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들이 뽑은 ‘빛공해’

서울시 ‘제11회 빛공해 사진·UCC’ 공모전 개최

이정은 | press@hkbs.co.kr | 2015.07.02 14:18
[환경일보] 이정은 기자 = 서울시와 조명박물관은 빛공해를 줄이고 감성적인 좋은빛 밤환경 조성을 시민들과 함께하고자 ‘빛공해 사진·UCC 공모전’ 개최(3월 23일~5월 26일) 결과, 총 70점의 수상작을 발표했다.

올해로 11번째를 맞는 ‘2015 빛공해 사진·UCC 공모전’은 미국 아틀란틱대학 천문대와 교류하는 국제공모전으로 지난 3월23일~5월26일까지 진행됐다.

일반부 사진부문 대상을 수상한 윤승희씨의 ‘휘황찬란’ <사진제공=서울시>



어린이·청소년부 사진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원진 학생의 화이트 아웃(White Out)



공모전은 어린이·청소년부와 일반부로 나눠 생활 속의 빛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도록 주안점을 두고 ‘공해의 빛’, ‘생명의 빛’ 의 주제로 진행했다.

사진 및 UCC 작품 총 3690점의 작품이 응모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수상작으로 서울시장상 35점(어린이·청소년부 사진 30점, UCC 5점), 조명박물관장상 35점(일반부 사진 35전, UCC 5점)을 선정했다.

어린이 청소년부 대상은 ‘화이트 아웃’이란 제목으로 이원진 학생(한국상해학교 3학년)이 차지했다. ‘화이트 아웃’은 청소년의 시선을 통해 일상생활 속 인공적인 빛의 영향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부문 최우수상은 장식조명의 빛이 반사돼 일상생활을 불편함을 사진에 표현한 ‘빛 때문에 밤잠을 못자요’의 이병규 학생(조일로봇고 3학년)이 차지했다. UCC부분 최우수상은 ‘과도한빛, 이대로는 안돼요’의 계성초등학교 조은슬 학생 외 3명이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에 돌아갔다.

일반부 대상은 야간 고층빌딩 숲의 넋을 잃을 정도의 화려한 불빛을 사진에 담은 ‘휘황찬란’의 윤승희씨가 수상했다.

일반부 사진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서종모씨의 ‘잠들지 않는 도시’



어린이 청소년부 사진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병규 학생의 ‘3호선도 좋지만 빛 때문에 잠을 못자요’



사진부문 최우수상은 ‘잠들지 않은 도시’로 도시 불빛의 경관은 아름답지만 자연은 괴로움을 표현한 작품의 서종모 씨가 차지했고 UCC부분 최우수상은 좋은 빛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Right light’의 이하늘씨 외 2명이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 수상했다.

어린이·청소년부 수상자에는 서울특별시장 상장이 주어지고 일반부 수상자에는 조명박물관장 상장 및 대상 300만원, 최우수상 200만원, 우수상 100만원, 장려상 50만원의 상금이 함께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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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면당한 중고·재고 '환골탈태'…'업사이클링' 눈길

    [JTBC] 입력 2015-07-18 20:53

    [앵커]

    재고상품을 새롭게 디자인하거나 기능을 보태서 새 제품 못지 않게 만드는 '업사이클링'이 요즘 유행입니다. 자원 재활용 환경보호와도 맞물려서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강나현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크고 무거워 외면 받던 가방이 깜찍한 두 개의 핸드백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것과 별 차이 없어보이지만, 팔리지 않던 골칫거리 재고상품을 새롭게 디자인한 겁니다.

    [정서현/코오롱패션산업연구원 수강생: 하나의 가방을 가지고 두 개의 가방을 만들어냄으로써 조금 소비자들이 놀랄만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옷, 신발 등 역시 재고상품에 새로운 감각을 더해 신상품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대학생 30여 명이 뉴욕 유명 패션스쿨의 교수진과 1주일간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업체 입장에선 재고를 처리할 수 있고, 소비자도 세상에서 하나뿐인 제품을 가질 수 있어 이 업체는 실제 상업화도 검토 중입니다.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폐현수막으로 웨딩드레스를 만들고 버려진 포장지나 헝겊을 멋진 파우치 소재로 활용하는 등 많은 시도가 이어져왔습니다.

    자원을 아끼는 동시에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제품을 만드는 새로운 트렌드가 똑똑한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방류 열흘…제주 종달리 앞바다서 뛰노는 ‘복순이’

    등록 :2015-07-15 19:42

    남방큰돌고래 ‘태산이’(수컷·20살)와 ‘복순이’(암컷·17살)가 방류 열흘 만인 15일 낮 12시께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앞바다에서 남방큰돌고래 무리와 함께 헤엄치는 게 확인됐다. 야생 무리에 합류함으로써 두 돌고래는 일단 야생 적응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등지느러미에 위성위치추적장치(GPS)를 단 복순이가 이날 종달리 앞바다에서 높이 뛰고 있다.  고래연구소 제공
    남방큰돌고래 ‘태산이’(수컷·20살)와 ‘복순이’(암컷·17살)가 방류 열흘 만인 15일 낮 12시께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앞바다에서 남방큰돌고래 무리와 함께 헤엄치는 게 확인됐다. 야생 무리에 합류함으로써 두 돌고래는 일단 야생 적응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등지느러미에 위성위치추적장치(GPS)를 단 복순이가 이날 종달리 앞바다에서 높이 뛰고 있다. 고래연구소 제공
    남방큰돌고래 ‘태산이’(수컷·20살)와 ‘복순이’(암컷·17살)가 방류 열흘 만인 15일 낮 12시께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앞바다에서 남방큰돌고래 무리와 함께 헤엄치는 게 확인됐다. 야생 무리에 합류함으로써 두 돌고래는 일단 야생 적응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등지느러미에 위성위치추적장치(GPS)를 단 복순이가 이날 종달리 앞바다에서 높이 뛰고 있다.

    고래연구소 제공

    삶의 돌파구 찾아 두 발로 세계일주… 17년간 걷고 있는 사나이

    세계는 지금

    수정: 2015.07.07 19:57
    등록: 2015.07.07 16:04

    1998년 11월 1일 첫 걸음, 극한상황에서 자신과의 싸움 도전

    고난의 길 6년뒤 끝날 듯… 러서 불법입국·간첩 오인받아 체포

    2006년 후 90일 체류 비자만 발급, 작년 추방·입국금지 딛고 재시동

    s\D4002030\Desktop\10판-칠레 푼타 아레나스.jpg

    칼 부쉬비가 2000년 남미 페루의 한 황량한 도로를 짐수레를 끌고 지나가고 있다. 칼 부쉬비 홈페이지

    17년 동안 두 발로 걸어 전세계를 일주하고 있는 남성이 있다. 영국 공수특전단 출신 칼 부쉬비(46)다. 그는 군대를 제대한 다음해인 1998년 초에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교통수단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두 발만을 이용해 세계를 걸어서 한 바퀴 돈다. 둘째는 첫째 목표를 성공하기 전까지는 고향인 영국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 부쉬비는 지도를 펼쳐 놓고 걸어서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경로를 찾아 빨간색으로 줄을 그었다. 지도에는 남미 끝인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를 시작점으로 중남미의 파나마와 콜롬비아 사이에 있는 열대우림,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가교인 베링해협을 지나 이후 러시아와 몽골, 중동, 유럽 대륙을 잇따라 통과해 영국에 도착하는 경로가 그려졌다. 총 거리는 약 3만6,000마일(약 5만8,000㎞).

     

    부쉬비는 1998년 11월1일에 첫 발걸음을 떼며 도전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올해 러시아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걸을 경우 부쉬비는 앞으로 6년 후인 2021년에 영국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가 도전에 성공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걸어서 지구를 한 바퀴 일주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가 걷는 건 단지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반 평생을 길 위에서 보낸 부쉬비의 행로를 짚으며 삶의 일면을 엿봤다.

    일생의 반을 걷는데 보낸 남자, 부쉬비

    부쉬비는 1998년 11월1일 칠레의 남쪽 끝 도시인 푼타 아레나스에서 긴 여행의 첫발을 뗐다. 길동무는 있었다. 생필품과 위성 전화기, 태양광으로 작동하는 노트북 등이 실린 바퀴 두 개 달린 짐수레였다. 부쉬비는 ‘비스트’(beast, 야수)라고 이름을 부쳐 주었다. 그는 약 100파운드(약 45㎏) 정도 무게가 나가는 비스트를 끌고 북쪽을 향해 걸었다. 몇 주 만에 발톱이 깨졌고 속도는 더뎌졌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낯선 이방인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3년 후인 2001년에 남미와 북미를 잇는 가교이자 파나마 지역에 있는 열대 정글인 ‘다리엔 갭’(The Darien Gap)에 도착했다. 악어가 사는 늪지대가 함정처럼 도사렸고 빼곡히 솟은 나무로 대낮에도 어두웠다.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그는 현지인처럼 꺼멓게 분장을 하고 정글을 헤쳐 걸었다. 무장혁명군이 보일 때면 나무 아래에 숨거나 강물 속으로 피신했다. 정글을 지나 구사일생으로 니카라과에 도착하자 결국 짐수레가 부서졌다. 부쉬비는 수레를 새로 만들고 ‘비스트 2’라고 이름 지었다.

    부쉬비는 북미 대륙으로 넘어온 뒤에는 서해안을 따라 걸었다. 멕시코 국경을 넘자 미국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모하비 사막을 건널 때는 지독한 고통이 엄습했다. 팔팔 끓는 듯한 모래와 섭씨 49가 넘어가는 고온은 한계를 시험했다.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로키 산맥을 넘을 때에는 커다란 바위를 영원히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은 시지프스 같았다. 짐수레를 허리에 메고 오르기를 계속했다.

    부쉬비가 북미 대륙의 끝인 베링해협 근처에 도착한 것은 2006년 초였다. 걷기 시작한 지 약 8년만이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는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알래스카와 시베리아를 잇는 베링해협을 걸어서 건너기로 했다. 바다 위에 어는 얼음 덩이를 밟고 가야 했다. 주위에서 만류했다. 목숨을 잃을 거라고 했다. 그는 2006년 3월 베링해협을 건너기 위한 최단코스를 택해 걸었다. 14일 일정이었다. 그 이상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컸다. 프랑스 모험전문가인 드미트리 키에퍼의 자문과 도움을 얻은 끝에 베링해협을 건너 러시아 땅을 두 발로 밟았다. 베링해협을 걸어 건넌 것은 부쉬비가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는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기뻤다.

    뜻 밖의 장애, 러시아

    부쉬비의 도전에 가장 큰 장애는 혹독한 기온도, 자신의 몸에서 끊임없이 피를 빨아대던 모기도, 혼자 걸을 때마다 엄습하던 지독한 외로움도 아니었다. 부쉬비가 베링해협과 맞닿은 시베리아 동단의 우엘렌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는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됐다. 불법입국과 그의 군 전력이 드러나며 간첩으로 오인 받았다.

    러시아 정부는 그를 석방하는 대신 약 90일간의 체류 비자만을 허가했다. 90일 후에는 외국으로 출국했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야 비자가 재발급됐다.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우엘렌 지역을 시작으로 유럽이 있는 서쪽을 향해 시베리아를 횡단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총 620마일을 걸었고, 2008년에 들어서는 단 3주만 걸을 수 있었다. 시베리아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늪지대와 강으로 변해 길이 없어졌다. 그가 걸을 수 있는 계절은 겨울 뿐이었다. 2008년 말부터 2010년까지는 멕시코에서 보냈다. 비자 문제가 다시 얽히면서 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2009년 발생한 경제위기로 부쉬비의 여행 경비를 후원해주던 스포츠업체들이 지원을 끊으며 악재가 겹쳤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시절이었다.

    부쉬비는 기다렸다.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인내뿐이었다. 그는 어렵사리 2010년 새로운 스폰서를 구했고, 하늘의 뜻인지 운 좋게도 러시아 정부가 다음해인 2011년 봄에 그의 체류 비자를 허가했다. 90일 비자만기 조건은 여전히 똑같았다. 부쉬비는 2011년 동안 총 680 마일을 걸어 러시아 동부에 위치한 도시인 스레드네콜림스크에 도착했다. 여정에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고향인 영국에 도착할 날짜는 한없이 미뤄졌다. 다만 걸을수록 영국은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그는 2012년에도 총 560마일을 걸었다.

    러시아 정부는 2013년 3월 부쉬비의 러시아 입국을 5년간 금지했다. 러시아 군부대 지역을 지나야 하는 그의 노선이 알려지며 서방세력의 간첩이라는 의심이 커졌다. 부쉬비가 1998년 시작했던 여정은 2013년 3월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멈췄다. 도전을 시작한 지 15년 만이었고 그의 나이 44세였다. 지구의 딱 절반을 걸었다.

    부쉬비, 그가 걷는 이유

    부쉬비는 15살 때 병원에서 언어장애인 난독증 판정을 받았다. 그런 장애가 인생에 작은 동기를 부여했다고 그는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16살이 되던 다음해에 그는 학업을 포기했다. 대신 영국 공수특전단에 지원했다.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다섯 번이나 불합격 끝에 입대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공수특전단의 상징인 붉은색 베레모를 쓰고 거울 앞에 서면 뿌듯했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평생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군복무를 하며 난독증을 앓는 군인은 진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내와 헤어지는 시련도 겪었다. 그는 1997년까지 12년 동안 복무하고 제대를 선택했다.

    처음 걷기 시작한 이유는 그랬다. 극한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고 극복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다.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다섯 살인 아들을 영국에 남겨두고 그는 도망치듯 1998년 출발점인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에 섰다. 그리고 걸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물었다. “왜 걷는 겁니까.” 그는 처음에 난독증, 군인, 아들 같은 단어를 말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걸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고통스럽고 힘들 뿐이었다. 나무 밑이나 강가에서 쉴 때에야 걷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 볼 수 있었다. 마음 속의 대답은 항상 달랐고 또 조금씩 변했다. 걷기 시작한지 4년 후인 2002년 미국 국경을 막 넘기 직전이었다. 한 행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또 다시 같은 질문을 던져다. 부쉬비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이유는 계속 진화한다. 한 가지 이유는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내 도전을 완수하고 싶고 그 전에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2013년 부쉬비의 입국을 금지했을 때 그의 도전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당시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포기란 단어를 곱씹으며 말했다. “나는 걷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지금 도전을 포기하면 그 희생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 버린다.” 그는 지난 15년 동안 아들을 단 두 번 만났다. 부쉬비는 2013년 중순 미국으로 갔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시작해 워싱턴까지 약 3,000마일이 되는 길을 걸었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워싱턴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이었다. 대사관 문 앞에 도착하는 도전이 끝난 다음해인 2014년 러시아 정부는 부쉬비의 입국을 허가했다.

    부쉬비가 걷는 이유에 많은 이들이 궁금해한다. 그의 말처럼 한 가지 이유가 아닌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 목적지인 영국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분명 들을 수 있는 대답 한 가지는 불현듯 유추가 된다. 아마도 “도전을 완수하고 싶었다” 아닐까. 예정대로라면 부쉬비는 앞으로 6년 후인 2021년쯤 영국에 도착한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바다는 두 국가 사이에 연결된 해저터널을 따라 걸을 계획이다. 그때 그의 나이 52세다. 그는 현재 러시아 동부에 있는 야쿠티아공화국의 수도인 야쿠츠쿠를 지나고 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