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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도 그림이 된다
그림 이야기 2009/10/11 08:53 이충렬한글날이 되면 생각나는 그림 2점이 있어 소개한다.

화단의 중진 이세득 화백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 그리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은 고어를 섞어 만든 판화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김창열 화백이 한글을 그리워 하며 만든 작품이다.
한글이 그리웠기 때문에 눈물을 그리듯 물방울을 그렸다.
외국에서 살면 이렇게 조국의 언어가 그립다.
-------------- 뱀의 다리 혹은 진빵 속의 앙꼬--------------
내친 김에 한글의 원래 이름인 훈민정음과
오늘 제막된 동상에서 세종대왕께서 들고 계신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한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으니
'해례본'에 대해 잘 아시는 분에게는 뱀의 다리다.

세종대왕께서는 우리 글을 만드신 후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셨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정신에 입각해
<세종실록> 1443(계해) 12월 30일 자에 실린 내용을 소개한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국역 : (사)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재)민족문화추진회.
원문에 대한 표점과 교감 : 국사편찬위원회
위에 소개한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신 건, 1443년 음력 12월이다.
그런데 '한글날'은 10월 9일이다.
왜 그럴까?
훈민정음을 창제한 1443년 음력 12월 어느 날을 한글날로 정한 게 아니라
훈민정음을 세상에 반포한 1446년 음력 9월 상순을 한글날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글날을 음력 날자로 할 수 없어,
음력 9월을 양력으로 계산해서 10월, 그리고 상순은 마지막 날인 9일로 계산해서,
한글날을 만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글날은,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1443년 음력 12월이 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물론 1443년 음력 12월을 양력으로 계산하면 1444년 1월이 되고
그러면 연도가 바뀌면서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복잡하다.
어쩌면 이런 이유때문에
반포날인 1446년 9월 상순을 양력으로 계산해서 한글날로 정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1443년 음력 12월에 창제했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한글날을
지금처럼 반포날로 계속 유지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창제한 때로 바꿔야 하는게 맞는지는
연구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세종대왕께서는 무슨 이유로
훈민정음을 창제 3년이 지난 후에야 세상에 반포하신 것일까?
세종대왕 동상 오른쪽에 보이는
<훈민정음 해례본> 때문이다.
세종대왕께서는 훈민정음(한글)을 만드신 후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 8명에게
새 문자를 만든 목적과 원리 그리고 글꼴을 결합하여 표기하는 방법을 설명한 책을 만들게 했고,
책 만드는 동안 훈민정음 반포를 보류했다.
책은 훈민정음 창제 후 거의 3년이 지니서 완성되었고 출판되었다.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는 1446년 음력 9월 상순(上旬)에야
새로 만든 문자를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했고,
훈민정음에 대한 해석과 범례를 설명한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도 배포했다.
다시 '백문이 불여일견' 정신에 입각해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를 언급한
<세종실록> 1446(병인) 9월 29일 자 내용을 소개한다.
여기에도 훈민정음 창제는 1443년 겨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4095) 에 합하여 삼극(三極)4096) 의 뜻과 이기(二氣)4097) 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사용하여 구비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마침내 해석을 상세히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이해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臣)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국역 : (사)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재)민족문화추진회.
원문에 대한 표점과 교감 :국사편찬위원회
위에서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 했다고 한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만든 책이니
목판본으로 만들어 상당히 많이 배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1943년(혹은 1942년)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 발굴할 때까지
단 한권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도
간송미술관 소장본이 유일하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로 23.3㎝, 가로 16.8㎝의 크기이고, 모두 33장 66면이다.
내용은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본문으로 4장 7면,
제2부는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 解例)로 26장 51면,
제3부는 정인지(鄭麟趾)의 서문(序文)으로 3장 6면,
맨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 9월 상한(上澣)을 명시하고 있다.
이 해가 바로 세종 재위 28년(1446)에 해당하니,
<세종실록>에서 언급한 '해석과 범례를 설명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해례본에는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용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창제 후 5백년이 지나면서 사라진 글자들도 있어
한글 연구에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인 책이다.
간송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했을 때는
한글말살 정책에 혈안이 된 일제가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모두 구속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광복 때까지 공개하지 못하고 깊숙한 곳에 숨겼다.
일제와 6.25 전쟁 속에서도 <훈민정음>을 무사히 지킨 간송은,
1956년 통문관에서 학계의 연구를 위해 영인본으로 출판하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귀중한 책이었지만 손수 한장 한장 해체한 후 사진촬영을 하게 했다.
그후 많은 학자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영인본으로 한글연구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귀중한 책이었지만
간송이 1962년 1월 2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국보로 지정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 장면 정권, 박정희 혁명정권에서 일하던 문화당국자들의 수준이 그정도였다.
독재정권, 민주정권, 혁명정권 모두......
이렇게 푸대접을 받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이 세상을 떠난 해 12월에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0월 11까지 전시되고 있다.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 했다고 한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만든 책이니
목판본으로 만들어 상당히 많이 배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1943년(혹은 1942년)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 발굴할 때까지
단 한권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도
간송미술관 소장본이 유일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로 23.3㎝, 가로 16.8㎝의 크기이고, 모두 33장 66면이다.
내용은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본문으로 4장 7면,
제2부는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 解例)로 26장 51면,
제3부는 정인지(鄭麟趾)의 서문(序文)으로 3장 6면,
맨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 9월 상한(上澣)을 명시하고 있다.
이 해가 바로 세종 재위 28년(1446)에 해당하니,
<세종실록>에서 언급한 '해석과 범례를 설명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해례본에는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용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창제 후 5백년이 지나면서 사라진 글자들도 있어
한글 연구에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인 책이다.
간송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했을 때는
한글말살 정책에 혈안이 된 일제가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모두 구속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광복 때까지 공개하지 못하고 깊숙한 곳에 숨겼다.
일제와 6.25 전쟁 속에서도 <훈민정음>을 무사히 지킨 간송은,
1956년 통문관에서 학계의 연구를 위해 영인본으로 출판하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귀중한 책이었지만 손수 한장 한장 해체한 후 사진촬영을 하게 했다.
그후 많은 학자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영인본으로 한글연구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귀중한 책이었지만
간송이 1962년 1월 2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국보로 지정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 장면 정권, 박정희 혁명정권에서 일하던 문화당국자들의 수준이 그정도였다.
독재정권, 민주정권, 혁명정권 모두......
이렇게 푸대접을 받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이 세상을 떠난 해 12월에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0월 11까지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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