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미술 -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4; 19세기의 미술 -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이후 자유주의 사상과 왕권의 붕괴 등으로 예술가들이 자유로이 자신의 개성과 주관을 표현하기 시작하여 다양한 회화양식이 나타났다.

신고전주의

회화, 조각, 건축, 가구에서 엄격한 고전양식을 부활시켰던 신고전주의는 장식적인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동으로 나왔으며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양식이며 고대의 역사나 신화에서 나온 진지하고 서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만 했다. 당시 사회가 가볍고 경박하며 쾌락 추구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애국적이고 도덕적인 주제를 강조하였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파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들이 우선시 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 폼페이와 헤라큘레니윰, 파에스툼 등의 고대건축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루브르 박물관, 파리

“미술은 대중을 교육시키는 데에 공헌해야 한다.”는 다비드의 가치관과 함께 로코코 양식의 죽음과 신고전주의의 탄생을 알린 작품이다.

<마라의 죽음>, 1793, 벨기에 왕립 미술관, 브뤼셀

혁명의 순교자를 현대의 그리스도처럼 묘사하고 있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1804, 루브르 박물관, 파리

교황 피오 7세의 입회하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고 있는 황제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과장되고 화려한 양식으로 변화시켰다. 개개의 인물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위엄과 장대함 또한 갖추고 있다.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1780~ 1867)

< 브로그리 왕자비의 초상>, 1853,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앵그르의 깨끗하고 정확한 형태, 이상화된 아름다움, 균형 잡힌 구성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적상을 보여주고 있다.

<오달리스크>, 1814, 루브르 박물관, 파리

빛나는 피부결과 윤곽선이 분명한 단순한 형태에서 앵그르 회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관능적인 우아함을 강조하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등을 길게 그렸다.

<터키탕>, 1863, 루브르 박물관, 파리

여성 누드의 대가였으며 도자기 같은 살결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였다. 19세기 당시 동양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1804

앵그르, <터키탕>, 1863

앵그르, <오달리스크>, 1814

낭만주의 (Romanticism) -느낌은 모든 것이다.” (독일작가 괴테)

1800~1850년 사이에, 이성을 중시했던 신고전주의에 반발하고 일어난 낭만주의는 감수성을 특히 중요시 했다. 작가와 화가 모두 이성적인 객관주의보다 감성과 직관에 의존했으며 자신의 정열이 이끄는 대로 극한까지 추구해나갔다.

낭만주의 예술의 작품 내용과 형식의 특징

1. 꿈속의 세계나 무한하고 신비적인 예감을 동경한다.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며 현실을 경시하는 풍조도 생겨난다. 알려지지 않은 먼 곳, 이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 강해진다.

2. 작품을 만드는 데 전통적인 법칙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예술매체나 장르간의 차이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예술은 음악, 회화, 문학, 건축의 한계를 벗어나서 종합예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3. 개성, 개인적 감정과 기분을 존중한다. 따라서 작가가 마음대로 창작할 수 있는 자유의 여지가 넓어진다. 그러나 작가의 자아가 주어진 현실을 넘어 무한히 확대되면서 현실을 경시하게 되는 경향도 있다. 심지어는 자아로 인하여 모든 외적 세계가 만들어 졌다는 관념까지 생겨나기도 한다.

4. 신비스러운 종교적 감정, 화려한 기사 생활과 로맨스, 무영담 등을 소재로 끌어낼 수 있는 중세를 동경한다. 전설, 민요, 동화, 민담들이 정리되어 소개되었고 이들은 무한한 시정의 원천이 된다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 1800,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왕가일족이 잘난체하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19~1823,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사투르누스는 그리스의 크로노스 신을 일컫는 로마의 이름이다. 크로노스는 아들 중 한명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신화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악마성, 폭력, 인간성의 타락을 상징하는 의미가 크다.

<180853>, 1814~1815, 프라도 미술관

5천명의 스페인 시민을 학살한 사건에 대한 전쟁의 잔혹함에 대한 분노를 다타내고 있다.

제리코(Theodore Gericault,1791~1824)

<메두사 호의 뗏목>, 1818~19, 루브르박물관, 파리

당대의 정치적 과분을 일으키고 있었던 배의 조난 사고를 약 7m×5m되는 거대한 캔버스에 묘사한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세네갈로 프랑스인들을 나르던 국영 이민선, 메두사 호는 실력도 없이 인맥으로 정부에 의해 선임된 선장의 무능력으로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조난당했다. 적도의 태양 아래서 12일 동안이나 물도 식량도 없이 표류하며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생존자는 149명의 승객 중에 오직 15명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주제의 생생한 묘사보다 정부의 무능력을 비난하는 정치적 의미 때문에 이 작품은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낭만주의의 정열이 처음으로 과거를 이상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진실을 포착하는 데에 쓰였던 것이다.

들라크루아 (Eugiene Delacroix, 1799~1863)

<키오스 섬의 학살>,1824, 루브르박물관, 파리

키오스 섬에서 터키인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작한 것이었다.

<사르디나팔의 죽음>,1827, 루브르박물관, 파리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단적인 것을 추구한 들라크루아는 전쟁에서 패배하자 종복들에게 자신이 자살하기 전 모든 소유물을 파괴할 것을 명했다. 왕의 후궁과 말 들이 학살당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그리고 있다. 불꽃같이 붉은 배경 위에 몸부림치는 육체들이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다 .강렬한 색조, 생생한 명암의 대조, 활달한 화필로 그려진 격렬하게 움직이는 듯한 형태이다.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 ; 자연 그 자체 - 실체의 시골풍경

<건초마차>, 1821, 국립미술관, 런던

터너(JMW Turner, 1775~1851) 색채가 주제 - 자신의 상상속의 격렬한 폭풍우

<,증기 그리고 속도감 - 위대한 서부행 철도>, 1844, 국립미술관, 런던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관계에 대한 내적 통찰을 보여주고 자연의 모방을 통하여 이를 알레고리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을 통일시키려는 그의 낭만주의적 풍경은 자연에 숨겨진 신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인간이 그 의미를 나눠 갖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자연은 항상 변화를 겪는 인간에 대해 변치 않는 이상과 영원성을 대변한다.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 1800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근원 : 질서, 엄숙함

분위기 : 고요하고 이성적, 정적, 객관적

주제 : 그리스 · 로마 역사, 신화

기술 : 색채가 아닌 소묘와 선을 중시.

붓자국이 전혀 없음

미술의 역할 : 도덕성을 고양하고 영감을

주는 것.

화가 : 자크 루이 다비드, 앵그르

가치관 : 직관, 감성, 상상력

영감의 원천 : 중세의 바로크 시기.

서아시아와 극동의 나라들.

기질 : 주관적, 자발적, 비순응적, 동적,

자유분방

색채 : 무제한적. 깊이 있고 다채로운 색채

주제 : 전설, 이국적인 것, 자연,

폭력적인 것

장르 : 영웅적인 투쟁에 대한 그림,

풍경화, 야생동물화

기법 : 재빠른 화필, 강한 명암대조

구성 : 사선을 주로 사용

화가 : 제리코, 들라크루아, 컨스터블,

프리드리히

501 위대한 화가 외

클로드 모네

[ CLAUDE MONET ]
감상자를 예리하게 응시하는 <베레모를 쓴 자화상>(1886)

감상자를 예리하게 응시하는 <베레모를 쓴 자화상>(1886)

원어 Claude Oscar Monet(원어)
출생-사망 1840년 11월 14일 ~ 1926년 12월 5일
출생지-사망지 프랑스 파리 - 프랑스 지베르니
예술양식 직접 눈으로 관찰하며 그린 색채가 풍부한 풍경화와 구상화, 일본 목판화에서 영감을 받은 구도, 단속적 화풍
작품 미술작품 감상하기

클로드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르아브르로 이사했다. 르아브르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그가 후일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곳에서 노르망디 바닷가와 시골을 탐험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급격히 변화하는 날씨가 바다와 육지에 미치는 효과를 관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방화가 외젠 부댕의 회화 기법이 모네의 표현법에 평생토록 영향을 주었다. 부댕은 모네에게 야외에서 직접 눈으로 관찰하며 그리는 '외광회화'의 개념을 소개해주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파리로 간 모네는 전통주의자인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들어가 후일 인상주의 화가 동료가 될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프레데리크 바지유를 만난다. 모네는 다수의 풍경화, 바다 풍경화, 초상화들로 연례 살롱전에 통과되어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었으나, 대규모의 좀 더 도전적인 작품들은 거절당했다. 살롱전에서 <정원의 여인>(1866)과 같은 작품들이 거절당하자, 쓰디쓴 실망감을 느낀 모네는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카미유 피사로, 르누아르 등과 함께 무명미술가협회를 설립했다. 이 협회는 1874년에 처음으로 독자적인 전시회를 개최했다.

 

<양귀비>를 비롯한 일부 수작들이 아르장퇴유에서 그려졌다.

모네가 이 무명미술가 협회전에 제출한 <인상, 해돋이>(1873경)는 외관상 마무리가 덜 되어 보여서 평론가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이 그림의 제목을 차용하여 무명미술가 협회전을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고 조롱하는 혹평을 했다. 하지만 무명미술가협회의 화가들은 낙심하지 않고, '인상주의자'라는 야유 섞인 용어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러한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주도권을 잡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새롭고 매우 성공적인 작업 방식을 연마해나갔다.

모네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과 장소들을 그림의 소재로 채택하곤 했다. 자신의 두 아내를 모델로 삼았고, 정원, 파리의 건물, 노르망디 해안과 전원,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던 지베르니에 있는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모네가 살던 전원적인 환경은 친구들을 끌었다. 마네와 르누아르 등이 파리의 혼잡을 피해 모네의 집에서 잠깐의 조용한 휴식을 즐겼다. 모네는 19세기 초부터 바르비종파의 관례를 따랐으나, 야외에서 풍경을 대충 스케치한 후에 화실에서 그림을 마무리 짓던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달리, 모네는 대규모 캔버스에 그릴 때조차도 야외에서 모든 작업을 끝마쳤다.

자연광 속에서
자연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포착해내고 싶어 했던 모네는 서양 풍경화의 양식에서 벗어나 동양 미술,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 목판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각의 과정과 그것이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에 매료되었던 모네는 '건초더미'(1888~1894), '포플러'(1892), '루앙 대성당'(1892~1894)과 같은 연작 그림들에서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이 작품들은 똑같은 풍경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을 각기 다른 그림들로 그린 것이다. 명암이 마치 고체처럼 만질 수 있는 실체를 가진 것으로 보여, 회화 역사상 이정표가 되는 작품들이다. 모네의 후기 활동은 지베르니에 있는 수련 연못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품들은 초대형의 벽화와 같은 캔버스 형식을 취했다. 식물들과 물이 색의 추상적인 환영 속에 녹아있고, 물감을 십자형으로 두껍게 칠하여 독특한 질감을 창조했다. 모네가 죽은 직후에, 프랑스 정부는 튈르리 공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모네의 마지막 수련 연작을 설치했다.

자연광을 탐구한 작품들 중 하나인 <국회의사당>

자연광을 탐구한 작품들 중 하나인 <국회의사당>

인상주의의 탄생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3)는 인상주의의 발달 과정 중에 그 이름을 지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의 주제는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항구를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모네는 밝은 오렌짓빛 태양이 희미한 바다 안개 속을 뚫고 떠오르는 것과 햇빛이 수면에 반사되는 것을 표현함에 있어 느슨하고 의례적인의 화법을 구사했다.
파리 풍자잡지 『르 샤리바리』의 미술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1874년에 열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독자적인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보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인상 - 그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상을 받았고, 저 그림 속에는 어떤 인상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한 솜씨란 말인가! 저 바다 풍경이 걸리기 이전의 벽지 상태가 저 바다 풍경화보다 더 완전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평가에 흔들리지 않았다. 후일에, 모네는 지금은 유명해진 해돋이 그림의 제목을 선정하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풍경화는 단지 인상일 뿐이고, 순간적인 것일 뿐이기에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유래했다. 알다시피 나 때문에 우리에게 붙게 된 꼬리표이기도 하지만, 나는 르아브르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안개 속의 태양을 그리고, 배의 돛대들을 전경에 그려 넣은 그림을 보냈다. 그림의 제목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르아브르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담을 수 없었기에 "<인상>이라고 적으시오"라고 말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미리 머릿속에 그림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빛의 화가, 모네의 그림 같은 자연주의 식탁

[福] 아주 행복한 생활 2014/05/12 19:02

빛의 화가, 모네의 그림 같은 자연주의 식탁



매일 밤 자정 1920년대 파리의 명소로 타임슬립 하여 황홀한 로맨스를 펼치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는 두 주인공의 대화로 시작합니다. "여긴 모네가 그림 그리고 살았던 곳이야. 시내에서 30분 거리고. 우리가 여기서 산다고 생각해봐."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이 장소는 '모네의 정원'이란 애칭을 가진 지베르니. 그런데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추구하는 21세기형 라이프스타일이 이미 한 세기 전, 바로 이 지베르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지베르니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며 절정의 예술을 꽃피웠던 예술가, 클로드 모네의 이야기입니다.




<클로드 모네의 집과 정원 지베르니 -http://giverny.org/->


풍경이란 오직 인상일 뿐



1874년 모네는 마네, 드가, 피사로 등 동료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곧 세간의 조롱거리고 전락하는데, 미술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평은 이랬습니다.


"인상- 그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상을 받았고, 저 그림 속에는 어떤 인상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한 솜씨란 말인가! 저 바다 풍경이 걸리기 이전의 벽지 상태가 저 바다 풍경화보다 더 완전하다."



<인상, 해돋이(Impression : Sunrise) 출처 : 위키피디아>

 



가장 집중적인 포화를 맞은 것은 모네의 그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르아브르 항구를 그린 <인상, 해돋이>는 노 젓는 뱃사공 뒤로 햇빛으로 물든 금빛 수면이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모네는 "풍경이란 오직 인상, 즉물적인 인상이라서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지만,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된 작품만을 인정하던 시대에 형태도 색채도 두루뭉술한 모네의 그림은 놀림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인상'이라는 단어에 '미완성'이란 의미가 내포되었음을 이용해 르루아는 경멸적인 기사를 썼고 모네와 동료들은 조롱 섞인 '인상파'란 이름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하지만 모네는 '인상파'란 이름을 받아들이고 '빛은 곧 색채'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고집스럽게 화풍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지독한 혹평을 받았던 작품, <인상, 해돋이>는 '르네상스 이후 최초의 총체적 미술 혁신'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인상파' 미술의 기원이 되었으며 르루아가 작명한 '인상파'란 이름은 '불명예스런'에서 '가장 명예로운' 이름으로 반전을 이룹니다.



<모네가 그렸던 '수련' 연작 중 하나. -출처 : http://www.interagir.com->



인상주의 탄생 이후 모네는 미술사에 또 한 번의 획을 긋게 되는데 그가 시도한 '연작(series)'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일한 모티브를 비슷한 구도와 다른 분위기로 반복해 그리는 연작 형식은 칸딘스키, 몬드리안 같은 추상화를 거쳐 앤디 워홀의 팝 아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며 20세기 미술을 연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그 중 <수련>은 그의 대표 연작이자 최고의 역작입니다. 그는 200여 점이 넘는 <수련>을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에 그리며 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화폭으로 옮겼습니다. <수련> 연작을 그릴 당시 모네는 하루 종일 빛을 보고 그림을 그렸던 탓에 화가로선 치명적일 정도로 백내장이 악화되어 있었고, 아내와 아들, 또 평생 동지였던 르누아르까지 잃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한 인간의 고뇌와 상실감은 예술가의 열정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모네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연작을 마무리한 1926년 12월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지베르니의 화가, 정원사, 그리고 미식가



<길이 6m에 달하는 '수련' 연작 -출처 : 위키피디아->



모네가 1897년부터 1926년 사망할 때까지 매달린 <수련>은 길이 6m란 어마어마한 스케일 외에도 감상할 때 선 자리에서 열 걸음 이상 떨어져서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독특한 감상법으로 유명합니다. 과연 모네는 어떻게 이런 걸작을 탄생시킨 것일까요? 비밀은 바로 '지베르니'에 있습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1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센 강둑의 조그만 동네입니다. 명성을 얻기 전 모네가 파리에서 그림을 그릴 때 잠깐 머물며 매혹되었던 곳으로 만년에는 아예 정착해 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전생에 걸친 유화 작품 2천여 점 중 350여 점이 이곳에서 완성됐으며, 문제의 2,150여 점에 달하는 <수련> 연작이 탄생하고 완성된 것도 이곳에서입니다.


재미있게도 지베르니는 미술사의 거장과 함께 모네에게 재미있는 명성을 하나 더 선물했는데, 정원사란 타이틀이 그것입니다. "나는 정원 가꾸기와 그림 그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만큼 모네는 지베르니 정원 가꾸기에 열심이었습니다. 꽃밭과 연못을 만들고 수상정원을 꾸미는 한편, 평소 원예잡지를 구독하며 지구촌 곳곳에서 사온 꽃나무와 식물들로 새로운 조경을 시도했습니다. 그 실력이 오늘날의 원예사들이 봐도 감탄할 정도라죠. 출장을 갈 때면 정원사들에게 일일이 메시지를 남겼고, 아내에게는 꽃들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고 합니다.



<모네의 정원 -http://giverny.org/->



물론 모네의 이런 정원 가꾸기에는 인상파로서의 숙명이 뒤따르긴 합니다. 이 정원에서 그는 이젤 3~4개를 동시에 펼쳐놓고 하루 종일 작업을 하는 등 마음껏 작품활동을 즐겼던 것입니다. 인상주의 화가에게 자연은 영감의 원천. 평소 야외에서 그림 그리기를 즐겨 뙤약볕이나 파도, 모래바람은 물론 비 오는 날에도 마다치 않던 모네였으니,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는 지베르니는 천혜의 피사체이자 독창적인 색감의 팔레트, 그만의 자유가 보장된 완벽한 아틀리에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네는 이 아름다운 정원을 혼자 독식하진 않았습니다. 정원이 꽃과 푸른 녹음으로 휩싸이면 그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즐겼습니다. 덕분에 모네의 정원은 인상파 화가들뿐만 아니라 조각가 로댕,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등 당시 문화 예술계, 정치계를 휘어잡던 걸출한 인물들이 드나들며 영감을 얻고 화합과 소통을 하던 성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자연 속에서 키운 미각



<모네의 주방 -출처 : http://www.galenfrysinger.com/->



이런 지베르니 문화를 꽃피우는 데 정원 못지 않게 커다란 역할을 한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모네의 식탁. 사실 모네는 미식가로 꽤나 까탈스럽고 완벽한 식성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맛있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며, 음식은 맛있게 먹이 위해 먹는 것이라고 여긴 진정한 식도락가였습니다. 화가로서 명성을 얻지 못하던 시절에도 요리사를 두 명이나 두었죠.


보관법이나 운송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신선한 식재료를 다양하게 구하지 못하던 시대였음에도 식탁에는 매일 신선한 채소가 올라와야 했고, 푸아그라는 알자스 지방산, 송로버섯은 페리고르산 식으로 재료의 품종부터 신선함, 맛을 세밀히 따졌다고 합니다. 또 맛있게 먹은 금식은 요리 수첩에 조리법을 기록하기까지 했는데 그렇다고 직접 요리를 한 것은 아닙니다. 부엌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면서 맛있게 먹었던 레시피를 요리사에게 던져주곤 완벽히 재현하라고 요구했던 인물, 그가 모네였습니다.



<작은 만찬회가 열리곤 했던 모네의 식탁 -출처 : http://giverny-impression.com->



이런 모네의 까다로운 식성 덕에 모네 가족이 지베르니에 정착해 정원을 가꾸는 것과 함께 가장 공을 들인 게 바로 채소밭을 일구는 것이었습니다. 모네는 완벽한 채소밭을 꾸미기 위해 품종 카탈로그를 끼고 살았고, 지베르니의 기후와는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품종은 기필코 채소밭에 심고야 말았습니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끊임없이 그림 그리는 데 몰두했던 그였지만, 하루에 한 번은 채소밭을 살피러 캔버스 앞을 떠났다고 합니다. 또한 마음에 드는 씨암탉이나 씨오리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 사육장을 돌며 축사를 채웠고, 하늘빛과 파란색으로 꾸며진 그의 부엌은 커다란 화덕과 아이스크림 제조기 등 당시로선 최신식 각종 요리기구로 꾸며졌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조달된 산지직송(?)의 신선한 재료에 오랫동안 고급 식당이나 유명인들과 식도락을 즐기며 쌓은 미식 견문은 모네의 식탁을 소박하지만 풍성하고, 예의와 격식을 갖춘 최고의 만찬으로 완성되어 지베르니를 찾는 수많은 손님들의 입맛을 매혹시켰습니다.


걸작 <수련> 연작을 탄생시키고 사시사철 꽃으로 둘러싸여 있던 모네의 그림 같은 정원 지베르니는 모네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의 빈곤한 영혼과 까다로운 식도락을 완벽히 채워준 건강한 텃밭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지베르니의 풍요로운 결실로 완성한 그 자연주의 식탁은 모네가 수많은 예술가와 소통할 수 있었던 오감이 살아 있는 창구,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자연'이란 정체성이 투영된 그의 삶 자체이자 또 하나의 연작이 아니었을까요?




출처 : 웹진 Pioneer 134호(5월호) 천재의 식탁

 

 

 

 

 

 

 

 

[모네의 해돋이를 위한 침묵]


황 전


친구에게,

며칠 전 자네가 모네의 [해돋이] 그림 평을 내게 부탁하면서 이런 말을 했네.

“모네가 해돋이를 출품한 그날부터 많은 그림 평론들이 있었겠지. 물론 그러한 평론들은 그림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네. 왜냐하면 이 해돋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네. 자네라면 이 의문을 풀어 줄 것 같아서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 걸세, 부탁하네.” 하고


친구여, 지금도 자네의 간절한 음성이 가슴을 파고

들기는 하나 자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네.

친구여, 화가들에게는 평론가가 필요하기는 하나 그 평론은 객관적이어서 지식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자네같이 내적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된다네. 친구여, 한번 생각해 보게나. 누가 있어 예술작품을 평론한단 말인가?

물론 평론을 통해서 작가의 가치를 올리고 그림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좋은 면도 있다네.


그러나 진정한 화가는 그러한 것에는 관심 없다네. 오직 순간순간을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비밀을 드러낼 뿐이라네.

친구여, 생각해 보게나. 누가 그림을 보고 작가의 존재 비밀을 평론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할 수 없다네.

미안하네.

자네가 오해를 할까봐 이런 긴 서두를 쓸 수밖에 없네.

친구여, 사실 나도 자네처럼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물안개가 뼈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네.

친구여, 자네와 내가 똑같이 그런 경험을 했다면 아마 그것은 우리가 젊은 시절에 흑산도(黑山島)에 잠시

여행을 갔다가 생긴 일 때문인 것 같네. 그때 사건을 적어볼까 한다네. 이 글을 본다면 자네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네.

우리가 흑산도에 도착해보니 주변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특히 주변에 많은 섬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지. 그래서 우리는 이른 아침에 섬들을

구경하려고 해돋이 그림에 그려져 있는 그런 배를

빌려서 서툰 노를 저어가며 방파제를 벗어나

섬들을 향해 가고 있는데, 눈으로 보기에는

가까운 섬들이 막상 노를 젓고 가보니 생각보다

훨씬 멀리 있는 섬들이었지. 그때 우리는 젊어서 두려움이 없었지.

그래서 무작정 섬만 바라보며 노를 저어 가는데 갑자기 안개가 밀려오면서 우리는 순식간에 안개 속에 갇혀 버렸잖아. 누군가 바다는 변덕쟁이라더니 그때 우리가 정말 실감 했었지.

그때 우리는 정말 막막했었네.

밤은 별이라도 떠 있는데 태양이 아직 떠오르지 않는 이른 아침안개는 우리들을 아주 작은 공간에 집어넣고 숨만 겨우 쉬게 만들 뿐,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노도 젓지 못하고 멍하니 바닷물만 바라보고 있었지.

사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네. 우리는 젊은 나이에 처음으로

서로 오랜 침묵을 했었지.


우리의 침묵이 서서히 굳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안개가 옅은 연분홍색으로 물이 들면서 해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었네.

해풍이 점점 세차게 불어오자 안개가 서서

걷히기 시작하면서 붉은 태양이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것이 보이는데 정말로 장관이었잖아!

나는 그때처럼 태양을 아름답게 본 적은 없었다네.

아직은 완전하지 못한 해맑은 태양이 옅은 물안개와 해풍에 의해 서서히 걷히고 있는 안개에 젖어 있는 모습에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었지.


친구야, 태양이 점점 떠오르면서 그 붉은 빛에 젖어가는 옅은 안개와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그리고 파란 바닷물 빛, 이러한 빛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모네가 그린 해돋이를 그대로 연출하고 있었잖아.

친구야, 우리가 모네 [해돋이] 그림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은 해돋이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해돋이 그림과 같은 상황에 있었던 추억 때문이라네.

친구여, 나는 모네의 해돋이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모네가 해돋이를 그릴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아주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몇 자

적어봤네.


아마 모네는 많은 화가들이 부유층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그린 그림인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같은

그런 틀의 그림들, 다시 말하면 그러한 그림들이 유행이란 이름하에 안개처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눈을 멀게

하여 고정된 시각을 갖게 하고 사람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무엇인가를 알고는 있었네.

그러나 그것을 사람들에게 무엇으로든 보여줄 수가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바다로 나가 해돋이를 보고나서 그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자 그 유명한 인상 해돋이가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네.


그래서 모네의 해돋이를 보면 존재의 비밀이 붉은 태양으로 승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네.

모든 사물들이 단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해가는 에너지 파장에 자신의 존재 비밀과도 같은 태양의 파장을 섞어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비밀까지 드러내 보이려는 참된 화가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네.

나는 모네를 좋아 하지만 그가 남긴 말을 더 좋아 한다네.


“직접 경험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면,

나는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친구여 명심하게. 이러한 의지가 없으면 결코 [해돋이]와 같은 걸작을 그릴 수가 없다네.

친구여, 자네 덕분에 옛 추억과 모네의 해돋이를 다시 생각하게 되어 기쁘다네.

 

 

 

* 모네 수련연작 :: 수련연못/청색수련/흰색수련연못 작품해설

모네(Claude Mnet, 1840~1926)는 인상주의 화가다.

모네는 모든 그림의 주제를 "빛"으로 삼고,

보이는 모든것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모네의 가장큰 업적으로 여겨지는 연작은

1890년대 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졌다.

건초더니, 포플러, 루앙대성당, 런던풍경,

베네치아 풍경등을 연작으로 그렸고,

그의 나이 57세인 1897년부터 86세로 사망할때까지

수련연작에 매달렸고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모네의 연작이 시작된 계기는 바로 1890년에

모네가 자신의 자녀들과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지베르니에 정착하여 정원의 꽃, 나무,

연못 등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였다.

이때 모네는 직접 정원을 가꾸고 수련과 수생식물,

연못위에 일본식 다리를 짓고, 꽃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정원에 애착과 열정을 보이면서 모네의 작품의

양상이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모네는 수련연작을 제작하였는데

수련연작의 개수는 250점에 달한다.

사망직전까지 백내장으로 시력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작품들이 추상적으로 단순화 되는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네의 연작중 '수련연작'은 단연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2009개정교육과정 의견-국어 -짜장면, 짬뽕, 탕수육 에 관하여

 

1. (26쪽)이야기의 배경이 아이들의 학교일상에서 벌어진 상황이라는 측면에서

도시락, 커피병에 담아 온 짜장의 등장은 학교급식이 일반화된 요즈음 현실감이 떨어진다.

 

2. (24쪽)의 다음 글은 지나친 복문으로 3학년 단계에서 상황 이해가 어렵다.

종민이가 소변기 앞에 서서 지퍼를 내리고 있을 때, 덩치가 제법 큰 아이가 화장실 소변기를 향하여 소리치며

왕이라고 정한 자리에 섭니다.

 

3. (31쪽)공부한 내용 정리하기에서 1번의 '인물의 마음을 생각하며 실감나게 읽어 봅시다' 에서 제시된 보기가

대체로 감정의 톤이 높은 예로만 이루져 있다.

대안으로

"종민아 네가 참아"

"나도 짜장이 좋아"

등의 보기가 추가 되면 다양한 인물의 감정상태를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