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인 질문. 영화 <레 미제라블>은 힐링 텍스트인가. 이 질문은 일단 카메론 메킨토시의 뮤지컬-영화 버전에 국한한 것이다(빅토르 위고의 원작과 뮤지컬-영화 버전은 매우 듬성듬성한 차원에서의 이야기 얼개를 제외하고는 같은 텍스트로 엮기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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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레 미제라블>에는 관객의 마음을 고양시킬 수 있는 드라마가 있다. 원전의 내용을 확대, 축소하거나 아예 바꾸고 생략해버린 뮤지컬의 각색 방향은 애초 그런 감정의 폭발을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권 지지층이 <레 미제라블>에서 대선 패배의 후유증을 치유받고 있다고 하면 이건 좀 엉뚱한 문제가 된다. 패배 원인을 상대 진영의 거짓과 기만, 혹은 특정 세대의 안일함으로 돌리고 개표부정 같은 음모론으로 ‘힐링’하면서 <레 미제라블>을 인용한다는 건 좀체 앞 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레 미제라블>의 주요 이야기는 1830년의 7월 혁명 전후에 걸쳐있다. 이미 프랑스는 1789년의 대혁명과 공화정 수립 이후 제 1제국, 그리고 왕정복고라는 황당한 과정을 고스란히 겪은 상황이다. 7월 혁명은 왕정복고로 인한 반동의 역사를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의 피가 뿌려졌고, 결국 샤를 10세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급진주의를 두려워했던 온건 자유주의자들은 정작 피를 뿌린 공화파의 주검 위에 올라 서서 새로운 왕, 루이 필립을 옹립했다.
그에 대한 공화파의 불만과 경제 악화, 콜레라와 같은 악재가 겹쳐 발발한 것이 1832년의 파리 봉기, 즉 <레 미제라블>의 후반 무대인 6월 봉기다. 영화에서 볼 수 있듯 말 그대로 처참하게 실패한 항쟁이었다. 민중은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혁명씩이나 해놓고 고작 왕을 다른 왕으로 바꾸었을 뿐인데다(항쟁씩이나 해놓고 고작 전두환이 노태우로 교체된 데 따른 결과적 피로감을 떠올려보시라) 생활은 전보다 훨씬 형편없어졌다. 극 중 앙졸라는 민중이 당연히 나서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민중의 피로를 상쇄할 어떠한 대안도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고 그저 당위에만 골몰해있을 뿐이었다.
만약 <레 미제라블>로부터 대선 패배를 설명하는 유의미한 해석을 끄집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상대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수사적인 품성론에 집중한 전략이 중간층의 피로를 야기했다는 점일 것이다. 극단적인 진영논리로 가능한 최대치를 동원했다. 75.8% 투표율에 과반 지지로 졌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전략은 폐기처분 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리케이드 뒤의 공화파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좌절된 혁명과 대선 패배를 같은 층위에 두고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를 음미하며 낭만에의 보상을 찾는다면 이 판에는 영영 답이 없다.
<레 미제라블>이 제시하는 이슈는 정의의 궁극적 승리 따위가 아니다. 장발장과 자베르가 벌이는 신념에의 대결, 장발장과 코제트-마리우스의 마지막 해후는 무엇을 의미하나. 혁명이라는 거대 서사의 소용돌이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가치관과 계급과 세대에 속한 이들을 공히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개인의 평생에 걸친 자기비판과 성찰,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박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고작 상대 진영과 특정 세대에 책임을 돌리는 증오의 해법으로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텍스트에서만큼은 힐링을 누릴 자격이 없다. 우리는 이 숭고한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기 이전에 앙졸라가 아닌 장발장의 염려를 껴안아야만 한다. 장발장이 숲 속에서 코제트를 만난 이후 최후의 순간까지 골몰했던 바로 그것.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허지웅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