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리에 '빈 집'은 없다"
[인터뷰] 대추리 역사관 기획한 판화가 이윤엽 씨
2006-08-22 오전 9:58:26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미군기지 확장 이전 부지인 경기도 평택 대추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동요 '노을'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들판에는 빈집 철거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떠돌았지만, 그곳의 노을은 동요 속의 노을과 다르지 않았다.


대추리 주민들의 삶의 자취가 한데 모인 곳

이런 노을을 닮은 것일까. 무더위가 한풀 꺾인 19일 저녁, 들판의 노을을 등지고 선 판화가 이윤엽 씨의 표정도 밝았다. 자신이 지난 보름 동안 준비해 온 대추리 역사관 〈대추리 사람들〉이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본 직후였기 때문일 게다.
▲ 19일 저녁 대추리 주민들의 삶의 자취가 담긴 대추리 역사관 〈대추리 사람들〉이 문을 열었다. ⓒ프레시안


지난 6월 말 이주해나간 주민의 2층짜리 빈집을 개조한 〈대추리 사람들〉은 이곳 주민들이 살아 온 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다. 철거가 예정된 빈 집들에 담긴 오랜 기억의 흔적들은 한데 모은 것이다.

1층에는 주민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농기구가 전시돼 있다. 2층에는 주민들이 내놓은 사진 수백 점이 걸려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까만 교복을 걸친 까까머리 고등학생, 지금은 초로의 농부가 돼 있을 아기의 돌 잔치 장면 등이 낡은 흑백사진에 담겨 있다.

대추리의 과거만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쪽 벽에 걸린 시원한 크기의 천연색 사진에는 지난 2004년 이후 현재까지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투쟁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찍혀 있다.

그런가 하면 목판화가 이윤엽 씨, 사진가 노순택 씨를 비롯한 많은 미술가들의 작품도 곳곳에 전시돼 있다. 물론 모두 대추리를 소재로 한 것들이다.


〈대추리 사람들〉을 기획연출한 이윤엽 씨는 "(주민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추리 주민들의 삶의 흔적들을 모아 놓음으로써 그들이 정말로 지키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주로 노동자들의 삶을 소재로 작품활동을 해 왔던 이 씨는 올해 초부터 대추리에 머물러 왔다. 허물어진 대추분교 근처에 있는 이 씨의 작업실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대상과 교감하는 작품 활동을 위해 대추리를 찾다

프레시안 : 원래 '노동 미술'을 해 왔다고 알고 있다. 농촌 마을인 대추리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하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이윤엽 : 솔직히 말하면 나는 '미군기지 반대'를 위해 여기에 들어온 게 아니다. 그런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일년쯤 머무르면서 농민들의 삶을 체득하면 내 작품 세계가 좀 더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경기도 수원 변두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노동자였다. 그래서인지 노동자의 삶은 익숙했다. 노동자 생활도 해 봤다. 지금도 나를 보면 딱 노동자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원래 노동자밖에 그리지 못 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 작품이 다루는 영역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말 대추리에 찾아 왔다. 그리고 이곳 주민들의 모습에 반했다. 미군기지 확대 이전에 맞서 똘똘 뭉쳐 싸우는 모습, 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오랜 역사의 흔적….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매료시켰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주민들과 외부에서 온 활동가들이 밥을 같이 먹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대추리에 머문 경험이 내 작품 세계를 확 넓히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됐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또 따로 있다. 전에 노동자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판화작업을 할 때는 내가 그리는 대상이 내 작품에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들이 내가 그린 그림과 판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내 작품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대체로 노동자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이 나를 답답하게 했다.

그런데 대추리에서는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대추리를 소재로 판화를 찍고 그림을 그리면 이곳 주민들이 보고 좋아한다. 내 작품의 대상이 내 작품에 관심을 갖고 사랑을 품는 것이다. 작가로서 이런 기쁨이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강제 대집행이 남긴 내면의 상처, 창작으로 치유하다
▲ 목판화가 이윤엽 씨 ⓒ프레시안

프레시안 : 5월 4일, 5일 강제 대집행이 있던 날의 경험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다.

이윤엽 : 사실이다. 그날의 경험은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런 말은 사실 이제 와서야 하는 이야기일 따름이다.

강제 대집행이 있던 당일에는 정작 별 느낌이 없었다. 학교가 내 눈 앞에서 부서지고 예술가들이 애써 그린 벽화가 허물어지는데도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민들이 오랫동안 살아 온 터전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무감각한 것일까. 이래도 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죄책감이 엄습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막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일종의 우울증 증세도 나타났다. 마을 풍경 하나하나, 주민들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슬픔과 분노의 기운이 읽혔다. 지독하게 우울했고 움츠러들었다. 문밖에 나서는 것도, 작품을 하는 것도 두려웠다.

그 때 나의 내면을 치유한 것이 판화작업이었다. 5월 중순께부터 판화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작품,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내면이 조금씩 치유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내면이 치유돼 가면서 처음에는 비장한 분노만이 담겼던 내 판화 작품들에 조금씩 위트와 여유가 섞이기 시작했다.

"대추리 주민들이 겪은 내면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다"

프레시안 : 무자비한 공권력이 남긴 내면의 상처는 당신만 경험한 게 아닐 것 같다.

이윤엽 : 그렇다. 지금 이곳 주민들은 누구나 내면의 병을 앓고 있다. 주민들의 말이나 표정을 살펴보면 감정의 기복이 극에서 극으로 순식간에 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병 때문이다.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치료다. 어디서든 간에 이곳 주민들을 위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라. 대대로 살아 온 집과 논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수십 년 동안 같이 살아 온 이웃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몇 달밖에 머무르지 않았던 나도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는데 이곳 주민들은 오죽 했겠는가.

프레시안 : 당신이 작품 활동을 통해 내면의 치유를 경험한 것처럼 이곳 주민들도 당신과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일종의 치유 효과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이윤엽 : 기자가 그런 질문을 하면 아마 어떤 작가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겠지. 예술은 감상자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덧붙이면서. 나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면의 상처를 겪은 이들에게 예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위로'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예술의 몫이 아니다. 나는 내 작품들, 그리고 이번에 완성한 〈대추리 사람들〉이 이곳 주민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예술 창작의 과정에서 대추리가 나의 문제가 됐다"

프레시안 : 농민들의 삶과 그들에게 가해진 공권력의 폭력을 함께 경험하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넓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작품 활동이 갖는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예술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대추리에 와 있는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목이 예술가들과 다른 활동가들을 구별하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 대추리에 있는 이윤엽 씨의 작업실 ⓒ프레시안

이윤엽 : 솔직히 다른 활동가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우를 보자. 이제 대추리 주민들의 싸움은 내 문제가 됐다. 이 싸움 속에서 나는 상처를 입었고, 나의 작품 창작 활동을 통해 그것을 극복했고, 다시 그 과정에서 제 작품의 폭이 조금 더 넓어졌다. 이렇게 대추리는 내 삶과 작품의 일부가 됐다.

그런데 다른 많은 활동가들에게는 대추리의 문제가 그저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다가올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는 대추리의 현 상황이 주는 우울함과 답답함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저 옳고 그름만 있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대추리에 예술가들이 좀 더 많이 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여기에 오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안타깝다. 사실 예술가들이라는 게 원래 오갈 데 없고 배고픈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여기 오면 먹을 것도 있고, 잘 곳도 있는 데 왜 안 오는지 모르겠다.

"대추리 주민들은 '아름다운 기억'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프레시안 :〈대추리 사람들〉도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고 이주한 주민의 빈집을 이용한 것인데 조만간 국방부가 빈 집 철거를 시도할 경우 함께 허물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게 될 경우 주민들이 또 다시 큰 상처를 입지 않겠는가?

이윤엽 : 사실 대추리 주민들의 역사를 담은 〈대추리 사람들〉을 생각해 낸 계기 중 하나가 국방부가 '빈 집'을 철거하러 온다는 말을 접한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빈 집'으로 보이는 게 사실 '빈 집'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들이 '빈 집'이라고 말하는 공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지를 말하려 했다.

대추리에 '빈 집'은 없다. 하물며 대추리 사람들의 평생을 담은 사진들이 모인 〈대추리 사람들〉이 '빈 집'일 리는 없다. 물론 그것을 '빈 집'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대추리 주민들이 왜 싸우는지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대추리 사람들〉에 전시된 사진들을 보라.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돌, 졸업, 결혼 등 인생의 중요한 대목에 얽힌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추리를 떠날 수 없다는 주민들은 이곳에 담겨 있는 자신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 <대추리 사람들>의 저녁 풍경(왼쪽), <대추리 사람들>의 내부(오른쪽). ⓒ프레시안
클레의 자화상은 왜 눈이 하나일까
한겨레
»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소마 미술관에서 ‘파울 클레 전시회’가 열렸다. 그의 작품에서 영감이라도 얻은 걸까. 아이들은 미술관을 둘러본 뒤 근처 잔디밭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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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별로 떠나는 체험학습/소마 미술관 ‘파울 클레’ 전시회

아이들과 올림픽 공원에 나가 보았다. 보통 때 같으면 줄넘기를 허리에 묶고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거나 자전거를 이용해서 공원을 일주하거나 하는 계획을 세우겠지만 오늘은 마침 올림픽 공원 안에 자리한 ‘소마 미술관’에서 ‘파울 클레’ 전시회를 열고 있다고 하여 함께 들러 보기로 했다.

파울 클레의 클레(KLEE)는 영어로 클로버라는 뜻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남 3문 주차장 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 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소마 미술관(somamuseum.org)이다. 소마미술관은 이번에 전시회를 열면서 야외 조각들을 전시한 주변 잔디공원을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하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커다란 은색 공들을 쌓아올린 문신의 조각품 주변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즐겁게 노는 아이들과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오후 망중한을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도슨트의 전시설명이 있다고 하여 아이들과 우선 1층의 ‘어린이 미술체험관’에 가보았다. 널찍한 통유리를 통해 시원한 야외 조각공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체험관에서 아이들이 직접 화분에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클로버씨를 심어보는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토기 화분에 크레파스로 예쁘게 그림을 그리자 ‘클레의 이름이 영어로 클로버를 뜻한대요’라고 가르쳐 줬고, 아이들은 ‘아하, 클로버는 아이랜드의 국화인데 클레의 이름이 클로버였구나’하고 재미있어 했다. 씨앗을 심고 나자 이번에는 선생님이 그림을 하나 들고 오셨다. “이 그림은 잘 보면 글씨가 쓰여 있어요.” “정말, 알파벳이 보여요.” 아이들은 신기한 듯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그림에 쓰여 있는 내용은 ‘그리고, 아, 나를 더욱 쓰라리게 하는 것은 당신이 내가 가슴속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라는 시라고 했다. 아이들은 클레의 그 그림을 보고 자신들도 도화지에 글자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보며 파울 클레의 세계에 한 발짝 다가서고 있었다.

파울 클레는 연금술사?
음악과 미술에 둘 다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파울 클레는 죽기 전까지 무려 9100점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흔히 대가나 천재 화가로 불리는 사람들은 많은 대작들을 남기지만, 클레는 실험과 도전 정신으로 점철된 작품들만 남겼다. 1전시실에는 드로잉 작품이 많았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는 드로잉 작품에서는 꼼꼼하고 빈틈없는 클레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살던 스위스 베른의 경치를 그린 연작 드로잉을 보면 이런 과정을 잘 알 수 있다. 클레는 18살때부터 40살까지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자신의 작품을 정리하여 모두 목록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의 이런 세심함은 하나하나 손으로 줄을 그어 그린 ‘오르페우스를 위한 동산’이란 작품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작품 활동만 하고 뚜렷한 생계수단이 없던 그에게 친구인 칸딘스키는 여러 가지 직업인터뷰를 권해주기도 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된 조형예술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클레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연금술사’란 별명으로 불렸다. 색깔과 색깔을 섞어 혼합하고 끓여보고 실험을 해보는 그의 작업실에서는 늘 연기가 새나왔다고 한다.




2전시실, 3전시실에서 보이는 그림들은 우리가 보아온 추상미술의 대가 클레의 친숙한 그림들이 많았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클레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어린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도슨트의 설명을 앞줄에서 흥미롭게 듣는 이들도 바로 아이들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던 클레의 마음은 그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몇 개의 그림들 속에서 엿볼 수 있다. 귀가 없거나 한 쪽 눈이 없이 간결한 선으로 그려진 그림은 온화하고 자연스런 색채감 속에서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활기찬 올림픽 공원의 오후
미술관에서 나와 바로 앞에 있는 호돌이 열차를 탔다. 열차는 두 번 서는데 마지막에 서는 피크닉장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몽촌토성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몽촌토성 역사관’이 나오는데 400년이 넘게 서울을 수도로 삼았던 ‘한성 백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몽촌토성을 돌아보고 널찍한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먹고 나니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그늘아래 누워 가지고 간 책을 펼치고 있으니 부러울 것이 없다. ‘엄마 우리 다음주에도 또 소풍와요. 그때는 자전거 타고 신나게 달려보고 싶어요’ 아이들과 다음번 소풍을 약속하며 돌아오는 길 , ‘두 번째 파울 클레와 만남’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다음 주말이 기다려진다.

[포토뉴스]추억의 봉숭아 물들이기
입력: 2006년 08월 10일 18:42:27

10일 서울 송파구 송파나루공원에서 열린 ‘추억의 봉숭아 물들이기’ 행사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물들인 손톱을 보여주며 즐거워 하고 있다. /김문석기자
청계미술작품들 ‘몸살’…어른도 아이도 ‘시민의식 실종’
한 · 중국 작가 40여점 전시
자원봉사자 저지 역부족…“아이 기 죽인다” 항의도
한겨레
» 청계천에서 열린 국제미술제에 출품한 작품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위장토끼>는 전시회가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왼손에 쥐고 있던 당근이 부러졌고 팔이 부러졌다.
서울 청계천 일대에서 전시되고 있는 설치미술 작품들이 일부 몰지각한 시민들의 손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달 29일부터 청계천 일대에는 제1회 청계미술제 출품 작품들이 설치됐다. 환경과 인간을 화두로 한 이 전시회에는 정국택, 김민경, 홍상식, 리쑹화, 가오샤오우, 광위 등 우리나라와 중국의 젊은 조각가와 설치미술가 18명의 작품 40점이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전시회가 시작된 지 10여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접근하기 힘들거나 단단한 재질의 작품을 제외한 다수 작품이 관람객들의 손을 타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낮에는 자원봉사원이, 밤에는 경비업체 직원들이 작품을 지키고 있지만 일부 몰지각한 시민들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공공장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됐지만 시민들의 무신경함 탓에 작품 주위에 접근금지 줄이 쳐지고 ‘손대지 말라’는 안내판을 붙여야 할 상황까지 됐다.

자원봉사원 김현준(20)씨는 “망가진 작품을 보면 화가 난다”며 “여러 사람들이 즐기는 작품을 마구 훼손하는 것을 보면서 시민의식이 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광통교에 설치된 <카 맨>도 망치로 찌그러뜨린 자국이 남았다.
가장 큰 ‘수모’를 겪고 있는 작품은 김민경씨의 <위장토끼>. 버니걸 모양의 이 작품은 원래 1인용 의자에 홀로 앉은 형태였지만 사진 찍는 시민들이 몰리자 작가가 의자를 2인용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작품을 아끼는 대신 위장토끼의 팔과 다리, 들고 있던 당근을 부러뜨려 놨다. 작가가 부숴진 작품을 손봐 다시 내놨지만, 당근 등은 이틀 만에 또다시 손상되고 말았다.

김씨의 또다른 작품 <웰빙토끼>도 무사하지 못했다. 관람객들이 작품을 하도 흔들어대는 바람에 발 부분을 고정시키는 실리콘이 찢어졌다. 이 작품 앞에는 ‘상식 없는 분에 의해 작품이 손상된 상태이니 눈으로만 봐달라’라는 안내문이 나붙었을 정도다.

도롱뇽처럼 생긴 신현중 작가의 <공화국 수비대>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탓에 더 고생이다. 올라타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는데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올라타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가득하다. 아이들을 저지하는 자원봉사원에게는 종종 “괜히 아이 기를 죽인다”는 항의가 돌아올 때가 많다.

심한 경우는 아예 망치로 부순 것도 있다. 중국 작가그룹 ‘언마스크’가 만든 높이 3.의 대형 로봇 조형물 <카 맨>의 성기 부위는 망치 따위로 수십번 내려쳐져 보기 흉하게 찌그러졌다. 이 작품을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서울문화재단은 “이미 보험을 들어둔 상태라 보수해서 돌려보내면 되지만, 중국 작가가 한국 사람들의 문화 수준이 낮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이라며 난감해했다. 이 관계자는 “아직까지 시민들이 공공장소에서 미술품을 감상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며 “앞으로 이런 기회가 더 많아지면 작품을 대하는 시민들의 자세도 좀더 성숙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이유주현 이정애 기자 edigna@hani.co.kr