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365] 지오 폰티 ‘건축예찬’
입력: 2007년 06월 17일 18:39:11
건물은 삶을 담는다. 삶은 건물 안에서 숨쉰다. 그런데 나는 그렇다는 것만을 알 뿐, 건축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건축이 ‘있는 동굴을 찾아내기’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건축은 ‘동굴 만들기’라고 해야 옳다. 그래서 건축은 만듦이 수반하는 온갖 작위성을 지닌다. 결국 가장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간이 건물인데, 그 안에 가장 자연스러운 삶이 담긴다.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래저래 삶은 힘 든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주거를 만들면서 자연과 인위를 아우르려는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건축은 늘 기하학이고 물리학이고 재료학이고 경제학이면서 나아가 정치학이지만 이와 아울러 미학이고 철학이고 때로는 종교이기조차 하다.

그런데 때로 이런 구분이 철저히 준수되면서 그 각각이 제각기 자기 주권을 주장하며 이루는 건축을 본다. 이 때 작동하는 원리는 기막힌 합리성이다. 그러나 논리가 빚는 그 영역들의 조합이 건축은 아니다. 건축은 상상력이 그 모든 영역을 흡수하는 하나 안에서 이루어진다. 사람이 살 만한 괜찮은 집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 때 우리는 건축행위를 예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산다는 것, 결국 하나의 집을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내 집은 어떻게 지어지고 있을까? 나는 어떻게 내 집을 짓고 있는 것일까? 이런 물음이 가슴 속에서 인다면 한 번쯤 지오 폰티의 ‘시’와 같은 책 ‘건축예찬’(열화당)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는 가장 합리적이어야 하는 것은 마땅히 가장 상상적이어야 한다는 것, 곧 후자가 전자를 완성시킨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짐작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정진홍/ 한림대 과학원 특임교수·종교학〉
+ 종합
책을 왜 읽어야 할까
그대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공진언(oizzi) 기자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책을 왜 읽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도움이 되니까. 이는 밥을 왜 먹어야 하는가 하는 우문과 유사하다. 밥을 먹는 행위는 사회라는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다. 탄수화물 덩어리인 밥은 체내의 에너지를 발생, 축적시킨다. 책도 마찬가지다. 독서를 하는 행위 한 인간의 본능적 행위다. 식을 창조하고 축적해나가는 하나의 행위다. 그러나 밥과는 달리 책읽기에서 온 지식의 에너지는 쉽게 소모되지 않는다. 계속 축적되어 나간다. 그래서 인간은 책을 읽어야 한다.

내친 김에 조금 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이런 글을 읽으면서도 그대는 여전히 책 읽기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이다. "책만 보면 졸리던데 무슨 헛소리야. 너만 좀 유별난 놈이겠지" 하고는 지레 이 글조차 읽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래 포기하라. 그런데 하나만 묻자. 그대, 진정으로 책을 읽어본 경험이 있는가?

추리소설을 펴면 생각하는 것이 귀찮다고, 연애소설을 펴면 진부한 표현에 질린다고, 역사소설을 펴면 고리타분하다고, 과학서적을 피면 내 전공이 아니라고 등등 여러 가지 핑계를 창의적으로 창조하면서 제대로 읽어보려는 최소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하다. 무엇인가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본 적도 없으면서 지레 포기하는 습관은 아주 나쁘다.

물론 '여보게, 독서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나'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으리라. 그렇다면 인생의 전부도 아닌 한 부분인 독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본 사람이 어떻게 사회라는 야생에서 살아남겠느냐는 반문에 한번 답해보라.

여기 그대가 책을 읽어야할 이유가 하나 있다. 그대는 누군가와 격렬한 설전을 펼쳐본 적이 있는가? 혹은 사소한 말싸움이라도 좋다. 싸움에서는 먼저 손을 쓰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따라서 말로써 상대를 상대해야 하는데 이럴 때 필수적인 기술이 논리력이다. 상대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라. 책에는 상대를 지혜롭게 요리할 수 있는 요리법(recipe)이 제시되어 있다.

요즘 청소년(내 주변 친구들)들은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도 말을 해보면 대화의 깊이가 없어서 화제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요즘 학생들 학교 숙제는 시대의 유산-인터넷의 도움을 받아서 그대로 베끼거나 철자만 좀 고쳐서 낸다. 자신의 생각을 힘들게 피력해 봤자 인정해 주는 선생님도 없을 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수준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생각하기를 귀찮아하기 때문이다. 책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독서는 백익무해하다.

그저 책 읽기를 즐기란 말이다. 활자의 유혹에 빠져보는 것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다. 작품과 그대의 생각을 공유하고 흐름을 타라. 흐름에 빠져 작품 속 세 상에 들어가라. 책과 그대가 하나 된 느낌 그것이 진정한 독서다.

어떻게 책을 접할까?

이제 책을 효과적으로 또 쉽게 접해봐야 할 텐데 필자의 경우 아래와 같은 방법을 이용했다.

1. 인터넷 책 동호회에 가입해보자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는 동영상만 있는 게 아니라 동호회들도 많다. 회원수가 몇 만명, 몇십 만명을 상회할 정도니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의 바다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빠져라. 회원들의 독후감도 있고, 자신 이 책을 읽고난 후의 독후감도 업로드할 수 있다. 자신이 독후감을 업로드하면 리플(댓글)도 많이 붙는데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에 독서 후에 상당한 도움을 줄 거다. 정보교환과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므로 독서에 흥미를 돋우기에는 도움이 많이 된다.

2. 서점이나 문고를 자주 들리자

우선 서점이나 문고에 들리게 되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려고 혹은 책을 읽으려고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깨어있는 사람들 중에 내가 포함 되어있다는 자부심까지도 느껴라. 지식의 보고인 책을 읽기 위해 서점 바닥에 앉아서, 일어나라고 고함을 지르는 서점직원의 함성은 무시한 채 꿋꿋하게 책을 읽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자랑들 중 한명이 돼보는 건 어떨까. 필자는 책이라는 공통된 주제 속에서 그대들과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서 벌써 영광스럽다. 독서실, 도서관 보다는 서점이 훨씬 책 읽기 좋은 환경이다.

3. 책과 활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자

무조건 처음부터 두꺼운 책을 들이밀면서 '읽어봐!'라고 하는데 순순히 읽을 사람이 있을까?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라고 잡지, 만화책, 신문 등 활자가 들어있는 물건dms 무엇이라도 좋다. 읽어보자. 활자를 읽다 보면 저절로 좋아진다. 그것은 진리다. 누구나 어려운 건 싫어한다. 또한 꼭 어려운 책을 읽어야 유식해지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다느니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읽었다느니 하여도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위 즉 기만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의무적으로 독후감을 쓰게 만드는 점도 필자는 추천하지 않는다. 단지 읽고 난 후에 이 책은 어떠했다는 생각 혹은 그대에게 무엇을 남겼느냐는 정리해 보는 것이 좋을 거다. 의외로 독후감 쓰기가 싫어 책을 읽지 않는 아해들을 많이 보았다. 책을 재구성 해 본다거나, 독서기록장을 작성한다거나, 속독법을 기른다거나 하는 방법은 그대들을 책읽기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지뢰 같은 존재들이다. 읽어보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먹고 들어가게 하는 요인들이란 말이다. 절대 그런 부수적이고 불필요한 존재들 앞에서 위축되거나 소심해지 말자.

4. 책사는 것에 돈을 아끼지 말자

필자는 책을 사는 것에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정상적인 중고생이라면 학원을 다닐 것이다. 보통 종합학원의 학원비는 20~30만원 내외다. 책 한권 가격이 평균 만원정도 한다면 30만원을 투자해서 일주일에 세 번 학원에서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강의를 실험용 생쥐마냥 뇌에 주입받고 앉아 있느니 30권 책을 사는 것이 더 현명하리라 생각한다.

책은 미래를 위한 진정한 투자다. 투자를 잘해야 성공할 수 있다. 노련하고 똑똑한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이상으로 책과 조금 더 효과적으로 만나는 방법을 필자의 경험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지 조금은 감이 잡히는가?

다음은 과연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이다.

책을 어떻게 읽을까. 과연 어떤 방법으로 책을 읽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까? 사실 어떻게 독서를 하느냐 보다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느냐가 더 중요 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이 질문에 정답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조금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해 줄 뿐이지 절대적인 기준의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읽어서 편한 방법이고 유익한 방법이며 또 질리지 않는 방법이라면 그것이 옳은 방법이다. 다음은 내가 읽어서 편하고, 유익하고, 또 질리지 않는 방법이다. 여러분과 공유했으면 한다.

1. 활자, 단어, 문장 순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읽자

<칼의 노래>나 <현의.노래> 또는 <자전거여행> 등 김훈이 집필한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우리문학의 표현력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려운 어휘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단어하나하나가 신선해보이고, 참신하기까지 하다. 그런 문학을 음미하며 읽어보면 속독보다는 정독이 문학작품감상에는 더욱 효율적인 것 을 절감할 수 있다. 속독은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조차 주지 않고 빠른 속도로 넘어가기 때문에 생각할 틈이 없다. 가끔씩 TV에 출연해서 책을 속독한 후에 내용을 물어보면 척척 알아 맞추는 기인들을 볼 수 있는데 나는 그들이 매우 한심해 보인다.

책은 빨리 읽기 위해 탄생된 기록계가 아니다. 사회에서는 학생 모두를 수능형 인간으로 만들려는 발상인지 여기저기서 속독학습을 시키는데, 그러니 진정한 독서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책을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음미하며 읽자.

2. 생각하며 읽자

중3 생활국어 책에는 "생각하며 읽기"라는 단원이 있다. 다시 말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지,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능력은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왜 이 책을 읽고 있는지를 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은 책을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과도 일치할 뿐더러 때에 따라서는 더욱 중요한 물음일 수도 있다.

"생각하며 읽자"라는 말은 그대가 애당초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를 잊지 않으면서 책을 읽어나가자는 이야기이다. 생각 없이 글을 읽다 보면 읽고 난 후에 내용이 기억나지 않기가 쉽다. 가령 그대가 "체 게바라 평전" 을 읽었다고 하자. 책을 읽기 전에는 국가이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밖에 없는 줄 알았던 그대가 책을 읽으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존재에 대해 눈을 뜨고 또 이를 비판 혹은 옹호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대는 독서의 목적을 잊지 않은 거다.

다시 말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계속적으로 글을 읽어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생각을 하면서 글을 읽으면 독서 후에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또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4. 읽은 내용을 남에게 얘기 해줘라

글을 읽고 난 후 남에게 이야기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경우와 반대의 경우는 읽을 때 집중도나 읽고난 후의 여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단지 혼자 읽는 것에서만 멈추지 말고 읽은 내용 중 감명 받은 부분이나 실천해야할 부분 혹은 재미있었던 부분은 친구나 가족들 혹은 주변사람에게 설명해 주거나 이야기를 해주어라. 이렇게 하면 읽은 내용을 그대는 다시 회상하게 될 것이고 다시 남에게 설명을 해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것으로 만든 셈이 된다.

5. 매일 조금씩 꾸준히 책을 읽자

책 읽기에 있어서 벼락치기란 있을 수 없다. 이건 중간고사가 아니다. 시간이라는 공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독서다. 따라서 짬짬이 시간을 내어서 읽어야 하는데 습관이 들다보면 하루에 100쪽 정도는 너끈히 읽을 수 있다. 화장실에서, 쉬는 시간에 혹은 차안에서 등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루에 멍하니 보내는 시간 대부분을 책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대체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한 몇 쪽 읽다가 말다가를 계속 반복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매우 안 좋은 습관이다. 그건 그대가 집중력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너무나도 명백한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대들도 그 사람들 중 한명이라면 그 습관 당장 고쳐라. 왜냐고? 그 습관은 책의 흐름을 끊기 때문이다. 책은 흐름이다. 흐름의 연속이여서 활자의 연속이고, 단어의 연속이고 또 문장의 연속이다. 연속이란 무엇인가 연달아 계속된다는 뜻 아닌가. 연달아 계속 되어야지 독서의 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연달아서 책을 읽어라.

마치면서

어느 한 사람 이라도 이 허접하고 부족한 필자의 글을 읽고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만으로도 필자의 한없는 영광이리라. 필자에게 있어 책이란 참 소중한 존재고 특별하며 재미있다. 이렇게 재밌는 걸 필자 혼자만 독차지 하니까 너무 미안해서 이 글을 썼다. 재미있으면 누구나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누군가 노랬던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나는 이 재미있음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고 같이하고 싶다. 옛날 선현들이 위편삼절되도록 책을 탐닉하시고, 주경야독 하시고, 행유여력학문 하시던 때의 독서에는 필자의 독서가 비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 점이 필자를 더욱 책읽기에 정진하게 만든다. 책을 읽는 것에 두려움이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에 도전하든지 어려움은 있는 만큼 처음 책과의 접하면서 고통은 반드시 수반되게 마련이다.

책을 읽고난 후 반드시 "여자친구가 뭘 하고 있을까?"하는 호기심의 찬 표정으로 고뇌를 하고, 책에 대한 퀴즈를 풀어보고, 가로세로 퍼즐을 만들어 보아야하고, 남들 토론을 해보아야 한다는 강제는 독서의 참된 자유를 방해하는 모순된 외침일 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만 내가 위에 쓴 제안들은 그대가 글을 쉽고 편안하게 접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을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 읽는 그대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깨어있는 자들 중 한명의 모습일 테니까.
2007-03-25 11:30
ⓒ 2007 OhmyNews
세상은 여전히 그의 오아시스를 기다린다
[
▲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서툰 솜씨로 쓴다. "민주주의 만세!"
ⓒ 강기희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서 죽은 듯 쓰러져 세 시간을 있었다. 잠이 몰려왔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독한 몸살을 앓은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야지 하고 몸을 일으켜 보았지만 그것은 마음뿐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켜놓은 라디오에선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떨 때는 한없이 감미롭다가 어느 때엔 비장한 음악이 방안 가득 퍼졌다. 음악은 오래된 필름처럼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음악은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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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두루미를 벼랑 끝으로 몰지 마라!
찰라와 같은 시간 방 안에 머물러 있던 내 정신은 유랑자처럼 먼 곳을 향해 떠돌고 육신만이 남아 찬 몸이 되어갔다. 밤은 깊어지고 다시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할 때 쓸쓸한 거리를 떠돌던 정신은 서둘러 제 자리로 돌아왔다.

피곤에 젖은 육신을 두고 정처 없이 떠났던 정신은 사람은 있되 사람이 없는 그런 거리를 한없이 걸었다. 햇살은 강렬했으며 바람은 옷자락을 휘감을 정도로 강했다.

사람이 없는 거리에서 사람인 양 보이는 이들은 날리는 먼지를 모아 솜사탕처럼 둥글게 만들었다. 사람인 양 보이는 이들은 그것들을 씹어 먹으며 사람을 향해 뭐라 손가락질했다.

재즈 음악이 흐물흐물 문지방을 넘는 시간 정신은 꿈틀대는 육신과 합일했다. 육신은 차가운 방임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고, 먼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이상하게 다리가 아프네'라고 중얼거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부르던 그 시절의 중심엔 김지하 시인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속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갈증이 심하게 났다. 물병을 입에 대고 땀이 식을 때까지, 갈증이 가실 때까지 들이켰다. 잠시 입안이 시원하다 싶었지만 원초적 갈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냉장고를 뒤져 오래된 딸기를 찾아냈다. 무슨 딸기일까 생각해 보았더니 언젠가 밤늦은 시간 읍내에 사는 후배에게 술 하고 안주 좀 사와라 했더니 어머니 몫으로 사온 딸기였다. 곰팡이가 핀 딸기는 먹을 것보다 버릴 게 많았다. 버리기 아까워 살을 발라내듯 곰팡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곰팡이를 제거하자 딸기는 입이 작은 소인국 사람들의 짓인 양 몇 번이고 베어 먹은 자국을 냈다.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먹으며 갈증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찾아 올 사람 없는 산촌에서 개는 먼 산을 향해 부질없이 짖고, 담배를 붙여 물고 방안을 아무리 서성거려 보지만 목마름의 원인을 찾지는 못했다. 육신의 목마름이 아니라면 필시 정신적 목마름을 느낄 터. 책장을 뒤적이다 김지하 시인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뽑아 들었다.

출간된 지 25년이나 된 시집은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종잇장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첫 장을 펼치자 한때 가슴을 후려치던 시 한 편이 시야에 들어온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김지하 시 '타는 목마름으로' 전문


아, 그랬다. 오랫동안 내 너를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은 게 아니고 너의 세상이 온 줄 착각하며 살았다. 내 몸이 구속당하지 않는다 하여, 내 팔자 핀 정신이 한 없이 늘어졌다 하여 너의 세상이 된 줄로만 알았다.

생각해 보면 내 발길은 언제나 너를 찾아 헤매었지만 진정 너를 만나지는 못했다. 민주주의, 너로 가장한 가면 쓴 것들이 시야를 흐리게 하는 통에 너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고 외로운데 박수치고 환호하는 이들은 널 이용만 했구나.

아직 용도폐기 될 일 아닌데도 넌 신자유주의에 밀려 역사 속으로 유물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쓰던 너 민주주의여. 그 시절엔 폭압이 두려워 너의 이름을 선뜻 부르지 못했다. 그저 치떨리는 노여움을 가슴에 품은 채 서툰 백묵 글씨로 나무판자에 '민주주의 만세'라고 쓰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 김지하 시인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 강기희

김지하 시인이 아니었다면, 어렵게 구해낸 민주주의를 영원히 잊을 뻔했다

김지하 시인이 아니었다면 너, 민주주의를 영원히 잊을 뻔했다. 어쩌면 군 오징어를 씹듯 옛날이야기를 들먹이며 너를 추억했을지도 모르겠다. 술판 벌어진 자리에선 양주잔 비워내며 너를 안주 삼는 이들도 있겠다. 너의 노래는 이제 노래방에서조차 잊혀진 지 오래다.

세상 사람들은 너를 잊은 채 87년의 민주화항쟁을 이야기하고 이젠 그 시절마저 넘어서자고 말한다. 20년이 지난 2007년 지금 너의 입은 입마개로 가리워져 있고 너를 대신하는 입들은 새로운 세상을 열자고 열변을 토한다.

진정 뜨거운 가슴으로 너를 부르며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쳐보지도 않았는데 세상이 변했단다. 수천 길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너를 구해내기 위해 한 잎 꽃처럼 숨져간 이들의 넋이 아직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너를 잊었다는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경상도 합천이라는 동네는 너를 모질게도 억압했던 전두환이라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 공원 이름도 바꾼다고 한다. 죗값을 치렀다며 당당하게 해외여행도 가는 그들의 입에서도 가끔은 불경스럽게 너의 이름이 들먹여진다.

민주주의, 너를 구해내기 위해 곤욕을 치렀던 이들은 여전히 가난하기만 해 해외여행 한 번 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요즘은 너를 팔아 양복 입은 이들이나 너를 억압했던 이들이나 나란히 공항으로 향한다. 그 모습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족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구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가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는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렸다.

- 김지하 시 '오적' 중에서


김지하 시인은 1970년 시 '오적'을 발표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목마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 일로 시를 실었던 잡지 <사상계>는 정권에 의해 편집진이 구속되고 강제 폐간되는 운명을 맞는다. 시 '오적'은 당시의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작품이다. '오적'은 비록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차관을 다뤘지만 그 칼날은 정권의 심장부를 향했다.

박정희 정권과 결탁한 부패의 원인들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폭압정치와 민주주의 탄압으로 이어졌다. 당시 시가 발표되고 그 시를 본 박정권은 김지하 시인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이른 바 오적 필화 사건이다.

민주주의를 잊고 있는 그대들은 과연 누구인가?

'오적'을 발표한 지 37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오적이 없을까. 대상은 바뀌었지만 이 사회에는 여전히 오적이 존재한다. 세월이 좋아진 탓인지, 아니면 민주주의를 가장한 이들의 활개가 유난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요즘엔 오적이라는 말을 '신오적'이라 하여 자신들의 편의에 맞게 쓴다. 그것도 유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과거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이들이 신오적을 꼽았는데 그것이 참으로 생뚱맞다. 그들이 꼽은 신오적을 보면 민노당, 전교조, 민노총, 주사파 386세대, 노무현정부란다. 시의에 따라 변하긴 하지만 대체로 민주주의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그들에겐 오적의 범주에 든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암튼 세상 좋아지긴 한 모양이다. 이것이 김지하 시인이 원하고 바라는 민주주의는 아닐진대, 그들은 아무렇게나 민주주의를 끌어다 쓴다. 이런 욕된 민주주의라니.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 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 김지하 시 '1974년 1월' 중에서


시집의 두번 째 장을 펼치면 '1974년 1월'이라는 시가 나온다. 1974년 1월 8일은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된 날이다. 김지하 시인은 그날을 죽음이라 부르자고 한다. 그해 1월 8일은 모두가 죽음으로 항거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 시절은 박정희 정권에겐 말 그대로 긴급한 상황이기도 했다.

정권이 무너지는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짐을 느낀 박정권은 2년만에 긴급조치 9호까지 만들어냈다. 대단한 발전이다. 그 발전의 모태엔 문익환이 있었고, 지학순이 있었고, 김남주가 있었고, 또 인혁당 사건으로 죽어간 그들의 절규와 치떨리는 가슴으로 불러보는 민주주의가 있었다.

그 시절 죽음의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었다. 박정권은 입이 있으되 말을 하지 못하게 했고 생각이 있으되 어떤 표현도 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죽음의 거리엔 사람은 아니되 사람인 양 거들먹거리는 금수들만 득시글거렸다.

그때 김지하 시인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박정권의 발악은 김지하 시인의 펜을 더 강하고 힘차게 만들었다. 그 시절 그의 삶은 구속과 석방으로 이어지는 고난으로 점철된 날들이었다. 그는 밟혀도 밟혀도 일어서는 질경이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은 그의 펜이었다. 그가 써낸 글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고 억눌린 민중의 분노가 되었다. 그 분노가 폭발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우리의 곁으로 올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밀려들어오는 2007년, 김지하 시인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이 여전하다. 뜨거운 가슴으로 불러야 겨우 한 발 다가오는 민주주의를 향한 기다림도 여전하다. 그가 긴 침묵을 깨고 세상을 향해 입을 뗀다.

민주주의를 잊고 있는 그대들은 과연 누구인가?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그대들은 또 누구인가?

이 밤, 죽음의 거리를 지나온 김지하 시인이 묻는 듯하다.

▲ 문학 행사장에서 독자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김지하 시인.
ⓒ 강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