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시대의 인간은 좋은 결과보다는 과정의 기쁨으로 살아갈 것이다. 결과물들의 품질이나 가성비에서 결국 인공지능로봇의 솜씨를 이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과 공연은 과정지향성 예술이다. 미술은 현장에서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면 영어로 퍼포먼스(Performance)라고 부른다. 호모루덴스 인간이 결과를 잊고 과정을 즐기는 모든 활동은 퍼포먼스 예술로 볼 수 있다. 예술은 원초적 감정을 언어화 하는 힘을 주며 두뇌의 전인적 발달에도 좋다.
노벨상 연구에서 뛰어난 연구자들은 자폐증 성향도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 곳에 집착하며 반복을 좋아하는 성향이 위대한 발견, 발명과 연결된다. 그들의 반복도 퍼포먼스이다. 한국 공교육에서 ADHD 아이들과 자폐증 아이들이 결과지향적 커리큘럼에 의해 소외받으면 한국에는 창조적 기업이 줄고 노벨 과학(의학)상이 나오기 어렵다. 또한 공동으로 하는 과정지향성 과제로 관계 맺기와 책임감을 배우지 않으면 국경의 의미가 사라지는 ‘경제+문화협력 시대’를 한국이 주도하기 어렵다.
과정지향성 예술의 특징은 실수까지 예술이 된다는 점이다. 실수가 더 멋질 수 있는 분야가 바로 퍼포먼스이다. 성인이라면 눈 감고 만든 찰흙작품이 더 멋진 추상조각이 된다. 모든 실수가 멋진 실수로 인정받을 때 누구나 그 과정에 깊은 몰입으로 들어간다. 예술, 사랑, 사업은 실수가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장애, 실수, 실패가 예술과 사업의 출발점이 될 때 그 일은 회복탄력성이 좋아진다. 인간은 오직 자기만이 자신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경험과 자긍심이 중요하다.
자기의 어떤 못난 모습도 실수이면서 동시에 예술을 향한 완벽한 출발점이다. 모든 자기고백과 셀프디스는 예술의 시작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스스로 자기 점수를 매기게 하고 그 점수를 인정해주는 교사가 필요하다. 최소 15세까지는 그렇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생들이 키팅 선생을 존경하면서도 사랑하게 된 이유는 그의 과정지향 창의성 교육 때문이다. 키팅은 생각의 집단화를 경계하면서 모든 과정에 자신이 몰입되는 ‘카르페 디엠’을 속삭였다. 그는 글쓰기와 낭독을 공차기와 결합했다. 회화, 연극, 무용의 과정지향성 감정이입의 메소드는 셀프감정코칭의 과정이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을 6자로 표현하면 ‘셀프감정코칭’이다. 이 과정이 부족한 인간은 셀프소외나 셀프왕따로 가다가 심하면 묻지마 폭력자가 된다. 그래서 고등학생이라도 감정의 소통장소와 안식처가 필요한데 미술실, 공작실, 무용실, 연극실, 합창단, 오케스트라, 벽화봉사단, 태권도부, 글쓰기모임 등 각 동아리를 위한 공간이 배치되어야 공부에 소외된 아이들의 셀프감정코칭이 가능하다.
예술은 모두가 정답이며 누구나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이다. 역사, 과학과 달리 예술은 360도 활짝 열린 정답을 갖는다. 창작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속성이 있기에 특정 방향이 제시되지 않는다. 360도로 열린 다의성은 인공지능, 즉 AI가 가장 하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지금 공교육 체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인공지능 대비 교육이 예체능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영역이 분명히 구분될 미래를 위해서는 논리적 토론보다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토론을 더 자주 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하브루타 예술토론을 권한다. 예술활동을 매개로 하브루타를 하면 어른과 아이가 상호존중감을 간직하며 장시간 대화가 가능하다. 학교의 주요과목인 국·영·수·탐구로 하브루타를 하려면 아이의 배경지식이 충분해야 하지만 예술은 오히려 부모의 창의성이 떨어지므로 정말 하브루타의 본질인 친구처럼 대화가 가능하다. 이때 부모도 자기 작품을 만들면서 대화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이가 그리거나 만드는 주제와 다른 작업을 한다면 대화는 더 풍성해진다. 각자 높은 성취감을 가지지만 경제적 이익과 상관없는 예체능활동은 미래에 대량실업 사회가 와도 자존감을 유지시켜서 다음 기회를 잘 잡게 도와준다.
만지고 놀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게 하는… ‘평생유치원’ 한국어판 출간 미첼 레스닉 MIT 교수
미첼 레스닉 MIT 미디어랩 석좌교수가 지난 15일 서울 봉은사 근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 중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울 디지털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업무시간 20%를 개인 일에 쓰는 ‘구글 방식’도 도입해 볼 만 교사·학부모는 지도와 훈육보다 스스로 생각하게 도와줘야
창의성은 인간이 기계에 뺏기지 않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진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창의적인 소프트웨어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강박감은 코딩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본질은 어디 갔는지 한국에서의 코딩교육은 기존 지식 전달 위주의 주입식 방식으로 이뤄지기 일쑤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어린이 코딩교육 프로그램 ‘스크래치’로 만든 프로그램들을 공유하는 웹사이트에 한국 어린이 30명이 만든 30개의 프로그램이 동일했다는 것은 획일화된 코딩교육의 실례를 보여준다.
미첼 레스닉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미디어랩 석좌교수(62)는 지난 15일 서울 봉은사 인근에서 경향신문과 만나 이 같은 사례를 언급하며 “교사와 부모가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려 하기보다 아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끔 돕는 촉매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레스닉 교수는 ‘스크래치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이끌고 있는 MIT 미디어랩의 ‘평생유치원(Lifelong Kindergarten)’그룹에서 개발한 코딩교육 프로그램이 스크래치이다.
그래픽 기반이라 배우기 쉬워 150개국, 2500만명의 아동들이 스크래치를 이용해 자신만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다. 창의적 학습 방법론을 담은 저서 <미첼 레스닉의 평생유치원>의 한국어 출간에 맞춰 지난주 방한한 그는 게임업체 스마일게이트가 후원하는 스크래치 워크숍에도 참여해 한국 아이들을 직접 지도했다.
레스닉 교수는 “아이들이 창의성을 발휘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디지털 기술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 진부한 교과과정과 교수법을 그대로 두고 기술을 지식 전달의 도구로만 활용하는 것은 그저 “호박에 줄을 긋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디지털 기술이 창의적 사고나 표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거나 오락을 위해 설계된 점을 불행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기술 회의론자가 되는 것도 경계했다. 신기술을 제대로 설계하고 적절한 지원과 함께 제공하면 아이들에게 실험하고, 탐구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창의적인 두뇌로 키울 수 있는 기술이란 어때야 할까?
레스닉 교수는 ‘낮은 문턱’과 ‘높은 천장’, ‘넓은 벽’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보자도 쉽게 시작할 수 있게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복잡한 프로젝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넓은 벽은 아이들이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스크래치에서 잘 드러난다. 스크래치는 게임뿐만 아니라 대화형 이야기, 미술, 음악, 애니메이션 같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그는 “창의성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들이 놀이하는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동료들과 협력해 프로젝트에 열정을 가지고 빠져들도록 지원하는 것”이며 “연령을 불문하고 모두가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학교와 직장이 유치원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입식·강의형 교육에서 직접 만지고 놀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때 세상을 가장 잘 이해한다는 교감형 교육 모델을 만든 유치원이 지난 1000년간 가장 큰 발명품”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부터 모든 교육과정이 대학 입시에 초점을 둔 한국의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레스닉 교수는 급진적이면서도 점진적인 변화를 주문했다. 먼저 직원들의 전체 업무시간의 20%를 그들 스스로의 프로젝트에 사용하도록 하는 구글 방식을 도입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25%, 30%로 늘어날 것이고 이렇게 조금씩 바뀌어나가는 과정처럼 결국 모든 학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구글 방식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급진적 시도라면 이후 변화는 점진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학교와 같은 전통 교육기관의 틀을 벗어난 방과후 학습, 프로젝트 기반의 워크숍 등에서 이런 변화가 먼저 일어날 것”이라며 “아이들이 이런 곳에서 창의성과 기쁨을 경험하면 그들 스스로 변화의 촉매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교실의 수동성에 좌절한 아이들은 오래된 교육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를 추구할 것”이라면서 이런 점에서 그는 자신이 단기적으로 비관주의자, 장기적으로 낙관주의자라고 말했다.
레스닉 교수는 “교사와 학부모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며 “교사는 지식 전달과 훈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새롭게 생각하게끔 하는 촉진자로서의 역할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모는 아이들이 모험하고 실험하고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디자인할 수 있도록 조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창의성을 인간의 본질로 봤다. 창의성은 경제적 부를 주기도 하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데 필수적 요소로 그 자체가 삶에 기쁨과 의미, 목적을 부여한다.
그는 “기계가 인간을 대신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시대는 먼 미래의 일이고, 그때도 사람들이 통찰력을 갖고 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인간만이 지닌 특별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행복한아이연구소장이 지난 15일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육아와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 소장은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는 ‘겸손한 육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아이 키우기만큼 한국인을 괴롭히는 문제가 또 있을까. 첫돌 갓 지난 아이를 사교육 시장에 내보내는 부모 마음도 그리 기꺼울 것 같진 않지만, ‘내 아이는 사교육 안 시킨다’고 결심한 부모들도 편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내지는 못한다. 먹고살기 바빠 사교육은커녕 아이 얼굴 제대로 보기 어려운 가정도 숱하다. 아이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총력육아시대’지만 어른이 되기 싫은 아이도 그만큼 늘어나는 혼돈상태다. 잘 키워야 한다는 부모의 조바심이 지나치다보니 아이가 ‘감정의 하수구’가 되기도 한다.
‘육아멘토’로 통하는 소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행복한아이연구소장(48)은 아이 키우기에 대해 ‘쾌도난마’의 해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꾸준한 관찰과 대화로 필요하면 진단을 조금씩 수정해가며 아이의 마음을 읽어내려 애쓴다. 누구든 육아에 정답을 가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천석은 방송과 강연, 소셜미디어를 통해 육아와 사회문제에 대해 활발히 소통해왔다. 공동육아를 직접 조직하고, 교사모임을 만들어 학교 울타리 속 아이들의 상태를 살펴보는가 하면, 촛불집회에 나가기도 한다. 육아의 바탕에 사회문제가 있는 만큼 그의 관심범위는 사회 전반으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 15일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서천석을 만나 아이들과 부모 및 교사, 한국 사회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는 ‘겸손한 육아’가 필요하다”고 했다.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지 않으면 아이와 부모 모두 불행해진다고 본다. 대신 공동체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환경을 정부와 사회가 궁리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동체 복원을 돕는 인력을 마을에 두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 부모가 행복하지 않으니 아이들도 불행
- 강연이나 방송, 소셜미디어를 통해 활발하게 발신하는 것 같다.
“사회가 육아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니, 그런 점에서 사회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긴 하지만 실제 활동은 적은 편이다.”
- 아이 문제는 한국 사회의 주요 관심사이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정답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육아서가 본격적으로 출간되고 방송에 육아전문가들이 나오기 시작한 게 1990년대 초반이니 한국 사회가 아이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 갖게 된 건 25년쯤 됐다. 87년체제 이후 개인의 욕구가 중시되면서다. 하지만 아이를 중시하는 문화를 접한 이들이 부모가 된 첫 세대여서 아직 육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지 않은 것 같다.”
- 한국 아이들이 불행하다는 건 국제비교로도 확연하다.
“부모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생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래 갖곤 안돼’라는 식으로 불행한 감정을 아이에게 옮긴다. 한편으론 ‘아이 마음을 이해하며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생각과 ‘아이를 경쟁력 있는 인적자원으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렇게 지치고 힘든 감정이 아이에게 전이된다. 1970~1980년대 조사라면 지금처럼 불행감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 성장하던 시대였기 때문인가.
“그렇다. 생활형편이 점점 나아지고 고용사정도 나쁘지 않아 부모의 마음풍경이 그리 어둡지 않았고, 아이들도 그런 부모를 보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다. 요즘 초등학교 3~4학년생에게 물어보면 ‘어른이 되고 싶다’는 아이가 10명 중 1명도 안된다. ‘엄마, 아빠가 사는 게 힘들어 보이고 책임만 커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천석은 “육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부담감”이라고 했다. “부모가 아이와 만나는 순간에 충실해야 하지만 ‘잘해줘야 한다’는 부담 탓에 오히려 아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면 아이는 바로 알아챈다. ‘나에게 관심없다’고 생각하니 반항심이 생기고 일이 꼬인다.”
- 외국의 부모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나.
“외국 육아서적이나 논문들을 보면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독일에서 ‘번아웃키즈’라는 말이 등장했다. 미국 엄마들의 블로그를 보면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힘들고 지친다’ ‘이렇게까지 키워야 하나’ 하는 하소연이 넘친다. ‘육아고민의 세계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 어릴 땐 땀 흘려 뛰어노는 게 중요한데도 요즘 아이들은 게임이나 웹툰을 보며 논다.
“거주공간이 변했고, 부모의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다 보니 아이들이 위험해질까봐 밖에 내놓기가 쉽지 않다. 게임은 다칠 위험이 없으니 부모도 안심한다. 아이들이 ‘가상 공간’으로 쫓겨난 것이다. 요즘 아파트는 부모 감시가 가능한 놀이 공간이 있어 좀 낫지만 단독주택이 많은 저소득지역은 부모가 일하느라 방치된 아이들이 집 안에서 게임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
- 사회의 관심도 중산층 아이들에게 집중돼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사교육에 시달린다고 하지만 그 아이들은 다수가 아니다.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방치된 채 자라는데 언론들도 관심이 많지 않다. 평균적인 아이의 삶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에 정부가 관심을 갖고 투자해야 한다. 지자체마다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생겨나고 있지만 아이를 데리고 올 여력이 있는 이들만 혜택을 본다. 일 때문에 이용할 수 없는 가정이 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인력 투자가 필요하다.”
■ 잡무에 치여 아이를 못 챙기는 교사
서천석은 학교 안 아이들과 교사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드는 학교행정에 대해 비판적이다.
- 교육투자가 늘어났지만, 교사들이 아이에게 집중하기 어려운 문화가 있다고 한다.
“젊은 교사들을 만나보면 개개인의 능력이나 의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높지만 학교에 들어온 뒤 금방 무너지는 것 같다. 보통 직장이라면 일하면서 점차 책임감과 철학이 생기고 성장하는데 학교조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왜 그런 건가.
“교육철학을 다지거나 교육기법을 연마하는 걸 개인에게 맡겨버리는 식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다행이지만 안 해도 내버려둔다. 아이들이 행복하려면 교사의 상태가 좋아야 하는데 학교로부터 무시당하고 상처받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교사 모임에 갔더니 한 초등학교 교사가 ‘4학년을 처음 맡는데 학년부장과 과학부장 보직을 한꺼번에 시키더라’고 했다. 이러면 의욕을 잃고 실력도 쌓지 못할 뿐 아니라 스트레스가 아이들에게 전가된다.”
- 방법이 없을까.
“교육개혁의 핵심은 수업, 즉 교사가 아이를 만나는 시간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있다. 젊은 교사들이 잡무에 치여 아이들을 챙기지 못해도 교장·교감, 교육당국은 ‘나 몰라라’ 한다. 행정을 전담하는 교사직렬을 만들든가 하는 식으로 교사가 수업과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 청소년기 ‘질풍노도’를 닮은 한국 사회
서천석은 최근 들어 연대와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다. 지난 1월 열린 방송사 주최 강연에서는 “우리 사회가 많이 발전하고 중요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느꼈다”며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 정치상황을 보면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도 한국 사회가 좋은 상태는 아닐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이 그토록 ‘병든 사회’는 아니고, 오히려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사회인 것 같다. 촛불집회로도 확인되지 않았나. 다만 젊다보니 청소년기 ‘질풍노도’처럼 움직이는 문제가 있다. 세련돼 가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 노동현실을 보면 ‘당일배송’을 하느라 조바심 치는 택배기사의 고충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빨리빨리’ 풍조가 사람을 힘들게 한다.
“건강하지 않다. 빠르게 움직여야 생존에 유리한 시대를 겪었고, 그 덕에 발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염증을 내고 있으니 변화할 것 같다. 무릎 꿇고 주문받는 과잉서비스가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물론 규제도 필요할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더 나은 삶의 지수를 보면 한국이 ‘공동체 생활’과 ‘일과 삶의 균형’에서 최하위권이다. 속도가 빨라진다고 삶의 행복감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이 깨달아가면서 바뀌지 않을까.”
- 우리 사회는 ‘과정의 미학’이 부족한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생의 학교 가는 길을 소재로 방송한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어떤 아이는 학교 오는 길에 본 가로수, 다른 아이는 골목길, 또 다른 아이는 길에서 만난 강아지 얘기를 하더라. 사람 경험이 각기 다르고, 그래서 마음대로 단정하면 안된다는 걸 배우는 것도 교육이지만, 우리 교육은 ‘학교 갈 때 차 조심해라’ 같은 몇 개의 정리된 항목을 외우도록 하는 식이다. 나머지는 ‘잡담’으로 간주해 버린다. 최종 정리된 공식이나 요약적 지식만 가르치는 게 전부라면 공교육은 망할 수밖에 없다.”
- 강연에서 공동체와 연대를 강조하는 이유는 뭔가.
“육아가 왜 힘들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됐다. 아이를 부모만이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 부모가 키우라는 건 사회적 책임을 줄이기 위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게 힘들다 보니 아이를 안 낳는 거다. 얼마전 트레킹을 갔는데 절벽을 잇는 다리에 난간이 없었다. 겁이 나서 경치도 둘러보지 못한 채 앞만 보고 걸어야 했다. 공동체가 없는 삶이 꼭 그렇다. 불안에 시달리고 현실을 즐기기 어렵다. 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에서 보듯 국가안전망도 관료주의화되고 있지 않은가. 현대에 맞는 공동체를 만들지 않으면 육아도, 개인의 행복도 어렵다.”
-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방안이 있나.
“사람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갈등을 해소할지를 돕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연결하는 길과 다리를 만드는 ‘사회간접문화자본’이 필요하다. 기업의 퍼실리테이터(조력자) 같은 이를 마을에 두는 것이다. 정부가 그런 곳에 투자할 때가 됐다.”
■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 버려야
-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 키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유사 이래 가장 격렬한 ‘집중양육’의 시대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주는 것은 과거 어느 때보다 늘어났지만 그래도 부족함을 느낀다. 다만 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적) 편차를 메우기 어렵다는 깨달음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이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불안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육아’로 가야 한다.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자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고, 아이가 장래 어떤 삶을 살지 알 수 없다. 오늘 이 순간에 아이에게 충실하는 게 ‘겸손한 육아’다. 한계를 인정하는 걸 배우지 않으면 인생이 불행해진다.”
-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덕목은 뭔가.
“공동체를 벗어나 독립적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긍정하는 힘이 필요하다. 또 사회와 속도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인정받기 위해 높이 올라가려다 실망하고 내가 상처 주는 사람도 늘어날 수 있다. 멈춰서서 생각하지 않으면 휩쓸려 잃어버리는 게 많아진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뭔지’를 응시하는 시간을 때때로 가질 필요가 있다.”
- 아이들은 육아철학에 걸맞게 크나.
“내 생각대로 자라는 것 같진 않지만, 그걸 보면서 오히려 배우게 된다. 나의 장점이라면, 모르면 배우고 잘못은 빨리 인정한다는 점이다.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잘난 체하면 안된다.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안되면 생각을 바꿔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