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동운]대처가 잘한 것, 못한 것 (동아2013-04-11)

 

대처는 영국 총리 가운데 이름 다음에 ‘이즘(ism·대처리즘)’이 붙는 유일한 총리이다. 그가 내건 신자유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정책이다. 작은 정부, 공기업 민영화, 금융규제 철폐, 노동시장 유연화, 평등교육 타파, 복지개혁 등 시장 중시정책이다.

 

대처는 구조개혁에 성공한 정치가다. 정권을 잡자마자 예산을 줄여 작은 정부를 실현했고, 세금으로 보전되던 공기업을 민영화했으며 노동관련법 제정과 개정으로 노조파워를 무력화했다. 금융개혁에 성공했고, 친시장적 분배정책으로 ‘영국병’을 치유했다. 이를 지켜본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구조개혁은 대처 총리처럼 집권 첫 6개월 이내에 마쳐야 성공할 수 있다’라고 했다.

 

대처가 잘한 첫 번째 일은 기업이 다시 활동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처는 1992년 9월 서울을 방문해 연 인촌기념강연에서 “기업 활동이 국가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 활동은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국가가 시장의 역할을 박탈하지 않을 때 경제성장은 더욱 빠르고 훨씬 좋은 성과를 나타낸다”라고 말했다. 대처는 또 자신이 했던 구조개혁의 성공이 가능했던 비결에 대해 “꼭 한 단어, ‘기업’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라고 했다. 기업이 살면 경제가 산다는 것을 짚은 것이다.

 

대처는 또 당시 ‘민영화’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에서 3단계에 걸쳐 48개의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민영화된 공기업은 경쟁을 통해 생산성이 올랐고 일자리가 늘었다. 이에 따라 대처는 ‘영국을 공기업 민영화를 수출한 세계 최초의 국가로 만든 정치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지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은 공기업을 논공행상의 기념장소로 사용했다. 그런 점에서 새 정부가 방만한 공기업들을 어떻게 개혁할지 주목된다.

 

대처는 노조와도 과감히 싸웠다. 1970년대에 노조 천국으로 알려진 영국을 노동개혁을 통해 현재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노동시장이 유연한 나라가 되도록 기초를 닦았다. 한 예로, 대처는 재집권에 성공하자마자 1983년 6월 탄광 개혁을 추진했다. 제왕 같은 아서 스카길 노조위원장이 전국적인 석탄노조 파업으로 이에 맞섰다. 이에 질세라 대처는 석탄을 몰래 수입해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파업은 1984년 3월 6일에 시작해 이듬해 3월 3일까지 무려 363일 동안 지속되었다. 결국 스카길이 항복했다.

 

방만한 노조와 싸웠던 대처의 뚝심은 한국의 지도자들이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은 ‘경제자유’로 평가한 노동시장 유연성이 낮기로 2010년 144개국 가운데 126위다. 더 심각한 것은 2002년 김대중 정부 때 58위, 2006년 노무현 정부 때 107위, 2010년 이명박 정부 때 126위로, 노동시장이 지속적으로 경직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노동시장이 경직되면 기업 활동이 둔화되고 해외직접투자 유입이 감소한다. 한국은 최근 3년 동안 해외직접투자 순유입(유입액-유출액)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1조4000억 달러 이상의 해외직접투자 유입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주요 2개국(G2)이 되었다.

 

대처가 잘한 것이 많지만 잘못한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말기에 저금리정책을 펴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그는 인촌기념관 강연에서 “저금리 정책은 잘못한 정책이었다”고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또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1인당 똑같은 인두세를 매김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 마지막 임기 후반 대처는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인두세 도입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저항이 거셌고 시위 진압과정에서 시민 1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대처는 결국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정계를 떠나야 했다.

 

대처가 숨을 거둔 영국은 슬픔에 잠겨 있다. 고인의 지난 삶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볼 때다. 박동운 단국대 명예교수·경제학

 

칼럼 : 14년간 아이들에게 신문을 읽혀보니  (동아일보2012-11-10)

 

1990년대 중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되면서 수험생들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 언어 영역의 비문학(소설 시 제외) 지문 독해였다. 학생들은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볼 수 없었던 글에 낯설어했다. 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수능뿐 아니라 논술고사도 준비해야 했다. 이 두 마리 토끼를 효율적으로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오랜 고민 끝에 찾아낸 답이 바로 신문이다. 비문학 지문을 빠르게 읽고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을 습득해야 했다. 좋은 논술문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재가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신문은 여러 분야의 시사와 교양,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교재였다.

 

국어과 교사들이 신문 읽기의 필요성에 공감을 했고, 이 내용이 학교장에게 보고됐다. 결국 14년 전인 1998년부터 우리 학교에서는 아침 신문읽기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아침 시간에 입시 과목에 대한 방송수업을 하거나 보충수업 혹은 자율학습을 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아침 신문읽기를 시도한 것은 주변의 학교와 학부모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신문읽기를 주 1회에서 주 2회로 늘리는 과정에서 저항도 많았다. 학생들에게 아침마다 신문을 가져오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 시간에 차라리 문제집을 풀거나 단어를 외우는 게 낫지 않으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부모들도 있었다. 신문을 가져오지 않고서 친구에게 몇 장 빌려 읽는 시늉만 하고, 교사의 눈을 피해 엎드려 자거나 밀린 숙제를 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국어와 사회과 선생님들이 모여 신문읽기 지도 매뉴얼을 개발하고 담임교사 연수를 통해 바른 신문읽기의 방식을 알리면서 학생들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문을 제대로 읽히기 위해 신문 읽는 시간이 되면 담임교사들은 학생들이 가져온 신문의 제1면을 검사해 당일 발간물임을 확인했다. 또 책상에는 국어사전과 필기도구만 올려놓고 집중해서 읽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신문을 읽는 태도는 점점 고쳐졌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나왔다. 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읽었는지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강압적으로 특정 기사를 오려 공책에 붙이게 하고 중심문 찾아 쓰기, 내용 요약하기, 생소한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 정리하기 등을 수행과제로 내줬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이 형식적으로 과제를 해온 탓에 효과가 높지 않았다.

 

신문 읽기에 자율성을 좀 더 부여하기로 했다. 칼럼과 사설을 논리적 글쓰기의 표본으로 삼아 이를 베껴 쓰는 등 따라 연습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흥미 있는 기사를 스스로 선택해 읽도록 했다. 생각하며 읽는 분위기를 권장함과 동시에 과제 해결의 부담을 없앤 것이다. 그러자 신문읽기의 효과를 체감하는 학생이 늘고 스스로 신문을 찾아 읽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2005년부터는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프로그램으로 정착하게 됐다.

  <서울 세화여고 원유신 교감>

<사설> 공공의료의 미래를 묻는 진주의료원 사태(동아일보 기사입력 2013-04-05)

경남도는 2월 26일 누적 적자 등을 이유로 진주의료원을 폐업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그제부터 한 달 동안 문을 닫도록 했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홍준표 경남지사의 의지다. 이 병원은 매년 40억 원 이상 손실이 발생해 누적 부채가 300억 원에 이른다. 수년 내에 자본금이 바닥날 상황이다.

 

이 때문에 경남도와 도의회는 구조조정과 경영개선을 거듭 요구했지만 의료원 노동조합은 번번이 거부했다. 심지어 “노조가 선정하는 컨설팅업체에 맡겨 경영진단을 해보자”는 도의 제안조차 외면하고 지원만을 요구했다. “진주 권역의 의료서비스가 공급 과잉인 데다 2월부터 민간병원도 공공보건의료 기능을 담당하기 시작해 굳이 진주의료원이 필요 없게 됐다”는 경남도의 설명도 설득력이 있다.

 

반면 노조는 “임금이 2008년 이후 동결되고 6개월간 체불됐는데도 귀족노조냐”고 반박한다. 홍 지사가 취임 70일 만에 아무런 사전 경고나 언질 없이 폐쇄 방침을 발표한 것도 노조의 반발을 키웠을 것이다. 야당에서는 홍 지사가 자신을 ‘보수의 아이콘’으로 띄우려는 정치적 포석이라고 폄훼한다.

 

지역거점 공공병원은 적자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취약계층을 위해 의료비를 싸게 책정했기 때문이다. 전국 34곳의 지방의료원 등 39개 지역거점 공공병원 가운데 2011년 당기순이익을 낸 곳은 7곳뿐이다. 의료 수익만 따져 이익을 낸 곳은 김천의료원 하나였다.

 

진주의료원 노조는 뒤늦게 경영 정상화를 위한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도 홍 지사를 만나 “정상화 논의를 먼저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폐쇄 방침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경남도는 “직원 재취업과 환자의 건강 및 안전을 지키기 위한 방안만이 대화 대상”이라며 폐쇄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공공의료원도 폐쇄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공감대를 이룬 뒤에 마지막 처방을 써야 후유증이 덜하다. 노조가 ‘자구 노력을 하겠다’고 밝힌 이상 대화를 통해 진정성을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 진주의료원 사태는 전국의 공공병원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과제를 노출하면서 ‘한국 공공의료의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문화 칼럼/김작가]‘강남스타일’ 빌보드 1위 왜 안될까-동아 2012-10-13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아이튠스(애플의 온라인 음원 판매 사이트)에선 1위를 차지했는데 빌보드에서는 왜 안 될까? ‘강남스타일’은 빌보드 64위로 입성해 2주차 11위, 3주차에는 2위로 수직 상승했다. 언제 1위를 차지할지가 국민적인 관심사가 돼 버린 분위기다. 사실 아이튠스 차트 1위에 오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빌보드 1위를 기다리는 걸까.

 

미국은 차트의 나라다. 팔리는 모든 것에 순위가 매겨진다.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음악 잡지와 매체가 차트를 수록한다. 빌보드 잡지의 차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다. 빌보드는 1936년 첫 차트를 발표한 이래, 다양한 종류의 차트를 추가하며 산업과 트렌드의 지표 역할을 해왔다. 현재는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싱글 차트 ‘핫 100’을 중심으로 100여 종의 차트를 발표한다.

 

빌보드에 권위를 부여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대중의 소비패턴을 반영하는 집계 방식이다. 최근 디지털 산업의 변화에 따라 ‘핫 100’의 순위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는 셋으로 나뉜다. 디지털 다운로드(인터넷 음원 사이트에서 음원을 내려받는 것)와 에어플레이(방송 횟수), 온라인 스트리밍(음원 사이트에서 음원을 내려받지 않고 듣기만 하는 것) 횟수다. 디지털 음원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아이튠스 차트 1위를 했음에도 빌보드 ‘핫 100’에서 2주간 2위에 머문 이유는 에어플레이와 온라인 스트리밍 횟수에서 ‘마룬5’의 ‘원 모어 나이트(One More Night)’에 밀렸기 때문이다.

 

에어플레이에서 ‘원 모어 나이트’가 ‘강남스타일’을 앞선 것은 ‘강남스타일’이 언어 장벽의 한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언어장벽을 깨고 빌보드 정상에 오른 노래도 있었다. 1958년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모두뇨가 부른 ‘넬 블루 디핀토 디 블루(Nel Blu Dipinto Di Blu)’, 1987년 멕시코계 밴드인 ‘로스 로보스’의 ‘라 밤바’, 1996년 스페인 출신 ‘로스 델 리오’의 ‘마카레나’가 1위를 차지했다. 서양이 아닌 동양권에서 나온 빌보드 1위 노래는 1963년 사카모토 규의 ‘스키야키’가 유일하다.

 

이 노래들이 1위를 차지했던 것은 주류 미디어를 통해 어필했기 때문이다. ‘스키야키’의 경우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DJ가 이 노래를 듣고 감동해 방송에서 집중적으로 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 문화에 대한 환상이 당시 미국 사회에 깔려 있던 것도 인기를 북돋웠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라 밤바’는 같은 해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의 주제가로 쓰인 게 절대적이었다.

 

‘마카레나’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미국 여자 체조팀이 경기에서 사용해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울려 퍼진 덕에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노래가 됐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다른 비영어권 1위곡들과 차이가 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지금까지 노래들은 방송, 영화 같은 올드 미디어에 의해 ‘살포’됐다. 하지만 ‘강남스타일’은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의해 전 세계적 인기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최초의 비영어권 노래다. 인터넷의 인기를 등에 업고 빌보드라는 종합 차트를 위협했다.

 

지금까지 비영어권 빌보드 1위곡들이 미디어로부터 대중을 향해 하향 전파됐다면, ‘강남스타일’은 대중으로부터 주류 미디어로 상향 진입을 한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은 레코드 산업이 탄생한 이래 음악 시장을 지배했던 미국의 대형 레코드사와 올드 미디어로부터, 뉴 미디어로 스타 탄생의 권력이 넘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팝의 본고장 미국이 시스템도, 언어도 다른 ‘강남스타일’의 파죽지세에 무릎을 꿇은 셈이라고 할까.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어로 쓰인, 한국 가수가 부른 노래에 의해서 말이다.(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