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지금 착한 척 하는 거 잖아요!"
긴 기다림 뒤에 오는 것
텍스트만보기 안준철(jjbird7) 기자
그해 겨울은 너무 길었다. 당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여름조차도 한낮이 지나면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산간지방으로 이사를 간 까닭이었다.

냇가에서 동무들과 함께 멱을 감거나 천렵을 즐기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던 황홀한 여름이 끝나자 가을은 낯선 손님처럼 잠깐 다녀갔을 뿐, 곧바로 매서운 겨울 추위가 몰아닥쳤다.

수은주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한 겨울에는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었다. 마당에 나가 세수를 하고 나면 머리카락 끝에 고드름이 달려 있기도 했다.

행주로 밥상을 닦으면 물기가 금세 얼음으로 변하여 반찬 그릇이 상 위에서 춤을 추었다. 방안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차가운 냉골을 덥힐 나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겨울이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겨울이 아니라면 어찌 하늘에서 하얀 쌀가루 같은 축복의 눈이 하루 온 종일 펑펑 쏟아져 내릴 수 있었겠는가. 동무들과 패를 지어 눈싸움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하늘에서 막 내려오는 눈을 받아먹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을 따서 깨물어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꽁꽁 얼어붙은 논에서 썰매를 타거나 팽이를 치며 놀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삶아놓은 고구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별스러운 즐거움도 추운 겨울이 가고 어서 봄이 와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앞지르지는 못했다. 우리는 햇볕이 내리쪼이는 따뜻한 양지쪽에 앉아 돋보기로 검은 천이나 종이에 하릴없이 구멍이나 내면서 봄의 전령사인 강남 간 제비가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긴 기다림은 내 생애 처음이었지 싶다. 그 전에는 운동회나 소풍날을 기다리며 몇 밤을 뒤척인 것이 고작이었으니.

다행히도 그 기다림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자연의 섭리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겨울이 춥고 길어도 봄은 끝내 우리 곁에 와 주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렵 나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믿음 하나를 키워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까마득해 보이는 것도 기다림이 깊어지면 돌아오리라는 따뜻한 확신 같은 거 말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기약도 없이 마냥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그 기다림을 그만두어야 할 때를 생각하는 것만큼 교사에게 슬픈 일도 없다.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내 정성이 부족해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경우라면 신의 사랑으로 게으르고 못난 나를 수선하기만 하면 된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런 일이 부지기수였지 않은가. 내가 변하지 않아서 아이들이 돌아올 수 없었던 일들이.

교사의 태도가 변해도 아이들의 모습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그들의 삶이 이미 몇 단계의 기계적인 과정을 밟아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삶의 어떤 과정에서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 최초의 순간으로 돌아가 상처를 매만지거나 어긋난 것들을 바로 잡아주고 싶어도 나 같은 평범한 교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다려주는 것, 좀더 오래 기다림의 끈을 놓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니 기다림에 인색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다만, 그 기다림의 신호를 끊임없이 아이에게 보내줄 필요가 있다. 신호를 보내야 저편에서도 신호가 올 것이 아닌가.

며칠 전, 드디어 그 신호가 왔다. 학교 축제를 앞두고 춤 연습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한 아이가 내게 시디플레이어를 빌리러 온 것이다. 그 아이는 내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

"시디플레이어가 없어서 연습을 못하겠어요."

그 아이가 담임도 아닌 내게 와서 도움을 청하는 이유는 내가 올해 학교 축제 업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달 남짓 냉전중인 아이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화해의 청신호로 받아들일 만하지 않은가. 물론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무리 다정한 말로 다가가도 곁을 주지 않던 아이가 제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어쨌거나 나는 아이에게 시디플레이어를 챙겨주고 친절하게 연습장소까지 알선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단둘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체육관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운동장의 흙길이 새삼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 바람에 용기를 내어 무슨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모처럼 찾아온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불안감만 아니라면 나는 아이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금도 내가 널 미워한다고 생각하니?'

언젠가 나는 아이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아이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미워하잖아요!"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나인지 허공인지를 노려보고 있는 아이를 향해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미워하지 않아. 아니, 널 많이 아끼고 사랑해. 널 미워한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하겠어?"

그때 아이의 대답은 내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선생님, 지금 착한 척 하는 거잖아요!"

고백하자면 나는 아이를 미워했던 적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잡담을 하거나, 거울을 보거나, 휴대폰을 만지거나, 잠을 자거나를 번갈아 반복하는 아이를 마냥 예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하자면 그 아이에 대한 미움은 교사의 일상 같은 것일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학교에는 교사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인격적인 지도를 낯설어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것은 혹시 아이들이 누군가로부터 긴 기다림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요즘 아이들이 봄을 애타게 기다려본 추억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긴 기다림 뒤에 오는 것을 뜨겁게 얼싸안은 기억이.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보냅니다.
2006-12-0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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