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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03 강원도의 인물-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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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재능과 시에 대한 열정으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선 천재 여류시인
조선시대에 여자아이들은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했습니다. 친구도 맘대로 못 보고, 길거리에 나가서 뛰어놀지도 못했지요. 또, 먼 곳으로 자유롭게 여행도 가지 못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허난설헌은 이러한 아쉬운 마음을 시를 쓰며 달랬습니다. 시 속에서 허난설헌은 봉황을 타고 훨훨 날아다니고, 달나라 궁전에도 놀러가고, 신선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 말고도 허난설헌의 시에는 신선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다음 시를 감상해 보세요.
보허사
아홉 폭 노을 치마 옷을 입고서,
학을 타고 찬바람 내며 하늘로 돌아갑니다.
요해에 달은 밝고 은하수는 저물었는데,
옥피리 부는 소리에 구름 속으로 날아올라요.
그러나 열다섯 살에 결혼하여 오빠와 동생 곁을 떠난 허난설헌은 남편 김성립에게서 사랑 대신 질투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시를 잘 짓고 아는 것이 많은 아내가 부담스러웠던 거지요. 그래도 사랑스런 자식들을 키우고 좋아하는 시를 쓰며 견뎠으나, 자식들에 이어 오빠 허봉마저 세상을 등지자 슬픔을 견디다 못한 허난설헌도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을 앓으면서도 시를 썼던 허난설헌은 부용꽃(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떨어지듯 스물일곱 살에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허난설헌이 죽은 뒤 유언에 따라 시 대부분이 태워졌으나, 동생 허균은 누나의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습니다. 허균의 노력 덕분에 허난설헌의 시들이 세상에 소개될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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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다른 표기 언어 許穆
출생 | 1595(선조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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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82(숙종 8) |
국적 | 조선, 한국 |
본관 | 양천(陽川, 지금의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
자 | 문보(文甫), 화보(和甫) |
호 | 미수(眉叟) |
요약 조선 후기 때인 17세기 후반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했던 문신. 본관은 양천, 자는 화보, 문보, 호는 미수, 대령노인으로 1660년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등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만 1년상)에 반대하고 자최삼년을 주장했다. 1675년 덕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론을 주장하여 온건론을 편 탁남과 대립,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힘썼다.
남인으로 17세기 후반 2차례의 예송(禮訟)을 이끌었으며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아버지는 현감 교(喬)이며, 어머니는 임제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글을 배우고,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경기도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하여,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1646년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뒤 사복시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0년(현종 1)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朞年服:만 1년상)에 반대하고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주장했다.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그도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는 한편, 〈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서인의 주장에 따라 정해진 대공복(大功服:만 9개월)의 모순이 지적되어 앞서 그의 설이 옳았다고 인정됨에 따라 대공복은 기년복으로 고쳐졌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675년(숙종 1) 덕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론을 주장하여 온건론을 편 탁남(濁南)과 대립,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예궐했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듬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힘썼다.
학문과 사상
허목은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정구·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한다"라고 하여 이기불리(理氣不離)를 주장했으며, 무한한 이가 유한한 기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성리학, 이기론). 사단칠정론에서는 '심의 사덕(四德)은 사단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천리의 발로처'라고 하여 사단이발설(四端理發說)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이기·태극·심성을 일원적으로 파악하려는 심학이 중심이었다. 그는 천지자연의 변화는 인간의 심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아 인간에 내재되고 주체화된 천리인 본성(本性)의 함양과 보존, 그 실천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에 대한 파악은 그의 학문적 모색과 자아실현의 자세에 있어 주체성의 강조로 나타난다(→ 심성론).
허목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공자에게서 발견하고 그 실현방법으로서 고문·고학(古學:六經學)에 주목했다. 그러나 공자 또는 육경의 내용을 묵수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을 섭렵함으로써 자신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인격주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자아의 발견을 현실의 주체적 인식과 비판의 자세로까지 확대하여 사물의 실제·실상을 직시하고 이렇게 얻어진 경험사실의 가치를 고전(古典)에 근거하여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정치·사회 개혁론
허목이 살았던 시기의 당면과제는 임진왜란·병자호란에서의 파괴와 손실을 복구하고, 피폐한 민생을 회복시킴으로써 집권체제의 동요를 수습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군주·군권을 핵으로 하는 정치질서의 재정립을 적극 모색했다. 그는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드러내 존군비신(尊君卑臣)의 당위성을 강조했으며, 〈경례유찬 經禮類纂〉을 저술, 왕가(王家)와 사가의 예가 다름을 보여 주자가례적(朱子家禮的)인 예 인식을 극복하려 했다.
이는 군주중심의 정치운영을 강조한 그의 정치이념의 기반이었다. 즉 육경의 예악·예교 이념에 근거해서 신권을 억제하고 군권존중, 군주중심의 정치운영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는 집권세력 스스로의 개혁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군주가 단호히 나서 전제권을 발동하여 집권체제의 기능 회복을 위한 정치·사회 개혁을 실행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그가 예송논쟁에서 효종의 종통계승(種統繼承)의 의의를 천명한 것도 존군비신의 정치질서 확립이 시급하다고 본 그의 인식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백성의 생업과 안녕이 정치운영의 우선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보민론(保民論)을 강조했다. 허목은 17세기 중엽의 사회·정치 질서의 법전적 근거가 일단 15세기 〈경국대전〉의 규정으로 소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 시기에 군영신설과 둔전확대, 물고(物故), 아약(兒弱), 인징(隣徵)·족징(族徵)의 징포를 신법(新法) 또는 폐법(弊法)으로 규정하고 그 혁파를 주장했다. 또한 이 시기 집권세력이 추진하는 북벌정책을 비판하면서 내수(內修)가 선결과제임을 들어 민생안정, 농민부담의 경감을 강조했다.
즉 북벌을 위한 군영의 증설은 집권기반 강화를 위한 사병확대에 지나지 않으며, 둔전의 확대 역시 국가 공용을 빙자한 중간수탈, 사익추구라는 이유에서 각각 혁파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호포제(戶布制)는 그것이 명분, 즉 사회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양반호포의 전가로 결국 농민부담만 가중된다는 이유에서 극력 반대했다. 이와 같은 그의 정치·사회 개혁론은 신분관에서 보수적이기는 했지만, 양란 이후의 피폐한 조선왕조를 재건하려는 여러 개혁론 중 남인 중심의 변법적 개혁론의 선구가 되는 것이었다. 문장·그림·글씨에 모두 뛰어났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능해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저서에 〈미수기언 眉叟記言〉·〈경례유찬〉·〈방국왕조례 邦國王朝禮〉·〈경설 經說〉·〈동사 東事〉가 있다. 마전 미강서원(湄江書院), 나주 미천서원(眉泉書院), 창원 회원서원(檜原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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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되면 위인전을 언제쯤 접해주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역사를 어느정도 인식을 하고난 후 위인전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아서 초등 2학년인 딸아이에게 위인들에 관한 책을 깊이있게 전해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위인들에 관한 책들은 역사와 관련되어진 부분이 많기에 그저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간간히 어떤 한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이런 나의 고민을 어느 정도 해결해주는 책이 바로 비룡소의 새싹인물전 시리즈입니다.
초등저학년이 읽기 쉽도록 쉬운 말로 재미나게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고, 분량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부담없이 읽을수가 있으니까요.
이번에 45번째로 나온 이야기는 '허난설헌'입니다.
조선시대의 여류작가로 잘 알려져 있고,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나로도 알려진 허난설헌...
어렸을때 이름은 초희였네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남달랐던 초희는 아버지와 오빠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남자들처럼 글공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책을 보고 글공부를 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던 시대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허난설헌의 친정은 그걸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초희의 능력을 키워주었나 봅니다.
1577년 김성립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어렸을때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녀의 삶은 더 고단해집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스물일곱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마네요.
조선시대의 유명한 여류작가로 꼽히는 허난설헌..
하지만 정작 우리가 잘 아는 글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역사속에서 그랬다더라~라고 몇줄 나와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이번 책에서는 그녀의 시를 여러편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 광한전 백옥루에 대들보를 올리며> <신선 세계를 노래하다> <자식을 잃고 노래하다> <기하곡> 등...
< 자식을 잃고 노래하다>
지난해 귀여운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스러운 아들마저 잃었구나.
슬프고 슬퍼라 저기 광릉에
두 무덤 나란히 서 있으니.
엄마는 안단다. 너희 남매의 넋이
밤마다 어울려 함께 노는 것을.
처량하게 노래를 읊조리자니
슬프고 슬픈 마음에 눈물만 나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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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蘭雪軒
생몰년도: 1563년(명종 18)-1589년(선조 22)
본명; 초희(楚姬)
자; 경번(景樊)
호; 난설헌(蘭雪軒)
활동분야: 문학
띠를 매고 수건을 두르니 마치 선녀가 된 것 같았지요.
바람 차며 오색 그넷줄 하늘로 날아오르자.
노리개 소리 댕그랑 울리고 푸른 버드나무엔 아지랑이 피어났어요.
허난설헌이 꿈 많은 소녀 시절에 지은 시이다. 세속적인 근심이 하나도 묻어나지 않는 밝고 가벼운 분위기가 느껴진다.1563년(명종 18) 강릉 초당리에서 허엽의 딸로 태어난 그의 유년 시절도 그랬다.
허난설헌은 청렴 결백한 대학자인데다 대사헌까지 오른 아버지,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시대에 여동생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준 둘째 오빠 허봉의 배려와 사랑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며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던 가풍 속에서 마음껏 글을 읽고 시를 지었다.
아버지가 서경덕 밑에서 수학하여 집안에 도교 관련 서적들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이런 책들을 통해 신선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길렀던 허난설헌은 일곱 살 때 신선 세계의 광한전에서 백옥루를 짓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이 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꼈던 허봉은 허난설헌이 막냇동생 허균과 함께 이달에게 학문과 시를 배우도록 주선해주었다. 이달은 서얼이었지만 학문적 재주가 출중해 시의 천재라고 불렸는데,특히 낭만적인 당나라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이러한 그의 경향은 허난설헌에게까지 이어졌다.
자유롭고 행복했던 허난설헌의 소녀 시절은 결혼으로 그 막이 내린다. 정확한 연도는 전하지 않으나 대략 열여섯 살 무렵 허난설헌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과 혼인했다. 명문가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지만,한 살 위였던 남편은 허난설헌을 담기에 그릇이 작았다. 허난설헌의 문장과 학식에 열등감을 가졌던 남편과의 사이는 결혼 초기부터 원만치 않았다. 남편은 글공부를 이유로 집을 떠나있는 날이 많았지만,거듭 과거에 낙방했고, 나중에는 기방에 드나들기 까지 했다.
진보적이었던 친정과 달리 엄격한 사대부 집안이었던 시집의 분위기도 허난설헌의 숨통을 죄었다. 먹과 붓을 가까이하며 자랐던 그에게 집안 살림은 익숙지 않았고 집안 살림에 서툴고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고울 리 없었다. 여기에 지식을 잃는 슬픔까지 겹쳤다. 아이 둘을 모두 어려서 앓고 그는 통곡하며 시를 썼다.
올해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구나.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마주보고서 있는데
쓸쓸한 바람 백양나무에 불어오고,
도깨비불 반짝이는 숲 속에서
지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노라.
술잔 따라 네 무덤 앞에 바치노라.
가엾은 너희 형제 넋은
밤 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으려나.
비록 배에 아이를 가지고 있다지만,
어찌 잘 자라 나기를 바라겠는가.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슬픈 피눈물만 속으로 삼키노라.
허난설헌이 마음을 붙일 곳은 시와 독서밖에 없었다. 그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을 탈피하기 위해 신선 세계를 동경하는 시를 많이 지었다. 또 야사에 따르면 늘 화관을 쓰고 향로나 향합을 놓는 상인 향안과 마주 앉아 시를 지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많이 보았던 도교 관련 책들의 영향을 받아,속세를 벗어나 선계에서 노니는 유선시(游仙詩)를 많이 지었는데,조선은 물론 중국에서도 유선시를 지은 여성 작가는 허난설헌밖에 없다.
“화관 쓰고 꽃망토에 아흡폭 무지개 치마 차려 입으니/한가락피리 소리 푸른 구름사이에 울린다/ 용 그림자,말 울음소리, 창해의 달빛/ 상양군(上陽君) 만나러 십주(十洲)에 간단다"
시 속에서 그녀는 마음껏 자유롭고 호쾌하다.
한편,가난하고 천대받는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당시 사회에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라는 구절이나
라는 구절은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친정의 몰락으로 허난설헌은 더욱 마음 둘 곳 없는 신세가 된다. 아버지 어머니의 연이은 죽음,둘째 오빠 허봉의 귀양,그리고 귀양 뒤 방랑하던 허봉의 죽음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선물로 받은 중국 최고의 시인 두보의 시집을 보물처럼 간직하다 주며 두보의 뒤를 잇는 위대한 작품을 쓰라고 격려해주던 허봉은 허난설헌에게 스승이며 친구였고 글벗이었다.
그런 허봉이 죽은 다음 해 허난설헌도 스물일곱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야사는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고 전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목욕 후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세 번째 아흡수(27세)인데,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어졌으니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지은 시들은 모두 불태워버리고 나처럼 시를짓다 불행해지는 여인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근래 허난설헌의 자살 설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지만, 심증에 불과할 뿐이다.
허난설헌은 뛰어난 재능과 시대를 앞선 눈을 가졌지만“부인은 정치와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에 종사하지 않으며,사회와 내왕하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 여인의 직책은 단지 가사에 종사하는 것이다(《백호통의》)"라는 생각이 지배하던 사회의 벽에 부딪혀 젊은 나이에 아까운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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