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AE(Discipline-Based Art Education)의 이해

DBAE의 정의

DBAE(학문기초 미술교육 운동, 이하 DBAE로만 사용)는 유치원부터 초 중고생들을 근본적으로 발달시키고, 또한 성인교육, 평생교육, 미술관, 등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하여 공식화된 총체적인 접근방법이다.

DBAE라는 용어는 1984년, Dwaine Greer가 발표한 잡지 소논문에서부터 미국 미술교육 분야의 전문용어로써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비롯된 DBAE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된 개념이 아니며, 특히 훈련 내지는 이해에 근거한 미술교육이란 뜻으로 1950년대 말부터 나오기 시작한 Bruner(1960)의 구조적 훈련Structure of disciplines, 즉, 단편적인 사실이나 기술을 암기하고 배우는 것보다는 지식의 근본적인 개념구조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발표한 교육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Efland, 1987).

DBAE는 몇 가지 학문의 교육들(특히 네 가지 미술의 기본적인 교육들 - 제작, 비평, 미술사, 미술비평)에 관련하여 그들과 경험하고, 그들로부터 의미를 얻어 결국에는 중요한 목표를 가지게 된다. Greer에 의하면, 이런 교육들은 모두 미술에 중점을 두며, 그림을 그릴 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구조적인 학습체계 속에서 이를 아동들에게 제시해 주는 것으로써 DBAE의 기본적인 지식구조를 이룬다고 하였다(Greer, 1984). 이러한 교육을 통해 미술, 작가들, 미술 과정들, 그리고 문화와 사회 안에서 미술의 역할과 기능을 창작하고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DBAE는 1980년대 이래로,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예술교육 게티센터The Getty Center Education in the Arts" (현재는 The Getty Education Institute for the Arts로 명칭이 바뀌게 됨)에서부터 교육현장에 직접 간접적으로 적용되었고, 미국 전역의 교육적 변화를 광범위하게 조사, 연구하였으며, 결국 각 훈련들의 통합적인 접근의 중요성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오늘날 DBAE는 미국 학교 교육의 교사 양성, 교과과정 개발, 교육지침, 학습, 평가, 등의 대부분의 교육과정을 위한 기본적인 바탕이 되고있다.

DBAE의 특성

DBAE는 다른 미술교육의 일반적인 모형들과는 구별되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DBAE는 미술교육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다. 본래 유치원부터 초 중고생들에게만 제한되지 않게 고안된 DBAE 프로그램들은, 일반 교육에서 미술에 대한 이론의 기초가 되고 미술교육을 하나의 독립된 교과로 인식하게 한다.

학생들은 네 가지 미술 학문 훈련들(창작, 미술비평, 미술사, 미학)의 내용으로부터 파생된 균형 있고 엄격한 교과과정에 충실해야 한다. 이렇듯 아동이 참여하는 교육과정은 문서화되고 연속성 있게 계획되어진 미술 교과과정의 틀을 구성하고, 이때 아동의 연령 발달과 경험적인 측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서 아동에게 적절한 내적인 의미를 느끼게 해야한다.

총체적인 프로그램에서, 미술작품들은 학습의 목적을 제공하고,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의미가 있을 작품들을 선택하도록 격려되어진다. 따라서 어떠한 규범도, 어떠한 유명작품들의 목록이나 필수불가결인 조항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학습되어질 미술작품들은 교실의 학생들에게 의존한다. 선택된 미술작품들은 의미와 해석에서 풍요롭고, 독특하거나 흥미롭게 학생들의 마음을 끌 필요가 있다.

미술은 DBAE에 관한 지식, 기술들, 이해를 구축시키는 전문적인 성장 기회들이 제공되어진 인증된 교사들에 의해서 가르쳐져야한다. 미술 전담 교사들과 담임, 혹은 다른 교과목의 교사들은 수업을 계획하고 진행시키고 가르치는데 서로 가깝게 협동한다.

미술에 관한 학습 능력을 장기적으로 고려한 프로그램은 지역 학교구, 대학, 미술 박물관, 등의 정책과 교류하여 학생들의 학습에 훌륭한 동기유발이 되는 총체적인 미술교육을 이루어야한다.

DBAE에서 학생 학업에 관한 평가는 교사 단일 결정이 아닌, 학생들, 교사들, 학교 행정가들, 위원회, 부모님, 등에게 보고된 결과들과 함께 일정한 기초에서 수행된다.

DBAE 학문 교육의 정당성

학문 훈련들은 미술품들이 창작되어진 의미에 따라서 미술작품들을 감상하고, 이해하고,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또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학문 훈련들Disciplines"이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몇 가지 가설들이 구성될 수 있다.

1. 각 분야들은 지식이나 의미가 인지된 커다란 틀을 제공한다.

2.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학문 훈련들에 관하여 학습하고 이해한다.

3. 특징적인 절차들과 방법들은 탐구와 학습을 촉진할 수 있게 존재한다.

이러한 학문 훈련들은 미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의 원천들이 된다. 그들은 여태까지의 지식과 기술의 분야들이고, 화가들이나 미술평론가들, 미술사가들, 예술철학자들처럼, 훈련들 안에 연구하고 그들의 취지에 기여하는 개인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발전한다. 학문 훈련들은 또한 견습생들이 그들의 작업에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고, 말하고 있는가를 반영한다. 사실상, DBAE 자체는 기본적인 미술 학문훈련들에 대한 탐구를 촉진시킨다.

그러나 미술 훈련들은 홀로 DBAE에 대한 유일한 내용들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관련된 원천들을 제공하는 첨가된 분야들은 인류학, 고고학, 보도기관, 문화학, 교육 평가, 언어학, 철학, 사회학, 등이 포함된다. 오늘날 점점 더 이러한 분야들이 발전하는 것은 우리가 미술 교육을 더욱 알차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미술 학문 훈련들은 학생들이 미술작품을 넓고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기본적 지식, 기술들, 그리고 통합적인 이해를 제공한다. 결국 DBAE란 아동들에게 조작할 수 있는 미술재료들을 단순하게 제공함으로써 아동들이 스스로 학습하도록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동들이 더욱 창의적일 수 있도록 학습을 도와주고 촉진하는 여러 방면으로 다양한 수업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편 다른 학문분야들과 미술의 통합은 미술 자체 의미의 감소를 피하는 균형 있는 활동들을 신중하게 요구한다.

DBAE의 네 가지 학문적인 교육들

DBAE 미술교육은 시각미술에서 필요로 하는 네 가지 중요한 활동과 관련된 네 가지의 주요한 목표를 가진다. 즉 미술작품을 창조하는 것, 미술작품의 질을 지각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미술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는 것, 미술작품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그러한 판단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네 가지 학문의 분야들, 즉 미술작품의 창작, 미술비평, 미술사, 미학은 DBAE의 이러한 내용이 도출되는 주요한 분야들이다.

▲ 작품 제작 : 다양한 매스 미디어의 도구들과 기술들과 함께 경험과 생각들을 숙달적으로 적용하여 미술작품들을 창작한다. 또한 미술가들의 시각언어를 배우도록 하며 실제로 작가의 정신적 사고 및 시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미술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다양한 매개체의 기술적 사용능력을 발견하도록 한다.

▲ 미술 비평 : 미술작품들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을 증가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회 안에서 미술의 역할들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미술작품들에 대하여 서술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고, 이론화한다. 결국, 미술비평은 아동에게 시각세계를 독특한 방법으로 바라보고 기술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 미술사 : 인간의 상황들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시간, 장소, 전통, 기능, 양식들의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서 미술품들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들을 연구한다. DBAE는 학생들이 미술과 문화형성의 상호작용을 역사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들간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 미학 : 무엇이 미술을 다른 종류의 현상들과 구별을 시키는지, 그러한 차이점들이 생기는 문제들, 그리고 미술작품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기 위한 기준의 발달에 관하여 이해하게 하는 미술의 본성, 의미, 가치에 대한 질문들을 모으고 조사한다. 미술활동에서의 이러한 미적 추구는 특정한 미술작품의 표현적 특징을 인지하도록 이끌며 미적 지각능력을 발달시킨다.

비록 미술작품들과의 만남에서 그들의 원리적 역할과 기능, 등을 파악하기 위하여 훈련들을 정의하는 것이 유용하지만, 이러한 분야들은 또한 서로 유동적이고, 이동적이며, 통합되어 진다. 따라서 관련된 흥미들과 새로운 쟁점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학문 훈련들의 경계들이 변하고 일반적으로 연장되므로 어떠한 한정된 정의들도 결국에는 불충분하게 보여질 것이다.

맺는말

미술작품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에 대하여 가리킨다. 미술은 우리가, 과거와 현재 모두를 포함한, 점점 더 상호의존적인 많은 다른 사회들이 어떻게 그들의 생활, 문화, 공간들에 대하여 살고 생각하고 느끼는 지를 이해하게 도와준다.

DBAE는 미술교육에 총체적인 접근을 유도하고, 학교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의미를 운반하기 위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비평하고 역사적인 조사와 미학적인 질문들에 종사하는 연구가 바탕이 된 경험들과 같은 특정한 전략들을 사용한다. 미술작품에 대하여 말하고 쓰고 연구하는 것은 중요한 전략들이다. 학생들은 이와 같이 네 가지 학문 훈련들로부터 비롯된 엄격한 미술교육에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야한다. 성공적인 교육의 실행을 위해서 교사의 포괄적인 행정의 지도력, 전문화, 그리고 다양한 교과과정과 지역 미술관 방문이나 주변의 좋은 미술가들과의 대화, 등등, 지역사회의 풍성한 자원들이 요구된다.

참고문헌

Dobbs, S.M. Learning in and through Art The J. Paul Getty Trust. 1998

Eisner, E.W. The Role of Discipline-Based Art Education in America's School.

The Getty Center for Education in Arts, 1988

집필 - 홍소영 / 덕성여자대학교, 미국 미주리 University Columbia 미술교육학 석사.

[작문과제]
AnnikavonHausswolff,fromtheseriesUntitledWithBubble,1995
2002.6.5.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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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eVisualArtDeviceofResearch&Education
I미술작문I포트폴리오I실기자료I진로와진학IVISARTI
2002.6.13.출제
월드컵축구경기가사람들을영광시키는
원인은무엇인가?라는질문에답하고그
열광이다양한현실의영역을마비시키는것이
정당한지여부를확인하라.
1,500자에세이로작성할것

2002.6.26.출제
다음의문장을다운로드해서
1,000자분량내외로요약하라.

[
예문다운로드]
2002.7.3.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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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esMuggenthaler,DerAustauschvonGeschenken
zwischenMenschundTier(TheExchangeofGifts
betweenManandBeast)
,1989.
2002.7.10.출제
이장면은1968년뮌헌에서
실행된거리의퍼포먼스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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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ieExport,TapandTouch
Cinema
,Performance,1968,
Munich,Photo:WernerSchulz
[도판1]
무용가강수진
[도판2]무용가강수진의발



7월17일출제

도판1도판2는무용가강수진에관한
이미지이다.
이들두이미지를보고예술적아름다움과그것을
창작하는노동에관해서이야기하라.단,"마당히
뭐뭐해야한다"는식의당위론을허용하지말라.
작문과제
Dr.Duanus'famousmagicact
2002.7.30.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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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8.3.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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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migianino,Self-Portraitin
aConvexMirror
,1524년경
DuaneMichals,AStoryaboutaStory
2002.8.6.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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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8.9.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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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ielaIturbide,Jardinero

특별기획

한국 판화예술의 현재와 전망 -이인희 / 화가, 부산동의대 강사


머리글

판화는 판(版)을 매개로 해서 같은 그림을 복제하여 복수로 제작해 낼 수 있는 간접표현 방법의 예술 형태이다. 회화나 조각 같은 미술분야와 다른 판화의 이러한 성격은 작품의 일회적이고 유일무이한 틀에서 벗어나 좀더 많은 대중들에게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예술작품을 직접 소유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예술의 일품주의를 주장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판화는 20세기초까지도 일반인이나 화상들에게 그리 인기 있는 분야는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유럽의 각 대회에서 판화 수업이 이루어지고, 판화 기법을 익힌 그들이 배출되면서 판화 보급에 정열을 쏟게 되었으며 2차대전 이후에는 기존의 대가들도 판화를 생산해 내면서 그 저변을 넓혀나가게 되었다. 이제는 생활의 주변에까지 접근해 있는 판화는 우리나라에서 어떤 과정을 밟아 지금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사회에 수용되기 위한 제도로서 판화교육, 전람회, 화랑, 공방 등은 어떤 양태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판화를 둘러싼 여러 분야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점검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한국 판화의 약사(略史)

우리나라의 전적에 담긴 인쇄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66년 경주 불국사 소재의 석가탑 해체 복원 공사때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한 이 경문은 길이 약 6.2 m, 폭 약 6.7cm로 54cm 크기의 닥종이 12장을 이어 붙여 먹으로 찍어낸 목판 인쇄 두루마리이다. 제작 연대는 서기 751년(혹은 서기 704∼706년이라는 주장도 있다)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격적인 판화는 고려시대에 와서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이 여러 점 전해진다. 고려 목종 10년(1007년) 개성 총지사가 개판해 낸 '보협인다라니경의 변상도'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판화이다. 이 판화는 보협인다라니경의 내용을 압축하여 표현해서 한지에 먹으로 찍은 가로 10cm, 세로 4.5cm 크기의 삽화이다. 그리고 삽화가 아닌 별책본으로 제작된 판화는 1050년경 조판된 '대방광불화엄경의 변상도'가 43매 전해지는데, 이것은 승려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화엄경의 내용을 함축성 있게 도식화해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어제비장전판화'가 있는데 이 판화는 불타의 교리 중에서 정수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판화는 개개의 사찰을 중심으로 스님들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같은 내용을 담은 중국의 판화들보다 화려하고 장엄하며 판각이 정교하고 섬세하여 절정의 시기를 맞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고려 23대 고종 21년(1234년)에 목판인쇄의 결점을 보완한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로 발명되면서 인쇄 문화는 불교를 중심으로 더욱 더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숭유배불 정책에 따라 불교는 쇠퇴하게 되고 불교의 내용을 담고 판화 또한 퇴조를 보이게 된다. 불교적 내용을 담은 판화는 점차 유교적 내용과 민속적 내용을 담은 판화로 바뀌게 되어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부모은중경도 등의 판화가 서적의 삽화로 쓰였다. 이 밖에도 인물, 풍속, 충효, 예악, 무예 등에 관한 것을 도식화해서 삽화로 엮은 것도 전해진다. 조선 중기 이후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서적 간행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판화 제작은 시들해지게 된다.

조선시대의 판화는 고려시대의 것과 비교해서 화려하거나 정교하지는 않지만 공간 처리가 대담해지고 화면이 단순화된 새로운 양식으로 자리 잡아 가면서, 이 양식에 따르는 민화, 부적, 능화판(책 겉장에 무늬를 박아내는 목판) 등의 제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회화로서의 판화는 기술 계승을 가능하게 할 수요층이 줄어들면서 그 맥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 겨우 각(刻) 분야만 서예와 결합하여 서각(書刻)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서양화의 도입과 더불어 판화도 서양식 조형개념을 바탕으로 받아들여져 그 기술적 방법에서도 서구적 조형방법에 얽매이게 되었다.

<표1> 학교 교구 및 설비 기준 (1990년 문교법전)


교과명

구분

교구명

규 격

학급수별 소요 기준

12이하

24이하

36이하

37이상

48이하

49이상

국민학교

미술

회화

로울러(잉크판 포함)

프레스기

조각칼

소 형

1조4개

20

1

35

20

1

35

20

1

35


40

1

60

40

1

60

중학교

미술

회화

로울러(잉크판 포함)

실크스크린 세트

프레스기

대·중·소 1조

소 형

10

1

1

10

1

1

10

1

1

10

1

1



판화

문지르개(바렌)

10

10

20

20



고등학교

미술

회화

로울러(잉크판 포함)

실크 스크린 세트

프레스기

대·중·소 1조

4또는8절지용

소 형

20

1

1

20

1

1

20

1

1

20

1

1





"한국에서 이른바 현대판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서구의 현대 회화 수용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던 50년대 후반기였다. 물론 해방 전후에도 일부 화가들에 의해 판화가 제작된 것이 사실이며 선전(鮮展) 후반기에도 서양화부에 몇 점의 판화가 출품되는 사례를 보이곤 했다. 그러나 그 수준은 여기적(餘技的)인 소극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며 아직도 하나의 장르로서 인식되지 않은 상태였다."

(오광수 저,「한국 현대 미술사―1900년 이후 한국미술의 전개」, 열화당, 1989)

5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몇몇 화가들을 중심으로 판화의 독자적 장르 개념이 세워지면서 한편으로는 국제 판화전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1958년 한국판화가협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게 된다. 1960년대의 판화는 주로 목판을 중심으로 한 단조로운 것으로서 이러한 흐름은 해외에서 현대 판화를 수학하고 돌아온 젊은 작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7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판화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탄하게 계승하여 발전되지 못하여 거의 단절 상태에 있다가 서양 문물과 함께 유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판화교육

우리나라 초중등학교에서의 미술교육, 그 중에서 판화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 과목에 비해 비중도 낮고, 상급 학교로 올라갈수록 입시에 중요한 과목에 밀려나고 수업 시간도 극히 적기 때문에 내용있는 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들 학교에서의 판화 교육은 제도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그 여건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문교부에서 법으로 정하고 있는 각급 학교의 '학교 교구 설비기준' 중에서 미술 과목의 교구 및 설비 기준은〈표1〉과 같다. 이 도표를 통해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학교에 프레스가 1대이상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이 각급 학교에서 제대로 실천된 경우를 보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프레스만을 가지고는 판화를 제작할 수도 없지만, 간혹 소형 프레스가 갖추어졌다고 해도 그 기능이 온전한 경우는 더욱 희박하고 판화 제작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재료와 약품 등을 갖추고 있지도 못하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각종 판화 제작에 정통하지 못하여 고작 고무판이나 목판을 가지고 판화 시간을 메우는 것이 현실이다. 조각칼의 경우는 국민학교에만 비치하도록 되어 있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그나마 국민학교에 갖추어 놓게 되어 있는 조각칼도 그 내용을 살펴보면 형식적임을 알 수 있다. 36학급 이하인 학교의 경우에, 조각칼 4개가 한 조로된 것을 35조 갖추게 되어 있지만 이 정도 숫자의 조각칼은 현재 국민학교 1학급당 인원수에 비추어보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미술과 교구 중 판화 교재로 분류된 것은 중학교의 바렌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회화 분야로 구분되고 있다. 볼록 판화의 인쇄과정에 사용되는 바렌이 중학교에 필요하다면 국민학교와 고등학교 설비 기준 항목에서 제외된 것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판화에 필요한 용품들을 제판용품과 인쇄용품으로 구분해 볼 때에 전체적으로 제판용품의 설비 기준이 거의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볼록 판화 제판에 쓰이는 조각칼이 국민학교에 필요한 용품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오목 판화나 평판의 제판에 소요되는 교구들은 하나도 설비 기준이 없는 실정이고 '실크스크린 세트'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애매하기만 하다. 문교부에서 법으로 규정한 항목들조차도 이렇게 형식적이고 더구나 각급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 내용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밀도있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판화 인구의 저변 확대와 판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도 내실있는 판화 교육이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그렇게 되기 위한 여건이 빠른 시일 내에 갖추어지기를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대학교에서의 판화 교육은 거의 미술대학에 개설된 판화 시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 교육 과정에 판화가 도입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60년대 초 미국에서 판화 교육을 받고 돌아온 작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대학에서의 판화는 유강렬이 미국에서 돌아와 홍대에서 가르치면서 시작되었으며, 서울대 미대에서도 역시 미국서 수학하고 온 김정자에 의해 판화가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오광수 저,「한국 현대 미술사―1900년 이후 한국미술의 전개」,열화당, 1989)

70년대의 한국 판화계는 판화 교육을 받은 인구층이 넓어지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판화의 국제적 진출이 늘어나고 외국작가의 국내전이 유치되면서 판화에 대한 열기도 예전에 비해 높아진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판화 교육 환경은 아직도 열악하기만 한 것이었다.

80년대 들어 판화에 대한 관심과 판화 인구 증가에 힘입어 판화를 전공할 수 있는 학과 설치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는데 1983년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에 마침내 판화과가 개설되어 신입생을 모집하기에 이른다. 판화과의 개설은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판화 교육의 장을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뒤이어 1988년에 서울대학교는 대학원 과정에 판화 전공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같은 해 홍익대와 추계예술대에 판화과가 생겨났다.(〈표2〉참조)

〈표2〉판화과 설치 대학

구분

학교명

설치연도

정원

프레스

설치형태

동판

석판

서울대학교

1988

3

8

1

대학원 서양화과판화 전공

성신여자대학교

1983

5

1

대학원 판화과

홍익대학교

1988

40

7

2

미술대학 판화과

추계대학교

1988

30

3

4

미술대학 판화과

*해마다 약간 유동적임. 현재 학기 중에 있는 사람은 23명 내외

대학에서의 판화과 신설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위해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학교측이나 학생들의 판화에 대한 기대감과 열의에 비해 대학에서의 판화 교육 여건이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프레스의 경우만 해도 〈표2〉에 있는 숫자는 각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프레스의 총수이다. 이 정도 수량의 프레스를 판화 전공 학생들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대학에서 전공외의 판화 시간을 수강하는 학생들도 사용하게 됨으로써 프레스의 숫자가 부족한 형편이다. 부족한 숫자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학생 개인이 소유한 프레스나 학교 밖의 인쇄소에 의존해서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학교들은 국내 미술대학 중에서도 사정이 좋은 경우이다. 여타의 대학은 이보다 더 열악한 조건 아래에 있으며 지방대학일수록 형편은 더욱 좋지 못하다. 충분하지 못한 여건 속이지만 30년 남짓한 현대 한국 판화사에서 요즈음의 판화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젊은 작가들의 층이 두터워지면서 활발한 판화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를 배경으로 판화전 또한 수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다. 판화에 대한 높은 관심과 열기를 제대로 수용해 내기 위해서는 대학에서의 판화 교육 여건만이라도 하루 빨리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판화가와 판화전

국내에서 본격적인 판화전이 열린 것은 1960년을 전후로 해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판화전은 판법이 목판 위주의 단조로운 것으로서 판화의 표현성 확대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대체로 60년대 초반 현대 판화의 기술적인 방법의 습득에서 출발한 작가는 김봉태, 윤명로, 김종학, 배륭 등이었으며 전통적인 판법에 현대적 조형성을 융화해 간 기성세대는 유강렬, 정규, 이항성, 최영림, 이상욱 등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 발표전을 들면 정규목판화전(1956), 이항성판화전(1958, 1962), 김정자귀국판화전(1958), 김상방판화전(1963), 배륭·윤명로판화2인전(1964), 배륭판화전(1964, 1966), 김민자판화전(1969), 김윤신석판화전(1969) 등이다."

(오광수 저,「한국 현대 미술사―1900년 이후 한국미술의 전개」, 열화당, 1989)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종류의 판법이 도입되고 제판 기술이 향상되면서 판화는 비로소 판화의 독자적 특성을 지닌 장르로서 정착하게 된다. 또한 국제 규모의 전시회에 참가하여 몇몇의 작가들이 수상을 하게 되면서 그 수준이 국제적인 것에 접근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8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학에서 판화 교육을 받고 졸업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전시회도 빈번하게 열리게 되었는데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초창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판화를 다루는 층이 두터워지면서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모전도 여러 개로 늘어났는데, 판화공모전은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 판화 부문이 설치된 이래, 현재는 판화 부문이 포함된 공모전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개최되고 있는 주요 공모전은〈표3〉과 같다. 이 표에는 구상전(양화)이나 한국구상조각대전(조각) 등과 같은, 한 분야만 다루는 공모전은 제외되어 있다. 판화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모전이 70년을 전후로 한 시기보다도 수적으로는 많이 늘었지만, 〈표3〉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서울에 많이 편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지역에서 개최되는 공모전중에 판화 부문이 설치된 것은 3개인 반면 지방에서 열리는 공모전은 14개 중 4개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서울에서 개최되는 공모전 중에는 한국현대판화공모전, 공간국제판화전 같은 판화 전문 공모전도 있다.

<표3> 주요 공모전과 공모 분야

공모전명

공 모 분 야

대한민국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판화

동아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판화, 공예, 서예, 사진

중앙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판화

미술세계 신인공모전

한국화, 양화, 조각

강원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공예, 서예, 디자인, 건축

경기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공예, 서예, 사진, 건축

경남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판화, 공예, 서예, 사진, 건축

광주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판화, 공예, 서예, 사진, 건축

대구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판화, 공예, 서예, 사진, 건축, 일러스트

부산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판화, 공예, 서예, 사진, 시각디자인

인천시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공예, 서예, 건축, 디자인

전남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공예, 서예, 사진, 사군자

전북도전

한국화, 양화, 조각, 공예, 서예, 사진, 건축

제주도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공예, 서예, 응용미술

충남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공예, 서예, 사진, 건축

충북미술대전

한국화, 양화, 조각, 공예, 서예, 사진, 건축

서예대전

한글, 한문, 사군자, 전각

공예대전

금속, 도자, 목칠, 염직, 기타

목우회전

한국화, 양화, 조각, 문인화



<표4> 1988년 지역별, 월별, 분야별 전시 횟수 (개인전·단체전포함)

구분

월별

서 울

지 방


양화

한국화

조각

판화

서예

사진

기타

소계

양화

한국화

조각

판화

서예

사진

기타

소계

총계

1

16

10

7

5

5

4

10

57

22

13

·

·

15

15

7

72

129

2

35

12

10

5

3

10

20

95

27

9

2

1

8

16

24

87

182

3

53

15

14

9

4

8

39

142

31

26

3

3

12

16

23

114

256

4

61

26

10

9

20

5

40

171

25

14

4

2

12

15

25

97

268

5

62

16

22

3

15

10

28

156

22

9

3

·

14

13

25

86

242

6

52

17

31

13

15

11

46

185

39

19

8

2

11

16

25

120

305

7

26

11

16

10

7

8

28

106

16

2

3

3

13

6

13

56

162

8

32

18

10

9

4

11

39

123

14

11

6

3

7

9

17

67

190

9

31

17

17

11

7

15

37

135

6

8

4

1

4

12

11

46

181

10

33

26

25

6

10

5

34

139

26

17

5

1

16

14

34

113

252

11

57

34

27

5

14

24

37

198

30

9

5

3

26

17

29

119

317

12

34

19

16

7

13

12

20

121

15

8

2

4

8

12

13

62

183

492

221

205

92

117

123

378

1,628

273

145

45

23

146

161

246

1,039

2,667


서울지역에서 열리는 공모전이 전국의 작가들을 참가 대상으로 하기는 하지만 공모전의 이러한 서울 편중 현상은 작가들의 서울 편중과도 관련이 있다. 1년간 전국에서 실시된 각종 전시회를 분야별로 정리한〈표4〉에서 보듯이 88년 한 해 동안 전국에서 열린 판화전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포함해서 모두 115건인데(이것은 각종 전시회 총 건수인 2,667회의 4.3%이다) 이 중 지방에서 개최된 전시회는 전체 판화전의 20%에 불과한 23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열린 23회의 판화전 중에서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서의 판화 전시회를 제외하면 그 이외의 지역에서 발표된 판화전은 극히 미미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판화 인구가 80년대에 들어 많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수적인 면에서 다른 분야들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것은 미술대학에서의 판화 교육이 일부 학교를 제외하면 내실있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정작 판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경우라 해도 판화기법에 익숙지 못하거나, 혼자서 재료를 구입하고 판법을 연구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고, 판화 인구의 저변이 다른 분야의 그것과 비교해서 엷은 이유 등으로 판화 전시회를 개최할 기회가 회화나 조각 분야보다 적기 때문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전시회를 여는 단체전을 들여다보면 판화 부문의 빈약함이 쉽게 드러난다. 〈표5〉는 88년도에 전국에서 개최된 각종 단체전을 근거로 해서 분야별로 구분해서 정리한 것이다. 전체 단체 숫자인 1,543개에 비해 판화 부문은 3.8%인 59개에 불과하다. 이 숫자는 발표된 전시회를 통해 파악된 것이므로 누락된 단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다른 분야 역시 같은 사정이므로 그 비율에서 큰 오차는 없을 것이다. 특히 지방의 경우는 전체 단체수의 0.7%인 12개인데 이 역시 대도시의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그 이외의 지역에는 극히 적은 숫자의 단체만이 있을 것이다.

〈표5〉전람회를 통해 본 분야별 단체수 (1988년)

구분

양화

한국화

조각

판화

서예

사진

기타

서울

181

98

83

47

86

65

280

840

지방

158

54

27

12

124

120

208

730

(%)

339

(22)

152

(9.8)

110

(7.7)

59

(3.8)

210

(13.6)

185

(11.9)

488

(31.4)

1,543

(100)


판화전의 상대적 열세는 무엇보다도 판화가의 숫자가 적은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8월 현재 미술협회에 등록된 회원들을 전공 분야별로 그 구성비를 보면 판화부문에 가입한 회원은 전체의 1.5%인 55명에 지나지 않는다. (〈표6〉참조) 물론 미술협회에 전국의 모든 작가들이 가입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분야의 작가 수를 감안해 볼 때에 판화가의 구성비는〈표6〉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90년 상반기 동안에 서울 시내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를 보아도 판화가와 판화전의 수적인 열세가 금방 드러난다. 〈표7〉은 임의로 선정한 서울 시내의 6개 화랑을 대상으로 90년 1월부터 6월 사이에 열렸던 전시회를 각 분야별로 비교한 것이다. 이 중 판화전은 전체전시 횟수인 169회 가운데 8.9%인 15회로 상당히 낮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판화 작가와 판화전이 해를 거듭하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용면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것은 대학에서의 판화 교육이 내실 있게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회화나 조각분야와 비교하면 그리 중요한 원인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다른 분야에 판화보다 내용 있는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판화 교육보다 더 큰 원인은, 전체적인 판화시장이나 판화 수용층이 엷다거나 판화용품 등에 있는 것이다. 판화가 작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화랑, 공방, 판화용품 등 제반 여건이 동시에 향상되어야 한다.

<표6> 미술협회 가입 회원(분야별) (1990년 8월 현재)

구분

한국화

양화

조소

공예

서예

판화

평론

디자인

합계

인원수

(%)

731

(20.1)

1,429

(39.3)

331

(9.1)

577

(15.9)

298

(8.2)

55

(1.5)

21

(06)

194

(5.3)

3,636

(100)

<표7> 90년 1∼6월 화랑별 전시 내역

구분

화랑명

회화

조소

판화

기타

관 훈

45

6

7

5

63

제 3

13

2

1

3

19

백 송

12

1

1

1

15

16

4

2

2

24

바탕골

13

3

4

6

26

동 숭

12

7

·

3

22

합 계

(%)

111

(65.7)

23

(13.6)

15

(8.9)

20

(11.8)

169

(100)



판화 공방과 판화용품

다른 분야와는 다르게 판화가 갖는 특징인 복제·대량 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판화 시장이 형성되거나, 제판 기술과 판종이 다양하게 발전하기 위해서 판화 공방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나라 미술계에 현대 판화가 도입된 시기가 서양의 그것보다 짧기 때문에 판화 공방의 역사 또한 일천하기만 하다. 공방의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본격적인 공방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79년의 일이다. 한국판화가협회 회원과 D화랑이 손을 잡고 공방설립을 추진한 적이 있다. 당시 소문으로는 한국에도 곧 판화 전문 화랑과 공방이 동시에 출현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 처음의 풍문과는 달리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화랑은 화랑대로 작가는 작가대로 각기 사정을 주장하다 끝난 것으로 보인다." (「계간미술 16호」, 중앙일보사, 1980)

위의 글에서 보듯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계획했던 공방 설립은 무위로 돌아가고 1981년 K씨에 의한 공방이 문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판화 보급이 그리 널리 되어 있지 않은 때였으므로 초창기 몇 년은 판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회원제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현재는 동판 프레스 2대와 석판 프레스 3대를 갖추고 판화가들의 작품을 찍어내는 일에 주력하면서 판화 보급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또 1989년에는 서울 판화공방이 설립되어 동판 프레스 2대와 석판 프레스 2대를 갖추어 놓고 운영되고 있다.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판화공방의 출현이 이렇게 늦어진 데에는 그동안 판화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거나 대량 주문 제도가 정착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에도 원인이 있지만 국산 판화용품의 부실함에도 기인한다.

판화 제작에 필요한 수많은 용품 중에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은 외국산에 비해 질이 낮다. 그래서 그나마 생산되는 국산용품의 대부분도 전문가들에게 외면 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오목판화와 석판화에 반드시 필요한 프레스의 경우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1968년의 일이다. 한 소규모 회사에서 조립을 시작했으나, 얼마 못가 문을 닫고 말았다. 수요층이 워낙 엷어서 채산성이 맞지 않아 제작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다가 1974년에 이르러 주로 주문에 의해 생산하는 방법으로 프레스 제작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V사, C사에 의해 동판 프레스와 석판 프레스가 생산되고 있어 초창기보다 훨씬 여건이 좋아졌다. 국산 프레스도 거의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품질로 향상되었으며, 실제로 국산 프레스를 사용하는 인구도 늘고 있다. 다만 부속품의 내구성이나 정밀도에서 좀더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 사용 경험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 밖에 프레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판화용품들은 국산화가 거의 안되어 있다. 판화용 종이에 있어서는 국내에서 전혀 만들어지지 않고 있으며, 잉크의 경우는 일부 제조회사에서 만들어 내놓은 것이 있지만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잘 사용되고 있지 않다. 또 로울러의 제작 수준은 고무 로울러에 머물러 있다. 가죽 로울러는 전혀 생산되지 않고 있고, 고무 로울러도 외제에 비해 내구성이 낮다. 기타 판화 제작 과정에서 필요한 용품들의 경우도 거의 생산되지 않거나 있어도 아마추어에게나 적합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판화공방

공방명

설립년도

대 표

프레스

주 소

동판

석판

신촌공방

1981

김태호

2

3

마포구 서교동 335-4 삼빌딩 202호

서울판화공방

1989

황용진

2

2

강남구 논현동93-1 대동빌딩 403호


늘어나는 판화 인구에 비해 판화용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화방이 하나도 없는 현재의 사정은 판화 재료의 시장성이 낮아서 개발에 엄두로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메조틴트 제작에 필요한 Rocker의 경우 연구비를 투자해서 개발해 내도 거의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한 이치이다. 판화가 성행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기계를 사용해서 만든 메조틴트용 동판을 화방에서 팔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구경하기조차 힘들다. 메조틴트를 하는 판화가들이 적어서 그렇겠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국내에서는 메조틴트 제작에 쉽게 접근하기가 힘들다. 이런 현실속에서 판화가들은 재료를 마련하기 위해서 화공 약품상, 인쇄 재료상, 과학 교재상, 심지어 치과 재료상 등을 전전하고 있다.

판화시장과 화랑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내 판화시장은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화랑가에서 판화는, 그중에서도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그리 인기있는 품목이 아니다. 화랑에서는 화랑 기획전에 구색을 갖추기 위해 판화 부문을 끼워넣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화랑측의 기획 의도를 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화랑들이 소위 대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에 비하면 판화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간혹 판매를 위한 판화 기획전이 화랑의 의욕적인 시도 속에 열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화랑은 그 전시회로 인해 재정적 손실을 보지 않으면 다행인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판화시장이 이렇게 좁은 책임이 화랑 측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양 여러 나라들이나 일본같이 판화공방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하다거나, 화랑이나 공방이 판화를 활성화시키기에는 구매층이 엷다거나 판화 가격이 높다든가 하는 등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또한 판화를 수십 점 판매하는 것보다 대가들의 작품 1점을 거래하는 것이 훨씬 수지타산이 맞는 것도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판매 방식에 있어서도 화랑에 앉아서 찾아오는 고객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구매 대상자를 직접 찾아가서 미리 준비한 판화 샘플이나 슬라이드를 보여주고 설득력있는 말로 설명한다든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 예컨대 수퍼마켓, 극장, 가구점 등에서 작품전을 연다든지, 판화 가격에 부담을 느끼는 고객을 위해 할부판매 방법을 도입하든지 하는 등의 적극적인 시장 개척과 고객 개발 방안 도입을 고려 해볼 만하다. 이를 위해서는 화랑에 대량으로 판화를 공급해 줄 수 있는 공방의 출현도 필수적이며 공방은 공방대로 개성있고도 다양한 내용과 종류의 판화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작가들과의 연계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더욱이 1991년 국내 미술 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빈약한 판화시장은, 대량으로 제작되고 가격이 낮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에 의해 크게 잠식당할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서도 화랑과 공방 작가들의 연계가 이루어져 국내 판화계의 활성화에 힘써야 할 것이다.

맺는말

판화는 판화만이 갖는 특징(대량 생산을 통한 가격의 저렴화)으로 인하여 쉽게 대중화 될 수 있고 또 외국에서는 이미 널리 보급되어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판화 보급이 요원한 실정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상당한 수준의 전통 판화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쇠퇴해 갔고 서양에서 도입된 판화가 유입되면서 현대 한국 판화가 새롭게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격적인 판화가 제작된 지 30여 년에 불과한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한국 판화의 여건은 개선되어야 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작품을 팔아 생활하는 전문적인 판화가가 등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 할 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판화를 둘러싼 교육, 작가, 화랑, 판화용품, 정책 등의 환경이 모두의 노력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이중에서도 작가와 구매자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로서의 화랑과 공방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화랑은 판화의 예술성과 장식성, 낮은 가격과 대량공급이라는 이점들을 대중들에게 이해시키고 시장을 넓히는 일에 긴 안목을 가지고 주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공방은 공방대로 어떤 판화의 기법도 소화해 낼 수 있도록 물적 인적 여건마련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수한 제판, 인쇄 기술자의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기술의 곤란과 복잡성 때문에 오늘날 판화는 분업내지 공동작업으로 제작되고 있는 것이 통례이다. 즉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사와 인쇄사는 그것을 파고 인쇄한다. 피카소에게는 조각사인 크롬링과 인쇄사인 루이 피일이나 뒤당이 있고, 샤갈에게는 샤를르 소를리에가 절묘한 색채와 터치를 살려냈다. 또 보나르, 모딜리아니, 마티스에게는 빈곤시대의 쟈크 비용(뒤샹의 형)이 있다. 브라크, 미로, 쟈코메티, 레제, 달리, 뷔페 등에게는 석판기술의 제1인자 페르낭드 무를로가 그늘 속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계간미술 6호」, 중앙일보사, 1978)

수적으로 증가한 판화전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에 불과하며 고되고 복잡한 과정을 작가 혼자 감당해서 작품을 만드는 현실 속에서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형편이다. 판화시장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분업이 전제되어야 한다. 작가가 구상한 작품은 판화공방에서 숙련된 기술자들에 의해 풍부한 Edition이 만들어져서 가격을 낮추어 누구나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게 해주고 화랑은 적극적인 판매방법의 개발로 판화저변을 넓혀야 할 것이다.

판화시장이 형성되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판화 전문화랑의 등장, 판화용품의 국산화를 위한 투자, 초중등학교와 대학에서의 내실있는 판화교육, 판화재료 전문 화방의 등장도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이다. 현재의 여건이 판화시장을 이루어 내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들이 점차 개선될 것은 틀림없고 판화가들의 열기 또한 높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망은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프레스 제작사

구분

제작사

설립년도

대 표

제작품목 및 규격(단위:mm)

주 소

동판프레스

석판프레스

HOT PLATE

청 원

1975

이홍용

대형

1400x800x25

중형

1050x60x20

대형

1400x800x25

중형

1050x60x20

800x600

구로구 천왕동 114

벤 호

1985

안자록

EP-1400

1400x800

EP-1100

1100x650

LP-1400

1400x800x28

LP-1100

1100x650x28

600x400

대구직할시 서구 비산동 399-9

[한국을 이끌 60인] 12. 설치미술가 이불
입력: 2006년 04월 02일 17:08:31 : 3 : 0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물이 그대로 보이지 않았어요. 항상 그 이면에 숨은 모습을 생각했죠.” 설치미술가 이불(42)의 운명은 어쩌면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새벽’이란 뜻의 ‘불’로 지어준 그때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막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새벽’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는 늘 ‘불온한 사상’ 때문에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취직을 할 수 없었던 가족의 생계는 가내수공업으로 해결했다. 반짝이는 구슬들이 집안에 굴러다녔던 어린 시절부터 이불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왜 교실 벽에 걸려있어야 하는지 의문이었고, 예쁜 구슬로 만든 액세서리는 갖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기에 앞서 노동의 대상이자 가족사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만약 그에게 이러한 가족사가 없었다면 오른손잡이를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삐딱한 왼손잡이’가 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는 그 왼손으로 시험을 치러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도제식 학교 교육은 별 재미가 없었다. 졸업 즈음인 1987년 최정화, 고낙범, 이형주 등 홍대 출신 10여명과 함께 조직한 ‘뮤지엄’은 그룹전 활동의 마지막이자 미술계 ‘앙팡테리블’의 원조였다. 3년간 활동한 이 그룹은 한국미술사에서 ‘신세대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89년 ‘낙태’를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는 천장에 나체로 매달렸고, 이듬해엔 괴물같은 차림으로 공항에서부터 일본 도쿄까지 12일간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를 감행했다. 여성의 몸을 남성의 시각으로 재단하는 사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항이었다.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반짝이를 생선에 장식한 후, 그 썩어가는 냄새까지 ‘전시’한 작품 ‘화엄’이 1997년 뉴욕 MOMA에서 철거된 해프닝은 오히려 ‘월드 스타’로의 초대장이 되었다. 이후 사이보그, 몬스터, 노래방 시리즈를 연이어 발표했고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국내보다는 국제 전시가 많아졌다.

데뷔 20년. 순수 국내파 출신으로 ‘월드 스타’를 목전에 두고 있는 이불은 ‘화려하고도 센세이셔널한’ 경력들을 장식물로 삼은 ‘미술계의 여전사’에서 방향을 급선회했다. 지난해 6월 바젤 아트페어에 출품된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이게 과연 이불의 작품이 맞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사이보그도, 페미니즘도 사라지고, 예쁜 구슬도 자취를 감췄다. 다만 미래도시의 폐허를 연상케 하는 뒤죽박죽의 건물들과 구조물, 고속도로 같은 것들이 전시됐다. ‘나의 거대한 서사시’라는 이 시리즈는 작가에게 영향을 준 책이나 영화, 설계로만 남아있는 동서양의 이상적 건축물 같은 것들이 석줄의 전광판 문장과 함께 전시된다. 하지만 그 사이를 지나가는 고속도로는 끊겨있다. 각각은 모두 인간의 열망과 이상을 담은 것이지만, 실제론 실현되지 못한 이상일 뿐이다. 이 ‘문명의 삭막한 풍경화’는 인간의 이상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사이보그나 몬스터 같은 기존의 작품들과 달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다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역사,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권력의 실체를 제 작품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사는 여성 예술가니까, 그 방법이 페미니즘적일 수도 있고,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일 수도 있었던 거죠.”

미술계에서는 그의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남편인 영문학자 제임스 리의 영향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미술과 문학이라는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주고 받는 영향 외에도 이불의 해외활동에 남편의 도움이 컸다. 10년 전엔 치렁한 머리에 뚱뚱했던 이불이 지금은 정장차림에 숏커트의 날씬한 뉴요커처럼 변한 외모에서부터 그렇다.

단말마의 외침처럼 충격적 퍼포먼스와 뚜렷한 주제가 드러나는 작품으로 지난 20년 동안 한국에서부터 세계로 내달렸던 이불은 이제 굵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간과 문명에 대한 서사시를 읊고 있다. 자, 그녀의 서사시가 드러내는 세상의 이면을 볼 준비가 되었는가?

▶ 이불은 누구

▲1964년 강원도 영월 생 ▲1987년 홍익대 조소과 졸업 ▲1987~90년 ‘뮤지엄’ 활동 ▲1997년 뉴욕 MOMA에서 개인전 ▲휴고 보스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 ▲1999년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문화관광부 장관상,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공로상 등 수상 ▲2002년 석주미술상, 로댕갤러리 개인전 ▲2003 일본 재팬 파운데이션 개인전 ▲2006년 국제갤러리 개인전 (예정) ▲2007 파리 카르티에 재단 개인전(예정)

〈글 이무경·사진 박민규기자 lm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