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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긍정하라, 가고 오고 돌고 도는 삶/이정우 | |
삶의 높은 곳과 낮은 곳 오르내리며 깨달음 고조되는 ‘철학의 오페라’ 세상에 태어나 살아야 한다는 건 징벌 허무주의와 대결하며 “나 다시 오리라”는 초인에의 의지 설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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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사유가 완숙기에 달했던 1880년대 전반에 씌어진 걸작이다. ‘철학적 오페라’(들뢰즈)로서의 이 책에서 우리는 깊은 병을 ‘실험’함으로써 위대한 건강을 찾아낸 한 천재의 고뇌와 환희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니체의 이 저작은 영원회귀의 긍정과 초인에의 길을 설파한다. 여기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삶의 저 높은 곳과 저 낮을 곳을 줄기차게 오르내리면서, 뱀, 독수리, 두더지, 독거미, 불개 등 수없이 많은 동물들, 난쟁이, 현자, 교황, “제 발로 거지가 된 자”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인물들을 만나면서 여행한다. 여행을 통해 깨달음은 심도를 더해 가고 차라투스트라도 성숙해 간다. 이 책을 읽기는 쉽지 않다. 느낌으로 읽어야 할 대목들, 지나치게 개인적인 구절들이어서 독해되지 않는 구절들, 불필요해 보이는 언사들을 비롯해 해독해내기 쉽지 않은 대목들이 많다. 니체 자신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이 책을 온전하게 읽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온전하게 읽겠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니체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을 관류하는 근본 주제는 ‘영원회귀’ 사상이다. “사물들은 정의와 징벌이란 것에 따라 도덕적으로 정돈되어 있다. 오, 만물의 유전이라는 징벌과 ‘생존’이라는 징벌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어디 없을까?” 광기는 이렇게 설교했다고 한다. 이것은 징벌로서의 생성과 생존의 이야기이며 영원회귀의 이야기이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생성은 그 자체 부정의한 것이다. 그래서 만물은 징벌을 받아 ‘아페이론’으로 돌아가곤 한다. 여기에는 우주에 투영된 정의/부정의의 감각이 존재한다. 만물 유전은 징벌이다. 살아야 한다는 것,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야 한다는 것(da-sein)은 징벌이다. 영원회귀는 징벌이다. “생존 또한 영원히 되풀이해서 행위가 되고 죄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생존’이라는 징벌에서 영원한 것이다.” 달빛 속에서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는 저 거미, 저기 저 달빛, 영원한 사물들에 대해 속삭이며 성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나와 너, 우리 모두는 이미 존재했었고 또 어느 날엔가는 다시 존재할 것이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年)는 영원히 흐른다.
나와 너, 존재했고 또 존재할 것 허무주의와의 대결은 영원회귀의 긍정을 통해 수행된다. “나는 너희들에게 ‘의지는 일종의 창조하는 자’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너희들로 하여금 이 터무니없는 노래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모든 존재들은 역능을 의지한다. 더 정확히 말해 모든 존재들은 역능의지“이다”. 의지는 창조하는 존재, 차이를 창조해내는 존재이다. 영원회귀를 긍정함은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요, 되돌아옴을 긍정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차이의 창조는 열역학 제1법칙(‘에네르기 보존의 법칙’)의 영향 하에서, 즉 동일성으로서의 전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니체에게 영원회귀의 긍정은 되풀이됨에 대한 긍정이다. “일체의 ‘그랬었지’는 창조하는 의지가 나서서 ‘나는 그러하기를 원했다!’고 말할 때까지는 한낱 흩어져 있는 조각돌이요, 수수께끼이자 끔찍한 우연에 불과하다.”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요, 그것을 의지의 필연으로 바꾸는 것이다. “세계는 주사위놀이를 하는 신들의 도박대”이다.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대수(大數)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률론은 우연을 필연으로 전환시킨다. 주사위를 더 많이 던지면 던질수록 확률은 더욱 정확해진다. 그러나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것은 던지기라는 행위를, 매번의 수(手)를 그것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던지기의 행위, 매번의 수를 수학적 확률을 공고히 해 주는 ‘경우’들, 함수값들로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이 때 삶이란 고귀한 의미에서의 ‘놀이’로서 다가온다.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은 연민의 정까지도 없애준다.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게 생이었던가? 좋다, 다시한번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반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세계의 원인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아니다. 주체는 자신이 영원회귀의 한 원인이 됨으로써 영원회귀의 결과가 된다. “나를 얽어매고 있는 원인의 매듭은 다시 돌아온다. 그 매듭이 다시 나를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한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영원회귀와 함께 되돌아오는 것, 자신이 그 원인이자 결과로서 참여하는 것은 영원회귀에 어떤 차이를 도래시키는 것은 아니다. “나 다시 오리라. 이 태양과 이 대지, 이 독수리와 이 뱀과 함께. 그렇다고 내가 새로운 생명이나 좀더 나은 생명, 아니면 비숫한 생명으로 다시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열역학적 동일성이 얼마나 무겁게 니체를 누르고 있는가가 다시 한번 확인된다. 때문에 니체에게서 영원회귀의 긍정은 단적인 차이에의 긍정이 아니라 세계의 동일성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건들을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또 다시 위대한 대지와 위대한 인간의 정오에 관해 이야기하고, 또 다시 사람들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초인이 “넘어서 가는” 자라면, 그가 넘어서는 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세계의 어떠-함, 어떤 “것”으로서의 세계는 단순히 영원회귀한다. 초인이 넘어서 간다면, 그것은 이 영원회귀하는 세계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이다. 넘어서 감은 공간적 이미지가 아니라 생존 양식에서의 차이의 이미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영원회귀가 좀더 명확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재정식화되려면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베르그송에게서 세계의 동일성은 와해된다. 차이는 세계 내에서만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그 자체, ‘전체’에서의 차이가 문제이다. 베르그송은 이런 ‘절대 차이’를 도입한다. 여기에서 ‘창조’라는 말은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세계 내에서의 어떤 창조가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의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의 창조이다. 니체의 발짓을 멈칫거리게 했던 동일성은 와해된다. 초인의 길 함께 갈 순 없는가 영원회귀를 사유한다는 것은 차이와 반복을 사유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서 반복이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의 운동, 차생(차이생성)에서 발생하는 반복, 잠재적 차이가 현실화되는 과정과 떼어서는 존립할 수 없는 반복이다. 여기에서 반복은 허무주의적 색채를 떨어버리고 차이의 힘을 구현하는 결정적 계기로서 다시 자리매김된다.
그러나 거리의 파토스는 함께-감의 파토스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초인에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것은 니체를 맑스와 함께 사유할 때 부딪치는 문제이며, 맑스와 니체가 사상적으로 현대를 맞이한 이래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서평자 추천 도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지음, 정동호 옮김 책세상 펴냄 (새로운 판본에 기초해 번역한 ‘니체 전집’의 열세번째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지음 그린비 펴냄 (니체의 저작에 대한 경쾌한 해설서) 쉽게 읽는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뤼디거 슈미트 외 지음, 김미기 옮김 이학사 펴냄 (중요한 구절들을 뽑아서 해설해 놓았다) 50자 서평 ◇ 김지혜(시인)=“영원의 샘, 정오의 심연에서 씌어진 서양의 도덕경. 이 책을 읽으려는 자는 한 번도 창조된 적 없는 신앙을 신앙하며 사자처럼 투쟁해야만 한다.” ◇ 천홍임(서해중학교 교사)=“차라투스트라의 생동감 넘치는 여정은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이의 본질적 존재 이유다. 따라서 이 책은 진정한 삶의 이정표를 제시한 세기 최고의 서사시다.” ◇ 김유미(한국 갤럽 연구원)=“방대한 니체 사상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먼저 펼쳐보라. ‘오독의 역사’가 있을 만큼 논쟁적인 니체 사상의 정수를 간결한 문체를 통해 조금은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 다음주 이후 고전 <문명화 과정>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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