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라는 감정은 정도에 따라 세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불편함→기분 나쁨→짜증→불쾌→화→분노’와 같이 여러 단계를 거치며 상승한다. 임의로 그 단계를 10개 정도로 나눈다고 하면 화를 잘 내는 아이는 1, 2 수준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9, 10 수준으로 화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화를 전혀 못 내는 아이는 10 수준의 화를 내야 할 상황에 0이나 1 수준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들이 그런 편이다.
아이의 감정 표현은 기질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부모와의 상호작용으로 그 틀이 완성된다. 부모의 정서 표현과 반응을 그대로 배운다. 따라서 아이가 화를 잘 내는 편이라면, 가장 먼저 부모 자신이 화를 쉽게 내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그런데 부모의 감정 표현이 지나치게 무심해도 아이가 쉽게 화부터 낼 수 있다. 부모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아이는 일부러 강도를 높여 부모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화를 내서 부모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면 그 이후부터는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강도가 점점 세져서 아주 작은 일에도 걸핏하면 화를 내게 되기도 한다.
화를 폭발시킨다는 것은 부정적 감정으로 가득 찬 감정그릇을 빨리 비워내려는 행동이다. 평소 부모가 아이의 부정적인 감정을 엄하게 제지하는 편이라면, 아이의 감정그릇은 꽉꽉 눌러놓은 감정을 항상 가득 채운 상태일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작은 자극에 쉽게 화를 내게 된다. 감정그릇이 쉽게 넘쳐버리기 때문이다.
아이가 화를 전혀 못 내는 편이라면 부모로부터 감정을 거부당한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어렸을 적부터 아이가 재미있다고 호기심을 보이는 일에 “안 돼. 옷 더러워져. 세균 있어” 하면서 뭐든 못하게 했거나 조금만 칭얼대도 “왜 이래? 너 아기 아니잖아!” 식으로 아이의 힘든 감정을 매번 수용해주지 않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했을 때 무조건 혼을 내도 그럴 수 있다. 아이는 그 자체를 나쁜 행동으로 생각하고 죄책감을 갖는다. 또한 더 이상 혼나기도 싫어서 감정을 자꾸 숨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아이로 자란다. 부부간에 다툼이 심할 때도 그럴 수 있다. 부모가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서로 상처를 주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점차 상황이 악화되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아이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아이는 반대로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 다음에 감정 엘리베이터 게임을 한다. 미리 아이와 화가 난 정도를 1에서 10까지 정하고 아이가 어느 수준의 화를 내는지 체크한다. 1층은 짜증, 10층은 극도로 분노한 상태를 나타낸다. 아이에게 눈을 감게 한 다음 “지금 10층에서 감정 엘리베이터를 탔어. 이제 서서히 내려갈 거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한 층씩 내려오자. 9층, 8층…, 2층, 1층”. 1층에 도착할 즈음에는 아이의 화도 많이 진정된다.
반면에 화를 내지 않는 아이에게는 감정 엘리베이터를 1층부터 시작해서 점점 층수를 올린다. “지금 이 상황은 네가 기분이 나쁠 일이야. 이럴 땐 화내는 게 당연해. 필요할 땐 화를 내는 거야. 지금 너는 0이나 1 정도로 표현했는데, 지금은 5만큼 화를 낼 일이야” 하고 현재의 감정 상태와 실제로 표현해야 할 감정 수위를 가르쳐준다. 층별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을 가르쳐줘도 좋다. 이를테면 1층은 “아, 짜증 나”, 2층은 “기분이 나쁘네”, 3층은 “정말 기분이 나빠”, 4층은 “나, 화났어!”, 5층은 “기가 막혀! 네가 어쩜 그럴 수 있어!”와 같이 한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분노조절 장애? 화는 치료해야 할 병이에요”
[분노조절장애에 멍드는 폭력사회] ④ 인터뷰-최명기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연구소장
- 허주열 기자입력 : 2018.10.05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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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S>가 최명기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연구소장(정신과 전문의)에게 물었다.
◆순수한 분노조절장애는 소수
“상습 보복운전과 같이 공격적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를 간헐성폭발성장애 또는 충돌조절장애라고 해요. 남들이 생각하면 사소하고 별일 아닌데 갑자기 크게 화를 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하죠.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사례를 보면 사실 순수한 의미의 분노조절장애는 많지 않아요.”
최 소장은 분노조절장애라 볼 수 없는 다양한 사례를 들었다. 이를테면 술을 먹고 자주 화낸다면 ‘알코올 중독’이고 누군가 몸을 툭 건드렸을 때 화를 내면 그건 ‘피해망상증’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우울증으로 갑자기 화를 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내과질환인 갑상선기능항진증도 분노조절장애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다. 갑상선기능항진증 환자는 본인도 모르게 갑자기 큰 화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의학적으로 분노조절장애가 아니다.
최 소장에 따르면 심지어 폭력범죄 피의자가 처벌을 경감받기 위해 분노조절장애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폭력행위가 반복된다면 그냥 ‘폭력범죄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분노조절장애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간단히 말하면 화를 많이 내면 분노조절장애예요. 대부분 화를 내는 사람들은 화를 낸 뒤 ‘그럴 만해서 화를 냈고 본인은 뒤끝이 없다’고 주장해요. 예컨대 다른 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하는 것으로 보고 ‘나는 욕은 안하니 문제가 없다’는 식이죠.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 경우가 많아요.”
최 소장에 따르면 간헐성폭발성장애에 대한 의학적 진단기준은 엄격하다. 이를테면 ▲사람·동물·물체 등을 향해 공격적인 행위를 일주일에 2회 이상, 3개월 이상 지속하거나 ▲1년에 3차례 이상 물건 파기 및 사람, 동물 폭행 등을 할 경우 분노조절장애라 보면 된다.
하지만 진짜 분노조절장애자가 스스로 병원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다른 병으로 화를 자주 내지만 그 이유를 몰라 병원을 찾는다고.
“진짜 분노조절장애 환자는 주변에서 권해도 병원을 찾지 않아요. 법적인 문제가 생겨 죄를 경감받기 위해 오거나 아이가 부모에게 심하게 대드는 경우 상담을 위해 방문하는 경우가 많죠. 일부 엄마들은 아이에게 화를 자주 낸다고 미안한 마음에 찾기도 해요. 대부분 분노조절장애가 아닌 다른 병 때문인 경우가 많죠. 이 경우 상담을 하다 허무감을 느끼기도 해요.”
◆대화가 능사 아냐… 냉각기 필요
최 소장은 본인이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할 정도로 화를 자주 낸다면 일단 원인을 파악한 뒤 제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술을 먹고 화를 자주 낸다면 술을 먹지 말아야 해요. 약자에게 자주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면 약자에게 말을 안 걸어야 하죠. 분노조절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이유를 대는 경우가 많은데 자주 반복된다면 치료를 받거나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피하는 게 우선이에요.”
최 소장은 세간에 잘못 알려진 부부싸움 해결방법도 지적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지만 통상 화를 내는 상황은 2~3가지밖에 안돼요. 예컨대 아내에게 화를 내거나 술을 먹고 화를 내는 경우죠. 특히 아내에게 사소한 일로 자주 화를 낸다면 거리를 두고 냉각기를 가질 필요가 있어요. 대화가 무조건적인 해법은 아니에요.”
특히 최 소장은 부부싸움을 한 뒤에 바로 한이불을 덮고 자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상 남자들은 부부싸움을 한 뒤 본인 우위의 잠자리를 강요하고 행위가 끝나면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이건 지극히 남성 위주의 잘못된 시각이죠. 대부분의 여자들은 감정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로 잠자리를 갖게 되면 더 우울해지고 모멸감을 느껴요. 한마디로 부부싸움을 한 뒤 남성이 힘으로 잠자리를 강요하면 강간과 같아요.”
최 소장은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분노방을 찾아 물건을 부수고 하는 것은 큰 효과가 없다고 단언했다.
“싸움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면 크게 소리를 지르다 욕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면 멱살을 잡다 주먹질까지 해요. 애초에 소리를 치지 말았어야 해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면 분노방을 찾아 분노를 발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와서 차를 부수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등 2차 분노표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을 거예요.”
즉 분노방은 PC방과 유사하다는 게 최 소장의 설명이다. 총을 쏘는 게임 등을 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자주 하면 폭력성향이 커진다며 권장하지 않는다. 청소년의 경우 법적으로 사용시간을 제한하기도 하는데 분노방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는 것.
“분노방이 효과가 있다면 게임도 마음껏 해야 하죠. 게임이 폭력을 양산할 수 있다면 분노방이야 말로 최악이죠. 따라서 분노방을 찾는 사람들은 진짜 분노조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게임처럼 그냥 재미를 위해 가야 한다고 봐야해요.”
끝으로 최 소장은 현대인의 올바른 정신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도 조언했다.
“우선 스트레스를 술로 해결하려는 건 좋지 않아요. 또한 안되는 걸 억지로 하는 것도 피해야 하고요. 만약 직장인이 특정 상대에 대한 분노가 쌓인다면 나중에 크게 폭발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미리 휴가 등을 통해 휴식기를 갖는 게 바람직해요. 그것이 어렵다면 빨리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게 나아요. 매일 싸우는 부부라면 주말이라도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떨어져 지내는 걸 추천해요. 나쁜 것, 더 나쁜 것, 최악 사이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면 결국 나쁜 정도에서 끝날 일도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거예요.”
☞ 본 기사는 <머니S> 제560호(2018년 10월3~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