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이명욱(李明郁)


이명욱(李明郁), 어초문답도 漁樵問答圖, 17세기,
173.0 cm ×94.0 cm, 간송미술관 소장

‘어부와 나무꾼은 서로에게 무얼 물을까?’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는 어부와 초부가 묻고 답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어부는 고기잡이이고, 초부는 나무꾼이지요.

그림 속에서 누가 고기잡이일까요? 당연히 낚싯대와 고기 꾸러미를 들고 있는 사람이지요. 고기잡이는 커다란 머리에 테만 있는 갓을 썼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은 깎지 않고 내버려 두어 삐죽삐죽 뻗어나 있고, 허리춤에 그러모은 바지 아래로는 맨발이 드러나 있습니다.

고기잡이는 갈대가 무성한 강변 길에서 나무꾼을 만났습니다.

“어디 오늘은 재미 좀 보았나?”

나무꾼은 고기잡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허허, 재미는 무슨?
그저 바람이나 쐴 뿐이라네.”

고기잡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에 쥔 붕어 두 마리를 들어 보였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저기 강변에서 하루 종일 앉아 겨우 이뿐이란 말인가!”

나무꾼은 고기잡이가 낚시하던 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고기잡이는 대답 대신 웃기만 하였습니다.

“그 놈들 참 실하기도 하네. 오늘은 자네가 안주거리를 구했으니 술은 내가 내겠네.”

고기잡이와 나무꾼은 사이좋게 주막이 있는 마을로 향했습니다.

바람이 불자 나무꾼의 치렁한 옷자락이 펄럭였습니다. 허리춤에 찬 손도끼와 어깨에 멘 막대가 흔들렸습니다.
군데군데 꿰맨 옷자락은 남루했지만 표정은 무척 밝았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 시대 화가 이명욱이 그렸습니다. 궁중에서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직업 화가로,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습니다. 임금님도 그 실력을 인정하여 도장을 선물로 내려 줄 정도였습니다.

화면은 나무꾼의 막대와 고기잡이의 낚싯대로 나뉘어졌습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 길과 갈대의 방향은 반대로 기울어지게 하였습니다. 갈대 잎과 길가 잡풀의 세밀한 묘사와는 달리 옷 주름은 아주 시원하고 경쾌한 선을 썼습니다.
가난하지만 욕심 없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마음을 잘 나타내는 듯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듯 욕심 없이 자유로운 마음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관직에 나가 높은 벼슬을 얻으면 부와 명예가 저절로 따라왔지만, 자칫 재앙을 입는 일도 많았습니다.

신라 효성왕이 왕으로 등극하기 직전의 일입니다.
하루는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궁중의 뜰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왕이 되면 그대를 잊지 않겠노라.”

왕자는 뜰의 잣나무를 보며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왕위에 오른 효성왕은 신충에게 아무런 벼슬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충은 왕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예전에 왕과 바둑을 두었던 잣나무 그늘로 갔습니다.
잣나무는 그 약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푸르기만 하였습니다.

신충은 그 자리에서 ‘원망하는 노래’를 지었습니다.

잣나무 푸른 잎은
가을에도 지지 않은 법인데
너를 어찌 잊겠느냐 하신 말씀
우러러 믿고 있었더니
이제 그 마음 변해 버렸구나.

연못에 비친 달 그림자가
물결이 일면 사라져 버리듯
작은 일에도 마음 흔들리니
이 세상이 모두 그렇단 말인가.

신충은 시를 종이에 써서 잣나무에 붙여 두었습니다. 놀랍게도 잣나무는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시들어 버렸습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신충에게 벼슬을 내리니 비로소 잣나무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신충은 다음 임금인 경덕왕 때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에 들어갔습니다.
임금이 두 번이나 사람을 보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산골에서 나무꾼처럼 욕심 없이 사는 게 벼슬살이보다 더 행복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도 한 목숨인데 함부로 죽일 수 없지!' '이 잡는 노승' 관아재 조영석(1686년-1761년)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9.3 cm X 17 cm, 개인 소장

짚신을 신고 길을 가던 한 스님이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스님의 이마를 식혀 주었습니다.

'아니, 몸이 왜 이렇게 근지러울까?'

스님은 겨드랑이 밑을 뻑뻑 긁다 말고 옷고름을 풀어헤쳤습니다. 깨알같이 작은 이가 보였습니다. 그새 피를 잔뜩 빨아먹었는지 몸통이 온통 붉은 빛을 띄었습니다. 스님은 손톱으로 이를 뭉개려고 하다가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이도 한 목숨인데 함부로 죽일 수 없지!'

이런 생각이 들자,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놈이지만 밉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문득 아침에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습니다.


옛날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비둘기 한 마리가 갑자기 품 안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비둘기의 두 눈은 겁에 질려 있고, 가슴은 두려움으로 콩콩 뛰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금방 커다란 독수리가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내 먹이를 당장 내 놔!"

독수리는 붉은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안 돼. 나는 모든 생명을 구하기로 나선 수행자야. 산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해칠 수는 없는 법이지."

독수리는 눈을 뒤룩거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엉터리 수행자군. 내가 비둘기를 먹지 않으면 비둘기는 살지 모르나, 나는 배가 고파 죽을 테니, 이러나 저러나 산목숨 죽이기는 마찬가지지. 차라리 덩치가 크고 위대한 이 독수리님을 구하는 게 낫지. 그깟 비둘기 한 마리가 대수냐?"

독수리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습니다.

"정 그렇다면 비둘기 대신 내 몸을 뜯어먹어라."

독수리는 비둘기만큼 무게가 나가는 생고기를 떼어 내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수행자는 저울을 가져와서 한쪽에 비둘기를 올려 놓은 다음, 다른 쪽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내 올렸습니다. 비둘기가 훨씬 무거웠습니다. 고통을 참으며 이번에는 다른 쪽 허벅지를 잘라 내 저울에 올렸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는 장딴지를 도려 냈습니다. 차례로 온몸의 살을 떼어 냈지만 저울은 기울어진 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온몸을 저울에 달았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무게가 같아졌습니다.

결국 비둘기나 사람이나 '생명의 무게'는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이를 잡아 죽이는 대신 살살 털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에는 남을 괴롭히지 말고 착한 일을 하는 생명으로 태어 나거라."

이렇게 말하고 나자 몸이 근지럽지 않을 뿐더러, 마음 또한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스님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김명국(金明國) 달마도, 조선인조 17세기(1636~1637)
족자 모시에 수목, 101.7×54.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달마도는 ‘달마’라는 스님을 그린 그림입니다. 달마는 누구일까요? 아주 빠른 순간에 몇 가닥의 선으로 그린 이 그림을 보면, 그는 이국적인 용모를 하고 있습니다. 팔(八)자 모양의 눈썹은 짙고, 그 아래 흰자위가 많은 눈은 아주 큽니다. 무언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 약간 찡그린 표정입니다.
두 눈썹 사이에는 굵은 주름이 잡혔고, 그 아래 역시 커다란 매부리코가 있습니다. 텁석부리 수염 속에 감추어진 입은 굳은 의지로 꽉 다문 모습입니다.

달마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 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달마는 옛날 인도 남쪽의 한 왕국에서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 무렵 동쪽에서 온 한 스님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국왕은 이 스님을 궁궐로 초대하여 진귀한 보석을 선물하였습니다. 스님은 세 왕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왕자들이여, 국왕은 제게 이토록 아름다운 보석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요?”

첫째 왕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이 보석은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답니다.”

둘째 왕자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셋째 왕자인 달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스님, 보석이 아름답긴 하지만, 한갓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건은 갖고 있는 사람만 즐거울 뿐 다른 이들에게는 의미가 없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보물보다 소중하다는 말인가?”

스님은 달마에게 바짝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달마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깨달음, 슬기, 그리고 마음입니다.”

스님은 달마의 이 말을 듣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국왕이 세상을 떠나자 달마는 스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달마여, 내가 죽고 나면 멀리 떠나 내 뜻을 펼쳐라.”

달마는 스님의 말을 명심하였습니다.
달마는 마침내 중국으로 가서 스승에게서 배운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달마가 중국으로 갔을 때, 양나라 황제는 달마를 불러놓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짐은 그 동안 많은 절을 짓고, 탑을 쌓았으며, 책을 펴내었도다. 어떤 공덕이 있는가?”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달마는 아주 간단히 대답하였습니다. 당시의 중국 불교가 겉치레에 치우쳐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달마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제는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몹시 화가 났습니다.

달마는 할 수 없이 강 건너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강을 막 건너려는데 한 떼의 군사들이 바람같이 몰려왔습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달마를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달마는 강가에 있는 갈대 잎을 꺾어 물 위에 띄웠습니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자 몸이 개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갈대 잎 위에 살짝 올라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 길로 소림사라는 절에 가서 무려 아홉 해 동안 벽을 바라보고 앉아 마음 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김명국은 조선 시대 중기에 활동했던 화가입니다.
성격이 무척 밝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내키지 않은 그림은 잘 그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공주의 빗첩에 그림을 그리라는 왕의 명을 받고는, 아름다운 꽃이나 나비 대신 사람 몸에 붙어서 피를 빠는 이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김명국의 달마도는 순식간에 그린 그림입니다. 꼭 그려야 할 인물의 중요한 특징만 나타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쉽게 그릴 수 없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달마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아홉 해 동안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듯이, 화가 또한 그런 인물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오랫동안 연습하고 노력해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53그 마음이 그림 속에 나타날 때 바로 좋은 작품 '모견도' 이암


'모견도' 이암·16세기, 종이에 수묵 담채,
50 X 75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러분! 혹시 강아지가 되어 본 경험이 있나요? 꿈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강아지가 되기도 합니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아이고, 내 강아지!"하며 엉덩이를 두드려 줄 때가 바로 그렇지요.
그런 말을 들을 때 혹시라도 속상해하지는 마세요. 아주 귀엽다는 뜻이니까요.

그림 속에 강아지 세 마리가 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입니다. 그런 데도
킁킁거리며 어미 냄새를 맡고, 달콤하고 따뜻한 젖을 능숙하게 찾아 내는 것을 보면 마냥 신기할 따름이지요.

여러분! 강아지 세 마리에게 이름을 붙여 주세요. 우선 강아지들의 특징을 살펴야겠지요.
흔히 강아지 이름은 색깔에 따라 붙여 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흰둥이, 검둥이, 누렁이... 그러나 각자의 개성을 살려서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더 좋겠지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가운데에 있는 통통한 흰둥이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물러날 줄 모릅니다. 어미의 가슴 쪽으로 끼여든 검둥이도 야무지게 생겼습니다. 셋 중에 가장 어미를 닮은 것 같습니다. 한편, 누렁이는 어미의 잘록한 허리 쪽에서 단잠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특징을 연구하다 보면 멋진 이름을 붙일 수 있겠군요.

강아지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면 아마 그림 속의 어미도 좋아할 것입니다.
벌써 자랑스럽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지요?

개는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입니다. 야생에서 생활하다가 가축화된 것이지요.
개는 집을 지키고 사냥을 하며, 심부름을 하기도 합니다. 주둥이가 뭉툭해서 잘 짖는 개는 집을 잘 지키고,
주둥이가 길고 뾰족하면 사냥에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어미 개는 사냥개의 일종인 셈이지요.

우리 조상들은 개가 하는 행동을 관찰해 앞날을 예견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무도 없는데 앞마당에서 컹컹 짖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개 꼬리에 지푸라기가 묻어 있으면 손님이 온다고 했지요.
또 개가 풀을 뜯어 먹으면 큰 비가 오고,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 큰 바람이 올 징조라고 했지요.
과연 정말일까요? 여러분 주변의 개들을 유심히 살펴보도록 하세요.

이 그림을 그린 이암(1499년~?)은 조선 초기에 활동한 화가로, 사람이나 동물 등을 자세히 보고 그리는 데
뛰어났습니다. 그림 솜씨가 탁월해 임금님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나라에서 제일 가는 화가였던 셈이지요.

어린이 여러분! 사진처럼 똑같이 잘 그린다고 해서 다 화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진이 없었던 옛날에는 그런 재주도 필요했지요.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개성을 잘 파악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마음을 읽을 수 있지요.

그 마음이 그림 속에 나타날 때 바로 좋은 작품이라고 여겼답니다.

/박영대ㆍ화가

이암 李巖의 화조구자도 花鳥狗子圖




이암(李巖,1499∼?)의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조선, 16세기전반,종이채색 86.0×44.9cm,호암미술관소장.

이암(李巖)은 개나 고양이 같은 작은 동물들의 순진무구한 모습과
아름다운 새가 어울린 그림을 많이 그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