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별별 예쁜 책]손글씨-사진-그림이 모여 한권의 책이 되기까지

기사입력 2014-01-25 03:00:00 기사수정 2014-01-25 03:00:00

  
 
◇왜 책을 만드는가: 맥스위니스 사람들의 출판이야기
맥스위니스 편집부 엮음·곽재은 박중서 옮김/408쪽·2만6800원·미메시스


책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독자에게 낱낱이 공개한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자동차 관련 서적을 만들 때 사용한 일러스트의 초안. 미메시스 제공
우리가 서점에서 만나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책만큼 친절한 안내서를 찾기도 드물다. 이 책은 미국의 소규모 출판사 맥스위니스가 같은 이름의 계간지 맥스위니스와 몇 종의 정기간행물, 단행본을 만든 과정을 이 작업에 참여한 인물의 인터뷰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어떤 아이디어가 ‘책으로 내겠다’는 마음의 불을 댕기는지, 제작 과정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있는지, 편집자들은 그 속에서 어떤 막막함과 싸우고 성취감을 느끼는지가 생생히 펼쳐진다.

따분하지는 않을까 싶지만, 이 책에는 그런 우려를 잠재우고도 남을 사진과 그림 자료가 가득하다. 투고 원고의 검토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커다란 원고 분류함 사진이 등장해 편집자의 결정에 따라 운명이 엇갈리는 원고의 종착지를 보여주는가 하면 독자들의 사은품 신청 내용까지 적힌 정기구독신청서(심지어 영문 손글씨를 한국어로 손글씨로 번역해서)가 등장할 때도 있다. 일러스트 초안의 스케치나 도서의 제작 단가표 등 영업비밀 같은 자료들까지 독자들에게 공개한다.

맥스위니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들의 출판 과정을 담은 책을 낼 생각을 했을까? 이 출판사의 편집장 데이브 애거스의 말에 정답이 있다. “이 책은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책이며, 또한 미래의 출판인들에게 책을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재미있을 수 있는가를, 그리고 책을 제작하는 수단이 그들에게 얼마나 열려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한 책이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책과 지식] 배병우·서도호·최태지 … 예술가가 말하는 창조성[중앙일보] 입력 2014.01.25 00:01 / 수정 2014.01.25 00:10

창조성의 원천
신동엽·김은미·이중식 지음
김영사on, 416쪽
1만8000원


흔히 예술가는 ‘타고 난다’고 말한다.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창조성’이 천부적 재능의 하나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창조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가. 보통사람들은 다른 이의 마음을 뒤흔들 무언가를 창조할 수 없을까. 이런 의문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창조적 행위를 소수의 예외적인 천재들의 영역으로 밀어놓는 대신, 창조성을 발현시키는 사회적 요인을 찾아나선다.

 각각 경영·커뮤니케이션·건축을 전공한 저자 세 명은 ‘예술가는 어떻게 창조성을 끌어내는가?’라는 주제로 한국을 대표하는 19명의 예술인을 인터뷰했다. 전 국립발레단장 최태지, 사진작가 배병우, 첼리스트 송영훈, 설치미술가 서도호 등 예술가 외에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안호상 국립극장장 등 문화 행정가들도 포함시켰다.

 인터뷰를 통해 찾아낸 창조성의 원천은 네 가지다. 일단 ‘전방위 통신’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동시대 사람들과 소통하며 세계 최첨단의 예술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단장 시절 러시아 볼쇼비치 발레단의 유리 그리가로비치를 영입해 발레단의 수준을 높인 최태지 단장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로는 ‘내면탐색’으로 자신의 내면과 정신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창조의 실마리를 찾는 사람들이다. “나의 삶에서 최대의 관심은 그냥 ‘나’”라고 말하는 사진작가 니키리 등이 이런 유형이다.

 창조적 결과물을 내는 사람들은 특정 스타일이나 사조를 거부하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발레리나 김주원은 사회적인 통념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대무용, 뮤지컬, 방송을 넘나드는 도전을 즐긴다. 마지막으로 ‘완전한 도취.’ 예술 이외의 다른 삶을 포기하고 완벽을 향해 치열하게 집중하는 예술가들이다.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창조성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는 제격이지만, 너무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한 데 담다 보니 개개인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아쉽다. 결국 책이 전하려는 바는 이거다. “명나라 화가 동기창은 예술가는 타고 난다고 했는데, 또 한편으로 누구나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여행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도 했지요.”(사진작가 배병우)

이영희 기자

브라질 뒤흔든 소설, 한인작가 이규석 "GO, 계속 가자"
    기사등록 일시 [2013-11-04 17:44:38]    최종수정 일시 [2013-11-05 12:16:57]
【서울=뉴시스】강진형 기자 = 브라질 이민 한국작가 닉 페어웰(이규석)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빌딩에서 닉 페어웰 대표작 'GO' 출판 간담회를 갖고 있다. 2013.11.04. marrymero@newsis.com 2013-11-04
【서울=뉴시스】오제일 기자 = "저는 왜 인생을 사는 건지 몰랐어요. 그걸 브라질 친구들이 알려줬죠. 배웠던 걸 되돌려 주려고 책을 썼습니다."

14세 때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작가 이규석(42·닉 페어웰)이 소설 '고(GO)'를 들고 한국을 찾았다. 브라질 언어인 포르투갈어로 쓴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됐으니 '역수출'인 셈이다. "행복합니다. 전 세계의 작가 중 저보다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가 브라질에서 배운 것도 행복이다. "브라질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배웠습니다. 브라질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지만, 그 사람들도 즐겁게 살아요.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능력이 있고 없고와 상관 없이 그냥 행복한 거에요. 환경이 아닌 자기 마음으로 행복해하는 게 브라질의 스타일이죠."

책은 작가가 '인생은 즐거우려고 사는 것'이라고 알려준 브라질 친구들에게 전하는 긴 편지다.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말을 안 듣더라고요. 돕고 싶은 마음은 큰데 말이에요. 그래서 실망하지 말고 계속 가라는 걸 소설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게 된 거에요.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썼죠. 책을 읽고 힘을 얻어서 계속 'GO'하라는 마음이었죠."

【서울=뉴시스】강진형 기자 = 브라질 이민 한국작가 닉 페어웰(이규석)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빌딩에서 닉 페어웰 대표작 'GO' 출판 간담회를 갖고 있다. 2013.11.04. marrymero@newsis.com 2013-11-04

'나는 가슴에 구멍이 난 채 태어난 사람'이라며 외로운 삶을 자처하던 화자가 사랑과 이별을 겪으며 삶의 의미를 느끼는 과정을 다룬다. '나는 누구일까'를 찾아가는 서사시이자 '루저'의 삶을 살던 젊은이가 영웅적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자기만의 신화'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지만 사실 어떤 게 행복이라는 걸 잘 몰라요. 행복은 자기 마음에 있는 건데 말이죠. 다른 사람이 보면 바보 같더라도 자신이 행복하면 그게 행복이죠. 그걸 브라질 사람들이 제게 가르쳐 준 거에요. 그걸 가르쳐 준 사람들이 슬퍼하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또래에게 이야기하듯 쓴 책은 브라질에 울림을 줬다. 'GO'는 브라질 청춘들이 너나없이 '내 삶을 바꾼 책'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는, 브라질 청소년들이 책 제목을 문신으로 새기는 책이 됐다. 2007년 브라질 교육부가 선정한 전국 공립고교 필독서이기도 하다.

【서울=뉴시스】강진형 기자 = 브라질 이민 한국작가 닉 페어웰(이규석)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빌딩에서 닉 페어웰 대표작 'GO' 출판 간담회를 갖고 있다. 2013.11.04. marrymero@newsis.com 2013-11-04

"브라질과 한국 문화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어요. 고독입니다. '내가 왜 사느냐' '내가 뭘 해야 하느냐'는 등의 고민이죠. 특히 이런 문제는 젊은 사람들에게 크게 다가옵니다. 그런 이야기를 친구 또래에게 하고 싶어서 쓴 책인데 젊은이들이 읽으면서 자기 일처럼 느꼈나 봐요."

28년 만에 찾은 한국, 28년 만에 내뱉은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이 반갑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배웠던 것을 전하고 싶다.

"브라질 사람들은 이해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라고 이야기해요.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가 있으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책을 읽을 때 이해를 못 할 것 같으면 사랑해줬으면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읽어줬으면 고마울 것 같아요." 344쪽, 1만3000원, 비채

kafka@newsis.com

이틀 만에 11만부… "역시 공지영"

새 장편 '높고 푸른 사다리' 서점가 돌풍
입력시간 : 2013.10.31 20: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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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공지영(50)씨가 4년 만에 발표한 새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한겨레출판 발행)가 발간 이틀 만에 11만부 넘게 나갔다. 출판관계자들마저 "믿기지 않는다" "놀랍다" "역시 공지영"이라며 혀를 내두를 만큼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다.

한겨레출판은 31일 "초판 11만5,000부를 찍어 28일부터 판매에 들어간 <높고 푸른 사다리>가 이틀 만에 물량이 모두 소진돼 재판 1만5,000부를 추가 제작했다"고 밝혔다. 극심한 출판 불황 속에서 초반 판매 속도가 이처럼 가파른 것은 공씨의 전작은 물론 대형 베스트셀러 작가들과 비교해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2009년 6월 30일 창비에서 발간된 공씨의 전작 <도가니>는 출간 한 달 만에 13만부가 나갔으며, 역시 창비에서 나온 신경숙의 초대형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도 2008년 11월 10일 출간돼 첫 달에 8만부, 둘째 달에 10만부가 팔리다 점차 가속도가 붙으며 200만부를 돌파했다. 문학 작품 중 가장 최근의 베스트셀러인 조정래의 <정글만리>(해냄 발행)는 1, 2, 3권을 합쳐 한 주 만에 21만부가 나갔고, 2주 만에 초판 물량 30만부가 동나 추가 제작에 들어갔다. 창비 관계자는 "5,6년 전과 비교해 출판시장이 반토막 난 상황에서 이 정도 속도로 작품이 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역시 공지영 작가의 힘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화끈한 반응은 탄탄한 고정 독자층을 가진 공지영 작가의 신작에 대한 서점가의 높은 기대치를 반영한다. 조정래 이후 이렇다 할 '비장의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출판 불황을 타개할 구세주로 '공지영'을 주목하고 있는 것. <높고 푸른 사다리>는 10월 셋째 주 <정글만리>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오른 법륜 스님의 에세이 <인생수업>을 밀어내고 조만간 자기계발 분야에 빼앗긴 1위를 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인생수업>과 <높고 푸른 사다리> 모두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책들이다.

한편 <높고 푸른 사다리>의 책 표지가 지난해 청아출판사에서 나온 E. 젤린스키의 <우리가 잊고 사는 50가지>와 똑같아 한때 소동이 일기도 했다. 한겨레출판 관계자는 "표지는 시판 중인 일러스트를 구매해 사용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전혀 위촉되지 않는다"며 "책이 시중에 배포된 이후에야 이미 똑같은 표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나 작가와 협의 후 교체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테이블 설명

공지영 "어떠한 죽음도, 탄생도 상투적일 수 없어요"


박선영기자


왜 이제야 썼느냐, 고 가장 먼저 물었다. 더불어 고백했다. 나는 당신의 애독자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지금 내가 그 사실에 일말의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이제야 해버린 당신 탓이라는 게 주장의 골자였다.

"하하하. 다 때가 있는 거죠. 아무 때나 써지는 게 아니에요. 근데 실은 나도 이런 소설을 좋아해." '공지영답다'는 형용사의 사전적 정의라 할 만한 경쾌한 미소의 시연.

출간 이틀 만에 11만부가 팔리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소설가 공지영(50)씨의 새 장편 <높고 푸른 사다리>는 고전문학전집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소설이다. 청춘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한 뜨거운 우정과 사랑이 있고, 신과 구원의 문제가 있으며, 전쟁과 죽음의 비극이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페미니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사형제도 비판, <도가니>의 장애인보호시설의 인권유린 고발 등 뜨겁게 현실과 맞서온 작품 이력을 감안할 때 인간 존재의 근본적 고뇌를 다룬 이 작품은 이례적이라는 표현을 넘어 이질적으로까지 보인다.

"제가 남녀간의 연애를 본격적으로 써본 것도, 세상에, 작가 인생 26년 만에 처음이더라고요. 이번에는 작정하고 고전적으로 가보려고 했어요. 사실 현실 비판은 내 본성에 안 맞아.(웃음) 저는 사춘기를 신과 씨름하며 보냈고, 18년 전 다시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끊임없이 신에게 '대체 왜?'를 따져 물으며 살아왔어요. 제 안에서 오래 곰삭아온 주제예요." 굳이 작가의 이 말이 아니더라도 이 소설은 공지영의 전 생애가 응축돼 아름답게 폭발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작품이 좋다"라고 말할 때 그 좋음의 근거에는 여러 가지 형식과 방법이 있다. 새롭거나 지적이거나 세련되거나 기발하거나 첨예하거나 도발적인 것이 이 즈음 '좋다'의 판단 준거로 널리 통용되는 가치들이다.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은 결코 '좋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까지 설득할 수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읽었을 때와 같은 마음의 요동 앞에서 '서기 2013년에 웬 앙드레 지드냐'고 따지는 것은 소설을 읽고 이미 마음이 흔들려버린 것만큼이나 무력한 일이다.

소설은 정요한이라는 서른 아홉의 가톨릭 신부가 생애 가장 소중했던 세 사람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10년 전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뛰는 심장의 뒤편으로 차고 흰 버섯들이 돋는 것 같"은, "그 해처럼 이별이 내 존재를 휩쓸고 간 적은 없었던" 시절이다. 'W시'로 표기되는 경북 왜관수도원을 배경으로 신에게 따지고 굴복하고를 반복하며 형제처럼 마음을 나눴던 두 수사 미카엘과 안젤로, 벗어 던진 검은 수사복을 목련꽃 환한 나뭇가지에 걸어둔 채 밤새 사랑의 행로를 달리게 했던 첫 사랑 여인 소희, 그 모두를 요한은 그 해에 잃는다. 잔잔해서 더욱 사무치는 우정과 사랑이 서사의 가로축이라면, 세로축은 한국전쟁 흥남 철수 당시 벌어졌던 전쟁의 참상과 그 속에서도 결연히 빛났던 인간의 품위다.

흥남 철수 얘기를 하면서 작가는 또 울었다. "그동안 전쟁이라는 말을 너무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던 거예요.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다치고, 전쟁도 불사하고…. 인간을 존재의 가장 밑바닥으로 처박는 그 끔찍한 참상 속에도, 그런데, 인간의 위대함이 있더라고요."

흥남 철수 당시 부두에는 남쪽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 위한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밀쳤고, 어린 아기들은 겨울 바다에 짐짝처럼 던져졌다. 미국 해군 선장 마리너스는 정원 12명의 화물선에 1만 4,000명에 달하는 피란민을 태워달라는 요청을 받고 망설인 끝에 수용 명령을 내린다. 5층의 짐칸에 한가득 사람을 채운 후 뚜껑을 덮고 물 한 방울도 주지 못한 채 사흘을 달려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 선장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갈증을 견디다 못해 약한 자의 피를 빨아먹는 것으로 시작해 살인과 식인의 아수라로 화했던 아우슈비츠의 일화였다.

그러나 뚜껑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너무도 고요하게 서로의 버거운 존재를 버티던 1만4,000여명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죽은 이도, 다친 이도 없었고, 오히려 신생아 다섯 명이 태어나 승선 인원보다 하선 인원이 많았다. 거제도에는 배의 도착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주먹밥과 맑고 신선한 물을 담아 부두에 나와 있었다. 그날은 온 누리에 신의 축복이 가득한 크리스마스였다.

실화에 기반해 밀도 높은 문장들로 구축된 이 서사의 세로축은 정요한 신부의 개인사를 다룬 가로축과 만나며 "어떠한 죽음도, 어떠한 탄생도 상투적이지 않음"을 조용히 웅변한다. 문학의 장 안팎에서 광범위하게 소모돼온 공지영이라는 '시니피앙'을 가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문화적 기호와 취향을 숱한 장삼이사들의 그것과 구별 지으려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고도 그 태도를 고수하려면 아마도 적잖이 안간힘을 써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