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군 화개면 정금리 야생 차밭에서 소재를 의논하는 제임스 설리번(오른쪽)과 김성수 예술감독. [사진 김석구]
눈이 번쩍했다. 코가 실룩실룩한다. 온 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지난 23일 오후, 경남 하동군 화개면 정금리의 야생 녹차 밭. 미국 출신 설치미술가 제임스 W 설리번(66·메도우즈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은 도시를 지날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다. 차밭으로 들어가 잎을 따 냄새를 맡고 손으로 비비며 주변 풍광을 살핀다. 설리반은 오는 10월 지리산 하동 일원에서 ‘다시 자연으로-생명 속에 생명을 담다’를 주제로 열리는 ‘2018 지리산 국제환경예술제’(예술감독 김성수)에 초대작가로 선정됐다.
미국 자연주의 설치미술가 제임스 설리번
올 10월 지리산 국제환경예술제 참가
“숙성한 찻잎과 어린 찻잎, 덖은 정도에 따른 질감 차이가 재미있어요. 할머니와 손자의 피부가 다른 것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저는 자연의 모든 요소를 몸, 특히 촉각으로 느껴서 그 재료의 감성을 바탕으로 작업합니다. 하동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차를 소재로 하고 싶지만 너무 여린 소재라 걱정이네요.”
설리번의 '신체 생태 미술' 개념을 보여주는 대표작. 볏짚과 회반죽, 나무가 소재다.
설리번 교수는 세계 미술계에서 ‘신체 생태 미술’ 개념을 발전시켜온 선구자로 꼽힌다. 볏짚과 회반죽, 나무 등으로 구성한 인체 조각은 우주 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인간의 생존 조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목받았다. 삐죽빼죽 몸 밖으로 튀어나온 짚의 예리한 형태가 보는 이를 자극한다. 예일대에서 철학을 먼저 전공하고 20대 후반에 조각을 공부한 그는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작품의 이론 체계를 단단히 세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일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미술가의 길에 들어선 설리번은 인간 실존의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다.
“2016년 첫 해에 작업한 대지예술가 크리스 드루리의 ‘지리산 티 라인’을 봤어요. 지리산 맥을 잇는 산줄기에 차나무와 바위를 뱀이 똬리 틀 듯 엮은 게 힘차면서도 아름답더군요. 지난해 2회 작가인 야생주의 현대미술가 에릭 사마크는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장소를 골라 원시의 성소를 만들었어요. ‘소리 나는 돌과 피난처’는 제목 그대로 그곳을 찾아온 이들에게 소란한 세상에서 비껴난 자기만의 안식처를 주더군요.”
프랑스 야생주의 작가 에릭 사마크의 '소리 나는 돌과 피난처' 앞에서 생각에 잠긴 설리번.
드루리는 영국, 사마크는 프랑스 출신이다. 이제 미국 출신 설리번의 작업이 완성되면 지리산 하동군은 자연주의 현대미술의 선도국이라 할 세 나라 세 작가의 작품을 보유한 희귀한 지역이 된다. 김성수 예술감독은 “처음에는 하동이란 낯선 지명에 고개를 갸웃하던 거장들이 직접 와서 현장을 보는 순간, 지리산이 품어주는 천혜의 땅에 반해서 창작 의욕을 불태운다"고 설명했다.
설리번은 김성수 감독이 조성 중인 자연주의 예술복합공동체인 ‘지리산 아트 팜’의 예술학교 야외극장 주변을 작품 설치 장소로 점찍었다. 26일에는 통도사에서 열리는 천연염색 시연장을 둘러보며 “무슨 재료를 써야할까 고민이 더 깊어졌다”고 털어놨다. 28일 한국을 떠나며 그는 “10월에 돌아올 때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작업 방향을 잡을 것 같다”는 암시를 남겼다. 새로운 자연주의 생태미술의 씨가 지리산에 뿌려질 모양이다.
하동(경남)=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