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영웅 안용복은 당시에는 천민 계층에 속하는 부산 출신의 어부였다. 부산포에 있던 왜관에 출입하면서 일본말을 배운 그는 1693년 어민들과 함께 울릉도 부근으로 전복을 따러 갔다고 일본의 어부들과 부딪혔다. “왜 남의 바다에 와서 고기를 잡느냐”고 항의하다가 숫자가 부족해 일본으로 납치되고 만다.
안용복은 도쿠가와 막부에 끌려가서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서 불과 하루 거리지만 일본 땅에서는 닷새 거리이므로 분명히 조선 땅”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이에 굴복한 막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문서를 건네주고 풀어준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던 중 나가사키에서 문서를 빼앗기고 대마도에 90일 동안 구금되고 만다. 다시 부산 왜관에 50일 동안 구금되면서도 항의를 거듭했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났지만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해 안용복을 은근히 나무라는 분위기였다.
이후 조정이 태도를 바꿔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문서를 일본에 보내자 일본 막부는 어부들에게 이 지역의 고기잡이를 금지시켰다. 대마도주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영유권을 주장하자 안용복이 다시 나섰다. 그는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내쫓고 일본 막부를 찾아가 강력 항의한 끝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확약을 얻어내고 대마도주마저 굴복시켜 우리 땅임을 확실히 했다. 그 후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의 중요성을 깨닫고2년에 한 차례씩 순시하도록 하였다. -사이버독도(www.dokdo.go.kr)에서 발췌 <중앙도서관 역사논술 강사>
△생각해보기
1. 안용복은 울릉도에 들어온 일본인들을 내쫓기 위해 ‘울릉우산 양도 감세관’이라고 스스로 칭하며 양국 간에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에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겨우 유배형으로 감형되긴 했지만 그 후로는 기록이 끊어졌습니다. 재판 때 안용복은 어떻게 항변하고, 재판관은 어떤 이유로 판결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조선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에 농토가 없어 척박한데다 왜구들이 자주 침입하자 1400년대 이후 백성들을 본토로 철수시키고 섬을 비우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다가 1882년에야 다시 백성들을 울릉도로 이주시켰습니다. 현재 독도에는 김성도 씨가 살고 있습니다. 독도의 영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지 친구들과 의논해 봅시다.
3. 최근 우리나라는 독도 인근 해역에 대한 해양조사를 벌임으로써 일본과의 갈등이 커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교과서 왜곡 지원 의혹, 해양 경비 강화, 해양 조사 등 독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어떤 방법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지 알아보고 그에 대한 반론을 펴 봅시다.
△알고 있나요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의 땅이 된 것은 지증왕 13년(512) 때이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13년 6월 신라 이사부가 울릉도를 정벌하여 신라에 귀속시켰고 해마다 토산물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사부는 성이 김씨로 지증왕 13년에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됐다. 당시 우산국 사람들은 신라 해안을 자주 침략하고 무역을 방해하는 등 신라 조정에 골칫거리였습니다. 이사부는 정벌을 계획했지만 우산국 사람들이 사납고 거칠어 힘으로 굴복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꾀를 냈습니다.
그는 우산국 사람들이 세상 정보에 어둡다는 것을 이용해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실었습니다. 우산국 해안에 이른 그는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맹수를 풀어 모조리 잡아먹게 하리라.”하고 위협했다. 그러자 우산국 사람들은 항복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사부는 그 후 신라의 최고 관직까지 올라 한강 일대와 대가야를 신라에 편입시키고 낙동강 하류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등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웠다.
안용복 장군 충혼비(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