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준의 그림밖의 그림 <1> 지역 미술작가로 살아가기
화가는 직업이 아니라 생활고 버티기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경남 의령의 한 폐교를 개조한 돌조각가 조정우씨의 작업장 전경.
기획자로서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할 때는 늘 가슴이 설렌다. 현장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 보거나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없이 즐겁다. 그러나 때로는 작가의 열악한 창작 현실을 확인하는 가슴 아픈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초전리 내기마을에서 작업장을 전세 내 8년 째 홀로 버티고 있는 오순환(42) 씨다.

그는 얼마 전 경제적 압박을 견디다 못해 마을 앞 가스충전소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1988년 경성대 예술대 회화과를 나온 후 전업작가로 작품 제작에만 매달려 왔지만 경제 사정은 여전히 빠듯하다. 그 동안 작가로서 지명도가 점차 알려져 활동의 폭은 확장됐지만 경제적 여건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1994년 6월 지금은 없어진 갤러리 누보에서 아내가 내준 곗돈 300만 원으로 첫번째 개인전을 치를 때만 해도 화가의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 몰랐다며 흉금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지금도 생활비 조달은 아내 몫이다. 그림이 조금씩 팔리기는 하지만 그 돈은 작품 제작비 대기에도 모자란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1주일에 한번 정도 울주 작업장을 떠나 부산 집에 갈 정도로 악착같이 작품 제작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오 씨는 "화가가 직업이 아니라 버티기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래도 화가의 길을 포기할 수 없으니 아마 천형인가 보다 하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고 토로했다.

지난 5월초 부산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비워진 농가에 '대안공간 오픈 스페이스 배'를 차린 네 명의 30대 미술가들 역시 열악한 지역 작가들의 창작 여건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 작업장은 기장체육관에서 울산쪽으로 14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왼편으로 나오는 월명사 밑에 있다. 현재 입주한 작가는 서상호(39) 박은생(38) 안재국(37) 정만영(37) 씨로 허름한 농가와 악취나는 돼지우리를 개조해 작업장으로 만들기 위해 밤 새우기를 밥 먹듯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업작가로 뛰어 들면서 목수 미장 타일 붙이기 등 거친 육체노동으로 작업비용을 마련하는 게 몸에 뱄다.

경남 의령에서 한 폐교를 빌려 작업하고 있는 조정우 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인 활동을 하다가 석조각을 시작했다. 얼마 전 6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방문했다. 폐교 작업장에는 그의 작품이 가득해 그가 전업작가 임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개인전에 대한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술계의 평가가 어떨지, 작품 판매는 될지, 사람들은 많이 올지 걱정된다"는 그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어떤 작가든 한결같은 꿈은 '작업에만 전념'이다. 하지만 현실은 아이들 교육과 가정 생활에 대한 압박 때문에 창작 활동을 중도 포기하거나 가산을 조금씩 탕진해 나가며 힘겨운 버티기를 감행해야한다. 작가 지원을 해주는 기관은 그나마 미술관 정도인데 그것도 그리 기회가 많지 않다. 지금도 지역의 젊은 작가들은 지하실 한구석에서 라면으로 배를 채우며 세상에 내놓을 자신의 작업과 거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예술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공공적 의미도 의외로 크다. 삶 자체가 심미화 되어가고 있는 요즘, 그 사회적 의미는 더욱 부각되고 있다. 문화의 세기라 하지만 문화 생산자에 대한 복지와 사회적 인식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는 힘든 작업 환경에서 몸무림 치는 작가들의 아픔을 사회 공동의 책임으로 생각해 봐야 할 때 아닌가.

김해 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



▲ 필자는 조현화랑, 갤러리 칸지 등의 큐레이터를 거쳐 2002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 현장감독을 맡았고 현재 부산대 박사과정(미학)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