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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지 전개 시 유의점
1) 이 글은 사태에 대한 주장이나 입장이 아닌 해석을 묻고 있다. 진실이란 분명한 듯하지만 주관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서술한다.
2) 진실과 그것의 노출을 염두에 둔 작품이 많다. 진실의 층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주제와 그것이 이야기하는 철학은 범주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트루먼쇼’는 트루먼이 살고 있는 세계가 가짜였음을 드러냄으로써 세계의 허구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의 층위에 알맞은 예시 영화를 찾아보자.
3) 상대주의와 절대성, 주관성과 객관성의 차이를 생활 속 경험과 같은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예시
2005년도 국내에 개봉된 ‘빨간 모자의 진실’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동화 ‘빨간 망토’에 대한 기대를 뒤집는 작품이었다. 할머니 집에 가다가 늑대에게 잡아먹힌 빨간 망토이야기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복잡 다단한 추리물로 재탄생한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던 사실은 모두 음모로 발각되고 그 아래 은닉되어 있던 실체는 이해 당사자인 여러 사람의 서술을 통해 입체화된다.
흥미로운 추리물이자 모험 서사인 ‘빨간 모자의 진실’은 진실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보다 숨겨지기 쉬운 속성이 있음에서 발상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이란 하나의 실체일까 아니면 타당한 가설의 정착일까? 또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속에 또 다른 진실이 있다는 가설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은 무엇일까?
수많은 예술작품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진실을 숨긴 채 운용되고 있는 거짓의 체계로 제시하고 있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소설인 조지 오웰의 ‘1984’도 그렇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소설뿐만이 아니어서 최근의 영화 작품들, 이를테면 ‘매트릭스’나 ‘올드보이’, ‘트루먼쇼’와 같은 작품들 역시도 숨겨진 비밀과 과거 그리고 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개 진실의 문제를 전면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불완전함을 진실에 빗대어 재조명한다. 밥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 세계가 모두 입력된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는 이러한 제안 중 가장 급진적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매트릭스’가 제시하는 바의 놀라움은 액션이나 촬영 기술의 혁신에 기댄 바도 크지만 무엇보다 현실적 공간 자체를 허위의 공간으로 전도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진실이 실체로서 존재하며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감각적인 세계가 아닌 다른 먼 곳, 초월적인 공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제안이기도 하다. 초월적 공간 너머에 존재하는 남루한 진실을 가시적 형태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트릭스’는, 닫힌 세계의 출구 너머에 진실의 가능성을 위치시켰던 ‘트루먼쇼’의 가설을 넘어선다.
이러한 작품들은 “진실”이라는 실체가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가설을 통해 일상적 공간을 불편한 음모의 장으로 새롭게 조형한다. 관습적 기대로 굳어진 고전 작품들이나 동화의 서사를 비틀고 재조명하는 시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습과 기대를 전복하는 새로운 조감의 효과는 편안한 일상을 반성적 사유의 대상으로 탈바꿈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불편한 제안이 일상을 반성하게끔 한다는 것은 무감각해진 편안한 일상이야말로 진실을 은폐하는 원리임을 보여준다.
주어진 현실을 음모나 거짓으로 보는 것은 시스템에 의해 조율되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진실을 재편성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원적 이기심에 대한 각성을 모두 아우른다. 편안한 일상으로 여겨지는 현재의 삶을 은닉된 진실이라는 가정을 통해 입체화함으로써 자칫 무감각해질 수 있을 현실적 삶을 새롭게 되돌아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진실이라는 것 역시도 일종의 효과나 음모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나 ‘빨간 모자의 진실’과 같은 작품들은 진실이 얼마나 개인의 이익이나 욕망에 의해 쉽게 윤색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진실은 단 하나의 모습을 지닌 객관적 실체이지만 수많은 가설 가운데서 절대적 진실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상대주의의 혼란과 절대성의 횡포 가운데, 사태를 관망하는 객관적 인식만이 진실의 실체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어쩌면 “진실”이 더 완강한 음모의 위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