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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배기 유림(여)이는 요즘 1주일에 한 번씩 ‘논술’을 공부하고 있다. 방문교사가 집에 찾아와 그림책을 읽어주면 아이는 말이나 그림으로 독후감을 대신한다. “논술 배우기엔 너무 이른 것 아니냐”는 질문에 엄마 최모(33·서울 도곡동)씨는 “이제 대입에선 논술이 대세 아니냐. 책 읽는 습관도 길러줄 겸 늦게 시키는 것보단 낫다”고 말했다. 최근 논술사업을 시작한 서울 서초동의 H사는 아예 ‘통합논술 프로그램’이란 이름을 걸고 3~7세 원생을 모집하고 있다. 방문교사가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토론하는 식이다. 이 업체는 현재 ‘1000명 회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학습지 회사인 C사도 1년 전부터 유아논술 교재를 제작해 전국 유아·유치원에 공급하고 있다. 유치원을 돌아다니며 시장조사를 한 결과, ‘장사가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교재가 꼭 글쓰기에 한정된 건 아니었지만, 유치원들의 요구로 교재에 ‘논술’이란 두 글자가 붙게 됐다. 업체측은 “요즘은 엄마들이 유치원에서 논술까지 해줘야 좋아한다”며 “동네 보습학원들도 유아(幼兒)논술반을 만들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대학들이 2008년 대학입시부터 ‘논술’ 비중을 높이겠다고 최근 발표한 이후 ‘사교육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서울 대치동, 목동 등 대입 수학능력시험 중심으로 짜인 학원가는 ‘논술’로 무게 중심을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특히 논술이 사교육의 ‘핵’으로 급부상하면서 “대학입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찍부터 ‘논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분위기가 학부모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 가고 있다. 2~3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초등논술 바람이 이제 유아단계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학부모들의 ‘논술 불안감’을 이용한 업체들의 얄팍한 상술이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서울 대치동의 한 초등 논술학원 로비. 아이들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유아 논술’이 최대 화제였다.
“우리 애는 여섯 살 때 웨이팅(waiting:대기자 명단) 걸어놔서 초등학교 1학년 때 (논술학원에) 들어갔다니까요.”
“거기 2~3년 웨이팅은 기본이지. 유아반은 임산부들이 와서 신청서 적고 간다니까요.”
“36개월짜리 앉혀 놓고 레벨 테스트 시키더라고요. 애가 얼마나 집중할 수 있나 보려고.”
기존의 고등부 중심 논술학원도 유아·초등 논술시장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E논술학원장은 “저학년 자식을 둔 부모들은 다 자기 자식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갈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고등부보다 초등부 논술시장이 훨씬 크다”며 “초등학교 2~3학년 아이를 둔 엄마들도 ‘늦은 것 아니냐’며 대입논술을 걱정한다”고 했다.
주요 대학들이 논술을 강화한다는 발표를 한 이후 학원에는 학부모들의 문의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대치동의 유명 M학원은 “발표 후 상담일지를 못 쓸 정도”라고 했다. L논술학원 박모 원장도 “5세 유아 코스에서도 학부모들이 자꾸 쓰는 걸 원해서 기존 토론과 말하기 교재에 글짓기 칸을 만들어 논술을 시키기 시작했다”고 했다.
서울 강남의 H논술학원 접수창구에서 만난 임선영(가명·35·서초동)씨. 초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임씨는 “요즘 (초등논술) 안 하는 애들도 있느냐”고 물었다. “예전엔 ‘국·영·수’였다면 지금은 ‘논·영·수’라고 부를 정도”라는 것. 열기가 뜨겁다 보니 논술조차 ‘선행학습’으로 받아들이는 추세라고 했다. 한 논술학원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 읽기교재에 중고생도 이해하기 힘든 소설가 오상원의 ‘유예’를 끼워 넣는가 하면, ‘다국적 기업의 장단점은 무엇인가’로 토론을 시키기도 한다. 이 학원 관계자는 “이렇게 해야 학부모들에게 먹힌다”고 했다.
서울 강남의 M학원은 아예 고등학교 논술과 같은 방식으로 초등 논술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인가’란 주제로 600자 원고지를 채워야 한다. 아이들은 이미 신미양요, 조미통상수호조약에서부터 작전통제권까지 토론을 끝낸 상태. 한 시간 동안 써 내려간 논술은 첨삭교사의 평가를 거친다. 이 학원의 5학년 프로그램에는 ‘연역추리와 귀납추리를 비교하시오’, ‘평등과 자유, 무엇이 우선돼야 하는가’ 등의 토론 주제도 포함돼 있었다.
학원에서 만난 오모(13·대현초 6)양은 “고3 오빠가 대입논술을 준비하고 있다”며 “엄마가 나도 논술을 탄탄히 준비해야 한다고 해서 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강남 일대에선 1인당 20만~30만원짜리 소그룹 논술 과외도 생겨나고 있다. 학부모 유모(36)씨는 “대입논술에서 아무리 창의력을 평가한다고 해도 어쨌든 오래 준비한 아이들에게 유리한 것 아니냐”며 “다른 애들 다 하는데 손 놓고 불안해할 부모는 없다”고 말했다.
(김남인기자 (블로그)kni.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