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만원의 행복~~ 황인용



예상외의 단조로운 건물이 오히려 호감이 간다
녹이 슨 철문 출입구 앞에 싸리나무가 햇살에 얼굴을 비추고 있다..

넓은 스트디오 안은
시멘트벽 그자체로도 충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한쪽에 하늘과 나무가 보이는 투명천장이 맘에 든다..
때마침 흐린 날씨가 더욱 운치 있다


입장료 만원으로
커피. 차 음료수 무한으로 리필이 되고
거기에 파운드케익까지 무한으로 리필되니...

또...

전문잡지와 소설책이 손만 뻗으며 놓여있어~

황인용이 LP판으로 선별해주는 격조높은 음악과~
시간 잘 맞춰가면 황인용의 음악해설두 들을 수 있는 곳



▲ 입구에 있는 배너 간판 ^^ 심플함



▲ 녹슨 철판에 분필로 글씨를 썼는데 글씨가 입체감이 남



▲ 2층에서 아래층을 내려다 봄



▲ 2층에서 입구를 내려다 봄. 왼쪽 아래 시계 디자인이 눈에 띔



▲ 2층 갤러리



▲ 2층 현미경과 눈 모양의 구



▲ 2층서 테이블 내려다 봄



▲ 빨간의자

TV 10년, 라디오 떠난지도 4년…방송인 황인용씨
그는 솔직했다. 첫인사로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했던 얘기인데 인터뷰할 것이 뭐 있나?"라고 반문한 것부터, 인터뷰 막바지에 “내 인생을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인간”이라고 자신을 간단하게 정의한 것도 그랬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꾸미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는 자신의 공간과 닮아 있었다. 장식 하나 없는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은 ‘카메라타’(Camerata: 이탈리아어로 ‘작은 방’을 뜻한다. 크게는 ‘동지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기둥 하나 없이 탁 트인 그곳은 3층까지 뚫린 창 사이로 밝은 햇빛이 머물며 공간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방송인 황인용(68). 어느 순간 TV에서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라디오에선 그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헤이리 마을의 음악감상실 카메라타에 가면 정겨운 그 얼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파주, 그곳에서 그는 순수 아날로그 감성으로 LP음반을 틀어주고 있다. 지난 22일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카메라타로 그를 찾아갔다. 인터뷰 내내 입구 반대쪽 벽면의 3분의 1 이상을 채운 대형 스피커 4대에서 흘러나오는 고전음악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황씨는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굵은 톤의 나긋한 목소리도 여전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부정하는 뜻으로 손사래 치는 일이 많았다. 답할 땐 첫 문장을 길게 빼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은퇴 아닌 은퇴

-요즘 생활은 어떻습니까?

“요즘 국선도를 시작했어요. 한달가량 됐나? 매주 화·목·토 오전 7시반에 동네 분들, 동호인들과 국선도를 해요. 아니면 풀을 뽑는다거나 주변 정리를 해요. 여기에 잡풀이 많이 나거든요. 건물 안은 우리 스태프들이 하고, 바깥쪽은 제 담당입니다. 국선도 모임이 없는 날은 여기서 10분쯤 떨어진 연습장에서 골프 연습도 해요. 그리고 근처 헬스클럽에서 운동도 하고요. 오전은 거의 운동하는데 보내죠. 그리고 보통 오전 11시 정도에는 이곳에 와서 거의 저 혼자 음악을 들어요. 점심 식사 전까지 1시간 정도. 제가 음악을 많이 들어야 손님들한테 들려줄 수 있으니까. 또 제가 음악 듣기를 워낙 좋아하니까요. 음반이 1만5천장쯤 있는 것 같은데, 저 중에서 듣지 못한 게 거의 다예요. 저거 죽기 전에 다 들어야 억울하지 않죠. 돈 주고 산 건데…. 하하.”

-단순하고 무료한 삶 아닌가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때로는 무료합니다. 저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강제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제라는 것은 직장생활을 한다거나 방송을 규칙적으로 한다거나 말이죠. 더군다나 전 일생을 거의 제가 컨트롤한 게 아니고, 거의 방송시간이 저를 타의적으로 컨트롤하는 생활을 했던 것 아닙니까? 그러다가 강제하는 시간이 없어졌을 때 그 시간을 아주 적절하게 요리하고, 정신적으로 별 탈 없이 생활한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이 음악감상실이 없었으면 아마 거의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요즘엔 이게 나를 어느 정도 강제하는 거죠. 그러나 이거는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그만이고, 제가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어떤 때에는 무료한 정도가 아니고 방송을 안 하니까 패닉(공황) 상태까지는 아니지만 견디기 힘들 때도 있어요. 아직도 그래요, 아직도. 방송 벌써 그만둔 지가 TV는 벌써 10년이 넘었고, 라디오도 4년이 넘었는데.”

-방송을 그만둔 건 자의에 의해서였나요?

“자의고 타의고 그런 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이 자연스럽게 됐어요. 제가 ‘그만둬야겠다’ 하는 어떤 의지가 있어서 된 게 아니고, 운명적으로 ‘그런 정도에서 방송을 끝내라’하는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제가 일부러 방송을 안 하려고 ‘이젠 그만두겠다’라고 선언한 적도 없고요. 그러나 제가 방송 프로그램을 맡으려고 애를 쓰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방송국에 가서 ‘이런 방향의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한 적도 없고. 사실 한국방송계가 예전엔 프로그램을 하나 맡으면 아무리 못 가도 3, 4년 심지어 15년 하는 것도 있으니까, 방송 프로그램을 맡으려고 애를 쓰는 준비가 안 돼 있었죠. 그런데 섭외가 안 들어오니까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된 거죠.”

-많이 아쉬웠겠네요?

“엄청나게 아쉽죠. 방송은 특히 매회 할 적마다 ‘오늘 방송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MC는 없을 겁니다. 방송 끝날 때마다 항상 ‘미진하다’거나 ‘부족하다’ 생각해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매일 두 시간씩 하고 나면 ‘방송이 이것밖에 안 되나’하는 것이 20년 넘게 쌓였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 얼마나 아쉽겠어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 분들에게 고별하고 감사하는 자리 없이, 매듭이 없이 슬며시 그만둔 거잖아요. 대학교수는 은퇴할 때 은퇴 논문집을 낸다거나 은퇴식을 호텔에서 열기도 하는데, 저라고 그런 욕심이 왜 없었겠어요? 여기 오시는 분들도 ‘요즘 방송하는 겁니까, 안 하는 겁니까’ 물어요.”

◆TBC 통폐합과 눈물의 고별방송

(1980년 11월 30일 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정책에 의해 TBC(동양방송)는 KBS에 통합돼 문을 닫았다. 이와 함께 TBC의 간판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도 청취자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했다. 시그널 음악인 폴 모리아의 ‘시바의 여왕(La Reine De Saba)’이 흐르자 DJ 황인용은 “기억하시죠? 이 시그널. 오래 기억해 주세요”라며 끝 방송임을 알렸다. 목소리 가득 눈물기를 머금은 황씨는 자정이 다가오고 애청자들에게 고별사를 고하면서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날의 방송은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마지막 방송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어요. 처음으로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제가 성격이 진취적이지 않아서 한 번 직장은 영원한 줄 알았지, 방송국이 사라진다고는 생각도 못했죠. 그런 고정관념 속에 살다가 방송국이 없어지니까 ‘역사라는 게 개인이 아무리 거부하고자 해도 사회 전반적인 흐름에 도저히 역행할 수는 없는 거구나’하는 엄숙한 운명을 느낀 거죠. (그는 이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휩쓸려 가는구나’ ‘개인은 무력하구나’하는 것도 절실하게 느꼈어요. (황씨가 말을 하는 동안 스피커에서 엄숙한 합창 소리가 톤을 높였다. 묘한 우연!)

-그 이후 삶에 대한 시각에 변화가 있었나요?

“아니, 그렇진 않았어요. 제가 그렇게 심각한 사람이 아니에요. 시대에 적응하며 살려고 하지. 그러니깐 1970년대의 격동기를 무난하게 보냈었지? 하하하. 무난하게 보냈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침묵하고 보냈다는 것 아니겠어요? 적응하면서.”

-방송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그는 경희대 법학과 출신이다.)

“우연히 시험을 보게 됐어요. 방송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대학 다닐 때 방송을 듣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옛날에는 라디오 방송도 변변히 없었지요. 학교 다닐 때 대학방송국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어요. KBS가 주최한 대학방송 경연대회에 경희대 대학방송국이 응시를 했는데 거기에 성우로 참여했어요. 아나운서 공부를 따로 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TBC에서 성우를 뽑는다는 것을 친구가 알려줘서 시험을 쳤어요. 그렇게 방송을 시작하게 됐어요. 대학 때의 조그만 경험이 제 운명을 결정지은 거죠.”

◆작지만 큰 공간 카메라타

황씨는 카메라타 건립도 계획을 확실히 세워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방송을 오래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할 일도 없을 때 음악감상실 같은 것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헤이리 문화예술마을 조성에도 그가 주축은 아니었다. 뒤늦게 헤이리 문화예술마을 조성 사업을 알게 됐고 고향인지라 동참했다. 그는 자신이 회원이 된 것이 ‘139번째’라고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러나 음악감상실로서의 카메라타의 수준은 꽤 높다. 사람을 압도하는 4개의 대형 스피커들은 이름난 빈티지 명품이다. 1930년대 웨스턴 일렉트릭사의 제품과 1940년대 만들어진 독일의 클랑필름 스피커다. 클랑필름 스피커는 히틀러가 군중을 선동할 때 썼던 것과 같은 제품이다. 스피커 4개 모두 외국의 극장에서 쓰던 것을 황씨가 10년 걸려 마련한 것들이다. 3층까지 뚫어 놓은 공간도 스피커에서 나온 음을 자연스럽게 울리는 역할을 한다.

카메라타를 개업하는데 든 자금은 그가 프리랜서로 번 돈을 모아 충당했다. 그는 “월급 생활을 끝까지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70년대 말까지는 집에 라디오도 하나 없을 만큼 가난했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1980년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음반도, 기기도 사 모으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살고 있는 그이지만 “2, 3시간 정도 들어야 아날로그랑 디지털 소리의 차이를 알겠지만 30분 정도 듣는다면 디지털 소리가 산뜻하고 좋다”고 시원스럽게 웃어넘겼다. 그러면서 그는 “음악이란 것은 감성이나 관념의 문제”라고 했다.

은퇴했지만 그의 유명세는 여전하다. 사진 촬영을 하는 중에도 한 중년이 “황 선생님 보러 일부러 왔다”고 했다. 황씨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서울이다. LA에서 사는 분이 오셔서 찾아왔다”고 답했다. 디지털 기술로 원음에 가까운 음악을 듣는 시대에 클래식 음악을 LP판으로 듣는 카메라타에는 방송인 황인용에 대한 추억과 함께 그렇게 시간이 멈춰 있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황인용은?=1940년 1월 1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경희대를 졸업하고 1967년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 3기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라디오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여러 방송을 진행했다. 1980년 프리랜서로 전환, 다양한 방송국에서 TV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04년 9월 경기도 파주헤이리에 토털미술관 고전음악감상실 ‘카메라타(Camerata)’를 개업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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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7월 26일 -


웨스턴 마카로니 테마파크

친근한 주니,베리,우디,스모키와 함께 떠나는 과학놀이 체험관!!

직접 주인공이 되어서 신나는 모험을 즐기면서 스스로 과학원리를

찾아내고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상상력은 하늘 높이 자라나게 됩니다.

생활 속에 숨어있는 과학의 원리를 애니메이션 주인공들과 함께 직접 체험하고

이해하는 웨스턴 마카로니 어드벤처 우리 아이들에게 즐겁고 신나는 상상력을

선물하세요.






우디의 목공 놀이터

블록놀이를 통해 네가/포지,패턴을 이해하고 체험합니다




서프라이즈 동굴

신나는 보물찾기로 분자 구조에 따른 물질의 특성을 이해합니다

헤이리 예술마을은 다양한 문화장르가 한 공간에서 소통하는 마을이다

헤이리는 도시와 건축, 자연과 삶이라는 문화를 상징하며

예술인들이 꿈꾸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을 표방하고 있다

1994년부터 구상하기 시작하여 1997년 발족된 헤이리는 15만평에

작가,미술인,음악가,영화인,건축가 등

370여명의 예술인들이 회원으로 참여해 집과 작업실,미술관,박물관,갤러리등

문화예술공간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경기 파주지역에서 전해져 오는 전래동요인 '헤이리소리'에서

따왔다.

해마다 다르게 스며들지요
[매거진 Esc] 사진작가, 바다를 찍다 ⑧ 노순택의 남해 문항마을
한겨레
» 이런 포즈는 척보면 삼천리다. “밥 다 됐다 아이가, 퍼뜩 오이라!”

어린놈이었다. 그랬기에 자전거에 몸뚱이를 싣고 남으로, 남으로 내달릴 무모함을 지녔으리라. 침낭 하나 없이 소주 몇 병 싸들고 집을 나선 지 어언 며칠째, 나는 무작정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지겹도록 달렸으며, 지치도록 달렸다. 머릿속 가득 생각을 짊어지고도 달렸고, 그저 멍하게 페달을 저어 수백 리를 나아가기도 했다. 그때 내가 품었던 복잡한 고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지금 하지 않으면,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했을 뿐이다. 밤이면 어쭙잖은 방랑객 흉내를 내며 기차역 대합실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하고, 동이 트면 다시 달렸다. 지나는 짐차를 얻어 타기도 수차례였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 그는 천 리하고도, 이백 리나 더 떨어져 있었다.

» 갯길이 다시 닫히고 나면,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을 뗀다. 갯벌체험을 다녀온 아이들이 조용한 탄성을 지른다.
» 바다는 느리다. 조금만 느린 눈으로 본다면 갯벌은 단순한 체험의 현장이라기보다는, 고단한 삶의 현장임을 알 수 있다.
‘자전거로 천이백 리’ 청춘의 기억

그해 여름의 새벽, 진주역 앞 공중전화를 붙들고 나는 말했다.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방학의 끝자락이었으므로 곧 서울에서 만날 테지만, 그래도 한번 보자고.

첫차를 타고 나온 그녀가 꾀죄죄한 내 몰골을 훑어보며 내민 것은 박카스였다. 헌데 내용물이 달랐다. 아버지 방에서 몰래 담아온 양주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진주역 공터에 자전거를 매어두고,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얘기하다 졸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커다랗고 빨간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남해대교였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째 바뀌고 있으니 시간은 자전거보다 빠르다.

나는 해마다 남해를 오갔다. 어느 해던가, 남해대교는 칙칙한 빛깔로 옷을 갈아입었고, 빨간 다리의 속삭임이 사라진 탓인지 설렘도 줄어들었다. 우리의 모든 일상사가 그러한 것처럼, 십여 년 사이 남해도 많이 변했다. 육지를 이어주는 큰 다리가 하나 더 놓였고, 그것은 오가는 이들이 늘었다는 반증이자, 오가는 이들을 더 늘려보려는 욕망이기도 했다. 섬이라고는 해도, 한반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보니 볼 것도 많고 놀 곳도 많다지만, 만사가 귀찮은 나는 늘 처가가 있는 미조 포구를 맴돌았다. 그러므로 내게 남해는 곧 미조 포구이기도 했다.


» 남해의 남단 송정해수욕장에서 넘실대는 파도와 노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 문항마을 갯벌체험의 으뜸은 ‘쏙’ 잡이가 아닐까. 삽으로 갯벌을 10cm쯤 긁어내면 연탄구멍만 한 구멍들이 수십 개 나타나는데 여기로 작은 붓을 집어넣으면 쏙이랑 녀석이 침입자인줄 알고 붓을 물고 늘어진다. 이때 븟을 살살 돌려 빼면, 쏙이 ‘쏙’하고 빠진다.
문항마을에 가보려 한다는 얘기에 장모님은 ‘아니 웬일?’이라는 표정이었다가, 그곳이 장수촌이라고 귀띔해주셨다. 남해군 자체가 장수 지역인데, 문항마을은 그 표본쯤 되는 모양이었다. ‘문항’이라는 이름이 항구를 연상시켰지만 그곳은 항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분주하거나 번잡스러움이 없었다. 마침 하늘마저 비구름을 잔뜩 품어 오가는 사람마저 적었다. 축축한 바다 내음이 코를 타고 들어와 온몸을 무겁게 가라앉히니 나는 멍하게 서 있을 수밖에.

저 너머 작은 섬은 바다로 가로막혔다. 허나 반나절뿐이었다. 바다는 성큼성큼 뒷걸음질 쳤다. 그가 물러난 자리에 길이 났다. 어찌 시간대를 알고 찾아왔는지 갑자기 사람들이 북적댄다. 저마다 장화 신고, 비닐 옷 덮어쓰고, 호미를 든 채.

‘모세의 기적’이라는 광고 문구는 거슬렸지만, 섬을 향해 열린 갯길은 작고 아름다웠다. 물이 빠진 갯벌은 언뜻 시체 안치소처럼 보인다. 온통 죽은 소라와 조개, 게 따위다. 허나 잠시 바라보면 무언가 꼬물댄다. 흡사 ‘매직아이’처럼 마구 흐물거린다. 모든 죽은 것들 사이로, 모든 산 것들이 꿈틀대는 것이다. 갯물에 맨발을 넣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들이 발가락을 꼬집고 더듬어댄다. 너, 살아 있거든! 산 것이 산 것에게 주는 은밀한 따끔거림은 차라리 선물이어라.

» 바다는 몸을 소리치게 한다. 비오는 바다에서 아이들은 몸을 아끼지 않는다.
» 바다가 물러가면 섬으로 가는 갯길이 열린다.
산 것들의 그 은밀한 따끔거림

연간 수만 명이 마을을 찾는다고 하니 문항마을 갯벌체험은 꽤나 알려진 모양이다. 아이들과 조개를 잡고, 쏙을 낚아채는 체험은 이 땅의 모든 부모가 바라는 산 교육임에 틀림없을 테지만, 모든 걸 교육 프로그램으로 환원시키려는 그 엄청난 전투력은 대개 조급증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자. 적어도 바다 앞에서는.

바다는 느리다. 느린 것은 죽은 게 아니다. 바다가 물러간 갯벌에서 잠깐 조개를 잡고 간 아이들이, 다시 성큼 다가온 바다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같은 곳이건만, 풍경은 이렇게나 달라지는데…. 내게 바다는, 해마다 달리 스며들었다. 바다를 품을 깜냥이 되지 못하니 그저 스며든 바다 맛이나 볼 따름인데, 해마다 다르니 바다가 변화무쌍한 탓인지, 내가 도섭스러운 탓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긴 우리가 아는 게 무언가. 어린 객기로 꾸역꾸역 기어들어왔던 남해바다가, 내게 이리 될 줄 누군들 알았던가.

사진·글 노순택 / 사진작가

» 문항마을은 90여 가구가 사는 작은 어촌이다. 이 마을은 장수지역으로 알려진 남해에서도 손꼽히는 장수촌이다.

■ 문항마을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 하동 나들목에서 나와 남해대교를 건너 쭉 가면 설천면 문항마을이다. 찾아가는 길보다 중요한 건 썰물 시간이다. 마을에 전화를 걸면 시간대를 알려준다. 전화번호는 (055)863-4787. 인터넷 카페는 http://cafe.naver.com/munhangbeach. 딱 썰물 시간에 가기보다는 여유롭게 도착해서 물 빠지는 모습을 아이들과 지켜보는 게 좋다. 숙박은 마을안내소와 어민휴게소를 이용하거나 민박을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