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데이 ? 꼭 우리가 즐겨야만 하는 축제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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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데이’는 사실 우리에게도 꼭 그렇게 낯설기만 한 축제는 아니다. 가령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 정도 되는 연령대의 사람들이라면, 80년대 유명했던 영화 ‘E.T'에서 주인공 엘리어트가 이티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가 왔던 별나라와 무선교신을 해야하는데, 그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 숲으로 이동하는것을 행여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것을 피하기 위해 바로 ‘할로윈 데이’를 이용 이티가 실은 어린아이가 할로윈데이를 즐기기 위해 괴물분장을 하고 나온 것으로 위장 숲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기억할것이다.


사실 비단 ‘E.T’ 뿐만 아니라 미국의 영화나 만화중 가족물이나 오락,호러물중에는 ‘할로윈데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종종 나온다. 뿐만아니라 가령 영어나 미국풍습을 배우는 과정에서 혹은 아예 직접 미국에 다녀온 사람들중에도 미국에 그런 전통행사가 있다는것 쯤은 한두번 들어본 사람이 적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한 십수년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는 이 ‘할로윈데이’를 그저 미국에서 그것도 주로 아이들이 즐기는 놀이같은 축제 정도로만 여겼지, 우리가 특별히 그것을 즐기거나 신경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이태원 정도에서 주로 주한 외국인들이 이 ‘할로윈데이’를 즐기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고 한다.


헌데 이 ‘할로윈데이’ 축제 문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10대-20대 사이에도 꽤나 급속히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다. 특히 바로 불금이기도 했던 지난 10월 31일 밤에는 서울시내 중심가 여기저기에 귀신이나 가지각색 코스프레를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을 적잖이 볼수 있었다. 또 백화점등에서도 이 ‘할로윈데이’를 겨냥한 캐릭터나 코스프레 상품 판매등 할로윈데이를 적극적으로 상술에 이용하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하는 추세다.


‘할로윈데이’는 그 유래를 따져보면 고대 북유럽 켈트족의 축제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고대 켈트족들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여겼고, 따라서 10월 31일은 한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일종의 ‘연말연시’로, 특히 이때 죽은자들의 영혼이 집에 들어오는것을 막기위해 집을 차갑게 하고 귀신이나 마녀 분장을 해서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켈트족 풍습이 청교도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으로 전래되었고, 그리고 대략 20세기에 접어드는 무렵부터는 주로 아이들이 괴물이나 귀신 따위의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탕이나 초코렛’ 따위를 달라고 하는 일종의 ‘놀이문화’로 자리잡은 것이다.


헌데 이 ‘할로윈데이’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10대-20대의 새로운 놀이문화로 파고들기 시작한것은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조기영어교육’ 붐과 무관치 않은것 같다. 실제 한 십여년전부터 주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유치원이나 학원등지에서 영어조기교육과 맞물려 10월말경에 주로 이 ‘할로윈데이’ 놀이도 함께 가르치며 즐기곤 했었다는 것이다. 실제 한 2천년대 초,중반경에는 아이들에게 ‘조기영어’를 가르치는 학부모들이 해당 유치원이나 학원등에서 ‘할로윈데이’ 행사를 즐겨 해마다 이 무렵쯤 되면 바로 그 ‘놀이’에 필요한 물품에 드는 비용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다는 이야기가 종종 보도되기도 했었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근래에 ‘할로윈데이’가 10대-20대의 새로운 놀이문화로 파고든것은 뿌리를 따져보면 분명 필연의 곡절이 있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에 ‘조기영어교육’이나 ‘조기유학’ 붐이 일기 시작한것이 대략 9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주로 잘사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일. 그리고 그렇게 ‘조기영어교육’을 받거나 ‘조기유학’을 다녀온 세대가 어느덧 10대,20대로 성장할만큼의 시간이 흐른것 아닌가. 그리고 대개 사람은 유아기와 성장기를 거치면서 어떤 교육을 받거나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가 그 사람의 정서나 가치관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법.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미국의 전통축제인 ‘할로윈데이’를 이맘때쯤 되면 즐기곤 하던 아이들이 어느정도 자라서 10대 청소년이나 20대 청년이 된 지금도 ‘할로윈데이’ 행사를 즐기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어쩌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은 ‘조기영어교육’ 붐이 한창 일때부터 이미 예고되었던 일인 셈이기도 하다.


‘할로윈데이’를 그저 유치원때부터 조기 영어교육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이 풍습을 익혀간 아이들이 자라서, 그저 젊은시절 한때 즐겨보는 놀이문화로 여기고 유연하게 받아들여 주자면 받아들여줄수 있기도 하다. 허나 이러한 ‘할로윈데이’를 즐기는 아이들로 인해 부모세대들이 갖게되는 경제적 부담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이보다 또 한편으론 굳이 서양 전통문화에서 유래된 이러한 문화를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즐기는것을 지켜보는것에 대한 문화적 불쾌감이나 떨떠름함이 더 크게 이는 면이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익숙한 기억이 있다. 바로 발렌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하는 문화다. 사실 ‘발렌타이데이’ 같은 문화야말로 보통 80년대 중,후반경부터 보통 잘사는 집의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이성친구에 대한 선물제공 문화였다. 그 뿌리 역시 천주교의 축일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는 하나 80년대 청소년들이 ‘발렌타인데이’를 즐기기 시작한것은 일본문화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와같은 문화에 물들어간 것이다. 더욱이 ‘발렌타인데이’는 그렇다쳐도 ‘화이트데이’는 발렌타인데이와 직접적인 상관도 없는 일본에서 시작된 무국적 문화였고, 그 뒤를 이어 아예 우리나라에선 무슨 블랙데이니,그린데이니,빼빼로데이니 하며 그야말로 백화점 상술에 불과한 그와같은 ‘데이’ 문화가 점입가경으로 퍼져갔었다.


무엇보다 소위 ‘발렌타인데이’ 문화가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80년대 어르신들은 그 모습을 보며 그와같이 개탄했었다. “ 요즘애들 우리나라 역사나 문화에 대해선 제대로 알고 저런짓 하는거냐 ? 도대체 난데없이 발렌타인은 무슨 발렌타인데이냐 ? ”며. 소위 발렌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하는것들이 조장하는 과소비 경향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도대체 서양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하는것인지 일본에서 들어온 문화라 봐야하는것인지 그 뿌리조차 불분명한 그와같은 ‘무국적 문화’에 청소년들이 물들어가고 그로인해 잃어가는 우리민족의 문화적 정체성 문제에 대해 어른들이 개탄했던것이다.


헌데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이제 그 발렌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하는것들을 즐기던 청소년들이 이제 집에 학교다니는 자녀 하나,둘씩은 있을만한 나이가 된 시점에 이르러 지금은 우리가 요즘 아이들이 즐기는 ‘할로윈데이’ 문화를 걱정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그 양상은 30년전 ‘발렌타인데이’ 문화를 걱정하던 어르신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적 부담감과 아이들의 문화적 정체성 문제. 무슨 인과응보나 역사의 윤회의 법칙마냥 30년전 우리를 보고 어르신들이 걱정했던것과 똑같은 양상으로 이제 우리가 요즘 아이들이 ‘할로윈데이’를 즐기는것을 걱정하고 우려하고 있는것이다.


30년전 발렌타인 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하는 문화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할 때, 어르신들은 그 당시 아이들의 ‘문화적 정체성’ 문제를 걱정하곤 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발렌타인데이 같은 선물,연애 문화가 백화점 상술과 맞물려 이젠 그 무슨 블랙데이니,그린데이니,빼빼로데이니 하며 확대되어 있는 실상이다. 글쎄, 30년쯤 세월이 지나면 ‘할로윈데이’도 또 다른 축제문화로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될까 ? 오늘날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가 그저 젊은시절 한때 즐기는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해버린것처럼. 또 그때쯤되면 요즘 아이들도 부모세대가 되어 그때쯤 유입될만한 또다른 무국적 문화로 인해 경제적 부담감과 문화적 정체성 문제를 우려하고 개탄하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할로윈데이’를 즐기는 문화가 요즘 아이들에게 유행하게 된것은 확실히 어릴때분터 그 무슨 ‘조기영어교육’ 같은것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할로윈데이’ 행사도 즐기며 몸에 밴 측면과 연관이 깊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현상을 즐기는 아이들을 선배세대,부모세대의 입장에서 바라볼때 생기는 문화적 이질감 또한 쉽게 떨쳐내기가 힘들다. 글쎄, 요즘 아이들이 즐기기 시작한 서양 전통문화에서 유래된‘할로윈데이’ 축제. 그저 아이들때 한때 즐기는 놀이문화 정도로 유연하게 받아들여줘도 되는것일까 ? 적어도 ‘문화적 정체성’이란 측면에서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사회현상인것만은 분명한것 같다.

 

프라이드 치킨, 시럽이 듬뿍 들어간 커피 등 기름에 튀긴 음식이나 단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이런 서구식 음식을 생활화하면 건강에 안 좋은 것뿐만 아니라 수명이 단축된다고 해요.

프랑스 연구원에서 남녀 합쳐 5천 여명을 대상으로

건강상태와 노화 상태, 각종 질병 등을 비교 조사했다고 해요.
그 결과 서구식 식생활을 유지했던 사람일수록 보통 노화 속도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해요.

서구식 식생활에서 벗어나야 고혈압, 당뇨병 등의 만성질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해요.


 

서양인들보다 한국인들의 장은 80cm나 더 긴 체형이기 때문에

식이섬유가 많은 곡류나 채소를 많이 섭취해야 하며 고기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서구식 식생활로 바뀌면서 고기는 더 많이 먹고

찬 음식인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으면서 장이 탈 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해요.

 

그리고 서구식 부드러운 패스트푸드를 즐기면 자연히 비만으로 진행된다고 해요.

여기에 패스트푸드는 각종 화학첨가물이 들어있어서 뇌의 조절 기능을 잃어서

감정조절이 안 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고 하죠.

 

따라서 각종 질병 없이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유기농으로 재배한 곡류와 채소를 주로 먹어야 하고

고기는 일주일에 1~2번 정도만 먹는 것이 좋답니다.

그리고 음식을 조리할 때에도 기름에 튀기기보다는 삶거나 데쳐서

지방섭취를 줄이는 것이 건강해지는 지름길이랍니다. ^^

 

 

  •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 전시 '어머니의 보자기展', '숨결의 연장-허동화展'
2006년 0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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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미술관에서는 한국자수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하는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展이 열린다.

3월 28일부터 5월 28일까지 열리는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1부 전시 '어머니의 보자기'에서는 조선시대 여성들이 만든 우리 옛 보자기와 자수 60여점을, 6월 2일부터 6월 25일까지 2부 전시인 '숨결의 연장-허동화 전'에서는 한국자수박물관 허동화 관장이 옛 직물로 만든 회화작품과 우리 옛 생활 도구를 이용해서 만든 오브제 작품 60여점을 선보일 예정.

1, 2 부로 연이어 진행하는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展은 옛 조상의 보자기와 생활 용품의 가치가 우리 선조의 생양식 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 기법과 구성 양식이 시간을 뛰어 넘어 현대로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성을 보여줄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어머니의 보자기展'에서는 19세기 조선시대 궁중에서 두루 사용되어 각종 물건을 싸거나 꾸미는 데 썼던 궁보, 민간에서 다목적으로 쓰던 상용보(이불보, 옷감보 등)와 혼례시에 썼던 혼례용보를 조각보, 자수보, 자수조각보, 모시조각보, 세모조각보, 네모조각보, 혼합형 보자기 형태로 만나 볼 수 있다.



한 땀 한 땀 바늘 자국마다 우리 어머니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보자기.

희망을 누비며 기쁨을 이어가는 마음이 조각조각 천에 스며든 자랑스러운 우리 보자기.



1988년 서울올림픽, 2005년 세계박물관대회의 피날레 전시, 예술의 나라 프랑스 니스(Nice)의 세계동양박물관 개관전에 초대 된 바 있는 한국자수박물관 소장품인 우리 전통 보자기와 자수는 세계인을 감동시키고 가슴을 벅차게 할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품이다.

얼마 전 '신비의 보자기' 전시라는 이름으로 한국자수박물관의 보자기를 선보인 뉴질랜드의 와이카토 미술관(Waikato Museum) 관장은 조선시대 보자기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해 독보적'이고 '각 보자기에서 엿볼 수 있는 섬세한 스킬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솜씨'라고 극찬했다.



또한 우리의 보자기는 화려하다. 전통 보자기는 색실로 수놓은 자수 보자기뿐 아니라 자투리 천으로 만든 조각보를 통틀어 보더라도 백색 한 가지 색으로 된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오방색을 중심으로 서구 추상회화에서 나타나는 조형성 못지않은 다채롭고 세련된 색채 감각을 보여준다.

이는 1980년부터 현재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가진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의 초대 전시에서 이미 인정받아왔다.

그 일례로, 한 미국 디자이너는 우리 옛 조각보의 디자인 감각이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 미술에 버금간다고 상찬했다. 이는 그동안 하찮게 취급받아온 우리의 옛 보자기가 서양 현대 추상미술의 거장의 작품과 대등한 위치에 오르는 조형성을 인정받은 당당한 예술품임을 말해준다.

선인들의 생활 용품이었던 보자기에서 극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조형 감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점은, 표현 양식의 유사성이 보이더라도 조각보의 조형은 어디까지나 옛 여인이 일상생활에서 솜씨가 있으면 있는 대로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욕심없이 지어 낸 이름 없는 예술인의 성과이고, 우리 옛 여인들의 소담스런 꿈과 감흥, 그리고 사랑의 발로였다는 점이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서 만든 우리 조선시대 보자기와 자수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다.

한편 2부 전시인 '숨결의 연장-허동화 展'에서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보자기를 30년 넘게 독보적으로 수집, 연구한 한국자수박물관의 허동화 관장의 독특한 작품을 감상 할 수 있다.

레나타 루카스(브라질 작가)

지금 보시는 작품은 브라질 작가 레나타 루카스의 '불편한 이방인이 될 때까지' 라는 작품입니다.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 건축물에 개입을 시도한 작품입니다. 저기 보이는 창문을 통해 반대편 아파트가 보이고, 그 아파트에서 사용하는 창문을 그대로 재현하였습니다. 이 창문은 대부분의 아파트에서 사용되는 창문이자 한국 사회의 획일화된 모습을 경계하는 입장을 나타냅니다.레나타 루카스 즉, 그녀의 개입은 일상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이미지나 우리 주변의 환경들, 기존의 상황, 풍경과 건축에 개입을 시도합니다. 물리적 방식을 통해 공간 안으로 개입함으로써 공간과 건축, 규정된 물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녀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2014년에는 한 갤러리의 공간을 파괴시키는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일반적 갤러리의 형태가 아닌 벽을 허물고, 기존의 체제를 바꾸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개입을 한 작품이고, '주민' 이라는 작품은 산책로에 깔려있는 자갈길을 일부 제거해 자갈길 아래 감춰진 시멘트를 드러내는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창문을 통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개입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볼까요?

 

 

 

 

GUSTAVE COURBET

구스타프 쿠르베는 자기 자신을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반란군으로 그리고 싶어 했지만,

사실 그는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가족들 역시 예술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이해해주고 그가 안정적인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재정상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40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갔지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1850년 전후로 자신의 고유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천사를 그려 달라는 주문에 " 실제로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수 없다"라고 말한 일화는

사실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을 잘 드러낸다.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했고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 큰 명쾌한 구성으로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 만남, 혹은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1854 >

19세기 중엽 프랑스는 아직도 혁명 중일 당시.

오르낭이라는 이름없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파리로 상경해

부모님은 법률가가 되라고 했건만 그저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구스타프 쿠르베.

보통 구스타프하면 클림트가 나오는 것이 더 익숙하지만

서양미술사에서 구스타프 쿠르베는 구스타프 클림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물이다.

더구나 이 그림 < 만남, 혹은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는 서양미술사에 큰 획은 그은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대체, 왜 이렇게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작품이 유명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걸까?

정말 이 그림은 '볼거리'는 없다.

19세기 파리의 살롱에 걸렸던 대부분의 그림들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적인 알레고리를 통해 교훈을 전달하는 것 같지도 않다.

등장인물들이 특별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배경을 이루는 풍경도 그저 평범한 시골길일 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나 이 그림의 특별한 점은 바로 그 '평범함'에 있다.

이 그림의 특별한 점은 바로 그 '평범함' 이다.

오른쪽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등산복 차림을 하고, 언덕을 막 걸어 올라 더러워진 신발을 신은 채

무식하게 긴 작대기를 짚고 있는 사람이 바로 쿠르베 자신이다.

왼쪽 중앙에 트랜디한 신사복을 입고, 저 멀리 지나가는 마차를 타고 막 도착해 흙이 묻지 않은 맵시있는 구두를 신은 채,

우아하게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람은 쿠르베의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Alfred Bruyas, 1821~1877)다.

그의 오른쪽에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하인이, 왼쪽에는 늠름한 개 한 마리가 양쪽에서 브뤼야스를 보좌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쿠르베가 그의 후원자 일행을 동네 언덕에서 우연히 만나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라고 말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눈다는 내용이다.

얼마나 특별한가. 이렇게도 ‘평범한’ 소재를 예술작품이라고 그린 것이…….

실제로 이 그림이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시만 하더라도 미술계의 아카데미즘은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등의 규범화된 장르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쿠르베가 내놓은 이런 장르의 그림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평범함’ 뒤에는 화가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잘 보라.

쿠르베는 허름한 등산복 차림에 무거운 화구통을 짊어지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 자신의 작품을 사주는 후원자를 만났어도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다.

인사를 하면서도 턱수염은 치켜 올라가 거만할 정도로 당당해 보인다.

반면 부자 후원자는 모자를 벗으며 점잖게 인사를 건네고 있지만 좌우로 그를 지켜주는 사람 혹은 개를 대동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돈은 있으나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쿠르베는 이 그림에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富)”라는 부제를 붙였다.

예술가는 돈은 없지만 천재적인 존재고, 그러니 돈 많은 부자들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 세느강변 둑의 아가씨들, 1856-1857 >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유사한 스캔들을 일으킨 그림이다.

1857년 살롱전에 출품되었지만 야외에 누워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음란하고 천박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기존의 미화된 여인과는 판이하게 다른 화법으로 당대의 풍속을 반영한 사실주의에 충실한 작품이다.

<화가의 아틀리에, 1855 >

쿠르베는 이 대작을 통해 화가로서의 정체성과 화가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젖먹이는 어머니, 옷감파는 유대인, 부르주아, 노동자, 창녀를 통해 사회의 계급적 불평들을 폭로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자신의 사실주의 노선을 지지했던 프루동, 보들레르 등 사상적 지지자를 그려 넣었다.

중앙 화폭에 자연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쿠르베.

자연의 진슬을 캐는 연구자라는 화가의 우월적 지위를 나타내며 어린아이는 창조의 영감, 누드모델은 진실을 의미한다.






주위에 널려 있으나 발견하지 못하는 평범한 ‘진실’을 그리다


그의 그림은 ‘아름다움’보다는 꾸밈없는 ‘진실’이 들어있다.

그저 특별할 것 없는 풍경과 소박한 옷차림이 웅장한 자연이나 화려한 의상보다 진실함을 담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남프랑스 특유의 따사로운 햇살과 그 햇살이 만드는 땅 위의 그림자따위나,

그리고 아무렇게나 피어난 듯한 길거리의 들풀등이 참 진실해 보인다.

우아한 포즈도 유려한 선도 인상적인 색채도 없어 ‘볼거리’가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가깝고 친근하다.

쿠르베는 부르주아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널려 있으나 발견하지 못하는 평범한 ‘진실’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이 서양미술사상 혁명적인 작품 중의 하나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부르주아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낮추고 사실주의에 입각해 그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획기적으로 표현했던 작품들, 구스타프 쿠르베의 정신이 깃든 작품들은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나는 그림으로 먹고 살면서 단 한 순간이라도 원칙을 벗어나거나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네.

또 누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아니면 쉽게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네.”

- 쿠르베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