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논술 ‘숨은 해법’
■ 정석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해주는 위로의 말이 있다. 논술에서 학생들이 자기의 견해, 주장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성적에 의한 ‘줄 세우기’만을 강요하다 보니, 시험 중심의 암기식 학습만이 ‘공부’가 되었고, 사고력·논증력·창의력·문장력 등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술에 필요한 여러 능력들의 부족함은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논리가 실제로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로해줄 수는 없다. 특히 수험생들은 몇 달 후에 논술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심란한 마음을 위로하는 말보다는 어려운 과제를 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다.
논술에서 ‘주장하기’는 여러 형태로 출제되고 있다. ‘자신의 견해를 밝히시오.’,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시오.’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으나 결론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장 부분은 학생들의 취약점이다. 많은 학생들의 글은 마치 ‘바른생활 교과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즉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의 반복처럼 보인다. 바로 이 부분을 고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장을 전개할 때 두 가지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서술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 두 가지는 ‘정당성’과 ‘논거’이다. 간단한 방법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쉽지만은 않다. 많은 연습이 필요한 부분이다.
‘정당성’이란 ‘사리에 맞아 옳고 정의로운 성질’을 이야기 한다. 주장하는 글에서의 ‘정당성’은 자신의 주장이 사리에 맞아 옳거나 정의롭다는 원칙적인 논리전개다. 학생들의 견해를 묻는 문제에서는 ‘쟁점’이 주어지기 마련인데, 주어진 쟁점에 대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에 대한 원칙적 논리전개와 ‘정당성’이 제시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여기까지는 잘 해내기도 한다. 문제는 자기주장의 정당성만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 원고지를 채우고 있다면 절대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다. 이의 해결방법이 ‘정당성’과 ‘논거’의 분리이다. 나의 주장(입장)의 정당성을 밝혔으면, 구체적인 논거를 통해 주장의 설득력을 얻어야 한다. 앞선 여러 글에서 제시된 내용이지만, 모든 주장하는 글에는 논거(근거)가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나의 주장도 논거가 있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이 부분을 학생들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논거’로는 주장에 맞는 구체적 사례, 구체적 해결방안 등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 연습을 하는 것이 논술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 실전 2013수시기출문제(서울시립대B형-지면 사정상 제시문을 편집)
고소득층에 더 많은 세금을 매겨야 할까?
[가] 사회 상태는 인간에게 처음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고 필요하며 또한 익숙한 것이라서 어떤 예외적 상황 또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자신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야만 상태의 고립을 점점 멀리하면서 이런 사회적 결합은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 상태의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의 존재 상황에 대한 인식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고, 인간의 운명을 구성하는 큰 인자가 된다. 주인과 노예 관계라면 모를까, 이제 어떤 인간 사회도 관련된 사람들의 이익을 골고루 반영하지 않고는 아예 존재하기도 어렵다. 평등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를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존립이 가능하다. (……) 다른 사람의 이익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에게 심각한 해를 끼쳐서는 안 되고, 서로 견제하며 사는 것 정도만 허용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생략)
[나] 무마자가 선생에게 말하였다.
“저는 선생님과 의견이 다릅니다. 저는 아울러 모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먼 월나라 사람들보다 이웃 추나라 사람들을 더 사랑합니다. 노나라 사람들보다 내 고향 사람들을 더 사랑합니다. 내 고향 사람들보다 내 집안사람들을 더 사랑합니다. 내 집안 사람들보다 내 부모를 더 사랑합니다. 내 부모보다 내 자신을 더 사랑합니다. 그것은 모두 내게 더욱 가깝기 때문입니다. 내가 맞으면 아프지만 남이 맞으면 나는 아프지 않습니다. 내가 어찌 아픔을 느끼는 자신을 아끼지 아니하고 아픔을 느끼지 않는 남을 아끼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남을 죽임으로써 나를 이롭게는 하지만 나를 죽임으로써 남을 이롭게 하지는 않습니다.”
(중략)
선생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의견을 좋아한다면 그 한 사람은 당신을 죽여 자기를 이롭게 하려 들 것이며, 열 사람이 당신의 의견을 좋아한다면 그 열 사람은 당신을 죽여 자기를 이롭게 하려 들 것이며, 온 천하가 당신의 의견을 좋아한다면 온 천하가 당신을 죽여 자기를 이롭게 하려 들 것이오. 또 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의견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한 사람은 당신을 죽이려 할 것이니 당신이 상서롭지 않은 말을 퍼뜨린다고 여기기 때문이오. 열 사람이 당신의 의견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열 사람은 당신을 죽이려 들 것이니 당신이 상서롭지 않은 말을 퍼뜨린다고 여기기 때문이오. 온 천하가 당신의 의견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온 천하가 당신을 죽이려 들 것이니 당신이 상서롭지 않은 말을 퍼뜨린다고 여기기 때문이오.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당신을 죽이려 들고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당신을 죽이려 들 것이니, 이것이 가벼운 입놀림은 당신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말이오. 당신의 말이 무슨 이익이 되오? 만약 이익이 없는데도 꼭 말하려 든다면 이것은 입이나 아프게 하는 짓일 것이오.”
[다] 한 사회의 연간 수입은 사회 전체 노동의 연간 총생산물 또는 그것의 교환가치와 정확히 같다. 따라서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자국 노동의 유지에 사용하고 노동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 결국 각 개인은 사회의 연간 수입이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사실 각 개인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공공의 이익을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자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이고, 노동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 자신이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게 된다. 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업을 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생략)
[라]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올바름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不義)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중략)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문제>
최근 프랑스 정부는 연소득이 100만 유로(약 15억 원) 이상인 최상위 고소득층에 대하여, 최고 세율 75% 적용 구간을 신설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 방침이 발표된 후 프랑스 사회에서 고소득층의 증세(增稅)에 대한 찬반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 세율: 과세 표준에 따라서 세금의 액수를 산정하는 법정 비율
‘고소득층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의 입장을 정한 뒤, [가]~[라]를 모두 활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시오. (1,000자 내외)
■ 정석의 적용
누진세의 정당성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이번 기획을 꾸준히 활용한 학생이라면 이제 논제분석은 익숙하게 해야 할 시점이다. 간단하게 도표로 나타내보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는 ‘고소득층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이하 누진세)는 주장에 대해 찬성의 입장을 취하기로 한다.
1. 누진세의 정당성(200자 내외)
2. (가)(나)의 심층 이해-나의 주장 옹호(300자 내외)
3. (다)(라)의 비판-반대주장에 대한 비판(300자 내외)
4. 마무리-나의 논거(200자 내외)
이 문제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모두 활용’이라는 조건이다. 모든 지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가 부족하다 하여 생략하거나 피해가는 답안은 문제의 조건을 이탈한 것이기 때문에 큰 감점을 받게 된다. 위의 논제분석에서 4-마무리 부분은 생략하고 1,2,3 항목만으로 1000자를 써도 무방하다. 그러나 4-마무리부분을 잘 쓸 수 있다면 더욱 경쟁력 있는 글이 될 것이다.
다음은 지문에 대한 이해부분이다.
(가)와
(나)는 누진세 찬성의 견해를 옹호하는 내용의 글이다.
(가)는 사회발전을 위한 개인에 대한 규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평등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를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고소득층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사회 유지에 대해 자기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누진세를 적용시켜 고소득층에게 사회유지의 일정 역할을 부가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가 된다.
(나)는 전체의 복리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에게도 이롭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간혹 무마자의 견해에 초점을 맞추는 학생들도 있기는 하지만,
(나)에는 무마자의 견해만 서술된 것이 아니라 무마자에 대한 묵자의 비판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묵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타당하다.
반면에
(다)와
(라)는 누진세에 반대하는 입장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지문은 논술시험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지문이라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일부 내용이다. 개인은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누진세는 개인의 의욕을 저하시킨다는 논리와 연결된다.
(라)는 인간은 그 자체로 고귀함을 지닌 목적적 존재이므로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를 위한 도구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법(누진세)보다는 ‘올바름’에 대한 각자의 자유롭고 양심적인 판단이 중요하다는 내용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다음의 ‘예시답안’을 통해 ‘주장하는 글’에서의 ‘정당성’과 ‘논거’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 요소들은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 함께 하는 예시답안
마땅히 고소득층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나 이익추구가 최고의 가치이자 자본주의를 원활하게 운용할 수 있는 ‘절대적 원칙’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 또한 사회의 안정적인 유지나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운영을 전제로 한다. 누진세는 부자들에 대한 강탈이 아니라 부자를 만들어준 사회에 대한 보답이다.
(가)와
(나)는 누진세 적용의 정당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가)는 사회 상태를 인간존재의 필수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상태의 유지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이익이 골고루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진세의 적용이 이에 호응한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처럼 1000만원이라는 돈은 부자들에게는 명품 백 하나일 수 있지만 빈곤층에게는 몇 가구의 한 달 생계비가 될 수 있다.
(나)의 묵자는 전체의 복리에 헌신하는 것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부자들도 사회에 일정정도 헌신하는 것이 그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자신의 부를 유지하는 방법인 것이다.
(다)와
(라)는 공통적으로 인간 개개인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체를 강조하던 사회에서는 타당한 이야기이지만, 현대와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이기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사적 이익추구의 사회적 공헌’이라는
(다)의 주장이 그렇다. 이 주장은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입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이익추구는 다른 사람과의 ‘공감’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라)의 주장은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도구화는 목적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적 존재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손만 대면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한다는 미다스는 현대의 최고의 찬사로 불린다. 하지만 미다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자. 먹고 싶은 것은 모두 금으로 변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금으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미다스의 손은 찬사가 아니라 저주이다. 부유층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내어놓음으로 인한 사회의 건강함이다. 고소득층은 더 많은 세금을 기꺼이 내야 한다.(1083자)
■ 한 가지 더 : 주제의 심층이해
미다스 신화에서 그의 능력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를 생각해보자.
디오뉘소스의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세일레노스가 실종된 적이 있다. 디오뉘소스는 이 스승을 찾아 헤맸다. 세일레노스는 사실 술 취해 비틀거리다 농부들 손에 이끌려 미다스 왕의 궁전에 가 있었다. 미다스는 노인이 저 유명한 세일레노스라는 걸 알고는 따뜻이 맞아들이고 자그마치 열흘간에 걸쳐 밤이고 낮이고 술잔치를 베풀어 노인을 대접했다. 그리고는 열하루 째가 되어서야 노인을 무사히 그 제자에게 돌려보내 주었다. 다시 스승을 맞은 디오뉘소스는 미다스 왕의 환대에 대한 답례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터이니 무엇이든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미다스는 정히 그렇다면, 자기 손으로 만지는 것은 모조리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디오뉘소스는 미다스가 좀 더 좋은 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면서도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해주었다.
미다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시종들에게 명하여 진수성찬을 차리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빵에 손을 대자 빵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음식을 한 술 입에 떠 넣어도 씹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어서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나 그것도 흡사 녹은 황금처럼 목구멍을 따라 흘러들어갔다. 이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재앙에 기절초풍한 미다스는 어떻게 하든지 이 마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리고 기껏 욕심을 부려 얻은 권능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지긋지긋하게 여겨도,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었다. 오직 굶어죽을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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