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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실전연습] 현대에 요구되는 인간상은 무엇인가
<실전 연습문제>
아래 제시문은 『맹자(孟子)』의 「만장(萬章)」 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에 서술된 세 인물은 각기 독특한 고전적 덕목을 갖고 있지만,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보완되어야 할 점도 없지 않다. 이들의 덕목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대비적으로 활용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점 하나를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현실적 인간상을 구성하여 논하시오.
(가) 백이(伯夷)는 눈으로는 나쁜 빛을 보지 아니하며 귀로는 나쁜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고 다스릴 만한 백성이 아니면 다스리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이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혼란하면 물러서서, 옳지 못한 정치가 나오는 곳과 옳지 못한 백성들이 머 물러 사는 곳에는 차마 거주하지 못하였으며, 예(禮)를 모르는 향인(鄕人) 들과 함께 거처하는 것을 마치 관복(官服)과 관모(官帽)를 갖추고 더러운 길바닥에 앉은 것처럼 생각했다. 주(紂)가 다스리는 시대가 되자 북해(北 海)의 바닷가에 거주하면서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므로 백이 의 기풍을 들은 자들 가운데 몰지각한 지아비는 분별력을 갖게 되고 나약 한 지아비는 뜻을 세우게 되었다.
(나) 이윤(伊尹)은 ꡒ어떤 군주인들 섬김 수 없겠으며, 어떤 백성인들 다스 릴 수 없겠는가ꡓ라고 말하면서 세상이 다스려져도 나아가고 혼란해도 나아갔다. 그래서 ꡒ하늘이 이 백성을 낸 뜻은 먼저 안 사람으로 하여금 나중에 아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신 것이며, 먼저 깨달은 자로 하여금 나중 에 깨달은 자를 깨우치게 하신 것이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에서 먼저 깨달은 자이니, 내가 장차 이 도(道)로써 백성을 깨우치겠다ꡓ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천하의 백성 중에서 필부필부(匹夫匹婦)라도 요순(堯舜)의 혜택 을 입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밀쳐서 도랑 속으로 빠뜨린 것처럼 생각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의 중책을 스스로 맡은 것이다.
(다)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군주 섬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작은 벼슬을 사양하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면 현명함을 숨기지 아니하여 반드시 그 도리에 맞게 하였으며,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고 곤궁을 당해도 걱정하지 않았다. 예(禮)를 모르는 향인(鄕人)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유유히 차마 떠나지 못하여 ꡐ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니, 비록 네가 옆에 서 옷을 함부로 걷어올리고 벗어버린다고 한들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ꡑ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하혜의 기풍을 들은 자들 가운데 옹졸한 지아비는 관대해지고 야박한 지아비는 돈독해졌다.
3. 다음은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에서 뽑은 글이다. 이 글로부터 우리 문화와 관련된 문제들을 유추하여 지적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
어느 날 저녁녘에 독고준은 자기 방에서 달이 지난 미국 잡지 ꡐ애틀랜틱ꡑ을 읽고 있었다. 아프리카 특집인 그 호를 읽으면서 준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거기에는 아프리카 사회의 여러 문제를 다루면서, 아프리카 의 조각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 작가의 단편도 실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 명물인 정글의 짐승들이 점점 수가 줄어간다는 기사는 아주 착찹한 감정을 자아냈다.
다른 글과 모두어서 읽어 볼 때, 거기에는 ꡐ새 아프리카ꡑ가 있었다. 준의 머릿속에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대체로 사자와 코끼리가 걸어다니고 흰 수렵 모자를 쓴 백인 탐험가가 총을 들고 걸어가는 앞뒤로 활과 창을 가진 토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잡지에 따르면 백인들은 사냥만 한 것도 아니고 토인들도 맨발 벗고 사냥 안내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스탠리와 리빙스턴 그리고 슈바이처와 헤밍웨이의 아프리카가 아니고 아프리카인의 아프리카였다. 서구의 문명 과 침공을 받고 괴로워하면서, 자기 조종을 하고 있는 역사 있는 전통 사 회의 모습이었다. 낡은 것과 새 것, 애착과 결의, 해체되어 가는 가족 제 도와 도시인의 고독, 전통 종교와 기독교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있었다. 준은 어떤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아프리카 상(像)은 서양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것이었다. 영화와 소설과 신문이 제공한 그 이미지들은 그렇게 이해성이 없고 무책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작가의 손으로 된 짤막한 단편 소설에는 사랑이 있었다. 여행자로서는 결코 지닐 수 없는 그 공간에 발붙인 사랑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독고준이었다. 거기에는 대륙과 대륙을 넘어선 공감이 있었다. 아프리카를 다룬 어느 서양 사람의 소설에서도 느끼지 못한 동시대성 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덟 페이지에 실린 아프리카 조각의 사진 곁에는, 피카소의 ꡐ댄서ꡑ라는 작품을 실어 놓고 놀라운 유사성을 보라고 주(註) 을 달고 있다. 피카소가 이 조각을 보았을까? 혹은 우연의 일치일까?
페이지마다 넘기면서 본 그것은 이십 세기 서양 미술의 원형(原形)에 틀림없었다. 그는 요 먼저 미술사를 읽을 때 그런 대목을 읽은 것 같았다. 준 의 머리는 헷갈려졌다. 아프리카의 경우 이것은 정통이다. 서양에서는 같은 내용이 전위(前衛)가 된다. 그는 본문을 읽어 보았다.
거기에 필자는 쓰고 있었다. 피카소, 브라크, 블라맹크, 마티스가 니그로 예술에서 색채와 구성과 환상을 얻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현대 화가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반대로 그들은 다빈치와 루벤스에게서 색채와 원근법과 환상을 받고 있을까? 희극이다. 그러나 약간은 슬픈 희극이다. 그러나 독고준이 더 씁쓸하게 생각한 것은, 한국 사람인 자기가 서양 미술사의 시점에서 이 이방(異邦)의 미술품에 놀라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서양 사람처럼, 이러한 기묘한 인식의 우회(迂廻). 그것은 물론 나의 책임이 아니다.
몇 세기 전에 서양 사람들이 무슨 발광이 나서 아프리카에 갔던 김에 그 곳 의 미술품을 갖다가 박물관에 벌여 놓고 그것을 피카소나 누군가가 보았다는 것은 내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지의 필자에 의하면, 이처럼 귀중한 아프리카의 민족 예술이 근래에 와서는 씨가 마르게 되어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이 예술은 구미 각 국에서 오는 관객들을 위해 만들어지는데, 한결같이 거친 솜씨여서, 살아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다.
이 조각은 무덤에 놓는 것과 종교 의식에 쓰이는 탈 같은 것으로서, 원래 순수한 감상을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니라 한다. 구라파의 문명이 들어온 이후로 토 착 종교와 옛날 관습이 점점 사라져 가는 데 따라서 이들 조각의 원래의 쓸데는 줄어가기 때문에, 공장(工匠)들은 수브니르 숍을 위해 제작하지만 그런 작품은 거의 날림이어서 보잘 것이 없다. 구라파식인 유화(油畵)를 하는 아프리카 인에게 전통의 계승을 권고하면, 그들은 모욕을 느낀다.
자연히 기왕에 생산된 작품을 보존하는 것이 급한 일인데, 사방에 흩어져 있고 정작 신생 아프리카가 미술관을 차리자면 외국에서 향토의 작품을 사들여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참고> 수브니르 숍 : 기념품 가게
아래 제시문은 『맹자(孟子)』의 「만장(萬章)」 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에 서술된 세 인물은 각기 독특한 고전적 덕목을 갖고 있지만,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보완되어야 할 점도 없지 않다. 이들의 덕목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대비적으로 활용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점 하나를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현실적 인간상을 구성하여 논하시오.
(가) 백이(伯夷)는 눈으로는 나쁜 빛을 보지 아니하며 귀로는 나쁜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고 다스릴 만한 백성이 아니면 다스리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이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혼란하면 물러서서, 옳지 못한 정치가 나오는 곳과 옳지 못한 백성들이 머 물러 사는 곳에는 차마 거주하지 못하였으며, 예(禮)를 모르는 향인(鄕人) 들과 함께 거처하는 것을 마치 관복(官服)과 관모(官帽)를 갖추고 더러운 길바닥에 앉은 것처럼 생각했다. 주(紂)가 다스리는 시대가 되자 북해(北 海)의 바닷가에 거주하면서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므로 백이 의 기풍을 들은 자들 가운데 몰지각한 지아비는 분별력을 갖게 되고 나약 한 지아비는 뜻을 세우게 되었다.
(나) 이윤(伊尹)은 ꡒ어떤 군주인들 섬김 수 없겠으며, 어떤 백성인들 다스 릴 수 없겠는가ꡓ라고 말하면서 세상이 다스려져도 나아가고 혼란해도 나아갔다. 그래서 ꡒ하늘이 이 백성을 낸 뜻은 먼저 안 사람으로 하여금 나중에 아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신 것이며, 먼저 깨달은 자로 하여금 나중 에 깨달은 자를 깨우치게 하신 것이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에서 먼저 깨달은 자이니, 내가 장차 이 도(道)로써 백성을 깨우치겠다ꡓ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천하의 백성 중에서 필부필부(匹夫匹婦)라도 요순(堯舜)의 혜택 을 입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밀쳐서 도랑 속으로 빠뜨린 것처럼 생각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의 중책을 스스로 맡은 것이다.
(다)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군주 섬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작은 벼슬을 사양하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면 현명함을 숨기지 아니하여 반드시 그 도리에 맞게 하였으며,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고 곤궁을 당해도 걱정하지 않았다. 예(禮)를 모르는 향인(鄕人)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유유히 차마 떠나지 못하여 ꡐ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니, 비록 네가 옆에 서 옷을 함부로 걷어올리고 벗어버린다고 한들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ꡑ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하혜의 기풍을 들은 자들 가운데 옹졸한 지아비는 관대해지고 야박한 지아비는 돈독해졌다.
3. 다음은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에서 뽑은 글이다. 이 글로부터 우리 문화와 관련된 문제들을 유추하여 지적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
어느 날 저녁녘에 독고준은 자기 방에서 달이 지난 미국 잡지 ꡐ애틀랜틱ꡑ을 읽고 있었다. 아프리카 특집인 그 호를 읽으면서 준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거기에는 아프리카 사회의 여러 문제를 다루면서, 아프리카 의 조각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 작가의 단편도 실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 명물인 정글의 짐승들이 점점 수가 줄어간다는 기사는 아주 착찹한 감정을 자아냈다.
다른 글과 모두어서 읽어 볼 때, 거기에는 ꡐ새 아프리카ꡑ가 있었다. 준의 머릿속에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대체로 사자와 코끼리가 걸어다니고 흰 수렵 모자를 쓴 백인 탐험가가 총을 들고 걸어가는 앞뒤로 활과 창을 가진 토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잡지에 따르면 백인들은 사냥만 한 것도 아니고 토인들도 맨발 벗고 사냥 안내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스탠리와 리빙스턴 그리고 슈바이처와 헤밍웨이의 아프리카가 아니고 아프리카인의 아프리카였다. 서구의 문명 과 침공을 받고 괴로워하면서, 자기 조종을 하고 있는 역사 있는 전통 사 회의 모습이었다. 낡은 것과 새 것, 애착과 결의, 해체되어 가는 가족 제 도와 도시인의 고독, 전통 종교와 기독교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있었다. 준은 어떤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아프리카 상(像)은 서양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것이었다. 영화와 소설과 신문이 제공한 그 이미지들은 그렇게 이해성이 없고 무책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작가의 손으로 된 짤막한 단편 소설에는 사랑이 있었다. 여행자로서는 결코 지닐 수 없는 그 공간에 발붙인 사랑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독고준이었다. 거기에는 대륙과 대륙을 넘어선 공감이 있었다. 아프리카를 다룬 어느 서양 사람의 소설에서도 느끼지 못한 동시대성 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덟 페이지에 실린 아프리카 조각의 사진 곁에는, 피카소의 ꡐ댄서ꡑ라는 작품을 실어 놓고 놀라운 유사성을 보라고 주(註) 을 달고 있다. 피카소가 이 조각을 보았을까? 혹은 우연의 일치일까?
페이지마다 넘기면서 본 그것은 이십 세기 서양 미술의 원형(原形)에 틀림없었다. 그는 요 먼저 미술사를 읽을 때 그런 대목을 읽은 것 같았다. 준 의 머리는 헷갈려졌다. 아프리카의 경우 이것은 정통이다. 서양에서는 같은 내용이 전위(前衛)가 된다. 그는 본문을 읽어 보았다.
거기에 필자는 쓰고 있었다. 피카소, 브라크, 블라맹크, 마티스가 니그로 예술에서 색채와 구성과 환상을 얻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현대 화가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반대로 그들은 다빈치와 루벤스에게서 색채와 원근법과 환상을 받고 있을까? 희극이다. 그러나 약간은 슬픈 희극이다. 그러나 독고준이 더 씁쓸하게 생각한 것은, 한국 사람인 자기가 서양 미술사의 시점에서 이 이방(異邦)의 미술품에 놀라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서양 사람처럼, 이러한 기묘한 인식의 우회(迂廻). 그것은 물론 나의 책임이 아니다.
몇 세기 전에 서양 사람들이 무슨 발광이 나서 아프리카에 갔던 김에 그 곳 의 미술품을 갖다가 박물관에 벌여 놓고 그것을 피카소나 누군가가 보았다는 것은 내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지의 필자에 의하면, 이처럼 귀중한 아프리카의 민족 예술이 근래에 와서는 씨가 마르게 되어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이 예술은 구미 각 국에서 오는 관객들을 위해 만들어지는데, 한결같이 거친 솜씨여서, 살아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다.
이 조각은 무덤에 놓는 것과 종교 의식에 쓰이는 탈 같은 것으로서, 원래 순수한 감상을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니라 한다. 구라파의 문명이 들어온 이후로 토 착 종교와 옛날 관습이 점점 사라져 가는 데 따라서 이들 조각의 원래의 쓸데는 줄어가기 때문에, 공장(工匠)들은 수브니르 숍을 위해 제작하지만 그런 작품은 거의 날림이어서 보잘 것이 없다. 구라파식인 유화(油畵)를 하는 아프리카 인에게 전통의 계승을 권고하면, 그들은 모욕을 느낀다.
자연히 기왕에 생산된 작품을 보존하는 것이 급한 일인데, 사방에 흩어져 있고 정작 신생 아프리카가 미술관을 차리자면 외국에서 향토의 작품을 사들여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참고> 수브니르 숍 : 기념품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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