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해석은 저자 아닌 독자 몫
2006년 논구술·입시정보 특집 ‘꼼짝마 논술’
한겨레
» 작품 해석은 저자 아닌 독자 몫
기획연재 : 꼼짝마 논술
역사는 오로지 있었던 사실만을 다루어야 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했을 때만 역사학은 객관적일 수 있다고 랑케는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객관적’이라는 사실의 수집 자체에도 사람의 주관이나 가치가 작용할 수 있다. 역사는 시대에 따라서도 달리 해석될 수 있다고 E.H 카는 보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괴테가 이 책을 쓴 의도를 알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괴테의 정신 행로를 따르면서 그의 삶과 문학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괴테가 처한 상황에서 그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문학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독자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저자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 예술작품을 대하는 옳은 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파우스트>를 읽지, <파우스트>를 쓴 괴테의 의도를 읽지는 않는다. 그의 생각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전에는 자살은 개인적 현상처럼 보였다. 뒤르케임은 이러한 개인적 자살의 이유에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이 아닌 어떤 사회적 실체가 있음을 찾아냈다. 이 사회적 실체를 설명하는 것이 신생학문이었던 사회학의 임무라고 보았다. 이렇게 사실과 해석의 문제는 상이한 무대 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루어졌다.

실제로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 행위로 보였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거나, 헤어날 수 없는 빈곤에 시달릴때 인간은 절망 속에서 자살을 결심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살에 이르게 한 그들의 심리상태에 주목했다. 무엇이 그들을 자살에 이르게 했으며, 어떠한 심리적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자살을 결심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반면 뒤르케임은 이들 자살한 사람들을 그들이 속한 집단으로 묶었을 때 나타나는 자살율에 주목했다. 즉 일정한 비율로 ‘안정적인’ 숫치를 보여주는 이 자살율과 자살율이 집단간에 보이는 차이에서 개인적 현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감지하였다. 그는 ‘그 무엇’을 설명하려 하였다. 고독한 행위인 자살 속에서 공동체와 개인과의 관계를 읽어냈다. 자살은 개인의 결단에 따른 행동이지만, 이 고독한 행위에는 사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강에 뛰어드는 불행한 사람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것은 바로 사회이다. 막 걸음마 단계였던 사회학의 대상을 바로 이러한 사회적 실체에 대한 탐구로 자리를 잡게 한 것은 뒤르케임의 공이었다. 뒤르케임은 개인적 사실의 배후에 감춰진 사회적 전체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사회적 사실은 개인에 대하여 외적구속력을 가진 모든 형태의 행위양식이었다. 그에 의하면 이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자의 역할이었다.

역사학에서 실증주의자는 사실과 해석을 분리했다. 이들은 객체인 사실과 해석의 주체는 멀수록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에게 역사는 사실을 모아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사실이 모이면 사실은 스스로 말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역사가의 주관을 철저히 배제하고 사실의 철저한 수집과 편찬만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경우 역사가는 실제로 별로 할 일이 없다. 역사가는 그저 수집가나 백과사전 편찬자일 뿐이다.

한편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수집되는가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을 정리하고 모으는 과정에서 역사가의 선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많은 사실 중에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선택하고, 중요치 않은 사실들은 부단히 솎아낸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사실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가들의 손때를 탄 사실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말을 걸었을 때만 이야기한다고 E.H 카는 표현했다.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해석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자신의 가치가 개입되어있는 사실에만 역사적 사실이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그렇지만 이를 역사가의 주관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카의 표현에 따르면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이다. 역사가는 역사에 자신이 사는 사회와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여전히 역사가 객관적인가라는 의문은 남는다.

문학에서 사실과 해석의 문제를 보자. 문학에서의 사실을 텍스트로, 해석을 비평이라고 할 때, 사실과 해석의 문제는 문학작품과 비평의 관계로 옷을 바꿔 입는다. 지금까지 문학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저자의 의도가 중요했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저자가 던져놓은 문장을 따라가면 됐다. <파우스트>를 이해할 때 괴테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썼느냐가 중요했다. 독자의 능동적인 해석이 들어갈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 이르면 논의는 달라진다. 이제 해석은 독자 즉 비평가의 몫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다만 필사자일 뿐이며 그의 진술은 다분히 개인적이다. 이제는 작품 자체조차도 완벽한 새로운 창작품은 아니다.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들을 조립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를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를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비유했다. 일단 글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가는 자신의 작품 해석에 관여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독자이며 저자는 이점에 관하여 더 이상 특권적인 지위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보다는 독자의 해석에 의해 창조된다.

» 박우현/벼리논술연구소 소장, 전 동아일보 기자
이화여대 2006년 수시1학기 문제는 독서형태를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구분했다. 텍스트에 대해 존재 양식으로 독해하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물었다. 중앙대 2006년 수시 1학기는 역사와 역사교과서를 사실로 놓고, 이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해석과 논쟁을 정리했다. 중앙대 2002년 수시1학기는 인도의 소 숭배 뒤에 감추어진 사실에 대한 설명의 지문이 나왔다. 순간적인 욕구와 장기적 생존을 둘러싼 갈등의 문제가 있다. 고려대 2004년 정시는 사실과 해석에 관한 4개의 상이한 지문을 주고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