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종씨도 학력 속여

[동아일보] 최씨 “외대 합격했지만 가정형편상 못다녀” 개교행사 참석… ‘외대 방송인상’ 선정되기도 KBS 1TV 대하사극 ‘대조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탤런트 최수종(45·사진) 씨도 학력을 속인 것으로 드러났다.

최 씨는 언론사와 각종 인터넷 포털 사이트 인물정보에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81학번)를 다녔던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최 씨는 21일 “배재중학교와 배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에 지원해 합격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등록을 못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콜로라도 포트모건 칼리지를 1년 정도 다녔다”며 “그때 부친상을 당해 귀국하는 바람에 학교를 더 다니지 못했다”고 밝혔다.

최 씨는 또 “연기자 데뷔 초에 매니저 일을 하던 친척이 당시 광고대행사에 자신의 프로필을 작성해 배포하는 과정에서 한국외국어대에 지원한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확인 절차 없이 학력란에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로 적시한 것이 발단이 됐다”며 “한 번도 한국외국어대 졸업 사실을 기재하거나 말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국내 간판급 탤런트이자 깨끗한 이미지와 철저한 사생활 관리로 팬들의 사랑을 받아 온 최 씨마저 학력을 속인 것으로 드러나 연예계 학력 위조 파문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외국어대는 2004년 개교 50주년 기념행사 때 가수 이승환, 탤런트 차인표 씨와 함께 최 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려 했지만 당시에도 입학 기록을 찾지 못해 포기했다. 최 씨는 1994년 개교 40주년 행사에 참석했으며 2000년에는 학교에서 시상하는 ‘올해의 외대 방송인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수상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 씨의 주변 인사들은 최 씨가 학교를 다니다가 중도 하차한 것으로 알고 있어 그가 허위 학력에 대해 해명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최 씨와 절친한 가수 A 씨는 “그가 학교를 입학한 것은 분명하고 중간에 그만뒀다고 본인 스스로 밝혀 왔다”고 말했다.

또 2004년 2월 월간지 ‘신동아’ 기사에는 “1980년대 초 무역학과에 입학한 뒤 2학년 때 미국 유학길에 올라 콜로라도 주립대 광고마케팅과를 다녔으나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파라과이로 이민 간 아버지가 사망해 귀국했다”고 기술돼 있다.

주영훈씨 조지메이슨대 안나와 한편 미 조지메이슨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던 작곡가 겸 방송인 주영훈(38) 씨도 학력 위조 사실을 시인했다. 주 씨의 소속사인 클라이믹스엔터테인먼트 측은 “최종 학력이 조지메이슨대로 알려진 것은 매니저가 동생의 학력을 주 씨의 학력으로 잘못 알렸기때문”이라며 “해당 포털 사이트에 수정을 요청한 상태”라고 밝혔다.

그러나 주 씨는 5월 24일 개그맨 박명수 씨가 진행하는 MBC FM ‘펀펀 라디오’에 출연해 조지메이슨대 경제학과를 다녔다고 말하는 등 의도적으로 학력을 속인 것으로 드러났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내 손안의 뉴스
  • '실력으로 승부한다' 고졸 출신 기술 명장들
  • 입력 : 2007.08.19 08:08 / 수정 : 2007.08.19 14:47
    • 학계와 문화예술계 유명인사들의 학력 위조와 부풀리기 행태로 사회 전체가 뒤숭숭하지만 산업현장에서는 오직 실력을 바탕으로 삶을 개척한 ’고졸 스타’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이들은 비록 정규 학업 시간이 짧고 내세울 것 없는 배경이었지만 오랜 세월 수없이 쏟아낸 땀방울로 ’기업의 꽃’인 임원직을 꿰찬 입지전적인 인물들이다.

    • ▲ 조성진 LG전자 세탁기 사업부 부사장 /조선일보 DB
    • LG전자 세탁기 사업을 총지휘하는 조성진(51) 부사장은 유명한 세탁기 명장(名匠)이다. 1976년 용산공고를 졸업하고 입사한 조 부사장은 ’일본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세탁기만 생각하며 30여년을 보냈다. 일본 기술에 의존해야 했던 전자동 세탁기를 100% 국산화했고, 세계 최초의 직접 구동 시스템과 듀얼(dual) 분사 방식의 스팀트롬(증기세탁) 개발을 주도했다. 신지식 특허인상과 장영실상, 대한민국 10대 신기술상, 동탑산업훈장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은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의 삶을 여실히 웅변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아이디어 왕’으로 손꼽히는 윤생진(57) 그룹 전략경영본부 상무도 고졸 생산직 출신이다. 목포공고를 졸업하고 1978년 금호타이어 공장에 타이어 생산직으로 입사한 윤 상무는 그동안 아이디어 1만8천600건 제출, 특진 7회, 대통령 표창 5회, 국제특허 17개 보유 등 끊임없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생산직에서 그룹 임원까지 오르는 신화를 창출했다.

      입사 초기 하루 4시간 이상 자지않고 아이디어를 구상해 일본 유명업체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타이어 제조공정을 개발, 20억원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성실과 열의 덕분에 그는 당시 금호타이어 사장이던 고 박정구 회장 앞에서 직접 신기술 브리핑을 할 수 있었고, 이후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윤 상무는 “무언가에 미쳐야만 성과를 낼 수 있으며, 기업의 생사는 아이디어에 달렸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현장에서 풍성한 아이디어가 쏟아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GS칼텍스 김진도 상무(56) 역시 사내 생산기술직 출신 1호 임원으로 유명하다. 여수공장 동력팀 운전원(생산기술직)에서 출발해 작년 12월 상무로 승진, 현재 여수공장 생산운영부문을 맡고 있다.

      성지공고를 졸업하고 1977년 GS칼텍스에 입사한 김 상무는 제1 중질유분해공장과 최고급휘발유 생산공정인 알킬레이션 공장의 건설부터 시운전, 정상 가동까지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력이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무엇이 되기보다는 일 자체에 열정을 다해 몰입하면 결과는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1열연공장의 임채식(55) 공장장도 화제의 인물로 손꼽힌다. 이 공장은 지난해 생산량 614만5천t으로 전 세계 350여개 열연공장 가운데 최대 생산규모를 자랑하는 곳. 포스코의 주력 생산라인에서 고졸 출신으로 공장장에 오른 것은 임 공장장이 처음이다.

      그는 전남 곡성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3년간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다 포항제철 직원훈련원 통해 포스코에 입사한 현장 늦깎이. 하지만 일본 연수를 다녀온 선배들에게 술대접을 하면서까지 압연기술을 업그레이드할 만큼 열성적이었던 덕분에 그는 현장 반장을 거쳐 대졸 사원들이 배치되던 관리직으로 승진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도 현장 경험을 살려 품질과 설비를 개선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쉬지 않고 쏟아내 현장작업률 세계 신기록(92.4%)을 세웠으며, 2005년에는 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제조기술센터 설비기술그룹에서 일하는 박동익(47) 부장도 실력을 인정받는 기술자이다. 마산공고 출신인 그는 1977년 고교 졸업 이후 삼성전자 제조설비기술 분야에서만 30년 잔뼈가 굵었다. TV, 모니터, 컴퓨터 제조설비와 해외공장 건설, 전기 등 유틸리티 설비기술의 명장으로 통하며, 1995년 제1회 삼성전자 설비관리 부문 명장으로 선정됐다.

  • 대입 논술시험의 위선

    ▣ 김창석 한겨레 교육서비스본부kimcs@hani.co.kr

    “대학의 예산을 집행하는 책임자라면 도서관 책을 사는 데 예산을 더 많이 쓸 것인가, 아니면 스포츠 동아리에 쓸 예산을 더 많이 쓸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구체적인 근거와 함께 800자 안팎으로 써라.”

    “다음의 각 제시문에 들어 있는 ‘세월이 흘러감’에 대한 생각을 ‘욕망’과 연관시켜 분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라.”


    △(일러스트레이션 / 조승연)

    두 가지 글쓰기 문제가 있다. 앞의 것은 미국 고등학생들이 흔히 쓰는 에세이 주제 가운데 하나다. 뒤의 것은 2006년 우리나라의 한 대학이 입학시험에서 낸 논술시험 논제다. 수준 차이가 이만저만 나는 게 아니다. 문제만을 놓고 보면 한국 고등학생들은 고도로 추상화한 논의도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지적으로 훈련된 학생들인 데 반해 미국 고등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가.

    내가 보기에 현행 대입 논술시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대학의 출제 교수도 알고, 시험 보는 학생도 알고, 학교에서 논술을 가르친 고등학교 교사들도 알고, 학원에서 논술을 가르친 학원 강사들도 다 알고 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 문제들이 고등학교 3학년생의 지적 성장 단계를 완전히 무시한 부적절한 시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일기도 제대로 써보지 않은 학생들에게 철학과 대학원생들도 쩔쩔맬 문제를 내는 식이다. 어린 학생들에 대한 대학들의 ‘지적 횡포’라는 얘기가 출제 교수와 채점 교수들한테서 나오는 이유다.

    글쓰기는 문화다. 글을 존중할 줄 아는 문화가 있어야 글쓰기 문화도 융성한다.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글보다는 말에, 말보다는 영상에 기대는 사회인 듯싶다. 전세계 어느 인터넷에서도 한국만큼 동영상 콘텐츠가 많은 나라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글보다는 말을 좋아하고, 공적 담화보다는 사적 담화를 즐긴다. 한국은 여전히 ‘구어체 사회’다. 글쓰기가 융성하려면 우선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문자생활이 사회의 주류적인 의사소통 방식이며 정보저장 방식이고 신뢰받는 표현방식이어야 한다.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책과 글이어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퇴임 뒤에 대부분 자서전을 쓴다. 자서전 내용을 뜯어보면 별로 볼 것도 없다.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 부분에 눈길이 가기는 한데 그것도 대충 얼버무렸다. 나머지는 대부분 시간의 흐름을 좇아간 대통령의 공식 일정이다. 부드러운 다큐멘터리 정도라고 할까. 그런데 그런 책이 발행되기도 전에 책을 사겠다는 이들이 수십만 명씩 되는 사회가 미국이다. 기록이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록하는 것을 사회적 책무로 받아들이는 풍토가 필요하다. 빌 클린턴은 대선운동 기간 당시 대학 시절 ROTC 교관에게 병역 문제에 대한 편지를 보냈던 기록이 들춰져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퇴임 뒤에 책을 쓰는 대신 배드민턴 라켓을 들거나, 훈수를 두거나, 골프를 치러 다닌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고 난 뒤 무엇보다 먼저 자서전을 썼으면 좋겠다. 또 몇 년 동안 한 문제를 가지고 글로 토론하는 지식인들을 봤으면 좋겠다. 그 정도는 돼야 어린 학생들에게 높은 수준의 글쓰기를 강요할 수 있지 않을까.

    [학력 콤플렉스] 부서지지 않는 한국판 카스트의 벽
    홍경석(hks007) 기자
    오늘도 습관처럼 새벽 다섯시에 기상했다. 토요일인 오늘은 출근을 안 해도 되는 날이다. 하여 늦게까지 잠을 만끽하고 오후엔 가족들과 어디로든 외식 내지는 물놀이를 간다면 딱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여유자적의 향유는 정규직에게나 해당되는 '호사'이지 나와 같은 비정규직에겐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엊저녁에 지은 압력밥솥 안의 차가워진 밥을 보리차에 말아 오이지랑 대충 뜨고 세수를 했다. 이어 면도와 양치질을 한 뒤 옷을 갈아입고 출근했다. 그렇게 집을 나서는 시간은 만날 통상 오전 여섯 시 전후이다.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는 길목엔 인력센터가 세 군데나 있다. 오늘도 인력센터 앞을 지나려니 하늘이 꾸물꾸물해서인지 어제보다는 현저하게 적은 일용직 사람들이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도착한 813번 버스를 타고 대전고교 앞에서 하차했다. 교문을 장식하고 있는 '대고인의 긍지 살려 명문전통 빛내자'는 전광판의 안내문을 보면서 아울러 정문 우측에 플래카드로 붙어 있는 '대전고 00회 출신 아무개 000(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고위직)에 취임!'이란 문구를 다시금 접하며 걸었다.

    그러면서 지난날을 잠시 회상하며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충남 제일의 도시인 천안시이다. 지금이야 서울서 출발한 전철이 천안까지 내려오므로 가히 수도권역이 되었으며 인구 또한 어느새 50만이 넘었기에 구청의 설립까지 회자되고 있는 도시가 바로 천안이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의 천안시는 사실 거개 무명(?)의 중소도시에 불과했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무변한 명성을 자랑하는 천안의 명물인 호두과자라면 또 몰라도.

    부서지지 않는 한국판 카스트의 벽

    박복한 탓에 겨우 생후 첫돌을 즈음하여 생모를 잃었다. 술을 물 마시듯 하셨던 편부와 몹시도 애면글면 살았던 탓에 항상 가난과 씨름하는 형극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술을 안 드시는 때면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지대하셨다. 그래서 내가 겨우 여섯살 때부터 천자문과 한글책을 사다주시며 깨우치게 하셨다. 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 전에 그같이 기초를 단단히 다진 덕분으로 순식간에 반에서 1등을 달리는 성적을 거두었다.

    이어 4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는 회장의 중책도 맡을 수 있었는데 불행의 먹구름은 6학년 1학기부터 더욱 노골화됐다. 그 즈음 중학교를 무시험으로 진학하는 이른바 '뺑뺑이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 뺑뺑이 제도의 1세대였던 나는 천안중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입학 일정에 따라 등록금만 납부하면 나도 어엿한 중학생이 될 터였다.

    하지만 당시부터 아버지께선 더욱 눅진한 자학과 폭음의 늪에 함몰되셨다. 가장의 책무를 포기하신 아버지만 바라보고 있다간 굶어죽기 십상이었다. 당장 나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공부보다 더 화급한 건 바로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것이었다.

    나의 국민학교 졸업식날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천안역 앞에서 구두를 닦았다. 비가 오면 우산을 떼다 팔았으며 심지어는 가짜 고학생 노릇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더 나이를 먹어서는 시외버스 정류장의 행상과 공사장에 나가 막노동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노력을 했음에도 빈곤의 거미줄은 여전히 우리 부자의 숨통을 죄는 암초로 굳건했다. 무심한 세월은 이러구러 흘러 지난 1980년대 초반에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그 당시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우린 내가 전역을 하는 대로 결혼하자고 약조한 터였다. 전역을 하고 사회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무지막지하게 가난한 우리집의 현실과 더욱 피폐해진 아버지의 처참한 몰골에서 나는 결심했다. 돈을 더 벌자!

    하지만 겨우 국졸 학력의 나라는 무지렁이에게 정규직의 편안한 직장은 그림의 떡이었다. 결국 학력보단 능력을 중시하는 영어회화 교제와 테이프를 판매하는 회사에 세일즈맨으로 입사했다. 맨 땅에 헤딩한다는 각오로 친구에게서 영어를 배웠고 책을 사서 읽고 외우며 지식적 공백을 메워나갔다. '고진감래'의 귀결로서 주임과 소장으로 승승장구도 했으나 곧 이은 회사의 부도는 다시금 나를 비정규직으로 내려앉게 하는 단초가 됐다.

    하지만 샛별처럼 빛나는 사랑하는 두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자면 슬퍼하거나 비참해 질 여력조차도 없었다. 나는 다시 다른 세일즈 전문회사로 들어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던 중 누가 말하길 자동차를 판매하면 돈을 더 벌수 있다고 했다. 하여 모 자동차 판매 지점을 찾아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역시나였던 건 최소한 학력이 고졸 이상은 돼야 입사서류의 접수조차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정상적인 학력은 고작 국졸이었으되 그간에 읽어댄 숱한 서적과 독학의 내공은 나를 대졸 이상의 지식을 겸비하게 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2년 전 모 문인협회로부터 등단의 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하나도 내세울 게 없다는 부끄러움에 스스로 등단을 고사했다. 하여간 나 자신이 여전히 못 배운 놈이란 편견과 자격지심으로 말미암아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회엔 일부러 안 나갔다.

    그같은 연유는 나보다 모두들 많이 배웠고 잘 사는 친구들을 보기가 시쳇말로 '쪽 팔리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이곳 대전에서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생들 모임이 있어 끌려나가다시피 간 적이 있다. 그러나 술 기운이 만개할 무렵 몇 친구가 그만 또 나의 예민한 복장을 긁고 말았다. '엄연히' 초등학교 동창생들 모임이었음에도 출신 고교가 어떻고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따위의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때문이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님을 간파했다. 아울러 학력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홀글씨란 걸 새삼 느꼈다.

    "앞으론 니들끼리만 놀아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수년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지금은 관계가 개선되고 복원되어 내가 동창생들 모임의 연락책을 맡고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본다

    그간 세일즈를 하여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이젠 모두 다 까먹고 무일푼이다. 다만 오롯한 건 사랑하는 가족들이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거개의 필부처럼 물질사관이 아닌, 오로지 나라는 사람 하나만을 보고 기어코 진득한 고생의 늪을 자초하고 감내한 진정 고마운 천사인 아내가 여전히 고맙다. 가정경제난으로 휴학하고 돈을 벌면서도 여전히 이 못난 아비의 '벗'이 돼주고 있는 아들 또한 살갑고 미안하기 그지없다. 초등에서 고교까지 파죽지세의 전교 1등이란 저돌성을 무기로 그예 서울대생이 된 딸 역시도 이 풍진 세상에 가장 든든한 내 자긍심의 보루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도 모자라 매년 매학기마다 장학금까지 놓치지 않고 있는 딸을 보자면 나도 모르게 불끈 힘이 솟는다.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 대접을 못 받고 비정규직으로만 살아온 지 어언 수십년이다. 1년을 일해도 10년을 근무해도 여전한 건 퇴직금은커녕 건강보험료조차 지원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 내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그간 일했던 직장을 지난달에 그만 두고 나와 지금은 선배님과 한 사무실을 쓰면서 여전히 세일즈를 하고 있다.

    사람에겐 누구나 꿈이 있다. 지금 나의 꿈은 이렇다. 우선 아들과 딸을 대학 졸업하게 만든 다음 하루하루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하는 이 척박하고 험한 비정규직의 세일즈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다. 다음으론 최소한의 생활보장만 된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감내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글만을 쓰고 싶다. 욕심을 더 내서 장편소설까지 집필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