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탄이 쏟아지는 마을

도계-묵호항간을 운행하던 낡은 석탄운반 기차가 흘린 낙탄을 모으려고 도계탄광촌 주민들은 체·괭이·호미·세숫대야를 가지고 철로변으로 모여들었다. 또 도계광업소 흥전갱에서 생산한 탄이 삭도를 통해 저탄장으로 내려오는 길에 ᄀ자 지점에서 삭도바구니가 공중에서 뒤집히며 탄을 자주 쏟았다. 인근 주민들은 이 탄들을 주워서 연료로 썼다.

도계 탄광촌의 철길에는 낙탄을 주우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도계(삼척시)에서 생산된 석탄은 항구가 있는 묵호(동해시)까지 기차로 운반되는데, 낡은 화차의 벽면에서는 석탄이 흘러내렸다. 구멍 뚫린 화차의 벽면을 가마니 쪼가리로 틀어막고 다녔는데, 덜컹거릴 때는 탄이 쏟아졌다.

탄광 도계

도계지역 주민 일부는 석탄화물차가 지나가면서 흘린 탄을 긁어모으려고 각종 도구(체·괭이·호미·세숫대야)를 들고 철로 쪽으로 모여들었다. 주부들이 많았지만, 아이들도 함께 따라다니면서 거들었다. 도계역에서 마교리와 흥전리 구간의 철길 쪽에 석탄을 줍는 사람들이 많았다. 철길 주변의 흘린 탄을 맨손이나 호미 등으로 긁어모을 때는 자갈 같은 석탄이 아닌 것도 따라 들어왔다. 이런 것은 체로 친 다음에 돌멩이는 바닥에 버리고 석탄만 모아서 세숫대야에 담았다. 장갑도 착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석탄 줍기에 나섰기 때문에 광부들처럼 손끝이 새카맸다. 도계탄광촌의 남자들이 땅 속에서 탄을 캤다면, 도계탄광촌의 주부와 아이들은 철길에서 탄을 캔 셈이다. 1960년대 말까지 철로변에서 탄가루 줍는 일은 부업거리였다. 추수가 끝난 논에서 흘린 벼 이삭을 줍는 농촌의 풍경처럼, 탄광촌에서는 석탄화물차에서 흘린 석탄을 줍고 있었다. 탄을 모은 뒤 대야나 자루에 담아 가져간 뒤 물에 반죽하여 주먹탄을 만들기도 하고, 수타식 제조기로 연탄을 찍기도 했다.

철길에서 흘린 탄을 모으다가 역 구내에 대기하고 있는 석탄화차 위로 올라가서 듬뿍 가져오기도 했다. 도계역이 가까울수록 흘린 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역 가까이 다가갔고, 역무원들은 탄을 줍는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쫓아내곤 했다. 철도 역무원이 쫓아내면 몰래 숨어들어 탄을 훔쳤다. 철길뿐만 아니라 산에 있는 경석장(탄광에서는 ‘보다장’라고 부름)에서 땔감을 찾아 배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갱내에서 석탄과 함께 나온 돌들을 경석이라고 불렀으며, 갱내에서 동발목으로 쓰고 나온 시커먼 나무를 화목이라고 불렀다. 화목(火木)은 경석장 근처에 버려지곤 했는데, 줍는 것은 불법이 아닌데다 석탄이 묻은 화목은 화력도 좋았다. 한 계절 열심히 모으면 겨울 땔감으로 충분할 정도였다.

경석장은 공개 입찰을 통해 임대되기도 했는데, 경석장에서 나온 탄을 ‘보다탄’이라고 했다. 이 석탄은 화력발전소나 연탄공장에 판매되었다. 석탄만으로 연탄을 만들면 잘 깨졌기 때문에 흙이나 보다탄을 함께 섞어 연탄을 만든 것이다.

도계탄광촌에서는 석탄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하늘에서 석탄이 쏟아질 때도 있다. 도계광업소 흥전갱의 탄은 공중삭도를 이용해 도계저탄장으로 수송한다. 산에서 내리막길로 오던 삭도는 중간 ‘사꾸도(さくどう)’(지금의 흥전지서 자리)에서 ᄀ자로 꺾어져 저탄장으로 간다. 그런데 ᄀ자로 꺾어진 중간 사꾸도에서 중심이 흔들리면서 삭도바구니가 뒤집히는 것이다. 뚜껑이 없는 삭도바구니에서는 뒤집힐 때마다 그대로 석탄을 모두 쏟았다. 삭도가 뒤집혀 석탄이 쏟아질 때면 인근 사람들은 달려가서 떨어진 탄을 긁어모았다. 삭도가 자주 뒤집히자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그 아래로 보호철망을 치기도 했지만, 탄은 여전히 쏟아져 내렸다.

1980년대까지 흥전리, 지금의 흥전지서 자리에 살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바가지(삭도)에서 탄이 쏟아지는 것을 자주 보고 살았다. 당시 바가지가 흥전골 안에 설치됐는데, 운반 도중에 종종 석탄을 쏟았다. 바가지가 뒤집혀 석탄을 쏟는 걸 1985년까지 봤다.
공중으로 운반되던 중에 뒤집혀 탄이 하늘에서 우수수 쏟아지면, 사람들은 "바가지 쏟아진다."하고 큰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가 나면 동네 사람들은 세숫대야·빗자루·쓰레받기 등을 들고서 우르르 달려갔다. 퍼 담은 탄으로는 나무 수타기로 19공탄 연탄을 집에서 찍어 썼다. 한번 쏟아지면 연탄 백여 장은 족히 나왔다. 바가지가 뒤집힐 때 나는 탄가루 먼지가 심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기도 했다.
(조순자, 도계3리)

도계광업소는 흥전갱 생산탄을 1940년 4월에 설치된 흥전갱-도계역의 공중삭도를 통해 도계역까지 운반했다. 공중삭도(일명 솔개차)는 도계 탄광촌을 상징하는 한 풍경이었다. 발음에 따라서는 소리개차로 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 마지막 케이블카형 석탄수송 장비인 도계광업소 가공삭도는 1940년에 설치돼 1991년 9월까지 50년 동안 도계광업소 흥전갱에서 생산된 탄을 도계역 저탄장까지의 2,314m 구간을 운반했다. 이 삭도에는 수리공들이 타고 다니기도 했는데 삭도가 고장이 나면 공중에 몇 시간씩이고 매달려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