자연의 순환이라는 도가적 측면과는 또 다른 생사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7, 8행에서 '오늘 밤'의 시어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 죽음의 세계를 '어느 집', '묵는다'라고 나타냄으로써 더욱 구체화한다.
(나) 아내의 죽음을 맞아 장자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에 혜자가 그 이유를 묻자, 장자는 본래 삶이란 형체도 기(氣)도 없는 것이며 흐릿하고 어두운 것 속에서 변하여 기가 생기고 그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기고 그 형체가 변해서 삶이 생기지만, 이제 다시 그것이 변해서 죽음이 오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를 통해 죽음이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풀이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이란 자연의 순환이치와 같은 것이다.
(다) 오늘날 우리 사회 담론 중의 하나인 존엄사에 관한 글이다. 글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다. 존엄사를 반대하고 있는 주장을 전제하고 그 전제를 반박하는 구성이다. 전제의 근거는 ①윤리적 측면 ②의료적 측면 ③생명의 신수설 즉, 우리의 생명은 모두 신이 주신 것으로 생명의 소유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신이라는 측면 등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박의 논거로 ①환자의 감내하기 힘든 고통 ②신체적 불편 ③삶의 질의 저하 등을 제시하였고 ①적자 생존과 같은 생존적 차원과 ②치료 비용 부담과 같은 경제적 측면은 논거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라)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향한 여정을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그려낸 글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에서 이룬 진리의 세계를 완성하는 공간으로 하데스(사후세계)를 인식하고 그 곳에서 진리의 마지막 단계를 이룰 수 있으므로 참 철인들에게는 행복의 세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곧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정화이자 해탈로 묘사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영혼이 순수하게 혼자 있는 상태를 염원해 왔으므로 참 철학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후 세계에서 철학자들은 완성하고자 했던 지혜를 얻게 됨으로 죽음을 큰 기쁨 속에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개개인의 삶의 과정과 목표에 따라 죽음을 맞는 태도가 다르게 드러난 셈이다.
대화제(大話題)는 '삶과 죽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숙명적 상황에 처하는데, 대처하는 방식은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삶을 전제로 한 죽음임을 유의하면서 논의에 임해야 한다. 자칫 죽음에 대한 무념의 태도나 지지적 태도 등이 논의 대상이 아님을 알고 논지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논제1】은 각각의 제시문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 태도가 어떻게 다른가를 분석한 뒤에 그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이다. 설명이라는 방법은 독자의 이해가 목적이기 때문에 제시문 근거를 바탕으로 쉽게 풀어서 말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되겠다. 약 600자 분량이니 제시문마다 150자 남짓씩 설명하면 된다.
【논제2】 ㉠논제1을 바탕으로 ①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이에 반하는 사례를 통해 ㉣주장을 강화하시오)
이 논제에서 논의 대상은 ①이다. 즉 삶과 죽음에 대한 수험생들의 견해를 논술하는 것이다. 다만 ㉠부터 ㉣까지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조건이 많은 논제는 채점에 객관성을 유지하기 좋은 방편이다. 해당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우선 ㉠은 논의의 범주이다.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제시문에 드러난 견해 안에서만 논의해야 한다. 이 때 논제1에 삶과 죽음에 대한 4가지 견해가 드러나 있어 어느 한 견해를 선택할 것인지, 네 견해의 일부나 전부를 일반화하여 논술할 것인지 먼저 결정해야 한다. ㉡은 논의 과정에서 제시되어야 할 근거인데 사례란 구체적으로 있었던 존재라야 한다. 물론 문학적 허구라도 보편성을 지닐 때 사례로서 충분한 자격을 지닌다. ㉢ 역시 논의 과정에서 제시되어야 할 근거인데 ㉣과 논리적으로 연계시켜 생각해 보면 ㉢은 전제되고 또한 반박되어야 할 요소이다. 반례이니 반박함으로써 주장이 강화되는 것이다. 다만 800자의 짧은 글이니 완성된 글의 구조(정당화 문맥구조)를 계획하지 말고 본론 형태만 갖추어도 충분하겠다.
·우리나라 문학에 나타난 삶과 죽음의 인식
우리 문학에서는 삶과 죽음을 이어지는 현상으로 인식하고 형상화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를 테면, 고조선 시대의 '공무도하가'에서는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이별해야 하는 아내의 비극적 심정이 남편을 따라 죽음으로써 저승에서 재회를 기약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은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삶이 죽음의 세계에서도 이어진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고전 소설 '심청전'에서는 죽음이 재생의 의미로 수용되고 있다.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죽음 이전의 단계에서 질적으로 변화하고 상승한 새로운 존재로의 재생을 의미한다. 죽음을 통한 자기 갱신을 성공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을 또 다른 의미로 바라보고 있다. 신라시대 유행한 향가 '제망매가'에서는 누이의 죽음을 애석해 하면서 죽음의 세계에서의 재회를 기약하고 있다. 물론 저승에서 재회를 위한 삶의 세계에서 노력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 문학의 여러 작품에서 죽음을 삶과의 단절로 인식하고 그 슬픔을 그려내고 있다. 정지용 '유리창'과 김광균 '은수저' 등에 형상화된 자식의 죽음에 대한 부모의 슬픔의 정은 육친의 슬픔을 넘어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삶은 이승에서 이루어지며 죽음은 저승의 몫으로 본 것이다. 전통 민속 상례에서 상여꾼의 앞소리 또한 죽음을 이승과의 단절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죽음이 현실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많은 작품들이 삶과 죽음을 단절적으로 인식하고 형상화한 작품들이 드러나고 있다.
·존엄사 논란 계기로 본 한국인 죽음의 의미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의 글 중에서
존엄사는 그동안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계를 중심으로 도입 요구가 계속됐다.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고 싶은 '웰다잉(well dying)' 개념이 확산되면서 국민의 찬성 목소리도 높아졌다. 국립암센터가 2008년 10월 성인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87.5%가 존엄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양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의 경우 1975년 4월 혼수상태에 빠진 딸(퀸란)의 생명유지장치 제거 권리를 아버지에게 달라는 소송에서 법원이 아버지의 주장을 인정함으로써 존엄사 논쟁에 불이 붙었다. 영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논쟁이 벌어졌고, 식물인간 환자에게서 영양공급장치를 떼어내도 좋다는 판결(1993년) 등이 나왔다. 독일은 형법으로 "어떤 이유에서도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한 개인의 판단을 기준으로 죽음 방식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방식이 되고 만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다수가 공감하는 방식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도 바람직한 방식을 찾긴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래도 '한국사람'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에 각각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지탱해주는 공통분모는 있게 마련이다. 이는 마치 하나의 나무에서 생겨난 수많은 가지와 잎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돼 있는 것과도 같다. 서로 다른 가지와 잎을 각각의 차원에서만 파악한다면 모든 가지와 잎이 공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낼 수 없다. 오직 뿌리의 차원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바람직한 방식이 찾아지는 것이다.
죽음의 해법을 찾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는 하나의 흐름은 바로 전통 속에 있다. 우리 전통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를 칼 융은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 왔을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돼 있다고 봤다. 그중에서 몸은 '모음'을 의미한다. 물, 쇠고기, 시금치, 콩나물 등을 '소화'라는 방식을 통해 모아놓은 것이다. 물, 쇠고기, 시금치, 콩나물 또한 그 이전의 물질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원재료를 분석해 들어가 보면 결국 우주에 가득한 물질의 본질인 기(氣)에 도달한다. 형체를 가진 모든 몸은 기가 모여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닷물에 얼음이 떠 있는 것과도 같다. 사람들이 그것을 얼음덩어리로만 안다면 얼음덩어리가 녹아 없어진 뒤에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얼음의 본질을 모르는 탓이다. 얼음의 본질은 물이다. 물의 차원에서 보면 얼음이 녹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즉 물의 차원에서 보면 얼음이 얼어 있을 때나 녹았을 때나 변함없는 물이다.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차이는 오직 형태뿐이다. 얼음이 녹는 것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의 몸이 죽는 것도 이와 같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기가 잠시 모여 있다는 의미고, 죽는다는 것은 기가 흩어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죽음을 '돌아가신다'고 표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논제1】
각 제시문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삶과 죽음의 세계에 대하여 (가)는 여정처럼 이어진 공간으로, (나)는 자연의 순환이치와 같은 경우로, (다)는 본인의 의지 있는 삶의 필요성을, (라)는 삶에서 이루는 지혜를 완성시키는 세계로 인식하고 있다.
(가)에는 죽음의 세계에는 ‘주막’이 없는 정도이니 삶의 세계에 비해 다소 풍류를 즐길 수는 없을 지라도 지속적 성격을 지닌다고 인식한다. 하여 죽음을 해가 매일 저무는 것처럼 일상적 행위로 받아드리고 있다. (나)에서는 삶과 죽음이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천지에 함께 존재하는데, 계절의 순환처럼 다르게 보일 따름이다.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것은 형체이고 그 형체는 기가 변한 것이고 그 기는 원래 흐릿하고 어두운 것이 변한 것이다. 삶과 죽음도 이처럼 변화하여 순환하는 과정인 것이다. (다)에서는 인간의 삶은 본인의 의지적 행위가 이루어질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인위적인 기계의 도움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은 죽음에 대한 의미를 밝히지는 않고 삶의 의미만을 제시하고 있다. (라)에서는 삶과 죽음은 이어지고 발전하는 단계로 인식하고 있다. 삶의 세계에서 이룬 지혜를 완성시키는 단계로 죽음을 생각해야 참된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삶의 세계에서 이룬 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
【논제2】
삶의 세계와 죽음 세계에 대해 우리 조상들은 연결적 인식과 단절적 인식이 공유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두려움보다는 담담한 심정이 드러나고 있는데 제시문에 드러난 것처럼 여로의 한 과정으로나, 자연 순환의 이치, 지혜의 완성 그리고 인위적 연명의 불필요성 등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후자의 경우 후자의 경우 안타까움과 절망적 심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글은 전자에 주제의식을 드러내고자 한다.
김소월의 시 『초혼』에 드러나는 고복 의식을 한 사례로 제시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신을 떠난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이미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내 보려고 하는 초혼의식을 하였다. 이는 영혼과 육신이 분리 될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사람의 몸과 마음, 어느 하나 죽어 없어지는 것은 없다. 죽어서 없어진다는 생각은 본심을 망각한 채 욕심에 빠져 몸의 형체만 보고 판단을 내리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의 내 마음에서 보면 죽어 없어지는 것은 없다. 다만, 몸의 차원에서 볼 때 형태가 바뀔 뿐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던 기가 흩어져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래 있었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도 같다.
한편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중세 유럽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은 페스트가 창궐한 지역에서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현실이 주는 공포감에 대한 인간의 몸부림으로 볼 수도 있다. 마치 길손이 갑자기 강도를 만났을 때 우선 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살려 주십시오’하는 행위와 견줄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현상이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개인의 인식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기 상황에서 살고자 행동하는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 반사적 행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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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훈 부산사대부고 교사 |
(주) 천재교육
III. 소설의 수용과 창작,
V. 수필의 수용과 창작
·고등학교 『문학(하)』
(주) 천재교육
VI. 한국 문학의 특질과 흐름
·고등학교 『전통윤리』
교육인적 자원부
III. 친척·이웃·교우관계와 바람직한 삶
·고등학교 『사회 · 문화』
(주)중앙교육진흥연구소
V. 현대 사회와 사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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