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이 책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서평]<애서광 이야기>
안소민(bori1219) 기자
언젠가 알고 있던 스님 중 한 분이 자신이 갖고 있던 많은 책을 어느 단체에 기부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를 비롯해 내 주위사람 몇몇이 감탄사를 연발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일행 중 한 명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 스님은 정말 책 읽는 것을 좋아하신 분이었어. 우리처럼 책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책 읽는 것'을 정말 좋아한 분이셨거든."

ⓒ 범우사
그는 '책 읽는 것'이란 단어를 유난히 강조해서 말했다. 듣고 있던 우리는 한바탕 폭소를 터트렸다. 책을 좋아하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새 책을 접할 때면 설레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원하는 책을 손에 넣었을 때 그 행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책은 반드시 소유해야만 즐거운 것은 아닌 듯하다. 간혹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친구에게 빌릴 때의 즐거움도 꽤 크니까.

그러나 여기 <애서광(愛書狂)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반드시 원하는 책은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비블리오마니아(bibliomanias)들이다.

그들은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가진 전 재산을 모두 책 구입에 쏟아 붓는다. 또 원하는 책을 갖지 못하게 되면 초조, 불안, 강박관념 등의 정서불안증상이 나타나는 사람들이다. 즉, 책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세계 유일본으로 알고 있던 자신의 소장본과 똑같은 책을 누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미칠 듯한 실망감과 좌절감으로 인해 거액의 금액을 주고라도 그 책을 구입한 뒤, 그 자리에서 불태워 없애버리는 괴팍스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세계에 오직 하나뿐인, 나만의 책을 욕망하는 것이 이들 비블리오마니아의 특성이다.

무엇인가 모으는 데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에는 총3편의 소설이 등장한다. <시지스몬의 유산>과 <애서광 이야기>는 비블리오마니아를 다룬 이야기이며 <보이지 않는 수집품>은 미술품 수집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국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를 모으는 데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시지스몬의 유산>에서 애서광 규마르는 생전의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시지스몬이 평소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서적들을 남기고 죽자 그의 책들을 구입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지스몬은 50세가 넘은 미망인 에레오노르와 결혼하는 사람에게 그 책을 준다는 유언을 남긴 상태다.

그녀로부터 청혼을 거절당한 규마르는 그녀의 곁에서 책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책에 한이 맺힌 이 미망인은 책을 못 쓰게 만들기 위해 서재 천정에 구멍을 내거나 생쥐를 풀어놓는 등 갖은 방법을 쓴다.

오랜 세월 끝에 에레오노르는 규마르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규마르는 마침내 시지스몬의 그 희귀한 책들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으로 차오르던 찰나, 이미 못쓰게 되어버려 누더기에 불과한 책들을 보고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보들레르가 16살 때 지은 작품이기도 한 <애서광 이야기>는 책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책방을 차리게 된 갸코모라는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다.

갸코모는 세계에 단 하나뿐이라고 믿었던 자신이 소장한 서적이 몇 개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짓지도 않은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만다. 그는 법정에서 '세계에서 단 한 권밖에 없는 내 책이 어딘가에 또 있다는 것은 내겐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라고 말한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병이 된 사람들

물론 소설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이 정도 되면 책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일 것이다. 그만큼 책을 열망하는 비블리오마니아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엔 책을 탐하는 그들의 욕망이 문장 곳곳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을 읽다보면 그들의 마음에 그대로 동화될 정도로 글들이 굉장히 사실적이며 탐미적이다.

'그는 그것이 책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 향기나 형태, 표제 등은 모두 그에게 있어 사랑의 대상이다. 그가 필사본 가운데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래 되어 읽기 어려운 날짜와 괴상한 고딕 문자, 장식 페이지의 채색에 사용된 두꺼운 금박과 먼지투성이인 페이지다. 더욱이 그 먼지의 향기는 그에게 있어서는 마치 값비싸고 향기 높은 향료와도 같은 것이다'(75쪽)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토록 깊을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깊이 사랑하면 병이 된다고 하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비블리오마니아들은 책을 사랑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앞의 두 소설이 애서광에 관한 이야기라면 마지막 <보이지않는 수집품>은 과연 수집이란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책은 문고판으로 출간되었으며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금세 읽을 수 있다. 애서광들의 책에 대한 독특하고도 집요한 열정, 그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애서광 이야기/ 보들레르 외 2인 지음, 이민정 옮김/ 범우사/ 2,800원

*<애서광 이야기>를 읽고난 후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애서광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억이 미치게 된다. 스스로 호를 '간서치(看書痴)'라 이름한 이덕무 선생이다. 추운겨울에 땔감 살 돈이 없던 그가 <한서>로 이불을 삼고 <논어>로 병풍을 쳐서 추위를 막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이덕무 선생은 위 소설에 나오는 애서광들과는 차원이 다른 듯하다. 위 소설 속 주인공들은 책을 단지 '모으는 행위' 자체에 열광했지만 선생은 '책 보는 것'을 끔찍이 사랑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6월 12일 학생글
엄마의 소리

강희영/삼천포여고 1학년

빗소리에 잠 못드는 밤

엄마 옆에 누워 듣는 소리

드르렁 드르렁



베게 위에서 들리는 서러운 눈물

바스락 바스락

이불 아래서 들리는 지친 한숨

꼭 하루 만큼

커지는 소리

오늘을 보내는 엄마의 눈물이

방 안을 울리고 마음까지 파고든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에

눈물에 안겨 잠드는 밤

어린 시절 고향에 관한 그리움
[서평] 박완서의 기억 속 사진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명희복(myunghb) 기자
ⓒ 웅진닷컴
도대체 뭔가. 소설인가. 수필인가. 책을 넘기다 보면 기존 장르에 관한 인식을 깨뜨리는 작품인 듯하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서도 마치 수필을 읽는 느낌이다. 수필을 읽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르다.

처음엔 장르를 가늠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존재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다. 저자 박완서가 기억에만 의존해서 쓴 장편소설이다. '기억은 각자의 상상력'이란 저자의 말을 참고하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2004년쯤인가, 매스컴에서 자주 소개했던 책으로 당시엔 구비만 해놓았다. 요즘처럼 한가해지면 읽기 위해서였다. 이제야 내용을 겨우 파악했다. 넓은 운동장을 샅샅이 확인하면서 걷는 자유로움 속에 지각생의 설움을 모두 묻어버릴 수 있다는 심정에서는 기쁘기도 하다. 때로는 동전이나 한 번도 쓰지 않은 듯한 깨끗한 만년필까지 주울 경우에는 감정이 완전 역전 아니던가.

나처럼 때늦은 독자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차례를 간략히 소개한다. 앞부분의 '다시 책머리에, 작가의 말'과 끝에 '작품 해설'을 제외한 본문의 장만을 나열해본다. ▲야성의 시기 ▲아득한 서울 ▲문밖에서 ▲동무 없는 아이 ▲괴불마당 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오빠와 엄마 ▲고향의 봄 ▲패대기쳐진 문패 ▲암중모색 ▲찬란한 예감 등 12개의 장이다. 각 장의 의미라도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항상 읽을 때마다 거치는 작업순서다. 어떻게 읽을까. 어느 부분부터 궁금해해야 할까. 마침내 결정했다. '싱아'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독서의 끈을 잡아나가기로.

"싱아는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높이는 1미터 정도로 줄기가 곧으며, 6∼8월에 흰 꽃이 핀다. 산기슭에서 흔히 자라고 어린잎과 줄기를 생으로 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나 예전에는 시골아이들이 즐겨 먹었다." (표지 뒷면)

표지 뒷면 중단에 그림과 함께 아주 작은 글씨로 씌어있는 말이다. 싱아의 정체가 과연 뭘까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빈궁기를 떠올리는 매개체임을 알 수 있었다. 작가에게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요소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먹거리가 절대부족해서 그것마저 먹지 않을 수 없던 궁핍기를 암시하는 매개물 말이다. 자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하 <싱아>)는 '유년시절에의 향수, 즉 저자의 어린 시절 고향에 관한 그리움'이 될 것이다.

나는 독자로서 <싱아>를 읽으며 세 단계의 충격적인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무엇일까'가 첫 단계이다. 독특한 소설 형식이란 점에서 피할 수 없는 느낌이다. '진짜 아리송한 장르다'가 두 번째 단계이다. 여전히 읽기의 뚜렷한 노선을 찾지 못하고 중반을 지나가고 있을 때까지의 느낌이다.

다음은 '역시 소설이군'이 세 번째로 느끼는 단계이다. 특히 '찬란한 예감'이란 제12장을 읽을 때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대개의 다른 장보다 양적으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묘사능력이 빛을 발휘하고 있음을 인식한 뒤에는 작품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다. 다음에서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정말로 그들에겐 징그러운 벌레를 가지고도 오락거리를 삼을 수 있는 어린애 같은 단순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빨갱이를 너무도 혐오했기 때문에 빨갱이의 몸을 가지고 희롱할 생각은 안 했다. 나는 내가 너무 귀족적으로 자란 걸 원망했다. 잘 먹고 잘 입고 떠받들어졌다는 소리가 아니라 수모에 길들여질 기회 없이 커 왔다는 뜻이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순간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만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124쪽-125쪽)


아마도 작가가 참아왔던 할 얘기가 봇물 터지듯이 나온 듯하다. 급기야는 절제하고 속편을 기대하게까지 하니 참으로 놀랍다. 독자로서는 좋았다가만 경우를 경험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이 벌레 취급당했던 시절 얘기를 짤막하게 운만 띄워놓은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작품에서 보이겠노라고, 독자로 하여금 기대하게 하는 의도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소설로 그린 자화상 : 유년의 기억'이란 부제에서 드러나듯 <싱아>는 미완의 소설임을 알 수 있다. 이제 겨우 유년의 시절을 마쳤을 뿐이다.

제1장 '야성의 시기'부터 마지막 제12장 '찬란한 예감'(고약한 우연에 관한 정당한 복수의 시간과 벌레의 시간을 증언할 수 있는 기회 같은 느낌)까지는 결국 작가가 유년을 지나 대학생이 된 때까지였다. 중년의 기억·노년의 기억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직 남아 있다. 어느 시점엔가 채워 넣기를 시도할 것 같다.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일제시기와 한국전쟁 발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신음 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불과 5년만에 혼란정국은 남북전쟁을 맞이한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전쟁을 맞이한 것이다.

이때 저자의 나이 20세 정도이다. '친일', '좌익', '우익으로의 전향' 등이 저자 집안에 많은 파란을 일으킨다. 저자와 저자의 가족 거의가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숙부가 사형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한편 진정 하고픈 얘기를 시작하기 전 단계까지 와서는 이야기를 맺고 만다. 이제 저자는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할 시간만 남아 있다.

우리는 글을 쓰게 되는 동기를 크게 둘로 구분하곤 한다. 표현 동기와 전달 동기다.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 전체 글을 써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도 문제와 비중 문제는 늘 존재한다.

표현 동기가 우세해져서 글을 쓰게 되면 저자의 지나친 감정발산으로 독자가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관을 지나치게 노출해버린다. 운문이 주요 부류의 글이 되기 쉽다. 객관성을 잃기가 쉽다는 이야기다.

반면, 전달 동기에 따라 글을 쓰게 되는 경우에는 저자가 독자에게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싱아>는 자연 표현 동기보다는 전달 동기가 우세한 작품이다.

작가는 침착성을 거의 잃지 않고 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무슨 내용을 어느 시기에 어떤 순서로 내놓아야 할지도 알고 있다. 감정을 절제하면서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싱아>의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대내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본다. 대내적으로는 주로 '저자와 저자 어머니 이이야기'와 '저자와 저자 오빠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제1장 '야성의 시기'에서 제11장까지와 제12장 둘로 나눌 수 있다. 변별기준은 일제침략과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것이다. 나는 이것 후자를 선택하고자 한다.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저자의 다음 말은 한편으로 나의 생각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한다.

"종전과는 좀 다른 방법으로 글짓기를 해 봤다고 해서 소설 기법에 어떤 변화의 계기를 삼아 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가가 자화상 한두 장쯤 그려보고 싶은 심정 정도로 썼다. 여태껏 내가 창조한 수많은 인물 중 어느 하나도 내가 드러나지 않은 이가 없건만 새삼스럽게 이게 바로 나올시다, 라고 턱 쳐들고 전면으로 나서려니까 무엇보다도 자기미화의 욕구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없는데 비견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게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기회를 꼭 가지려는 의도가 아닐까. 주위사람에게 벌레로 취급당하던 시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때를 갖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벌레의 이야기를 변명할 수 있는 자리마련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벌레의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바로 과거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자, 한 인간의 개인사가 거듭날 수 있는 기회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인간은 누구나 어두웠든 찬란했든 자신만의 과거를 지닌다. 특히 묵혀두었던 자신의 과거를 오늘에 되새겨보고 더 나은 나로 도약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장한다.
*관촌수필-일락서산- 전문읽기자료
2006/02/22 오후 6:38 | 小說

#(읽기자료) ***관촌 수필 - 이문구**
-일락서산(日落西山)-

시골을 다녀오되 성묘가 목적이기는 근년으로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양력 정초에 몸소 그런 예모(禮貌, 예절에 맞는 모양)를 찾고 스스로 치름은 낳고 첫 겪음이기도 했다. 물론 귀성 열차를 끊어 앉고부터 “숭헌(흉한)…… 뉘라 양력 슬(설)두 슬이라 이른다더냐, 상것들이나 왜놈 세력(歲曆)을 아는 벱여…….”
세모(歲暮, 섣달 그믐께)가 되면 한두 군데서 들어오던 세찬(歲饌, 세모에 선사하는 물건)을 놓고 으레껀 꾸중이시던 할아버지 말씀이 자주 되살아나 마음 한켠이 결리지 않은 바도 아니었지만, 시절이 이러매 신정 연휴를 빌미할 수밖에 없음을 달리 어쩌랴 하며 견딘 거였다. 그러나 할아버지한테 결례(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을 나 자신에게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가문을 지킨 모든 선인(先人) 조상들의 심상은 오로지 단 한 분, 할아버지 그 분의 인상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그리워해 온 선대인은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동기간들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색 창연(古色蒼然, 퍽 오래 되어 예스러운 풍치가 그윽함)한 이조인(李朝人)이었던 할아버지, 오직 그분 한 분만이 진실로 육친이요 조상의 얼이란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없은 거였고, 또 앞으로도 길래(오래도록) 그럴 것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받은 사랑이며 가는 정으로야 어찌 어머니 위에 다시 있다 감히 장담할 수 있을까 마는, 그럼에도 삼가 할아버지 한 분만으로 조상의 넋을 가늠하되, 당신 생전에 받은 가르침이야말로 진실로 받들고 싶도록 값지게 여겨지는 터임에, 거듭 할아버지의 존재와 추억의 조각들을 모든 것의 으뜸으로 믿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초사흗날, 그중(其中, 그 가운데) 붐비지 않을 듯싶던 열차로 가려 탄 것이 불찰이라 하게 피곤하고도 고달픈 고향길이었다. 한내읍에 닿았을 때는 이미 3시도 겨워(때가 늦어) 머잖아 해거름을 만나게 될 그런 어름이었다. 열차가 한내읍 머리맡이기도 한 갈머리〔冠村部落〕 모퉁이를 돌아설 즈음엔 차창에 빗방울까지 그어지고 있었다. 예년에 없던 푹한(퍽 따뜻한) 날씨기에 눈을 비로 뿌리던 모양이었다. 겨울비를 맞으며 고향을 찾아보기도 난생 처음인 데다 정 두고 떠났던 옛 산천들을 돌아보이자, 나는 설레이기 시작한 가슴을 부접할(의지할) 길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두 눈을 지릅뜨고 빗발 무늬가 잦아 가던 창가에 서서, 뒷동산 부엉재를 감싸며 돌아가는 갈머리 부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들뜬 것과는 별도로 정말 썰렁하고 울적한 기분이었다.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
그 중에서도 맨 먼저 가슴을 후려친 것은 왕소나무가 사라져 버린 사실이었다. 분명 왕소나무가 서 있던 자리엔 외양간만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 굴뚝만이 꼴불견으로 뻗질러 서 있던 것이다. 그 왕소나무 잎새에 누렁물이 들고 가지에 삭정이가 끼는 걸 보며 고향을 뜨고 13년 만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긴 했지만, 언제 베어다 켜 썼는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현장을 목격하니 오장에서 부레가 끓어오르지(몹시 성이 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4백여 년에 걸친 그 허구헌 풍상을 다 부대껴 내고도 어느 솔보다 푸르던, 십장생(十長生)의 으뜸다운 풍모로 마을을 지켜 온 왕소나무가 아니었던가. 내가 일곱 살 나 천자문을 떼고 책씻이(글방에서 학생이 책 한 권을 다 뗀 후 선생과 동료에게 한턱 내던 일)도 마친 어느 여름날 해 설핀(거치고 성긴) 석양으로 잊지 않고 있지만, 나는 갯가 제방둑까지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와 온 마을을 쓸어 삼킬 듯이 쳐들어오던 바다 밀물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댕기물떼새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석양 놀에 가득 떠 있던 눈부신 바다를 구경했던 것이다. 방파제 곁으로 장항선 철로가 끝간 데 없고, 철로와 나란히 자갈마다 뽀얀 신작로는 모퉁이를 돌았는데, 그 왕소나무는 철로와 신작로가 가장 가까이로 다가선, 잡목 한 그루 없이 잔디만 펼쳐진 펑퍼짐한 버덩(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 위에서 4백여 년이나 버티어 왔던 것이다.
그날 할아버지는 장정 두 팔로 꼭 네 아름이라던 왕소나무 밑둥을 조심스레 어루만시면서,
“이애야, 이 왕솔은 토정(土亭 : 이지함) 할아버지께서 짚고 가시던 지팽이를 꽂아놓셨는디 이냥 자란 게란다. 그쩍에 그 할아버지 말씜은, 요 지팽이 앞으루 철마가 지나가거들랑 우리 한산 이씨 자손들은 이 고을에서 뜨야 허리라구 허셨다는 게여……. 그 말씜을 새겨들어 진작 타관살이를 했더라면 요로큼 모진 시상은 안 만났을지두 모르는 것을…….”
하던 말을 나는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왕소나무의 내력에 대해서 최초로 들은 지식이었다.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왕소나무로 되다니. 토정이 이인이며 기행이 많았던 것은 토정비결을 보는 자리 옆에서 이따금 들었으므로, 할아버지가 외경스러워하던 모습이나 개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듯도 했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런 구전된 전설 따위는 곧이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 왕소나무는 군내에선 겨룰 데가 없던 백수(百樹)의 우두머리였고, 그 나무는 이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나는 우리 가문의 선조 한 분이 그토록 우려하고 경계했다던, 그러나 이미 40여 년 전부터 장항선 철로를 핥아 온 철마를 탄 몸으로 창가에 서서, 지호지간(指呼之間, 손짓하여 부를 만한 가까운 거리)의 그 유적지를 비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완전히 타락한 동네구나.-나는 은연중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마을의 주인(왕소나무)이 세상 뜬 지 오래라니 오죽해졌으랴 싶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더욱이 피서지로 한몫해 온 탓에, 해수욕장이 개장된 여름이면 밤낮 기적 소리가 잘 틈 없던 철로가에 서서, 그 숱한 소음과 매연을 마시다 지쳐, 영물(靈物)의 예우도 내던지고 고사(枯死)해 버린 왕소나무의 운명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가슴이 쓰리고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왕소나무의 비운에 대한 조상(弔喪)만으로 비감에 젖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내가 살았던 옛집의 추레한(겉모양이 깨끗하지 못하고 생기가 없는) 주제꼴에 한결 더 가슴이 미어지는 비감으로 뼈저려 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얼핏 지나치는 차창 너머로 눈결에 온 것이긴 했지만, 간살(칸살, 일정하게 둘러막은 건물의 공간)이 넉넉히 열다섯 칸짜리 꽃패집(ㅁ자형 집)의 풍채는커녕, 읍내 어디서라도 갈머리 쪽을 바라볼 적마다 온 마을의 종가(宗家)나 되는 양 한눈에 알겠던 집이 그렇게 변모할 수가 있을까 싶던 것이다.
그것은 왕소나무의 비운 버금(으뜸 바로 아래)으로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었다. 이제는 가로세로 들쑹날쑹, 꼴값하는 난봉 난 집들이 들어서며 마을을 어질러 놓아, 겨우 초가 안채 용마루만이 그럴듯할 뿐이었으며, 좌우에서 하늘자락을 치켜들며 함석 지붕 날개와 담장을 뒤덮었던 담쟁이덩굴, 사철 푸르게 밭마당의 방풍림으로 늘어섰던 들충나무의 가지런한 맵시 따위는 찾아볼 엄두도 못 내게 구차스런 동네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실향민. 나는 어느덧 실향민이 돼 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덜어 버릴 수가 없었다. 고향이랬자 무덤〔墓〕들밖에 남겨 둔 게 없던 터라 어차피 무심하게 여겨온 셈이긴 했지만, 막상 퇴락해 버린 고향 풍경을 대하니, 나 자신이 그토록 처연하고 헙헙하며 외로울 수가 없던 것이다.
나는 맨 먼저 할아버지 산소부터 성묘를 해야 예의라고 믿고 있었다. 할아버지 산소는 한내에서 40여 리 밖인 고만(高巒)이란 갯마을 연해의 종산(宗山, 한 문중의 조상을 모신 산) 한 기슭에 외따로 모셔져 있었다. 하루 한 차례의 버스편마저 없는 곳이라 천상 걷기로만 해야 하되 가며오며 한대도 하룻길로는 벅찬 곳. 도착한 날은 도리 없이 읍내에서 묵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었다. 비록 고향을 등진 지는 오래였지만, 며칠쯤 묵는대서 흉허물이 될 집은 없었다. 나는 읍내 군청 관사에 살고 있던 외척을 찾아 유숙처로 내정했다. 그런 뒤로 해전(해가 지기 전)을 뜻 없이 보낼 일이 따분하여 갈머리를 찾기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뛰놀며 성장했던 옛 터전들을 두루 살피되, 그 시절의 정경과 오늘에 이른 안부를 알고 싶은 충동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 계기였다. 비단 엉뚱하고 생소하게 변해 버려 옛 정경, 그 태깔(모양과 빛깔)은 찾을 길이 없다더라도 나는 반드시 둘러보고, 변했으면 변한 모양새만이라도 다시 한 번 눈 여겨 둠으로써, 몸은 비록 타관을 떠돌며 세월 할지라도 마음만은 고향 잃은 설움을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역전 거리로 나서자마자 비닐 우산부터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두둑우두둑 우산 위에서 들린 빗낱 듣던 소리는, 점심마저 굶어 허당이 된 가슴속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분명한 가락으로 두들겨 주고 있었다.
갈머리는 일테면 한내읍 교외로서 읍내 복판에서 보통 걸음으로 10분이면 닿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마을 동구 앞에는 조갑지(조개) 같은 초가 세 채가 신작로를 가운데로 하여 따로 떨어져 있었다. 한 채는 눈깔사탕이며 엿과 성냥을 팔던 송방(松房)으로 불리운 구멍가게였고, 주인은 술장수 퇴물인 채씨 부부였다. 그 맞은편 집은 사철 풀무질이 바쁘던 원애꾸네 대장간이었으며, 그 옆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던, 대낮에도 볕살이 추녀끝에서만 맴돌다 가 어둡던 옴팡집은 장중철이네가 차린 주막이었다. 부엌은 도가(도매상) 술에 물 타서 느루(늘) 팔던 술청이었고, 손바닥만하던 명색 마당 귀퉁이는 이발 기계와 면도 하나로 깎고 도스리던, 장에 가는 장꾼들만 바라보던 무허가 노천 이발소였다. 주막과 대장간 어중간에는 사철 시커멓게 그을린 드럼통 솥이 걸리어 있어, 장날마다 싸잡이 나무를 때어 끓이면서 장으로 들어가는 옷가지나 바랜 이불잇 따위를 염색하던, 검정 염색터가 전봇대 밑에 웅크리고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한 가지도 그전 그 모습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송방은 헐고 새로 이은 밝고 시원한 이발소로 변해 처마에 ‘관촌 이발관’이라는 문짝 만한 간판이 올라 있었고, 원애꾸네 대장간 자리에도 붉은 기와의 오죽잖은 블록 집이 대신 들어서 있는데, 아마 국민 학교 선생이나 군청 계장쯤 된 사람이 지어 사는 살림집인 것 같았다. 장중철이네 움막도 지붕을 슬레이트로 개량했고, 판자 울타리는 시퍼런 페인트를 발랐던 시늉만 낸 채로 ‘반공 방첩’ 표찰과 분식 장려 담화문이 붙어 있었으며, 곁들여 인두판만큼 기름하고 좁은 널빤지에 되다 만 먹글씨로 ‘천일 양조장 제13구역 탁주 위탁 판매소’라는 상호를 내걸고 있었다. 이발관 유리창을 뚫고 나온 난로 함석 연통에서는 보얀 연탄 가스가, 끓는 소댕(솥뚜껑)에 김 서리듯 부실거리고, 낯선 얼굴 두엇이 무심찮은 눈으로 나를 살펴보며 서성거리고 있었으나, 내가 알아볼 만한 얼굴은 단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온 동네를 바깥마당으로 여기며 18년 동안이나 산 토박이가 이토록 나그네 같은 서툰 몸짓밖에 취할 수 없단 말인가. 진실로 서글픈 일이었다.
나는 이윽고 신작로가 나뉘면서 검붉은 황토를 드러낸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섰다. 몇 걸음 안 가서 이내 과수원이 나왔다. 이제 과수원 탱자나무 울타리 곱은탱이만 돌아가면 철철이 선대의 손길이 닳아지고, 사변 이듬해부터는 여러 가지 푸성귀와 그루갈이를 내 손으로 직접 거두어 먹다가 집과 함께 모개흥정(함께 몰아서 하는 흥정)으로 처분하고 떠났던, 팔백여 평의 터앝(집의 울안에 있는 작은 밭)의 나타날 숨가쁜 길목이었다. 내린 비로 터지게 얼었던 거죽이 풀린 길은 해토머리(언 땅이 녹기 시작할 때)가 다 된 것이나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질었다. 그러나 옛길을 되찾았다는 감상 따위는 우러나지 않았다. 소나기가 두어 줄금만 내려도 산에서 쏟히는 맑은 물이 흐르던 길가의 개랑은 수채만이나 하게 좁아진 반면, 그 구거지(溝渠地, 개골창,개울)에는 지질한 블록 집들이 잇대어 서 있어 등산객의 걸음이 잦은 서울 교외의 외진 동네와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끝나면서부터는 바로 그 터앝머리였다. 나는 마음이 바빠 다그친 걸음으로 보리싹이 푸릇거리는 밭두둑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찰나, 가슴을 냅다 쥐어 질린 충격과 함께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팡이에 굽은 허리를 의지한 할아버지가 당신의 헛묘〔假墳墓(가분묘)〕를 굽어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항용 아끼시던 마가목〔馬牙木〕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는 역시 망건으로 탕건을 받쳐 쓰고, 공단 마고자 아래 허리춤에서는 안경집이 대롱거렸으며, 허연 수염을 바람결에 날리면서 구부정하게 서 있음이 천연하였다.
한참만에야 순간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잃어버린 지난날의 한 시절을 되살려 낸 착각으로 그렇게 오두망절(멍한 모양)하고 서 있은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한숨을 끄면서 칠성 바위 쪽으로 다가갔던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 순간적인 환각이었으나 소년 시절에는 너무도 자주, 일상으로 목격하여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도록, 그 할아버지 아니면 아무도 시늉할 수 없을, 그분의 인상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던 사실이었다.
나는 칠성 바위 중 맨 고섶(물건을 두는 곳이나 그릇 같은 데의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맨 앞쪽)에 있고, 참외를 따거나 수수목을 찔 때 흔히 올라앉아 쉬었던, 네모가 뚜렷한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빗낱은 계속 성깃성깃하게 흩뿌리며 비닐 우산을 투덕거렸고, 암컷처럼 패인 부엉재 고랑 아래 잔솔밭 밑 두어 채 초가 굴뚝에서는 저녁 청솔가지 연기가 비거스렁이(비 갠 뒤에 바람이 불고 시원해지는 현상)에 눌려 안개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앉자마자 칠성 바위들의 안부를 하나하나 살펴가기 시작했다.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바위라서일까. 태고로부터 북두칠성과 똑같은 위치로 배치되어 앉았던 일곱 덩이의 바위는, 한결같이 옛날 그대로 제자리들을 지키고 있었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그중 자주 오르내렸던 길가에 나앉은 막내둥이의 지프 같던 모습도 여전했으며, 댓 걸음 곁의 두꺼비 바위도 그 자리에 직수굿하게(저항하지 않고 풀 이 죽어 수그러져)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범이 누운 형상의 세 번째 바위 역시 엉성해진 덤불을 들러리로 한 채 그 위엄스런 풍모를 타고난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눈발이 히뜩대면 곧장 콩새와 굴뚝새들이 날아들어 푸득대던 덤불도 새 밭임자의 연장에 어지간히 시달렸으련만, 두 그루의 옻나무와 찔레 덩굴, 그리고 까치밥과 개다래 넌출이 어우러져 여전히 멧새들을 부르고 있었다.
바로 범 바위 밑에 쓰였던 할아버지의 헛묘가 언제부터 그토록 묘갈(墓碣, 묘 앞에 세우는 작은 돌비)과 봉분의 잔디결도 곱게 다듬어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신후(身後, 사후)에 조석 상식(上食, 상가에서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음식)을 올리면 무엇하며, 초하루 보름에 삭망(朔望,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 차례를 드린들 무슨 소용이랴고, 그 일이야말로 생전에 찾고 갖출 일이라 하여 15년 전부터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누구 생일 잔치보다도 더 푸짐하게 진짓상을 올리게 했던 아버지보다 앞서, 앞일이 다가오는 것을 내다본 항아버지 당신 스스로가 서둘러 만든 헛묘였으며, 평생 주초(酒草, 술과 담배)뿐 아니라 바둑 장기 같은 조용한 잡기마저 몰랐던 할아버지가 해 길어 무료함에 지치던 봄날이면, 지팡이를 의지해 홀로 칠성 바위에 나섰고, 구부정한 허리를 두들기면서 장차 당신이 영원히 누울 유택(幽宅, 무덤)을 보살피며, 쥐구멍이나 잡초가 자리를 못 잡도록 가다듬은 다음,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곤 하던 모습만을 자주 발견하고, 어린 소견에도 숙연해진 마음으로 발걸음이 무거워지던 것만은, 이십 수삼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간직해 왔던 것이다.
그 무렵 칠성 바위 언저리와 밭 가장자리에는 새봄마다 지장풀이 잘 되었고, 특히 할아버지의 헛묘 묘갈과 봉분에는 달짝지근하게 배동(대가 불룩해지는 현상) 오른 삘기가 많아, 햇살 긴 마른 봄날이면 얼굴을 새까맣게 태워 가며 소꿉장난으로 긴긴 해를 저물리곤 했었다. 그럴 적이면 할아버지도 지팡이를 앞세워 칠성 바위로 나왔고, 질경이와 광대나물이 흔하던 바위 앞 보리밭에서 나보다 몇 갑절씩들 나물을 잘 뜯던 망아지만한 옹점이도, 부살같이 손 칼을 놀려대며 나물 바구니를 채워 가곤 했었다.
옹점이는 마음씨가 너그럽고 착한 아이였다. 그녀는 3천 석의 지주이며 한말에 중추원의 의관을 지내다가 인접 동네 달 밭으로 낙향하여 살았던 외가의 행랑아범 딸로, 어머니의 신행(新行, 결혼하여 신랑이 신부집에 가거나 신부가 신랑집으로 가는 일)에 교전비(轎前婢, 주로 귀족이나 부유층의 혼례 때에 신부가 데리고 가던 여자 종)로 왔던 아이가 얼마 안 있어서 황아 장수(집집을 찾아다니며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용품을 파는 사람)에게 묻어 가자 이를테면 그 보충역으로 오게 된 아이였는데, 술장수의 데림추(주견이 없이 남에게 딸리어 다니는 사람)로 붙어 다녔던 이매(二梅)라는 화류계 퇴물(退物, 어떤 직업에서 물러난 사람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 행랑아범과 좋아 지내다가 일이 급해 어느 옹기점의 독 틈에서 낳았다 하여 옹점이라는 것이었다. 옹점이가 우리 집으로 들어온 것은 그녀 나이 일곱 살 때였다고 했다. 어머니가 친정에 갔다가, 외가 부엌에서 아기 동자아치(밥짓는 일을 하는 여자 하인)로 자라던 것을 안저지(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여자 하인) 겸 허드레 심부름용으로 데려와서 길렀다는 거였다. 마음씨갈은 비단결같이 고운 데다 손속이 좋고 눈썰미가 뛰어나며, 인정과 동정심이 많은 점에서 어머니는 노상 쓸 만한 아이라고 추켜주었다. 때문에 그녀는 동네에 떠 들어온 모든 비렁뱅이와 동냥중, 그리고 나병 환자들한테 인기가 있었고, 우리집에 와서 살던 머슴들은 그녀의 마음씨에 녹아 자진하여 부엌일까지 옙들이( 해주며 도우려고 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녀 일을 흉내 내어 나를 자주 웃겼던 것도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맨 처음 그녀를 다잡아 가면서 안팎 범절과 행실을 가르치고 다스린 이도 할아버지였다. 본디 사람 보는 눈이 달랐던 할아버지는 그녀를 보자 대뜸 싹이 있겠다고 판단하여 나이부터 물었었다.
“그래 너는 몇 살이나 되었다더냐?”
그러자 그녀는 아무 어렴성 없이 아는 대로 대꾸했다.
“지 에미가 그러는디 제년이 작년까장은 제우 여섯 살이었대유. 그런디 시방은 잘 몰르겄슈.”
“늬가 늬 나이를 모른다 하느냐?”
“예. 워떤 이는 하나 늘어서 일곱 살이라구 허던디 또 누구는 하나 먹었응께 다섯 살이라구 허거던유.”
“페엥-. 그래 늬 에민가 작것(잡것, 잡스러운 사람)인가는 요새두 더러 보이더냐?”
“접때 달밭 대감댁(외가)에 왔는디 봉께, 유똥 치마를 입구, 머리는 힛사시까미(머리털을 가지런히 하여 동여매거나 묶음)를 허구, 근사헌 우데마끼(손목 시계)두 차구…… 여간 하이카라가 아니던디유.”
“그래 그것은 시방두 장(늘) 술고래라더냐?”
“그리기 접때두 취해서 즤 애비허구 다투다가 고쟁이 바람으루 쬧겨났었슈.”
“페엥- 숭헌…….”
할아버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철부지하고 이러니 저러니 하기 싱거워서가 아니었다. 굴지의 지주였던 탓에 온갖 잡기와 유흥에만 몰두했던 나의 외숙한테 ‘대감’이라는 칭호를 썼기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을 말버릇이었지만 할아버지 앞에서는 무엄한 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잘 참았다.
“그래 늬 이릠은 무엇이라 부르더냐?”
“먼젓것인디유.”
“먼젓것이라…… 아직 이릠이 웂더란 말이렷다.”
“…….”
“늬 에미가 너를 즘촌〔店村 : 질그릇 굽는 마을〕 옹기 틈목에서 풀었다더구나……. 오날버텀 이릠을 옹젬(甕點)이라 허거라. 옹젬이가 무던허겄구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즉흥적인 작명을 했는데, 호적부에도 그대로 올라갔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옹점이는 어른 앞에서는 소견이 넓었고 아이들에게는 남달리 인정이 많았다. 그릇을 잘 깨는 덜렁쇠였고, 참새 못잖게 수다쟁이이기도 했다. 나물 바구니가 차도록 헛묘 앞에서 떠날 줄 모르던 할아버지를 볼 적마다 그녀는 그녀 깜냥대로(나름대로) 집에 들어오면 으레껀 나물 바구니를 뜰광에 내던지며,
“아씨, 나리만님두 봄을 타셔서 심난허신개비데유.”
그 큰 목통으로 떠들어댔던 것이다.
“저것…… 저 방정머리는 원제나 철 들어 고쳐질거나. 쯧쯧쯧…….”
하며, 어머니는 그 수선에 혹시 어디 나들이하셨다가 낙상이라도 했단 말인가 싶어 꾸리고 있던 반짇고리를 밀쳐 놓게 마련이었다.
“나리만님은 당신 헛뫼 써 둔 것이 옝 걸리시는 모냥이던디유.”
“너는 그만 좀 나서라.”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게 바구리 것은 뭐라는 게냐?”
그것이 사랑에서 즐겨 찾는 국거리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짐짓 그렇게 묻는 거였다.
“나리만님 즐겨 허시는 나승개허구 소리쟁이유……. 참 해두 오라지게 질다…….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은 떠난다아…….”
그녀는 귀동냥하여 남은 콧노래를 불러 가며 아궁이 앞에서 나물 다듬기를 시작한다. 나이보다 숙성했던 그녀는 그때 이미 사춘기에 들어 있은 모양이었다.
“반평생을 믱당, 믱당 허셨는디, 터앝머리에 그런 자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또박 십여 년이나 산을 챚어 댕기셨으니 여북허시겄네.”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정말 할아버지는 자신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볼 줄 안다던 지관(地官, 풍수 지리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를 가리어 잡는 사람)이란 지관은 모조리 수소문하여 불러 모았고, 지관을 앞세워 높고 먼 산 가림 없이 허다한 산을 뒤졌더라고 했다. 갈머리에서 읍내를 질러 건너다 뵈는 성주산 옥마봉을 비롯, 청라 오서산, 공주 계룡산, 그리고 당신의 선조인 토정〔이지함〕, 성암〔이지번(李之蕃)〕, 명곡〔이산보〕, 삼숙질의 유택이 이웃한, 토정 자신이 찾아내어 스스로 무덤을 만듦으로써 종산(宗山)이 된 주포면 고만과, 훨씬 선조인 목은〔이색〕을 모신 한산면의 여러 야산들까지도 두루 살펴보았지만, 결국 자신의 가분묘를 써 둘 만한 자리는 당신이 쓰는 사랑에서 가만히 불러도 이내 대답할 수 있게 가까운, 칠성 바위 가운데 범 바위 앞의 밭머리에서 찾아낸 셈이었다.
한번은 헛묘 앞에서 마주친 할아버지한테 나는 무심할 수 없어 물어 보기까지 했다.
“할아버지, 요기가 무슨 믱당이래유? 까시덤풀만 우거진 황토밭인디…….”
눈보다 귀가 훨씬 가까웠던 할아버지는,
“조 바위를 보려므나. 보매 보기루두 똑 북두칠성 형상 아니겄느냐.”
“그렇다구 밭이다 모이(묘)를 써유? 할아버지는 돌아가는 게 좋신 모냥이네유.”
“게 다 마찬가지여. 먹구 헐일 웂이 지달리는 게나, 일찍 가서 누워 잔디찰방(察訪) 허는 게나…….”
“…….”
“철웂는 것허구 이런 말 허는 내가 어리석다마는.”
“그렇지만 해필이면 바위 밑이래유. 넘들은 산에다 모이를 쓰던디.”
“나허구 이 바위들허구는 사구일생(四俱一生)이니라.”
“그게 무슨 말인디유?”
“그럼 사귀일성(四歸一成)이라구 허던 말은 더러 들어보았더냐?”
“아뉴.”
“숭헌……. 글을 배우구두 고만 것을 모른다며는 어쩐단 말이냐…….”
“…….”
“듣거라. 너 그럼 목화 느 근〔木花四斤〕이 면화 한 근〔棉花一斤〕인 중은 알겄느냐?”
“씨아루 잣어서 씨를 뺀 건 목화구, 솜틀집 가서 탄 목화는 면화지유.”
“행림들이 수삼 느 근이 건삼 한 근이라던 말두 못 들었더란 말이냐?”
“…….”
“무엇을 네 곱쟁이 합쳐야 그것을 가공한 것 하나허구 맞먹는다는 말인 게여.”
“그럼 껏보리 느 말은 멥쌀 한 말이겄네유?”
“페에엥-.”
‘페에엥-.’ 소리는 ‘숭헌…….’이라는 말과 함께 할아버지의 전용어였다. 화가 상투 끝에 이르러 아랫사람들에게 걱정(아랫사람의 잘못을 나무람)을 하실 때와, 되잖은 말, 같잖은 꼴, 어질지 못하여 어리석은 것 등, 꾸중을 대신하던 할아버지만의 용어였다.
그 무렵만 해도 할아버지는 자신의 일컬었던 문자 그대로 백수 풍진(白首風塵, 늙바탕에 겪는 세상의 어지러움이나 온갖 곤란)이었으니, 정자나무의 해묵은 뿌리마냥 간신히 견뎌 내던 형편이었다. 망백(望百)의 여든 아홉을 누린 탓에 인생 무상을 삶 자체로서 느꼈고, 그래서 장력(張力)은 잃었으되 매사에 자약(自若)할 수 있는 소중한 것을 지녔던 것인지도 몰랐다. 외람된 말이겠지만 바위들과 당신이 한몸임을 알았다면 바람이나 눈비 따위, 모든 자연계의 현상과 자신의 존재가 어떤 성질 혹은 체질을 서로 나눴는지도 알았을 것이었다.
나는 그 바위들이 무심 무태한 한갓 자연 물질로서 그치는 것이 아닐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의지와 얼이 굳어져 버린 영구 불변의 영혼이며, 아니면 최소한 그 상징일 것 같았으므로 신성하고 경건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나는 바위에서 내려 김장해 들이고 비워 둔 밭고랑을 질러 할아버지 산소를 모셨던 범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눈발이 나부끼는 겨울철이면 꿩과 산비둘기가 유난히 자주 내리던 자리였다. 우리 집에서 내리 오 년 동안이나 머슴살이했던 박철호(朴鐵呼)는 덫을 퇴비 속에 묻거나 약을 놓아, 꿩과 산비둘기들만 가만히 앉아서도 쉽게 사냥해 들이곤 했었다. 항상 할아버지와 겸상이었던 나는 할아버지가 타이른, 귀가 싫도록 들었던 말도 덩달아 새삼스러워졌다.
“세상이 아무리 앞뒤가 웂어졌더래두 가릴 게라면 가려야 쓰는 게여. 생치(生稚, 말리거나 익히지 아니한 꿩고기)는 양반 반찬이구 비닭이(비둘기)는 상것들이나 입에 대는 벱이니라.”
혹시 비둘기 고기라도 입에 댈라 싶어 미리 경계한 거였다.
범 바위 앞, 서울로 이사하기 앞서 종산으로 면봉(緬奉, 무덤을 옮겨 장사를 지내는 면례의 존칭)해 드린 다음 집과 함께 모개흥정해 선로원(線路員) 김씨에게 팔아 넘긴 산소 자리에는 고구마를 갈았다가 거둬들인 듯, 마른 고구마 덩굴이 우북더북한 밭고랑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빗낱은 언제 그쳤던가, 비거스렁이를 하느라고 바람이 몹시 매웠다. 좀더 저물고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읍내로 들어가야 하리라. 그러나 나는 몇 가구의 하잘것없는 인가를 돌아 옛동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진작 면례를 해드린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랴. 칠성 바위 언저리엔 오죽잖은 블록 집들이 무려 다섯 채나 지어져 있었다. 담장도 안 쳐 있고 쓰레기장과 닭, 오리장이 너절하니 흩어져 있는 가옥들이었다. 장차 주택들이 들어차면 산소 관리하기에도 여의치 않으리라 여겨 종산으로 모셨던 것은 열번 잘한 일 같았다. 집집마다 하수도가 돼 있지 않아 산소 자리와 칠성 바위 둘레는 온통 수챗구멍이나 다름없이 더럽혀져 있었고, 특히 다섯 가구의 다섯 군데 변소는 악취를 제멋대로 풍기며 보기 흉한 꼴들을 하고 서 있던 것이다.
동산 등성이로 오를수록 내가 첫돌을 맞은 뒤로 십팔 년 동안이나 살았던 옛집의 전모가 조금씩조금씩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대천읍 대천리 37번지. 할아버지가 만년을 나고, 어머니가 기울어진 가운을 끝까지 시달리다 지쳐 운명을 한, 그러나 내 손에 모든 것이 청산되어 이젠 남의 집이 된 옛집. 대지 삼백 오십여 평에 건평 칠십여 평의 ㄷ자로 된 그 집은, 솔수펑이(솔숲이 있는 곳) 기슭 잔디밭을 뒤꼍 장독대로 하여 남향받이로 정좌한, 덩실하고 우아한 옛날의 풍모를 조금쯤은 간직하고 있는 듯도 했다. 밭마당을 둘러친 들충나무 울타리와 뒷담장을 겉으로 에워싼 열두 그루의 밤나무는 이젠 완연히 늙어 버린 것 같았으며, 새 주인이 닭장과 돼지우리를 내지어 약간 좁아진 듯한 대문 앞에도 그 개오동 한 그루가 아름드리로 자라 있었다.
나는 울안 마당으로 시야를 옮겼다.
저것이 바로 그 모란과 매화일까. 그 매실나무며 치자나무도 여태 가꿔 오고 있단 말인가. 좀처럼 믿기지 않았지만 그러리라고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사철 어머니 손에 가꿔졌던 울안 정원은 타래박 우물을 가운데로 하여 썰렁하고 어수선한 대로나마 심겨진 그 자리에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곶감을 여남은 접씩 켜서 썼던 배시나무와 그 곁의 대추나무도 지붕이 얕게 자라 있었고. 나는 발돋움을 하여 뒤꼍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곁들여 울안의 온갖 실과나무와 관상목들을 대표했던, 가지가 휘어지게 감이 달려 겨우내 온 집안 식두들의 간식이 돼 주었던, 이젠 흔적마저 남지 않았을 그 죽은 감나무도 동시에 생각해냈다. 언제 누가 심은 나무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 누가 정월 보름날 시집을 보내 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밑둥에서부터 두 갈래로 갈라진 큰 가지 틈엔 도끼날보다 더 큰 돌이 깊숙이 박혀 있던 감나무였다. 그러나 그 감나무는 내 손에 찍혀 베어졌으며 내 손을 따라 아궁이로 들어가 한 삼태기의 재로 변해 버리고 만 거였다. 어머니는 반년 이상을 천식으로 몸져 앓으시다가 여름 방학을 맞은 팔월 초순, 내가 종신하는 앞에서 세상을 버렸던 것이다. 그 감나무가 죽은 것도 같은 순간이었으리라고 믿는다. 삼일장을 치르고 나서야 집안 식구와 대소가 및 마을 사람들은 사나흘 전까지도 잎이 시퍼렇고 대추알만큼씩이나 자란 그 숱한 열매를 달고 있던 감나무가 갑자기 죽어 있음을 발견하게 됐던 것이다. 잎새들은 모조리 오가리들 듯 푸른빛 그대로 말라 가랑잎이 돼 있었고, 솔바람만 지나가도 쪼글쪼글해진 감들이 상달 초승께 밤나무를 털 때처럼 우술우술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장사 치르기에 경황이 없어 아무도 여겨보지 않았을 따름, 감나무가 갑자기 죽은 것은 어머니의 운명과 거의 동시였으리라던 것이 많은 사람들이 같이한 의견이었다. 그 감나무는 어머니의 대소상을 치른 이듬해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아니 완전한 고사목(枯死木, 말라 죽은 나무)으로, 건드리면 부러지는 삭정이가 돼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입을 모아 그 감나무를 볼 적마다 고인(故人)이 생각난다고 했다. 보기 싫으니 베어 버리라는 충고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반생과 모든 것을 함께하다 죽은 나무를 두고 그저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뭔지 모르게 서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자 무릇 울안의 나무란 함부로 심고 옮기며 베지 않는 법이므로, 나무를 벤 즉시 그 그루터기에다 낫이나 칼을 꽂아 둠이 동티(재앙)를 예방하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나는 정말 남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기억에 짙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벤 둥치와 가지를 장작개비로 패 쌓으면서 솟아나던 눈물을 걷잡지 못해 했던 일이다.
이제 그 감나무 자리에는 짚누리(?가 앉아 있었다. 장독대 바로 위에 있는 앵두나무, 그 왼편으로 늘어서 있던 석류나무와 복숭아나무도 여전하게 제자리에 서서 담 너머 밖 산등성이에 처연히 서 있는 옛 주인을 무심하고 무표정하게 넘겨다보고 있었다.
가을이면 조석으로 쓸어 담아 내어도 땅이 안 보이게 낙엽이 쏟아져 쌓이던 정원이며 뒤란(집 뒤의 울안), 서너 칸이 넘던 대청마루와 사랑 툇마루들, 쓸고 닦기가 지겨워 아늑하고 좁은 집에서 살기를 그토록 원했던 내 신세는, 이젠 내 명의로 된 유일한 부동산이기도 한 열한 평짜리 아파트 한 칸만을 겨우 지니게 되고 말았다. 대충 훑어 보기에도 광과 헛간으로 썼던 서편 채는 방과 부엌을 들이고 내어 세를 준 듯했고, 사랑 마루 앞으로 돌나물이 잘되고 매화와 장미, 백합과 난초가 고이 자랐으며, 생지황이니 박하 따위 약초를 가꿨던 화단터로 상추나 쑥갓·호파·부추 등속의 푸성귀를 갈아먹는 자리로 변한 지 오래 된 모양이었다.
밭마당 밑뜸, 행랑채로 남아 대복이네가 살았던 초가는 그새 주인 또한 몇 차례나 갈리었을까. 이젠 제법 기와도 올린 알뜰한 주택으로 가꿔져 크막한 문패까지 달고 있었다. 미나리꽝으로 쓴 마당 밑 박우물 아래 초입 논배미부터, 내리닫이로 신작로까지 늘어섰으려니 했던, 가뭄을 모르던 무논이어서 해마다 오려를 거둔 구렁찰 논들은, 벌써 그런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게 붉은 기와나 슬레이트로 다시 이은 허름한 집들이 들쑹날쑹 제멋대로 들어 차 있었다. 원래는 우리 논이 끝난 곳이 신작로였고, 신작로를 건너서면 이내 장항선 철로가 가로지르고 있게 마련이었는데, 토정의 지팡이였다던 왕소나무는 흔적도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오죽잖은 블록 집이 노란 페인트로 뒤발한(온 몸에 뒤집어써서 바른) ‘접도 구역’이란 돌 말뚝과 함께 썰렁하고도 음산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철로 너머는 곧장 바다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동네 조무래기들과 벌거숭이로 뒹굴며 놀았던 개펄이었다. 물을 쓴 조금(조수가 가장 낮은 때인 매달 음력 8일과 23일) 때면 삼사십 리 밖의 수평선이 하늘과 한 빛깔로 아물거리고, 밀물이 들어차면 철둑과 연결된 방파제 위로 갯물이 넘실대던 바다.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하늘을 뒤덮으며 너울대고, 방파제 가장자리에서는 보멩〔염도계(鹽度計)〕를 신주 단지처럼 위하던 소금막〔제염막(製鹽幕)〕으로부터 청염(晴鹽)을 못 다 긁은 갈통물로 육염(六鹽) 굽는 연기가 해무(海霧, 바다에 끼는 안개)처럼 자욱했으며, 망둥이 낚시꾼들이 장마 걷은 방죽에 줄남생이(물가의 양지바른 곳에 죽 늘어앉은 남생이) 늘 앉듯 들벅거리되, 안옷〔황포(黃布, 돛으로 다는 누런 포목)〕을 활짝 펼친 돛단배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뱃사공들의 뱃노래가 물새들의 그것보다 더욱 구성지게 울려 퍼지던 바다였었다. 그러나 그 바다도 이젠 가고 없었다. 개펄 대신 논배미들이 열린 뭍이었고, 기름진 농경지대로 뒤바뀌어 있던 것이다. 상전 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심하게 변한다는 뜻)라고 듣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바다와 뭍을 경계하는 제방은 이십 리도 넘는다고 들었다. 그 제방 울안, 내 또래의 어린것들이 제집 마당으로 알며 놀았던 개펄과 갈대밭은, 구획도 제대로 된 논으로 변해 버려 염분이 성에처럼 서리고, 고둥이며 장뚱이가 발길에 차이던 개펄 아닌 농로는, 리어카와 소달구지 자국으로 올고르게 누벼져 있었던 것이다. 영원히 되찾을 수 없이 된 옛터를 굽어보며 어린 시절에 묻혔던 자신을 깨닫고 나니, 어느덧 하늘엔 구름이 물러나고 온 마을 안팎과 들판이 온통 타는 놀에 젖어 있었다. 나는 등성이에서 내려올 채비를 했다. 기온이 점점 내려가기만 하여 훨씬 더 추워졌던 것이다.
마을에는 아직 오랫동안 이웃해 살았던 낯익은 사람들도 여럿 남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네들을 방문하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전에도 장정이 되어 장가들을 들고 일가를 이뤘던, 맏형 또래나 그 위아래한테도 으레껀 옛 버릇을 못 버려 ‘허우’ ‘허소’ 또는 시종 반말로만 대한 터라, 그네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그네들을 지칭할 명칭의 마땅찮음 때문이었다. 갑자기 무슨 명칭으로 바꿔 부르며 대꾸해야 십상일 것인가. 결국 나는 마을을 들지 않기로 작정했다. 아니 될 수 있으면 알 만한 사람과 마주쳐도 얼굴을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리라 작정하고 발걸음을 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을을 아주 떠나던 날까지도 일가 손윗사람이 아닌 이에게는 무슨 경어나 존칭을 써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지시였고 곁에서 배운 버릇이었다. 나이가 직수굿한 어른들한테는 으레껀, 김 서방, 최 서방하며 성 밑에 서방이란 명칭을 붙여 불렀고, 어지간한 청장년들한테는 덮어놓고 아무개아무개 하며 이름을 부르곤 했었다. 그것은 동네 아낙네들한테도 마찬가지였었다. 아무개 어머니 아무개 아줌마니 하고, 그 집 아이의 이름을 빌어 썼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그처럼 되지 못한 수작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제격인 듯했고, 하는 편이나 듣는 쪽에서나 예사로이 여겼던 줄로 알았다. 안팎 동네 사람의 거지반이 행랑이나 아전붙이였으므로 하대(下待)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요 고집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안팎 삼 동네를 다 뒤져도 친구랄 만한 친구가 있을 수 없었던 고적한 소년 시절이 비롯된 씁쓸한 것이었지만. 정말 친구가 생기지 않았다. 친구 삼아 놀려고 애써도 아이들이 어울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갈머리만 해도 한두 살 아래위나 동갑내기가 여남은이 넘었지만, 아이들은 또 저희들 부모가 어려워하던 것에 못잖게 할아버지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걱정을 무릅쓰고 몰래 숨어 다니며 썰매 타기와 자치기를 하고, 가오리연도 만들며 팽이를 깎아 쥐고 아이들 뒤를 열심히 뒤쫓아 다녔지만, 마을의 아이들은 여간해서 속을 터놓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기미를 할아버지에게 들킨 날은 밥맛을 잃고 밤잠마저 설치게 마련이었다. 할아버지가 손수 회초리를 든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페엥- 못된 것. 내 애비한테 일러 매를 들게 하고 말리라…….” 이 말이 그토록 두려울 수 없는 공갈이었던 것이다. 매우 꾸짖도록 아버지한테 지시한 적이 없으면서도 그랬다. 외려 그런 것을 곧잘 고자질하던 것은 나와 다시없이 잘 지내온 옹점이였다.
내가 할아버지 앞으로 불려가 꿇어앉아 안절부절못하며 학질 떼는 구경을 그녀는 무엇보다도 재미 있어했으니까.
“숭헌, 그런 상것 아이들허구 븟해(벗하여) 놀었더란 말이냐? 그리 그짓말을 허려면 글은 뭣허러 배웠더란 말이냐?”
“…….”
“그저 틈만 있으먼 밖으루 내달으니 한심한 일이로고. 색거한처(索居閒處)요, 산려소요(散慮逍遙)라고 배웠으면 배운 만침 알 만두 허련마는…….”
“애덜이 대이구 놀자구 오넌디 워칙 헌대유.”
“그런 잡인 애덜허구 동무해 놀면 사람 베리는 벱이여. 다 저더러 사람 되라고 이르는 소리거늘, 페에엥-.”
나는 부러 둘러 댄 거짓말에 가책을 받았고, 그것은 또한 나를 무척 우울하고 소심하게 만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착잡한 형편이었다.
나하고 놀고자 한 아이는 내가 중학을 졸업하고, 아니 그 이듬해 서울로 이사해 오기까지도 단 한 사람이 없었다. 피차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 부모가 할아버지 성미를 훤히 알고 있어 애써 함께 어울리지 않도록 자기네 아이들을 타일러 단속한 탓이었는데, 그것은 국민 학교에 들어간 뒤로도 이어져,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나 다른 애들과 함께 어울려 주든가, 상하학길에 우연히 만나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을 따름이었다. 우리 집안의 엄한 어른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줄곧 피차 그럴 까닭이 없었음에도 그런 어색스럽고 부드럽지 못한 관계는 풀리지 않았다. 언제나 아래윗물 돌 듯하니 답답하고도 쑥스러운 일이었다. 피차 굳어져 버린 습관을 스스로 깨어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6·25 사변이 나기는 내가 2학년에 진급한 초엽이었다. 그 난리는 우리 집을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 고을의 어른을 잃은 애석함은 일가붙이가 아니더라도 갈머리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간의 영고 성쇠(榮古盛衰, 사물의 성함과 쇠함이 서로 뒤바뀜)란 그처럼 무상한 일이란 걸 알게 된 동기도 그것이었고, 곁들여 집안에 어른이 없는데도 동네 아이들이 나와 접촉하길 꺼리던 사실에서, 인생의 생사를 한갓 티끌에 견주던 전쟁이라는 막중한 참극을 겪고도 습관만은 허술하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울러 깨우치게 되었다. 어쨌든 중학생이 된 뒤에도 마을 친구가 붙지 않던 것은 어느 모로나 적적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어머니에게 그런 사정을 하소연한 적까지 있었을 정도로.
“너는 벨걸 다 걱정허더라. 동네 그까짓 것들도 다 동무라고 그러네? 니가 얌전허구 공부 잘허기루 소문나 있으닝께, 너구 하냥 놀먼 즤들이 쩔리닝께 피허는 것을…….”
어머니는 오히려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아이들의 세계에서까지 케케묵은 관습이 밑바닥에 깔려 있으랴 싶었던 것이다. 나는 학과 공부만은 늘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읍내 바닥에 있는 중학교였지만, 전쟁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던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남 아닌 불리한 약점을 온통 한 몸에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3대 1이 넘는 경쟁률을 선두로 뚫고 합격한 흥분만 해도 해포(1년이 넘는 동안) 가까이나 계속되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나의 근본적인 고립이 할아버지가 범백사(온갖 일)에 문벌을 찾아 간격과 층하를 두어 행세했던 영향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관하거나 안달을 하지도 않았다. 그 어린 나이임에도 자라면서 부대꼈던 경험으로 일단은 세태에 순응하는 길만이 가장 안전한 처신이라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볕이 지워져 가면서부터는 바람결도 한결 날카로워진 데다 등성이는 바람맞이였으므로 못 견디게 추워지고 있었다. 빗방울에 풀린 듯하던 발밑은 움직이기만 해도 와작와작 하고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등성이를 내려왔다. 그러나 곧장 읍내로 향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개운찮았고 섭섭하였다. 황혼에 잠긴 옛집을 먼발로만 기웃거리다 말기는 너무나 서운했던 것이다. 나는 등성이 꼭대기 너머에서부터 옛집 사랑 앞마당까지 나 있었던 가리마 같은 오솔길을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옛 주인의 발길에 닳았던 마당, 마당가의 물맛이 약수 맛으로 소문난 박우물, 등멱하기 십상이던 우물가의 빨랫돌, 가옥과 전답을 매매할 때 장기(掌記, 물건이나 논밭의 매매에 관한 물품 목록을 적어 놓은 글)에까지 올랐던 개오동과 들충나무들. 그러나 그 무엇 한 가지 옛 주인을 알아 반기는 것은 없었다. 마당가의 돼지우리가 좀 부산해지고 퇴비장을 후비던 서릿병아리 몇 마리가 지축지축 비켜날 따름. 저녁 시간이 되어 안에서 숟가락 달그랑거리는 소리나 이따금씩 새어 나올 뿐, 새 주인이 된 선로원의 가족은 한 사람도 얼씬 않고 있었다. 사랑 마루 역시 그 마루였으나 마룻방 태깔은 보얀 빛 대신 땟국에 찌들고 결은 우중충한 빛깔이었고 그 위에는 먼지가 부옇게 앉아 있었다. 마루 반자(방이나 마루의 천정을 평평하게 만드는 시설)엔 쥐 오줌 자국이 구석구석으로 얼룩져 있고, 처마 밑 서까래와 도리 안의 제비 집터에도 거미줄이 드레드레 늘어져 주인 잃은 지 오래임을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말을 따르자면 재래로부터 꺼려 온 공·시자(工·尸字) 형을 피했을 뿐 아니라 일·월·구·길자(日·月·口·吉字) 형에서 가장 알뜰한 것만을 골라 갖춘 구조 밑에 정초(定礎, 주춧돌을 놓음)된 집으로, 기와로 개축을 하자면 암수키와만 열 눌〔十訥〕이 들어도 모자라겠다던 집이었다.
“좋은 집이니라. 풍광이 명미(明媚, 산수 경치가 맑고 아름다움)허구 수세(水勢)두 순조롭구. 내가 후제 잔디찰방을 허더래두 부디 이 집을 잘 가꾸어야 허여…….”
잔디찰방(察訪)이란 할아버지가 즐겨 일컫던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인제는 늙어 어두우니, 너르잖은 곳간에 어렴시수(漁鹽柴水)만 동나지 않는다면, 누워 읊고 앉어 오이니(외니) 아무 걱정 없으련만, 시국이 이러니 늙마가 편칠 않구나…….”
줄곧 기울고 퇴색해 온 가문도 변명할 겸, 신수가 안온치 않음을 한탄하며 할아버지는 쓸쓸히 웃곤 하였다.
나는 좀전의 칠성 바위,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었던 범 바위 앞에서 깜뭇 고인을 만났었지만, 사랑 마루 앞에 서 있으니 또 다시 할아버지의 환영이 어른거려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신전(身前)이었을 때는 밤낮으로 행보석(行步席, 일종의 돗자리)이 두 닢이나 깔려 있었고, 일찍이 할아버지가 소시적에 써서 양각(陽刻)한 장강대필(長?大筆)의 ‘魚躍海中天(어약해중천)’이란 편액 아래에는 철지난 등토시(여름에 땀이 옷에 배지 않도록 끼던 등나무로 만든 토시)와 미사리(삿갓·방갓·전모 따위의 밑에 대어 머리에 쓰게 된 둥근 테두리)가 낡은 갈모(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던 기름종이로 만든 물건), 그리고 고사리손 같아 장난감으로 놀기도 했던 대여의〔죽여의(竹如意, 여의는 중이 설법할 때 손에 쥐던 뼈·나무·대·쇠 등으로 만든 것)〕와 함께 걸려 있었고, 장귀틀(마루 귀틀 중에서 세로로 놓이는 가장 긴 귀틀) 앞에는 으레껀 마가목 지팡이가 거리비껴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꿈이었다. 나는 해거름녘에 들른 길손처럼, 땅거미가 깃드는 추녀 밑에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얼마 동안을 그 모양으로 서 있던 나는 문득 마루와 사랑 부엌 사이에 비스듬히 열려 있던 함실문 틈으로 사랑에 군불을 넣는 인기척을 발견하자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함실(불길이 그냥 곧게 들어가게 되어 있는 아궁이)문 안에는 가마솥이 걸린 널찍한 사랑 부엌이 있었다. 소를 기른 일이 없었으므로 그 가마는 여물 솥이 아니라 허드레로 두고 군불 넣는 김에 물이나 데워 쓰다가 안에서 일이 있을 때만 제구실을 하던 가마였다. 춘추로 장이나 젓국을 달이고 두부와 청포묵 쑬 때, 그리고 엿을 고을 때만 한몫을 하던 솥이었다.
아궁이가 내는지 연기가 밖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아궁에 무엇이 타고 있는지를 단박에 알아낼 수 있었다. 가을걷이 지치러기인 콩깍지와 메밀대를 때고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바로 그것을 뜻하는 거였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굴뚝 냄새에 나는 불현듯 콩깍지와 메밀대를 군불 아궁이에 때어 볼 수 있었던 옛날이 그리웠다. 그 무렵은 내 손으로 직접 농사를 지어야 했던 고생스런 청소년 시절이었음에도, 호의호식하며 허리를 굽실대는 수염 허연 늙은이한테 도련님도련님 하는 소리를 들었던 철부지 적의 아련한 기억보다 훨씬 씨알이 여문 그리움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사랑 부엌 가마솥에서 물린 지경이 되도록 맡아야 했던 여러 가지 냄새들을 새삼스럽게 되새기며 마당을 떠나고 있었다. 싱금싱금한 청포묵 앗는 냄새는 그리 자주 맡은 게 아니었지만, 간수(소금이 습기를 빨아들여 녹아 나오는 쓰고 짠 물)를 칠 때마다 부얼부얼 엉기던 두부솥의 구수한 내음이며, 엿밥을 애잇(애벌) 짜 내고 조청으로 졸일 때 밥맛까지 잃도록 달착지근하게 풍기던 엿 고는 냄새만은 다시 한 번 실컷 맛보고 싶은 뼈끝에 매듭진 추억이었다. 매년 추수가 끝나면 고사를 지내자마자 바로 채비를 하던 것이 엿을 고는 일이었다. 정초나 할아버지 생신 잔치에 쓸 조청을 장만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주초(酒草)를 못하던 할아버지의 간식이나 아이들의 주전부리(때를 가리지 않고 군음식을 자꾸 먹는 버릇, 군것질)감으로 강정 굽기, 그리고 단지에 담아 굳혀 두고 끌로 떼어 눅여 먹도록 하는 갱엿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할아버지가 쓰던 사랑 벽장은 언제나 손자들이 군침을 흘리던 곳이었다.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자리끼(자다가 깨어 마시려고, 잠자리의 머리맡에 두는 물)가 머리맡의 문갑 곁에 놓여야 하듯, 할아버지의 전용 벽장 속에는 노상 군입거리가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원래 뛰어난 음식 솜씨를 자랑하였고, 극노인을 모신 덕분에 시식(時食, 그 계절에 특별히 있는 음식)과 절식(節食, 절기에 따른 음식)에 남달리 유의를 하던 편이었다. 정초의 떡국은 으레 있는 것, 대보름의 약식과 식혜와 갖가지 부럼, 해토머리부터 시작되는 칠미국, 한식의 개피떡, 심짇날의 화전, 단오에는 수리치떡을 특히 잊지 않고 만들었으며, 복중에는 닭곰과 밀전병이었고, 동지 팥죽과 납향날(납일, 동지 뒤의 셋째 미일(未日)로 한 해 동안의농사 형편과 그 밖의 일을 여러 신에게 고하는 제삿날)의 고기구이까지 용케도 찾아 솜씨를 보였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자리를 뜨기만 하면 나는 몰래 벽장 속을 뒤져대었으며 그때마다 욕심껏 훔쳐 먹곤 했었다. 벽장 속에는 꿀 용준(龍준,?)을 비롯해 조청 오리병·엿 단지 따위가 들어 있었고, 홍시 대추 같은 과일도 곰팡이를 피우고 있었다. 춘추로는 주로 가조기 홍어포 북어 등 건어물이 쌓여 있었다. 감초가 든 고리, 새앙소래기 따위 약재는 여름철 입가심용이었고. 훔쳐 먹지 않더라도 할아버지는 곧잘 벽장 속의 음식들을 먹게 했으나, 십 원이면 엿이 두 가락, 호박만한 참외가 두 개씩 하던 시절임에도 먹으면 먹을수록 양양대게 마련이었으니, 눈 어두운 노인의 간식을 훔쳐내어 먹던 재미는 그것대로의 각별한 맛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미처 천자〔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전 해만 해도 나는 곧잘 대청에 앉아 사랑문을 쳐다보며 칭얼칭얼 어머니만 볶아대기 일쑤였다. 먹을 것이 나오도록 하려는 잔꾀였다. 그때마다 옹점이는 신들신들 웃어 가며 귀엣말로 종알대었다.
“지왕이면 쬐끔만 더 크게 울어 봐.”
그러면,
“왜 운다느냐, 뭐 먹은 게 얹혔다느냐?”
사랑에서는 이내 할아버지의 걱정이 들려 오게 마련이었다. 이윽고,
“옹젬아, 예 청심환 가져가거라.”하는 소리. 그러면 나는 나도 모르게 달아날 채비에 바빴다. 약은 덮어놓고 질색이었으니까.
“나리만님두, 워디 편찮어서 울간디유. 먹을 것 나오라구 저러지유.”
때는 왔다고 옹점이는 재빨리 시치미를 딱 떼며 화통 삶아 먹은 목통으로 일러 바쳤다.
“이리 온, 이리 들온.” 대뜸 ‘페엥’이나 ‘숭헌’ 소리가 없으면 만사가 뜻대로 돼 간다는 징조였다. 한동안 주뼛주뼛한 뒤에 사랑으로 비슬비슬 들어가면 할아버지는 이미 갱엿을 주먹만하게 감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새까만 엿뭉치, 단지 속의 것을 힘 들여 감아 국자마냥 휘어지던 하얀 은수저, 그것을 얄금얄금 베어 먹는 재미란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봐도 역시 진미였다. 벽장 속의 음식을 좀처럼 얻어 먹기 힘들게 된 것은 집에 어린애가 생기고부터였다. 할아버지가 증손자를 보았던 것이다.
조카 아이가 세 살 나던 해 나는 일곱 살이었고 천자를 떼고 동몽선습을 배울 무렵이었다. 그러나 주전부리 구걸은 내가 천자를 배우기 시작하고부터 못 하게 되었다. 조카애가 대신 들어선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좀더 악랄한 꾀를 쓸 수밖에 없었다. 조카 녀석을 충동질하거나 일부러 쥐어박아 울려서 먹을 걸 타내게 한 다음 조카 녀석이 얻은 걸 다시 알겨먹는(소소한 남의 것을 좀스러운 짓으로 어루꾀어서 빼앗아 내는) 수법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무난한 방법, 조카 녀석이 해해거리며 웃고 나도 덩달아 즐겨 가며 실속 차리는 방법, 그것은 조카 녀석에게 못된 말을 가르쳐 할아버지 면전에서 재롱 삼아 떠들게 함으로써, 꾸짖지도 못하고 화도 못 내어 결국 달래어 내보내는 편이 그중 무난하다고 판단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것은 매번 효과가 있었다.
조카 녀석을 앞세워 사랑에 들어가면 녀석은 시킨 대로 커다란 목소리로 때로는 제물에 신명이 나서 손뼉까지 쳐가며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내었다. 할아버지의 탕건 속에 뙤똑하게 솟아 있는 허연 상투를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는 것이었다. 내 보기엔 더없이 기특한 재롱이었다.
“얼라리 꼴라리…… 할아버지 대가리는 잠지 달렸대……. 할아버지 대가리는 잠지 달렸대…….”
할아버지는 마른 기침을 두서너 번 거듭하거나 의치(義齒)의 윗니틀이 쑥 빠져 내릴 만큼 하품하는 척하면서 벽장문을 열게 마련이었다. 은수저가 휘어지는 만큼씩 엿단지는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너댓 번쯤 가르쳐 길을 들여 놓은 다음부터는 조카 녀석 스스로 그런 꾀를 부릴 줄 알게 되어 나는 그야말로 굿이나 보며 어부지리를 하게 되었지만.
연기는 사랑 아궁이에서만 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마당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사랑 마루를 되돌아보고서야 깨달았다. 사랑 부엌에 이어져 있는 대문 달린 바깥채 굴뚝에서도 부연 연기가 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연기 빛깔은 검불이나 등성이에서 갈퀴밤으로 모아진 북더미 타는 빛깔이었다. 원래 바깥채는 방 두 칸 외에도 두 칸짜리 대문이 나 있는 함석 지붕의 별채였었다. 문간방은 사철 잡곡 가마가 그득했던 머슴방이었고 그 윗방, 사랑 부엌에 잇대어 있는 방은 일상 창고처럼 쓰던 허드렛방이었다. 생전 불도 지피지 않고 밤으로도 전기를 넣는 날이 드물던 여벌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별채에서도 연기를 뿜고 있었다. 사람이 쓰는 게 분명했다. 세를 내준 모양이었다. 철도원 가족으로 그렇게 많은 방을 다 쓸 까닭은 없을 테니까. 그 방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항상 쓸고 닦아 정결한 장판 방인데도 음침하고 스산했던 과거 그 방의 내력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걷고 있었다. 나는 가급적이면 그 방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었고, 간혹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심부름을 받지 않기 위해 항상 손윗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부지런해야 했던 것이다. 때로 피치 못해 방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는 반드시 코흘리개 조카 녀석이라도 달고 들어가야만 했었다. 그 방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노상 그들먹하게 놓여 있었다. 약재밭에서 거둬 들인 생지황 뿌리며 박하 다발, 시커먼 젯상, 향탁(香卓)·교의(交椅, 신주나 혼백 상자를 놓아 두는 다리가 긴 의자)를 비롯한 각종 제기(祭器)들, 그리고 그보다도 더 많은 분량으로 치쌓였던 족보를 비롯한 황권 전적(黃卷典籍, 좀먹는 것을 막기 위해 종이에 황벽나무 잎으로 누른 물을 들인 옛날 책)이며 여러 무늬의 능화판(菱花板, 책 겉장에 마름의 꽃무늬를 박아 내는 목판)들이 무슨 보물처럼 대접받으며 정돈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그 방이 늘 음산하고 으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방 아랫목에 정중하게 모셔져 있던 것, 그것은 베 보자기로 덮어둔 시커먼 관이었다. 그 관 위에는 역시 베 보자기에 꾸려진 이불더미만한 보따리가 얹혀 있었는데 그것은 일습(一襲, 옷·그릇·기구 따위의 한 벌)을 갖춘 수의(壽衣)와 상제들이 입을 베 두건과 베 중단〔포중단(布中單)〕 따위 그리고 광목 깃옷(상제가 입는 생무명 옷)들과 대소가붙이들이 쓸 건(巾, 헝겊 따위로 만들어 머리에 쓸 것)과 행전(行纏, 바지·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감아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 등 최·공·시(衰功사시)의 상복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팔순이 훨씬 넘은 극노인 할아버지를 위해 미리 마련해 둔 상수(喪需, 초상 치르는 데 드는 물건)들이었다. 옻칠을 했다는 시커먼 관이며 수의 보따리를 볼 적마다, 나는 문득 공포(功布, 관을 묻을 때 관을 닦는 삼베 헝겊)를 앞세우고 검은 테두리의 앙장(仰帳, 천장이나 상여 위에 치는 휘장)을 펄럭이며 집 앞의 신작로로 드물지 않게 지나가던 상여(喪輿)를 연상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일쑤 공포감에 휩싸이며 그런 불길한 마음을 떨쳐 버리려고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6·25가 난 해에 우리 집은 망했다. 전쟁의 참화를 우리처럼 혹독하게 입은 집도 드물리라 싶은 쑥밭이었다.
할아버지는 그해 섣달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들과 큰손자를 앞세우고 떠난 거였다. 사랑마루엔 삼 년 동안 거적과 대지팡이〔상장(喪杖, 상제가 짚는 지팡이)〕가 놓여 있었고 말꼬지(?의 베 중단은 목매단 시신처럼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물론 내가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못 한 건 가족 중에 나 혼자뿐이었다. 피난처에서 미처 귀가하기 전에 그런 큰일을 당한 거였다. 숙환이나 급환으로 돌아가신 건 아니었고, 말년에 참혹한 꼴만 거듭 당한 뒤여서 노쇠해진 정신을 가누지 못한 게 원인이었으리라 싶다. 향수(享壽, 누린 수명)는 아흔. 사자(使者)를 맞아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유언은,
“부디 족보만은 잘 간수해야 허느니라…….”
단 한마디뿐이었다. 족보. 그것은 완전히 망해 버린 가문을 최후까지 지켜 보다 떠난 할아버지에게는 논문서나 집문서보다도 소중한 가산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잃고 열한 평짜리 아파트에 의지하고 사는 지금도, 나는 수십 년 동안 증보(增補, 더 보태거나 보충함)조차 안 한 그 족보만은 어떤 물건보다 소중하게 간수하고 있지만.
그 세보(世譜, 계보를 모아 엮은 책)와 충간공파 파보(派譜) 두 가지로 된 일곱 권의 족보는 지금도 할아버지가 생각나면 가끔 꺼내 뒤적이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 갈피 속에서 어쩌면 할아버지의 체취라도 맡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할아버지는 무슨 보학(譜學, 계보에 관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거나 뼈를 자랑하는 고리타분한 취미로서 족보를 받들어 모신 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청백리(淸白吏)가 속출한 것은 아니지만 줄곧 사대부(士大夫)의 가문이었다가 당신대에서 그치고 한갓 유생(儒生)에 머물러 선대의 뒤를 못 댄 한(恨)으로 그랬으리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 가문의 후예라는 기개만은 대단한 것이었고 평생을 자랑으로 알며 살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할아버지는 구십 평생 망건이나 탕건은 물론 오뉴월 삼복에도 버선 한 번을 벗지 않았다. 어머니가 시아버님 두려워 농촌에선 더없이 편리한 작업복인 몸빼라는 것이 고쟁이 같대서 못 입어 보고, 옹점이가 끝내 단발 머리를 못 해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다. 윗물이 맑아 아래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할아버지의 자(字)는 긍우(肯宇), 호를 능하(陵河)라 했으며, 병오(丙午)생으로 상주 목사(尙州牧使)의 아들이요, 강릉 부사〔강릉 대도호 부사(江陵大都護府使)〕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과거(科擧)는 스스로 포기했다고 했다. 그 즈음엔 이미 선조들이 모두 벼슬살이를 반납하고 낙향해 버린 뒤였고, 공부를 중단해야 할만큼 의기(意氣)와 가산이 침체돼 그럭저럭 실기(失期)해 버리고 만 것이라 했다. 애초에 벼슬자리에 못 오른 건 시국 탓으로 돌렸고, 자신의 불운(不運)함을 한탄했으며, 그러한 한(恨)이랄까 전조(前朝)에의 향수랄까, 하여간 그런 감상이 지나쳐, 종중에서 한창 명성을 떨쳤던 두 항렬 손위인 월남〔이상재(李商在)〕의 개명(開明)마저 늘 못마땅하게 여길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의 처신은 월남(月南)의 처세와 정반대였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직함은 사액 서원(賜額書院, 임금이 이름을 지어 준 서원)인 화암 서원(花巖書院)의 도유사(都有司, 향교·서원·종중(宗中)·계중(契中)에 관한 사무를 맡은 우두머리)이며 보령 향교(保寧鄕校)의 직원(直員)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는 이미 팔순에 이르러 있었으므로 옛일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춘추 시향(時享, 집안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 때면 교군꾼들이 가마를 메고 와서 서원으로 모셔 가던 것은 몇 차례나 본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때까지도 할아버지는 서원이나 보령 향교의 제반 집무를 사랑에 앉아서 처리하였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서원말과 교동에서 이십 리 길도 머다 않고 하루에 두서너 번씩 사람이 오며가며 결재를 받아 가던 거였다. 그러나 내가 서원이나 향교가 뭘 하는 곳이란 것을 알 만했을 때는 할아버지도 직원이나 도유사 자리를 떠난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제 시대엔 온갖 핍박과 굴욕을 견뎌 내면서 굳건히 지켜낸 향교와 서원임에도, 고령도 고령이겠지만 그보다는 가운의 불황과 우왕좌왕하는 시대에 이미 적응할 수 없음을 스스로 터득하여 은둔하기로 결심했던가 보았다.
서원말 사람으로 우리 집을 가장 자주 드나든 이는 언제나 패랭이를 쓰고, 두루마기도 없이 짚세기를 꿴 채 구럭(새끼로 그물처럼 떠서 만든 무엇을 넣기 위한 물건)을 메고 다니던 환갑 늙은이였다. 그는 무시로 드나들어 나하고도 피차 얼굴이 익어 있었는데, 그는 동구 앞이나 신작로가에서 놀던 나를 만나면 나보다도 먼저 허리를 굽신대면서 인사를 했다.
“되련님, 나리만님 지신감유?”
그것이 그가 하는 인사말이었다.
“예, 시방 사랑에 지셔유.”
나는 늘 그렇게 대답했는데 한 번은 앞서 나서서 사랑 앞에 이르러,
“할아버지 손님 왔슈.”
“뉘라느냐?”
“위떤 뇌인 양반유.”
했다가 나중에 호된 걱정을 듣기도 했었다. 할아버지는 그 패랭이 쓴 늙은이더러 늘,
“오냐, 수뵉이 왔느냐.”
마치 선머슴이나 다루듯이 하대를 했던 것이다. 그가 돌아간 뒤 할아버지는 나를 불러 놓고,
“숭헌……. 쇤님은 무어이며 뇌인 양반은 또 뭐이란 말이냐. 페에엥-.”
할아버지의 꾸중에 나는 일언반구의 말 대답도 못 한 채 물러앉았다. 그 패랭이 쓴 늙은이가 서원의 원노(院奴, 서원에서 부리던 노비)였음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뒤에 안 일이었다. 서원에서 온 젊은 사람한테도 할아버지는 매양
“수뵉이 왔느냐, 게 있거라.” 한 데서 나는 비로소 ‘수복’이란 명칭에 의문을 가졌을 정도로 무심했으니까. 향교를 지키며 사는 서원말 사람 이름은 모두 수복이란 말인가. 나는 천자로 배운 유식만큼의 수복이란 이름을 연상하고 있었다. ‘壽福, 秀福, 水福, 遂腹, 洙馥, 守福…….’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내 경우로 미뤄 봐도 한 동네에 그토록 많은 이름이 있을 수 없겠기 때문이었다. 내 처음 이름은 성구, 다음엔 필구였는데 첫돌 전부터 동명의 아이가 한 동네에 있어서 다시 민구라 지어 한동안은 민구로 불렀더라고 했다. 그러나 민구란 이름도 당내간에 둘이나 있어 일년도 못 쓰고 고쳐야 했다고 들었다.
“엄니, 서원말서 온 사람 이름은 죄 수뵉인가?”
오랫동안의 의문을 물었을 때 어머니는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그러믄, 싀원을 지키는 동안은 수뵉이지, 지키는 아랫사람이닝께.”
수복(守僕)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존재는 비단 수복이 들에게만이 위엄과 고고(孤高)의 상징은 아니었다. 서원말 일대의 주민들에게도 추상같은 권위자였으며 향교 안의 대성전(문묘 안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나 동서재를 거들어 온 향반 토호의 가문과 유림에서도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근엄한 선비의 기풍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팔순의 고령이었음을 밝힌 바 있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것들은 철부지의 어린 눈에 잠깐 동안 스친, 인생에서 은퇴하다시피 왕조의 유민으로 은둔 자적한 한 노인의 조그마한 편모에 그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그분은 내가 살아가면서 잠시도 잊을 수 없도록, 내 심신(心身)의 통치자로서 변함이 없으리라 믿어지는 것은 무엇에 연유하는지 모르고 있다. 할아버지의 가훈(家訓)을 받들고자 노력하다 만 유일한 손자였기 때문일까. 그 고색 창연했던 가훈들은, 내가 태어나기 그 훨씬 전부터 아버지가 이미 앞장서서 깨뜨리고 어겨, 전혀 반대 방향의 풍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음이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사상은, 할아버지가 주장한 전근대적인 가풍에 반발하기 위해서 싹튼 것은 물론 아니었다. 흔히 ‘죽으라면 그럴 시늉까지 할’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의 노선은 당신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대대로 공경 대부를 배출한 사대부가의 후예임을 조금도 대견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청백리가 몇 분 있었다는 기록만을 인정할 정도일 뿐. 따라서 양반 가계의 족보를 우려먹거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장(田庄, 자기가 소유하는 논밭)이 없음을 한하지도 않았다. 그러기는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으나 그것은 필경 할아버지 자신이 탕진해 버린 자책감에서 그랬을 것으로 여겨진다. 강릉 부사 시대부터 물림한 부동산들을 할아버지는 일제 때 군산(群山) 미두(米頭, 미곡의 시세 변동을 이용하여 현물 없이 약속으로만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 행위. 기미) 시장에 맛들인 후로 조금씩 조금씩 올려 세우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기 수삼 년 전만 해도 사법 대서를 개업했던 아버지는 미두로 기운 가세를 되살리기 위해 몇 척의 어선을 가진 선주(船主)였으며, 여러 두락의 염전(鹽田)을 소유하여 상당한 수입을 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재(理財)에 어둡지 않았던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을 전후해서, 아니 내가 태어나던 그 해부터, 아버지는 동래 회고조의 가풍이나 실속 없는 사상을 스스로 뒤집어엎는 데에 서슴지 않았다. 사농공상의 서열을 망국적 퇴폐 풍조로 지적했고 ‘무산 계급의 옹호와 인민 대중의 사회적인 위치를 쟁취한다.’는 구호와 함께 그것의 실천을 위해 앞장서서 주도하기 시작한 거였다. 아버지는 장날마다 한내천 모래 사장에서, 또는 쇠전(우시장)이나 싸전 마당에서 강연회를 열었으니 그것은 힘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감동과 지지를 얻는 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웅변이었다고 들었다. 그것이 변형되어 남로당으로 발전했던 것은 그로부터 다시 많은 시일이 흐른 뒤의 일이지만. 그리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 돼 버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들과 당신 사이에 금이 벌기 시작하고, 그것이 점점 두꺼운 장벽으로 굳어 가는 것을 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이방인임을 자인하며 인간사에서의 은퇴와 함께 변천하는 시대와 세월을 방관하기로 작정한 까닭이었으리라.
그렇게 세월하기 몇 해 만이었을까. 내가 할아버지에게 천자를 떼어 책씻이한 뒤, 이어 동몽선습을 읽기 시작한 무렵은, 아버지는 집에서 가사를 돌보기보다 예비 검속(豫備檢束,공공의 안전을 해롭게 하거나 죄를 지을 염려가 있는 사람을 잠시 잡아 가둠)으로 영어(囹圄, 죄수를 가두는 곳) 생활하는 날이 더 많아졌고, 더불어 대서사도 선주도 아니었으며 토지 개혁으로 분배받은 상환 농지 몇 필지로 겨우 식량 걱정이나 안 할 정도의 영세한 농민이었다. 어린 내가 보고 느끼기에도 그 얼마나 모순된 사랑방 풍경이었던가.
사랑은 커다란 장지틀을 가운데로 하여 널찍한 방이 둘이었다. 안방은 그 엿 단지를 비롯한 온갖 군입 거리들이 들어찬 벽장을 뒤로하고 정좌한 할아버지의 은둔처였다. 그 방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검버섯 속에 고색이 찌들어 가는 시대의 고아 이조옹(李朝翁)들이 집산장(集散場, 집산지, 모이는 곳)으로서 난세 성토장 겸 소일터였으며, 윗방은 아버지의 응접실이었다. 안방은 이 군수 아우, 윤 참의 아들, 조 진사, 홍 참봉, 도총관 조카 등등으로 불리던, 지팡이 없이는 나들이도 못 할 초라한 행색의 상투쟁이들이 늘 단골로 붐볐다. 노인들이 풍기는 특유한 체취로 하여 여간 사람이 아니고서는 코도 들이밀 수 없으리라고, 어머니는 빨래를 할 적마다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쓰는 윗방 손님들은 안방의 고로들 행색보다 훨씬 더 누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이 할아버지로서는 이름도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농사꾼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저녁밥만 먹으면 사랑으로 마을을 왔었다. 나무 장수 창호, 대장간 풀무쟁이 장지랄, 뱃사공 하다가 장터에서 새우젓 도가를 하는 마씨, 염간(鹽干)으로 늙은 쌍례 아버지, 목수 정당나귀, 땜장이 황가, 매갈잇간(벼를 매통에 갈아서 매조미쌀을 만드는 일을 하던 곳) 말몰이 최, 말감고(곡물 시장에서 되질이나 마질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전가…… 그네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던 단골 마을꾼이었다. 단골이 아닌 사람도 흔히 숙식을 하고 나갔다. 단지 집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저물어 찾아와 하룻밤 머슴방 신세지기를 원하던 그 숱한 길손들. 날 궂어 해가 짧은 날이면 도부(到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팖) 나섰던 소금 장수며 엿목판을 진 엿장수, 사주 관상쟁이…… 이따금 총을 멘 순사나 형사들이 불시에 들이닥쳐 가택 수색만 하지 않는다면 문경 새재 따로 없이 온갖 둥우리 없는 인간들로 앉고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었다.
흔히 찾아오던 단골들은 으레 서로를 ‘동지’라고 일컫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할아버지는 복고주의적인 향수를 버리지 못했는데, 내게 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그런 향수를 못 이긴 자위책(自慰策)이 아니었던가 한다. 천자는 할아버지가 소시적 후제(뒷날의 어느 때)의 손자들을 위해 창호지에 써서 매어 두었던, 땟국이 전 얄팍한 것이었다. 처음엔 나 혼자만 앉혀 놓고 가르쳤었다. 그러나 진도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재미가 없어 좀처럼 머리 속에 글이 들어가지 않던 것이다. 그것을 딱하게 여긴 어머니가 동네 조무래기들 중에서 두엇만 골라 함께 배우도록 할 것을 건의했지만 할아버지는 그냥 무가내였다.
“그 상것들 자식허구 워치기 한자리에 앉혀 놓고 읽힌단 말이냐. 페에엥-.”
그러나 내가 너무도 따분해 하고 힘쓰려 들지 않자, 할아버지는 결국 동네에서 동갑내기 아이들을 불러들이도록 했다. 준배(俊培)와 진현(鎭現)이가 그들이었다. 아전과 행랑붙이를 제끼고 고르자니, 타관에서 들어와 살던 집 아이로 지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부 시간은 대강 열 시부터 열두시, 그리고 두시부터 다시 두어 시간, 매일 두 차례씩 익히도록 되어 있었다.
두 아이들은 장날 이야기책 전에서 산, 마분지에 석봉(石峰)체본으로 인쇄된 얄팍한 천자문을 시멘트 부대 종이로 겉장을 얌전하게 싸서 겨드랑이에 끼고 왔었다. 책갈피 속에는 글자를 짚어 내려가며 읽기 알맞은 자가웃(한 자 반 정도)쯤 될 가는 시누대 토막이 끼워져 있었다.
그날부터 천자를 익혀 나가는 진도가 두드러지게 달라졌을 것은 당연한 이치. 책읽기보다도 끝낸 뒤 함께 어울려 장난질 치기가 더욱 신바람 났기 때문에, 하루의 일과를 전보다도 갑절씩은 빨리 해치우지 않을 수 없던 까닭이었다. 일과가 끝나면 우리들은 산으로 바다로 마냥 쏘다니며 날 저무는 것을 한으로 뛰놀곤 했었다. 마당 위로는 잔솔푸데기가 아담한 등성이였다. 푸숲이 우거진 논다랭이를 지나면 신작로와 철로, 그리고 이내 바다였으니 오죽했을까. 허나 “잠깐 나가 바람들 쐬고 온.” 하는 공부 도중의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재미도 있을 리 없었다. 금방 아무개야 하고 윗니틀이 혀끝으로 떨어지도록 불러모을 할아버지 음성이 고대(바로 곧) 귓전을 울릴 것 같은 초조와 불안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몇 가지 꾀를 부리기 시작했는데, 공부하다가 우리 셋 중의 아무가,
“할아버지 오줌 좀 누구 올래유.” 하고 별안간 허리띠 끄르는 시늉을 하는 거였다.
“웬 쇠변을 그리 자주 본단 말이냐. 페에엥-.”
“…….”
“니열버텀(내일부터)은 짜게들 먹지 말거라. 뭘 그리 짜게 먹구 물을 켰더란 말이냐.”
“…….”
“얼른 다녀온.”
그러면 우리 셋은 한꺼번에 일어나 함께 나가 버리는 거였다. 할아버지는 시력이 시력답지 못했으므로 조심해서 기척만 안 내면 거뜬히 뜻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할아버지는 일절 종아리를 때린 적이 없었다. 배우자고 와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당신 손자 위해 자청해 가르치기로 한 이상, 남의 귀한 자식들한테 그럴 수가 없다는 거였다.
할아버지는 아이들한테 글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 부담스럽잖은 소일거리요 보람을 느끼는 눈치였다. 온종일 결가부좌하고 눈감은 채 앉아 소시적에 읽은 글을 반추(反芻, 되풀이하여 음미하고 생각함)하는 게 고작이었던 그 허구헌 날에 비하면, 꾸짖다 어르고 달래며 함께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셋이나 있다는 게 다시없는 파적거리요 소화제였던 것이다.
나는 진도가 두드러지게 앞섰고 두 아이, 진현이와 준배는 언제나 내 뒤를 따르기에 허덕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내가 며칠 먼지 시작했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별게 아니었다. 교과서(천자책)가 다른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내가 배우던 가전(家傳)의 천자엔 토(吐) 한 자가 달려 있지 않았다. 물론 그때까지 우리들은 가갸 뒷다리도 모르던 판이었으니 토 아니라 글자 이름이 한글로 표기돼 있었대도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만, 허나 진현이와 준배가 장터 책전에서 사 가지고 다닌 천자엔 한글로 된 글자 이름이 곁들여져 있던 거였다. 진도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집에 돌아가 복습할 때마다 나타나는 거였다. 나는 암기력 하나만으로 되풀이 짚어 읽는 자습이 고작이었지만, 두 아이는 부모가 한글로 된 글자 이름대로 복습을 시킨 거였다. 그것은 나와 그네들 사이에, 다시 말하면 할아버지와 두 아이의 부모들 사이에, 발음상 웃지 못할 차질을 빚게 마련이었다. 다시 말하면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습관대로 구식 발음을 하였고, 시장에 나도는 천자책에는 신식(?) 풀이로 표기돼 있던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익히면 됐지만, 두 아이는, 책에 표기된 대로 가르치는 국문 해득 정도의 부모들의 교수 방법과, 책은 쳐다보도 않고 가르쳐 온 할아버지의 발음 사이에 끼어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 위-할 위(爲), 화할 화-조화 화(化), 다사 오-다섯 오(五), 떳떳 상-항상 상(常), 허물 과-지날 과(過), 하고자 할 욕-욕심 욕(欲), 아비 부-아버지 부(父), 마땅 당-마땅할 당(當), 마침 종-마지막 종(終), 즐거울 낙-풍류 악(樂), 지아비 부-남편 부(夫), 지어미 부-며느리 부(婦), 지게 호-문 호(戶), 쓸 사-베낄 사(寫), 수레 거-수레 차(車), 마루 종-근본 종(宗), 밭 외-밖 외(外)……’
이러한 차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전자는 할아버지의 발음이었고 후자는 두 아이의 교재에 표기된 풀이였다. 그러나 전부가 그 지경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특히 맨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잇끼 언, 잇끼 재, 온 호, 잇끼 야(焉哉乎也), 언재호야라, 헌디 석 자는 ‘잇끼’인디 한 자만 ‘온 호’ 아니냐, 그래서 아개 맞추느라고 ‘잇끼 호’라구두 하는 게여…….”
두 아이들의 책에는 ‘온 호’라고만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대로 우리는 너덧 달만에 읽기를 마쳤고 외기로 들어갔다.
“천지현황하고 우주홍황이라, 일월영책하고 진숙열장이라…….”
이어 야호재언(也乎哉焉)은 자조어위(者助語謂)요 하며 거꾸로 거슬러 왼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었다. 며칠 후, 셋은 나란히 동몽선습으로 교재를 바꿨고 눈감고 읊는 할아버지의 구술에 따라 그 억양과 율조를 흉내 내어 제법 의젓하고 청승맞은 목소리로 수월하게 읽어 내기 시작했다.
“天地之間(천지지간) 萬物之中(만물지중)에 唯人(유인)이 最貴(최귀)하니…….” 할아버지는 우리 수준에 알맞도록 문구를 풀어, 비근한 사례를 들어가며 구수한 강의를 해주었고, 우리는 우리들대로 무작정 암송만으로 끝내 버렸던 천자문 시절보다 한결 흥미를 갖고 배우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는 차츰 어서 바삐 어른이 되고 싶은 성년기에 대한 막연스런 동경과 충동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나이 탓이 아니었던가 한다. 원인은 할아버지가 언행 일체(言行一體)를 주장하며 실천에 옮기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했기 까닭이었다. 배운 것은 실행해야 한다는 게 할아버지의 절대적인 교육 방침이었던 것이다. 천자를 떼자마자 할아버지는 내 하루의 일과를 짜 놓았던 건데 그 일과표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자신임을 잘 알고 있는 게 불행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의 일과는 일년이 하루같이, 마치 절대 불변을 원칙으로 하여 짜여진 것 같았다. 춘하추동의 절후를 물을 것 없이 나는 새벽 네시에 잠에서 깨어야 하고, 짜여진 일과에 따라 언행을 구속받기 시작한 거였다.
새벽 네시, 눈곱을 비벼 가며 냉수에(어려서부터 더운 물을 사용하면 기개가 준다 하여 반드시 냉수를 사용토록 했다.) 세수하고 사랑에 나간다. 할아버지께 문안을 드리고자 함이다. 나는 큰절을 하고 무릎 꿇고 앉아 밤사이 무고하신가를 여쭙는다.
“오냐, 탈없이 잘 잤더냐.” 이것은 할아버지의 한결같은 첫마디였다. 이윽고 해야 할 일은 놋요강과 놋타구(가래침을 뱉은 그릇)를 가시는 일이었다. 내가 그것을 시작하고부터 옹점이는 내게 더욱 친절히 굴었고 어려워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가장 귀찮아하고 꺼리던 일에 내가 대신 들어섰기 까닭이었다. 요강을 부시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가래가 가득 담겨져 있는 타구를 쏟고 수세미질하여 닦는 일은, 조금만 비위가 약했더라도 해내지 못했으리만큼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사랑방을 말끔히 걸레질하고 나면 먼동이 갠다. 이젠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전날 배운 것을 외워 내야 했다. 그 시간은 사랑 아래윗방에서 묵은 손님이 몇이었든 나는 그네들 좌중 한가운데에 꿇어 앉아 막히지 않게 외워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좌중은 숨소리뿐이었고 나는 흉을 잡히지 않도록 기껏 조심하고 또한 곧잘 치러 내곤 하였다.
“어떤가?” 할아버지는 일쑤 손님들한테 물어 손님들의 “싹이 있네유.” 하는 칭찬을 기다렸다. 이제 생각해봐도 우스운 일은 음식에 대하는 자세를 훈계받고 실행했던 일이다. 그것은 천자를 배울 때부터 이미 실천했던 일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채중개강(菜重芥薑)을 설명하면서,
“흔히들 소채 반찬일수록 생각 웂이 만들고 맛 모른 채 먹느니라. 그러허나 긤생려수〔금생여수(金生麗水)〕허고 옥출곤강(玉出곤강)인 법, 이전버텀 군자는 푸성귀일수록이 가려 먹으랬어. 부디 채즁개강이란 말을 닞지 말 것이니, 푸성귀 속에 게자(겨자)와 새양(생강)이 안 들어가면 상것들 음석으루 예겨라.”
“예.” 나는 덮어놓고 대답부터 하도록 배웠으매 저절로 나온 응답이었다.
“이후 워디를 가 혹 음석을 먹는 일이 있더래두 게자 새양이 안 든 음석일랑은 절대 입에 대지두 말으야 쓰느니라.”
그로부터 나는 사오 년 동안이나 남의 집 김치며 나물 따위를 먹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썼던 것이다. 요즘도 이따금 채중개강이 문득문득 생각킬 정도로 애써 실행했던 것이다. 음식에 대한 할아버지의 자세는 그만큼 철저한 것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관촌 부락에서는 대사가 자주 있었다. 어느 해 늦가을엔 처녀 총각 해서 무려 다섯이나 혼인한 적도 있었다. 잔칫집에서는 으레 큰상을 차려 오게 마련이었다. 마을의 어른에 대한 인사치레로서 그네들 스스로가 그렇게 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음식상은 물론 맨 먼저 사랑 마루에 놓여졌다.
“뉘 집서 가져 온 게라느냐?” 할아버지는 우선 상을 들고 온 사람더러 그렇게 물었는데, 대답은 언제나 그 곁에 서서 군침을 삼키고 있던 옹점이의 일이었다.
“저 근너 짐 약국 망내딸이 시집 간대유.”
“이렇게 갖춰 보내느라고 애썼다 이르거라.”
“예.” 하고 대답하며 물러가던 것은 상을 들고 온 사람이었다. 옹점이가 상보를 걷으면 할아버지는 무엇 무엇이 올랐는가를 옹점이한테 물었고, 옹점이는 “두텁떡, 수정과, 송화 다식…….” 하며 남김없이 주워섬겼다.
“오죽허겠느냐…….”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대개 수정과나 식혜 그릇을 들어 한 모금 입가심해 보았고, 언제나 예외 없이,
“페에엥- 이것도 음석이라 가져왔다더냐. 네나 먹고 그릇 내어 주거라.” 하며 매번 외면하기를 주저 않는 거였다. 언제나 입이 함지박 만해지던 것은 옹점이와 우리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본래부터 일가 집에서 온 음식이 아니면 일체 맛보기조차 꺼려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버지는 무던히도 대범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처럼 가리고 찾는 게 없던 사람이었다. 뿐더러 할아버지를 닮아 점차 입이 짧아져 가는 나의 편식도 나무라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특히 삼강 오륜을 배우고 그 중에서도 내가 철저하게 실천해 보였던 장유 유서 사고 방식에 의한 생활면에서의 뒤처짐도 개의치 않았다기보다는 아예 무관심 일변도였다. 나는 사실 내가 생각해 봐도 답답할 정도로 장유 유서의 질서를 분명하게 지키려고 하였다. 지금도 나는 무슨 일에든 앞에 나서지를 못한다. 표면상으로 나타나는 것조차도 꺼려하는 버릇이 있다. 그것은 그 무렵 어린 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