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노교사의 꿈, 학교 텃밭에서 만나다
[서평] 이원구 <들꽃 학교 노교사, 교육 희망을 보다>
▲ 책 표지
ⓒ 우리교육
삶은 환상幻想 위에 건설되어 있다. 사랑과 명예, 그리고 종교와 교육의 바탕에도 환상이 깔려 있다. 그래서 환멸幻滅이란 말뜻처럼 삶이 환상이란 것을 자각하고 그 환상을 죽이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야 겨우 환멸을 느끼는 것은 슬픈 일이다.

첫 대목이 이렇게 시작되는 책이라면 필시 문학이나 철학, 혹은 종교 관련 서적으로 알기 십상일 것이다. 더욱이 이 책 <들꽃 학교 노교사, 교육 희망을 보다>의 지은이인 이원구 선생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였고, 그 후 일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주로 문예창작 방법을 실험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시창작교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등이 있고, 두 권의 시집을 낸 바도 있다. 이런 지은이의 전력이 그런 오해를 더욱 부추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학교에서 텃밭을 만드는 늙은 교사 이야기, 그 텃밭에 심은 우리 밀과 딸기와 도라지와 호박 이야기, 그리고 바위치, 꽃마리, 풍접화 등의 들꽃과 들꽃을 닮은 아이들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제목도 이에 걸맞게 '들꽃 학교 노교사, 교육희망을 보다'이다. 그런데 왜 책 서두에 허무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환상이며 환멸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킨 것일까?

이 책을 소개하겠다고 나선 나의 수작도 그렇다. 밤을 꼬박 세우다시피하며 감동이 올 때마다 연필로 밑줄을 그어놓은 까닭에 인용할 대목이 적지 않은데 왜 하필이면 그 두 단어에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일까. 그리하여 지은이가 말하듯 '이 책의 참다운 주인공인 학교 선생님들과 아이들, 그리고 무엇보다 풀 이야기'를 서둘러 들려주지 않고 끙끙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책을 읽다가 입은 마음의 외상(外傷) 때문이리라. 마치 불에 댄 자국처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간순간 아픔을 호소해온 것은 사실 나의 것이 아닌 그의 상처요, 그의 슬픔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런 뜨거운 동지애적인 공감 속에서 밤을 꼬박 지새운 셈이다. 책을 손에 잡았던 그날 밤, 내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이원구라는 한 실존의 모습이다.

내가 쉰다섯을 넘기면서 깨달은 것은 바로 환멸이었다. 이제 답답한 나라와 삭막한 학교, 까다로워진 선생님들, 그리고 지루한 국어교사 생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 나를 하루하루 옥죄는 서울에서 떠나고 싶었다.

그는 스스로 '불행한 국어선생'이었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그가 불행한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그가 자기 성찰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 할 일 많은 바쁜 세상에 공들여 헛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는 것도 그가 성찰의 사람인 까닭이다.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그는 아이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을 닮아 헛된 것을 꿈꾸는 아이들 말이다. 그것이 세상을 보는 올곧은 눈을 가진 교사가 겪는 이중의 고통이기도 하다.

한때 외환위기와 교육개혁을 겪으면서 삶과 교육의 자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한 저자는 명예퇴직을 신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명예퇴직은 불발에 그쳤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대안학교의 꿈도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 몇 권의 시집과 책을 엮으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학교 안에서 텃밭을 가꾸면서 흔들렸던 삶과 교육의 자리를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그의 직장은 서울 변두리 중학교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아이들 주변에는 자연이 있었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땅이 있었고, 그곳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풀이 있었다. 그는 10년 가까이 풀을 기르고 신화를 연구하면서 인류학적으로 풀이 지닌 대단한 가치를 알고 충격을 받는다. 그런 와중에 세계 꽃 시장의 어마어마한 판도, 서양인들의 은밀한 우리 식물 수탈, 무분별한 서양꽃의 남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우리밀 등 토종식물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어렵사리 환멸의 시간을 통과한 듯한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은 삶을 많이 반성하였다. 이러한 자각과 실존의 시대에 땅을 친구로 삼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이 땅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농작물을 가꾸고, 풀꽃을 기른 것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이는 우리 학교 선생님들 아이들이 함께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두레 활동이었고, 우리 풀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되찾는 회복 운동이었고,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겨 되살리는 부활사상이었다.

▲ 학교 텃밭에서 자라는 들꽃 이야기
ⓒ 안준철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들꽃 이름을 알 수 있다. '꽃에 미쳐 꽃에 배우다가' 들꽃의 아름다움에 더 깊이 매료되고 싶어서 장만한 800만 화소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지면 사이사이에서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들꽃 사진을 찍으며 뒷걸음치다가 밟아버린 풀을 바라보며 '산에서는 연한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옛날 도인의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것이 풀 한 포기와 벌레 한 마리를 고귀하게 여긴 생명 존중 사상이면서 인간인 '나'를 긍정하는 뜻이라는 것도 새삼 깨닫는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원구 선생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였고, 시창작에 관한 책을 펴냈으며, 두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책갈피마다 마치 복병처럼 숨어 있는 그의 시심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지면관계상 몇 대목만 소개한다.

'아, 저렇게 겉잎은 추위에 죽고 그 마른 잎이 외투가 되어 속잎을 살리는구나. 마치 부모가 자식을 껴안고 얼어 죽으면서도 그 온기로 어린자식을 살리는 것처럼…'

'우리는 농작물을 기르면서 조그만 철학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땅 냄새를 맡으면 무슨 말이든 아이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교실보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학교인가.'

'그런데 앉은부채는 아직 겨울인 2월에 왜 꽃을 피울까? 키가 작으니 나무들이 햇빛을 차지하기 전에 일찍 꽃을 피워 수정하고 결실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겨울잠에서 깬 동물들을 유혹하여 꽃밥을 먹이로 주면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손을 번식시켜 나가려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시인다운 생각에 잠겨 얼음이 녹아 있는 산길을 내려오다가 문득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과학과 김종원(이 책에는 동료교사들의 이름이 실명으로 소개된다. 그들에 대한 솔직담백한 묘사도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선생의 말을 떠올린다.

"영하의 날씨에도 철쭉 같은 나무의 잎새가 얼지 않는 것은 나무 속에 부동액不凍液이 들어 있기 때문일 거야."

있을 법한 얘기가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여리고 어린 잎새들이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얼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앉은부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추위에 강한 앉은부채를 먹으면 신장과 장을 풀어주어서 대소변이 잘 빠져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원구 선생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것은 앉은부채로 여학생들의 변비를 치료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아침에 머리를 감고 단장하느라 대변 볼 시간도 없는 아이들, 거기에 아침밥도 거르고 오는 아이들이 장이 좋을 리 없지 않겠는가.

책의 전반부에는 저자가 아이들과 동료교사들과 함께 땀 흘리며 텃밭을 가꾸는 노교사의 모습 속에 생명을 다루는 마음,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음이 잘 담겨 있다. 학교 안 쓸모없는 땅과 눈여겨보지 않았던 들꽃을 아이들과 함께 가꾸면서 서로를 의미 있는 존재로 되살려내는 모습들도 퍽 감동적이다.

하지만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재미와 감동의 깊이를 더한다. 진희와 아롬이. 두 아이는 마지막 책장을 다 넘기고 난 뒤에도 머리 속에 남아 있던 이름이다. 먼저 진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진희는 초등학교 1학년보다 작은 아이다. 그래서 그런지 글씨도 어린 아이처럼 큼직하게 함부로 막 갈겨쓴다. 자라지 않는 걸 짜증스러워하는 듯하다. 예쁘고 조그맣게 쓰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2년간 국어를 가르쳤는데 언제 보아도 안쓰러운 아이다.'

궁리 끝에 이원구 선생은 아이를 꼬집으면서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괜히 가서 꼬집으면 아이는 아프다면서도 눈만 흘기고 만다. 늙은 선생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눈치 챈 까닭이겠다. 선생에게는 잘 자라지 않는 아이도 가엾지만, 너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도 안쓰럽다. 아롬이가 바로 그런 아이다. 어느 날 그가 은행나무 밑에서 방귀를 몇 방 뀌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아름이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얼른 도망가 버렸다. 그런 아롬이에 대한 기록이다.

그 뒤로 학교에서 아름이를 만나면 나는 "아름아, 방귀 뀌지마."하고 장난을 쳤다. 그래도 얘는 부끄러운지 "예!"하고 대답만 할 뿐 어쩔 줄 몰라 했다. 부끄러움 많은 아롬이에게 장난을 치는 나는 분명 짓궂은 선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롬이가 부끄러움을 이기게 해주고 싶었다.

▲ 꽃과 아이들
ⓒ 안준철
결국 아롬이는 선생의 바람대로 부끄러움을 이기는 아이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기쁜 마음에 그런 작은 이야기를 늘어놓았거니 했는데, 두 아이의 이야기가 2억 5천만년 동안 지구에서 설치다가 사라진 공룡 이야기나, 중생대 석탄기의 거대한 나무가 사라지고 고사리로 남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생물의 진화 문제로까지 이어져 이렇게 갈무리 되고 있었다.

너무 약하고 부끄럼이 많다고 깔볼 수가 없구나.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롬이와 잘 자라지 않는 진희가 바로 자그마한 파충류나 혹은 고사리나 고비가 아닐까?'

이제 글을 마쳐야할 것 같은데 아직 밑줄 친 대목이 많이 남아 있다. 그가 어린 제자들에게 수업시간에 풀어놓은 쓸데없는 농담 같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신변잡기 같기도 한 이야기들이 내게는 오히려 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 형식은 없고 얼개만 있는 이야기들을 몇 줄로 요약해서 소개할 재간이 나에게는 없으니 일독을 권할 도리밖에 없다.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자가 평평할 평(平 )이라는 것. 그는 어린 제자들에게 ‘평등한 슬픔’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뿐만 아니라 만인에게 평등한 슬픔을 통해서 글공부를 시킬 계획도 세웠다. 그것은 아이들이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글로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왜 평등한 슬픔인가? 그리고 그는 왜 아이들에게 슬픔의 감정을 가르치고 싶은 것일까? 그것 또한 그럴듯하게 전달할 재간이 없으니 직접 책을 읽어보시라고 말해야겠다.

책의 마지막도 평(平), 혹은 평등에 관한 얘기로 갈무리된다. 그 장면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글의 감동이 어디에서 오는지 눈여겨 볼 만하다.

'재작년 봄에 시제를 지내면서 무덤에 절을 하다가 보라색 제비꽃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습이 문득 증조할머니 얼굴처럼 생각되었다. 할머니는 드디어 땅과 평등해지고, 늘 잘난 체하는 나는 엎드려 절하면서 드디어 땅과 평등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바람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사람과 풀꽃이 서로에게 맞절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